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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ad C 1[...]/[The Dead C.] 2023. 3. 26. 00:57
https://youtu.be/mzAdP6bDqB8
"3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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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audioculture.co.nz/articles/the-dead-c-why-use-two-chords-when-one-will-do-part-1
The Dead C: 코드 1개면 되는데 뭐하러 코드 2개를 쓰는가? 파트 1
Jon Chapman
[Audioculture]
2016년 5월 26일
자국에서 환영받지 못한, 너무 심하게 환영받지 못해 그 사실로도 유명해질 정도의 3인조 밴드 - 화가, 철학자, 그리고 팝 음악 드러머의 3인조는 80년대 후반 아주 완전히 좆되어버린 현실을 마주하고는 자신들의 귀에 포스트-펑크를 꽂았으며, The Dead C는 그들의 새로운 '노이즈 신념'과 함께 뉴질랜드의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음악적 '수출품'이 되었다.
2007년, The Dead C에서 '비(非)음악인' 역할을 맡고 있는 Bruce Russell은 "어려운 음악"을 다루는 잡지 [The Wire]에 [Epiphanies]라는 이름의 에세이를 투고하였으며, 이 글에서 80년대 뉴질랜드의 음악계에 The Velvet Underground가 끼쳤던 무거운, 그리고 때늦은 영향력에 대해 설명했었다: "대략 10년정도의 시간동안, 우리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음악들이 The Velvet Underground의 영향력에서 자라나와 발전했었다." The Chills는 "Sunday Morning"을 불러 일으켰으며, The Clean은 "Waiting for the Man"이었고, The Dead C는, "European Son".
잊혀진 영국 포스트-펑크 This Heat과 Flying Nun 레이블을 고소할뻔했던 밴드 The Fall의 영향을 받았던 The Dead C에게 있어서 뉴질랜드 밴드들 중에 '선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The Clean은 '최초 감염자'라고 부를 만한 밴드였으며, The Clean의 미학은 실험적 밴드 Marie & The Atom, Skeptics와 The Kiwi Animal, 노이즈 난동꾼 The Gordons와 Shoes This High, 로파이 및 DIY 선구자 Tall Dwarfs 및 This Kind of Punishment, 오만하고 게으른 '좆까' 밴드 The Stones등등을 통하여 전해지고 있었다.
"웃긴 것이, 사람들은 80년대 밴드들의 맥락 아래에서는 우리에 대해 그다지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라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80년대 뉴질랜드에는 상당히 과격한 밴드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이 내놓는 앨범들은 구하기가 아주 어려운 편에 속했었다 (아니면 아예 앨범을 안 내던가). 그런데, The Gordons, Skeptics, Scorched Earth Policy, The Puddle 등등은 다 어디 갔는가? 완전히 지쳐서 사라져버리지 않았나." (Bruce Russell, [This Is Your Life Now], 2013년)
"우리는 음악 그리고 음향 측면에서 공통의 흥미를 갖고 있었다. 서로 모여서 합주를 시작하기 전부터 그랬다. 록 음악의 구조, 그리고 그 구조의 어떤 부분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여러 관점에서 분석하는 대화를 나누곤 했고, 특히 뉴질랜드 음악에서 우리의 맥락이 어디에 위치할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의 아이디어는, 작곡과 록 음악에 대한 제한적 지식만을 가진 우리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는 것이었으며, 우리가 가진 제한적인 지식을 뉴질랜드 음악 문화에 대한 지식, 펑크 록에 대한 우리 나름의 해석과 연결시켜 보는 것이었다." (Michael Morley, [Bomb], 2010년)
"The Dead C를 시작했을 때, 거의 극초창기부터 우리는 곡을 연주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그 곡을 최선을 다해 망쳐버리려고 노력했으며 곡을 해체함으로써 그 곡에 대한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었다." (Robbie Yeats, [Live Eye TV], 2008년)
https://youtu.be/96VBLJjAEYc
"The AMM of Punk Rock"
음향 밎 시각예술가 Michael Morley는 학교 과제의 일환으로써 테이프 녹음기를 가지고 이런저런 실험을 하기 시작했었다. 이 '방향 전환'은 새로운 프로젝트의 시작으로 이어졌으며, 곧 Wreck Small Speakers On Expensive Stereos라는 이름의 밴드가 만들어지게 된다.
