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 Vincenzo Romania University of Padova [Revista Crítica de Ciências Sociais], 109, 2016: 6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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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탈리아 펑크의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배경
이탈리아 펑크의 1세대 밴드들은 1977년, 이탈리아 북부의 중소도시 및 대도시들 - 토리노, 밀라노, 볼로냐, 포르데노네 등지에서 결성되었다. 하지만, 다른 남유럽 국가들과 비슷하게 (Guerra, 2014) 이탈리아 또한 1980년대가 되기 전까지는 펑크가 '눈에 띄는' 하위문화로 자리잡진 못했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사이, 이탈리아는 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변혁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전통적인 정당들 - Democrazia Cristiana (DC, 기독민주당) 이나 Partito Comunista Italiano (PCI, 이탈리아 공산당, 서구권에서 가장 강력한 공산주의 정당) 등은 서서히 지지를 잃어가고 있었고, 반면 새롭게 나타난 자유주의-사회주의 정당 (Partito Socialista Italiano, PSI, 이탈리아 사회당) 이 집권당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PSI는 그 이후 10년 정도 집권당을 유지한다), 짧지만 격렬했던 경제 성장과 정치적 부패의 시기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들의 삶 또한 변화하고 있었다: 여피 (yuppie) 문화처럼 소비자 지향적인 하위문화들이 이탈리아 내 부유한 지역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었으며, 드넓은 전통적 농경지가 현대적인 산업 공장지대로 개발되었고, 1979년에는 상업용 TV가 이탈리아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되기도 했다. 1974~1978년 '고전' 펑크 시기의 영국과는 다르게, 당시의 이탈리아는 정치적 테러의 암흑기에서 막 벗어나 신자유주의적인 삶을 점진적으로, 문화적으로 수용해 나가던 단계, '경제 위기 이후'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당대 이탈리아의 음악계는 크게 두 가지 형태의 음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canzone leggera ('팝 음악') 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던 대중적인 팝 음악들과 canzone di denuncia ('저항 음악') 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던 반문화 성향의 음악들로. Canzone leggera는 1950년대부터 이탈리아 음악 산업 발전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거대 레이블 회사들 (RCA와 Ricordi), 국영 방송국 (Rai), 유명한 전국 단위 축제 (Festival di Sanremo, Canzonissima) 등을 통해 대대적인 홍보를 받았다. 반면 canzone di denuncia는 1960년대에 1968 혁명과 함께 등장하였으며, 아나키스트 민속음악이나 파시스트 시대 시위 노래 등 여러 이탈리아 전통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음악적 라이벌 관계는 DC와 PCI간 정치적 라이벌 관계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Canzone leggera와 canzone di denuncia라는 두 강력한 음악 장르들과는 대조적으로, 이탈리아 록 음악 씬은 상당히 약한 씬이었으며, 소수의 밴드들만이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가장 중요했던,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던 밴드들은 PFM이나 Area처럼 해외에서 더 유명했던 몇몇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과 Litfiba나 Diaframma같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더 큰 성공을 거두게 될 소수의 뉴웨이브 밴드들이 전부였다. 간단히 말해서, 이탈리아 펑크의 탄생은 '음악적 환경의 다원화'라는 맥락 속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초기 이탈리아 펑크 씬은 세계 각지에서 들어온 여러 서브-장르들 (아나코 펑크, 스트레이트 엣지, 하드코어 펑크) 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 외에도, 초창기의 이탈리아 펑크는 이탈리아 내부에서 벌어졌던 특정한 운동인 "Movimento del '77" (M77) 과도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Milburn이 말했던 것처럼, "1977년은 잉글랜드와 이탈리아의 청년들이 폭발하는 창의성을 한껏 만끽하던 시기였다" (Milburn, 2001). M77 운동은 'Autonomia'라는 이름의 새로운 정치 주체를 형성했던 특정 좌파 원외정당의 해산으로 인해 발생했던 운동이었다. Autonomia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써 새로운 사회 패러다임을 제시했었던, 고도로 이론화된 정치적 운동이었으며, 사상을 초월하여 일상에 실존하는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저항을 맥락화하고 경제와 관련된 정치 및 문화의 자율성을 강조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에 맞서 반대했었던 운동이었다. Autonomia는 문화 연구 학계에도 큰 영향을 끼친 Antonio Gramsci의 철학에 근간을 두고 있었다. M77 운동은 이탈리아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초기 확산 및 반-정보(counter-information)의 첫 사례를 지지하고 이끌어 내었으며, 이탈리아로 외부의 펑크 문화를 수입해 들어오는 것에 일조하였다. 특별히 볼로냐에서는 이탈리아 최초의 펑크 잡지들과 레이블들이 아나