2012년 Joseph Burnett과의 인터뷰에서, Morley는 이 '시작'에 대해 언급했었다: "처음에는 카세트 테이프 장비를 가지고 사운드 콜라주 같은 것을 만들었다. 아주 기본적인 음향 중첩이었고, 내부 인풋 같은 것 없이 마이크와 스피커,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만 존재하는 프로젝트였다. 1980년 나는 고등학교에서 Richard Ram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와 나는 둘 다 펑크 록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같이 Wreck Small Speakers On Expensive Stereos라는 이름의 밴드를 결성하게 되었다... 둘이서 이런저런 음향 실험을 해서 카세트 테이프에 담았었는데, 완전 초보 수준의 물건들이었다. 그 무렵 우리 둘이 즐겨 듣던 음악들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테이프들이었고, 어떻게 보면 우리의 무능함이 어떻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대학(University of Otago) 진학을 위해 더니든(Dunedin)으로 이주한 Ram과 Morley는 Wreck Small Speakers On Expensive Stereos 활동을 가속하여 여러 테이프들을 만들었으며 친구들 및 룸메이트들과 같이 연주를 하기도 했다. 이 때 생겨난 협업 프로젝트중 하나였던 The Red Orchestra는 같은 대학교 학생 Bruce Russell이 멤버로 포함되어 있었다.
[Stereogum]과의 인터뷰에서, Morley는 Russell과의 만남을 이렇게 묘사했다: "캠퍼스에서 Bruce를 몇 번 지나치곤 했었으며, Bruce는 우리의 모든 공연을 전부 보러왔었다. 그는 내 첫 밴드의 열렬한 팬이었다."
Russell의 미학적 방향성은 Wreck Small Speakers On Expensive Stereos의 공연들에서 감명을 받아 점점 더 크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Insample]과의 인터뷰에서, Russell은 말했다: "Wreck Small Speakers On Expensive Stereos에게서 대단한 영향을 받았는데, 왜냐면 이 밴드의 멤버들은 자신들이 뭘 하고 있는지를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연주자로써는 무능함 그 자체인 수준이었고, 정말 끝내주는 음악을 하는 밴드였다. 이들의 공연을 보면서 생각했었다, '나도 음악 관련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재능도 없는데, 그러면 나도 밴드를 할 수 있겠군'. 이들을 보면서 기타를 사게 되었고, 연주도 시작해보게 되었다."
철학 전공이었던 Russell은 이 시점에 이미 자신이 음악과 음향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임을, 그 길 위로 한번 올라서면 다시는 벗어나지 않게 될 것임을 예견했다. 그는 The Clean같은 더니든 밴드들, 그리고 The Fall이나 Cabaret Voltaire같은 외국 밴드들을 들으며 영향을 서서히 흡수하기 시작했다. [Live Eye TV]와의 2008년 인터뷰에서, Russell은 음악을 처음으로 '진짜로' 접했을 때의 경험을, 펑크가 이제 막 포스트-펑크로 나아가던 시절을 회고했다.
"어렸을 때에는 음악을 많이 듣지는 않았었다. Robbie처럼 나도 아주 작은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형이나 누나도 없어서 그들로부터 음악을 전해 들을 기회도 없었다. 해서 내가 진짜로 음악을 알게 되었던 것은 1977년이 되어서였다 - 록 음악을 발견하기에 나쁘지 않은 시기였다 - 하지만 이것도 거의 완전히 우연하게 발견했던 것이었다."
https://youtu.be/wfPRRBZUcQQ
"Mansions"
The Red Orchestra는 Wrecked Music 레이블에서 몇 개의 카세트 테이프를 발매했으며, 이 레이블은 Morley가 Wreck Small Speakers On Expensive Stereos를 위해 직접 설립했던 레이블이었다. The Red Orchestra는 더니든의 The Empire에서 주기적으로 진행되던 The Rip의 공연들 중 1984년 공연에서 오프닝 무대를 맡기도 했었다. Russell은 The Coonskin Kid라는 이름으로 (Morley와 함께 할 때에는 The Coonskin Kids라는 이름으로) 기타 노이즈 + 스포큰 워드 음악을 공연하기도 했으며 - 이 이름은 곧 A Handful of Dust라는 더 오래 쓰여질 이름으로 덧씌워졌지만 - Morley 또한 더니든의 슈퍼-그룹 The Weeds에서 때때로 연주를 하기도 했었다. Richard Ram 그리고 (향후 The Bats를 결성할) Bob Scott과 함께, Morley와 Russell은 Pink Plastic Gods의 멤버이기도 했다.
아이디어와 형식이 합쳐지고 있는 중이었지만, Russell은 더 대단한 것을, 정말로 훌륭한 것을 원했다. 1986년, Russell은 뉴질랜드를 떠나 런던에서 1년간 거주했으며, 뉴질랜드 바깥 세상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음악들이 어떠한지를 체험하려 했다 - 대체로 실망감만을 느끼던 와중, 그는 Sonic Youth를 발견하게 된다. 13년이 흐른 후 아방가르드 음악 잡지 [The Wire]에서 작성한 특집 기사(The Dead C에게 처음으로 적용되었던 '상당한 수준의 관심'이었다)에서, Russell은 Sonic Youth의 공연을 보고 패러다임이 바뀌는 정도의 충격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렸었다. "그 때 [Evol] 수록곡들로 공연을 하고 있었다.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곡들도 몇 개 연주하기는 했지만, 대체로 '의도적으로 록이 아닌 음악'을 하고 있었다." Sonic Youth의 공연을 보며 Russell은 향후 직접 스스로 만들어나가게 될 음악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1987년 1월, 더니든으로 돌아온 Russell은 Morley와 함께 포트 찰머스(Port Chalmers)로 이사했다. 당시 Morley는 This Kind of Punishment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으며, Russell은 [Garage]라는 팬 잡지에서 Flying Nun 레이블 음반들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오후, Morley는 Robbie Yeats를 드러머로 해서 3인조 밴드를 만들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 왔다.
"The Dead C 결성은 전적으로 Morley의 아이디어였고, 나는 사실 그 제안에 상당히 놀랐었다. Morley는 내가 얼마나 '통상적인 방식의 연주'를 하지 않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Morley는 그런 부분에는 애초에 거의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몇일 후 우리는 밴드로서 첫 연습을 했고,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4개월만에 첫 앨범을 녹음했다. 녹음은 굉장히 쉬웠다, 모든 것을 잘못된 방식으로 진행해 보자고 결정했었으니까." 2007년 [The Road Dreamed Forever]와의 인터뷰에서, Russell은 회고했다. "그 결정은 우리가 연습이라거나 '기술을 갈고 닦는' 짓 같은 건 안해도 된다는 의미였다. The Dead C는 언제나 '밴드가 해야만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기대를 철저히 무시하고 파괴하는 밴드였다."
Russell과는 다르게, 드러머 Robbie Yeats는 더니든의 바로크 팝 전설 The Verlains의 드러머로써 이미 기술을 잘 갈고 닦고 있던 음악가였다. 1984년부터 1990년까지 Yeats는 평범한 음악가들처럼 연습하고, 연주하고, 녹음했다. 어떻게 이런 평범한 음악가가 퍼포먼스 시인이자 시끄러운 사회주의자 Russell 그리고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이상한 노이즈에 완전히 푹 빠져있는 괴짜 Morley와 함께 뉴질랜드에서 가장 악명 높은 노이즈 록 밴드들 중 하나의 일원이 되었는지는, 사실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 [Stereogum]과의 인터뷰에서 Morley는 설명했다. "더니든은 작은 마을이었고 이상한 놈이 있다면 아주 쉽게 눈에 띌 만한 동네였다. 괴짜들은 자연스럽게 같은 장소, 같은 모임에 모여들었으며, 같은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Yeats는 샌프란시스코 팬 잡지 [Bananafish]와의 인터뷰에서, 대학교에 처음 도착했던 날의 추억에 대해 기쁘게 회상했다. "금요일이었다. Wreck Small Speakers On Expensive Stereos가 'wet lunch'(역주: 술을 곁들이는 점심 식사) 공연을 하고 있었다. 나는 지난 몇 년간 봤던 공연들 중 가장 훌륭한 공연이라고 생각했다."
Yeats는 [The Wire]와의 인터뷰에서도 밴드와의 첫 만남을 기억했다. "... 말도 안 될 정도로, 욕이 절로 나올 정도로 끝내줬다. 나는 당시에 Led Zeppelin 같은 밴드를 즐겨 듣는 소년이었고, 고어(Gore)에서 더니든으로 이제 막 도착한 꼬맹이였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눈에 보인 것은 엄청나게 훌륭한 음악이 지금 막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때 나는 결심했다, 내 길은 음악이라고."
격렬하면서도 본능적인 드러머이자 습관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성격인 Yeats는 자신이 어쩌다가 '더니든 사운드'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그리고 어째서 그가 불손한 음악가들인 Morley 및 Russell과 그렇게 잘 맞는 사람인지에 대한 이유까지도 설명이 될 만한 일화를 털어놓았다: "The Verlains에 들어가기 위해 거짓말을 했었다, 드럼을 칠 줄 안다는 거짓말을. The Verlains 멤버들이 뒤에서 이런 말을 했던 걸 엿들은 기억이 있다, 오, 이 녀석 박자는 하나도 못 맞추지만 나름 다이내믹은 있는데."
https://youtu.be/9whd_bioMnU
"Power"
[Bananafish]는 The Dead C가 3인조로서 처음으로 가졌던 어느 날의 오후에 대해, 멤버들이 즐겁게 나눴던 대화를 기록해서 출판하기도 했으며, 이는 [The Day The C Died]라는 이름의 글이 되었다:
『Mr. Russell: 어쩌다가 함께 하게 되었었지? 약도 빨았던 것 같고, 날씨가 맑았던 것 같은데, 어, 맥주도 마시고 있었을 거야.
Mr. Morley: 어, 그때 우리 진짜 구린 기타 앰프 2개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
Mr. Russell: 그날 오후에 같이 [Trout Mask Replica]를 듣고 있었는데 너가 우리 밴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던 거 같은데.
Mr. Yeats: 나는 그 자리에 없었어.
Mr. Russell: 사실 우리가 널 낚았던 거였지. Michael(Morley)이 너가 참여할 거라고 했었어. '어, Robbie(Yeats)도 할거야.'
Mr. Yeats: 그리고 나는, '씨바, 이거 완전 미친놈들 아냐...'라고 생각했었고.』
특유의 겸손함과 함께, Yeats는 [The Wire]와의 인터뷰에서 말했었다. "그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즉흥 연주'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즉흥 음악'이 무슨 단어인지, 철자도 몰랐다. 나에겐 정말로 좋은 기회였고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The Verlains의 곡 "Joed Out"의 가사처럼, Yeats는 날카로운 칼날 위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며 살고 있었으며, 더니든 사운드 1세대의 세심하게 짜여진, 빽빽하게 작곡된 음악들 속에서 경험을 쌓아나가다가, '뉴질랜드 프리 노이즈'라는 다음 세대의 물결에서도 가장 느슨하게 짜여진 밴드로 참여함으로써 이 '칼날 위의 균형'에서 내려왔던 것이다.
The Dead C의 첫 번째 공연은 밴드 결성 회합으로부터 몇 주가 지난 후, 1987년 1월 말, 더니든의 예술가 집단 창고 공간이었던 Chippendale House에서 진행되었다. 화창한 날씨에 맥주와 Captain Beefheart로 뒤덮힌 오후였다. 2014년 [The Press]와의 인터뷰에서, Russell은 이 공연을 회고했다. "우리 셋은 아주 짧은 공연을 했고 그 후 The Puddle의 George Henderson과 그의 친구들이 무대를 장악하고 공연을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를 완전히 덮어버리는 공연을 했고, 우리는 '좋아, 이게 우리 첫 공연이군'이라고 생각했었다."
몇년 후 Russell은 저명한 Xpressway 레이블 (Sonic Youth의 [Evol] 앨범 수록곡 "Expressway To Your Skull"에서 이름을 따 왔다) 을 설립하게 되지만, 이 당시의 Russell은 Diabolic Root 카세트 레이블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Morley는 Wrecked Tapes 레이블의 후신 Precious Metal 레이블을 운영하고 있었다. Diabolic Root 레이블의 첫 번째 카세트는 컴필레이션 앨범으로 Bob Cardy(AXEMEN 및 Shaft), Alastair Galbraith, Wreck Small Speakers On Expensive Stereos, Bob Scott, The Red Orchestra의 음악을 담고 있었다. 레이블의 2번째 앨범, 카탈로그 넘버 DR502는 [The Dead See Perform M. Harris]라는 이름의 앨범이었으며, The Dead C의 첫 앨범이었다.
C30 카세트 테이프로 21장만 제작되었던 "Max Harris"([The Dead See Perform M. Harris]의 별명)은 각각의 카세트 면에 1곡씩 들어가 있었으며, "(With Help From) Max Harris"와 "(Beyond Help From) Max Harris"라는 이름을 가진 연습실 연주 녹음이었다 - 총합 28분에 해당하는 길이를 가진, 코드 1개짜리 웅얼거림, 중얼거리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 날카로운 피드백 노이즈, 테이프 내내 떠도는 이상함, 강렬한 드럼과 찰랑거리는 퍼커션 음향으로 가득 찬 곡들이었다. 말하자면, "The Dead See"(당시 The Dead C의 이름)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Max"에서 이미 The Dead C의 향후 방향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Alley Oop]와 진행했던 1990년 인터뷰에서, Russell은 Paul McKessar에게 설명했다. "[The Dead See Perform M. Harris]에는 "Max"의 두 가지 버전이 녹음되어 들어가 있는데, 각각 우리가 모여서 진행한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연습 세션에서 녹음한 것들이었다. 이 두 곡은 녹음하자마자 바로 카세트 테이프로 만들어 발매했었다 (손으로 직접 인쇄한 우드컷 커버에 여러 그림이 그려진 부클렛이 있는 테이프였다). (좆같이 구린 2트랙짜리 녹음기로 녹음된) 14분간의 음향적 고문은 심지어 우리 스스로도 다시 들어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물건이었다 - 처음 녹음을 끝내고 다음에 진행되었던 두 번째 녹음은 완전한 "맹인" (아니면 "귀머거리"가 더 적절할지도) 상태에서, 첫 녹음과는 아무런 연관 없이 따로 진행되었다. 이후 The Dead C의 작업들 또한 이런 방식이었다."
4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 The Dead C는 앨범을 만들게 된다. "토요일 오후였나, 굉장히 화창한 날의 오후에 나는 바닥에, 카페트 바닥에 앉아서 내 부분에 해당하는 스네어 드럼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한 2주 정도 지냈던 것 같은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 둘이 와서 말하길 앨범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결국에는 진담인 것으로 판명이 되었고, 이 '앨범'이 [DR503]이었다." (Yeats, [Insample], 1991년)
https://youtu.be/ogSKlXgjVwM
"Max Harris"
이들은 이미 몇 개의 곡들을 Diabolic Root 레이블에서 C30 카세트 테이프 형태로 발매했었고 ([43 Sketch For A Poster]), 새 앨범은 Flying Nun 레이블에서 발매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Russell은 Flying Nun 레이블을 위한 제안서 같은 것을 작성하기도 했고, 레이블의 사장 Roger Shepherd에게 이 제안을 전달하기도 했다. Shepherd는 당시에는 좀 주저했지만, Russell은 그냥 "계속해서 Shepherd를 괴롭혔다".
"그 무렵 Robbie가 The Verlaines 공연으로 호주에 갔다가 막 돌아온 참이었는데, 멤버들이 모여 같이 저녁을 먹으러 나간 자리에서 The Dead C 앨범은 어떻게 되는 거냐는 농담을 주고받았었다. 뭐랄까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나는 Shepherd가 이 상황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Flying Nun 레이블에서 가장 잘 나가는 대표 밴드중 하나인 The Verlaines 멤버로 Robbie가 있었으니까. 이 멍청이들과 헛짓거리를 하는 중이라면, 한번 마음대로 해 봐야 하는 것 아닌지." ([The Wire], 2013년)
[DR503]은 스튜디오 녹음과 집구석 녹음이 섞인, 하이-파이와 로-파이가 섞인 앨범이었다: 8트랙, 4트랙, 2트랙, 아니면 그냥 워크맨. 앨범의 앞면은 (당시 기준으로도, 그리고 Flying Nun 레이블 기준으로도) 말도 안 될 정도로 로-파이인, 긴급하게 꾸물거리는 "Max Harris"의 5분 축약버전으로 시작하며, 그 이후 곧바로 회색빛 진흙투성이의 블루스 "Speed Kills"로 이어진다. 이는 단조로운 리듬 위에서 읊조리는 Russell의 목소리로 끈질기게 이어지는 "The Wheel"(아마 The Dead C의 모든 곡들 중 Russell의 목소리가 담긴 3개 정도밖에 안되는 곡들 중 하나)로 넘어가며, 밴드는 본드를 흡입하는 This Heat처럼 이리저리 긁어대고, 달그락거리고, 드론음을 이어간다. "Mutterline"같은 실험적 트랙, "Country"의 스튜디오 장난질 등등을 차치하고서라도, [DR503]은 '록 앨범'이었다 - 그러니까, This Kind of Punishment이나 Plagal Grind같은 느낌의 록 말이다.
[DR503]은 2번 재검토/재발매를 겪게 된다: Xpressway에서 발매된 카세트 [DR503b] - LP 버전과는 조금씩 다른 버전들과 [Max Harris]의 b-사이드를 담은 버전, 그리고 1999년 Flying Nun에서 발매된 컴필레이션, [Perform DR503c].
[Alley Oop]과의 인터뷰에서, Russell은 설명했다: "The Dead C의 녹음 경력에 있어 중요한 '발전'은 [DR503] 녹음 세션의 중반부 쯤에 발생했었다. 원래는 '필드 레코딩'을 좀 해 보려고 Richard Steele보고 4트랙 Portastudio 녹음기를 가지고 포트 찰머스로 나오라고 불러냈었다. 우리는 집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만큼 충분히 '자유롭게' 연주하며 녹음하는 것을 정말 좋아했었는데, [DR503] LP를 들어보고 나서 깨달았다, Portastudio로 녹음한 곡들 ("Speed Kills"같은 곡들) 이 8트랙 곡들보다 훨씬 더 듣기에 좋았던 것이다. 어째서인지 우리 모두 그냥 완전히 거기에 꽂혀버렸다. [Eusa Kills] 녹음은 The Verlaines 장비를 빌려다가 진행했고, 그 다음엔 Michael이 장비를 직접 구매했다. 우리는 그 장비로 '다른 곳'으로 떨어져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 그대로."
The Dead C의 미학은 Yeats의 다른 밴드 The Verlaines와는 완전히 다른 미학이었다. The Verlaines라는 밴드의 활동은 - "내가 마지막으로 참여한 앨범의 제작비는 20만 달러였는데, 심지어 이 때는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이었다. 삶, 음악, 예술에 대한 나의 생각과 부합하는 길이 어느 쪽 길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딱히 어렵지 않았다..." ([Live Eye TV], 2008년) [Insample]과의 인터뷰에서 Russell 또한 말했다: "The Dead C의 장비는 깜짝 놀랄 정도로 훌륭하게 구렸고, 이 덕분에 The Dead C의 음악이 그 정도로까지 아름다운 소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https://youtu.be/RxeQ-1fRVcI
"Children"
"[DR503]이 '록'이라면, [Eusa Kills]는 '팝'이 아닐까 싶다." Siltbreeze 레이블의 수장 Tom Lax는 CD 버전 라이너 노트에 이런 글을 적었었다. "T Rex 커버곡("Children")이 들어 있는 앨범을 '팝'이라고 안 하면 대체 뭐라고 하겠는가? 꽤 '여자애같은' 것 아닌지."
[Eusa Kills]는 밴드가 보다 더 환각적인 노이즈로 옮겨가고 있다는 변화를 보여주는 앨범이었다 - "Now I Fall"의 느긋하면서도 불안하게 흐르는 슬라이드 기타, "I Was Here"의 불온한 반복음, "Maggot"의 변조된, 미친놈같은 목소리까지.
"[Eusa Kills]의 몇몇 곡들은 상당히 미니멀하면서도 굉장히 조용한, 뭐랄까 꿈결같은 느낌이 있는 곡들이다." [Insample]과의 인터뷰에서 Russell은 말했다. "공연에서 재현하기 굉장히 까다로운 곡들이었다, 그렇게 조용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면 곧 관객들이 너나할 것 없이 떠들기 시작했으니까. 관객들의 집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록' 스러운 공연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The Dead C 멤버들은 뻔뻔할 정도로 대놓고 맛이 간 사람들이었다. [de/create]와의 인터뷰에서, Russell은 말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무수히 많았던 밴드 연습 시간들 중 3번인가 4번의 연습에서만 우리 모두 무언가에 취하지 않은 채로 연습을 했었던 것 같다." Morley는 이에 반박했다. "아니, 내가 기억하기로는 단 1번의 연습에서만 말짱한 정신으로 연습했었어."
본격적인 The Dead C 활동이 있기 몇년 전, Morley와 Russell은 "에테르 시기"라고 불리는 시기를 보냈는데, '그런 것들'을 흡입하고 널브러져서 쉬면서 음악을 듣고 지내기만 하는 것을 가리키는 시기였다. [The Wire]와의 인터뷰에서 Morley는 말했다: "거기에 더해서, 우리는 4월이 되자 아침에 엄청나게 일찍 일어나서 반도 쪽으로 차를 몰고 나가서 버섯(매직 머쉬룸)을 채집해 돌아와 먹곤 했었다." The Dead C의 '죽은 형제'라고 말할 수 있을 The Grateful Dead가 [Aoxomoxoa] 앨범 타이틀에 'We Ate The Acid'라는 문구를 숨겨두었던 것 처럼, The Dead C 또한 [Eusa Kills] CD 버전의 라이너 노트에 대충 휘갈겨 쓴 Morley의 글씨를 넣어두었다 - 'Hurry On April'.
[The Wire]와의 인터뷰에서, Russell은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개인적으로는 The Dead C 멤버들은 모두 굉장히 '사이키델릭'한 사람들이라고 본다. 록 음악의 전통들 중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요소가 있다면 바로 그것, 사이키델릭일 것이다, 100% 사이키델릭에 다른 모든 요소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우리는 그냥 록 음악의 모든 요소를 전부 벗겨내버렸고 사이키델릭한 요소만을 남겨서 취했다." Russell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당장 'Nag Champa' 향에 불을 붙이지는 말기를 바란다, Russell은 시애틀의 [The Stranger]와의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기도 했었다: "The Dead C는 '드론'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스페이스 록'같은 것도 안 한다."
https://youtu.be/dz7TKAAXzw8
"Magg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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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ce Russell / Robbie Yeats / Michael Morley2022/06/20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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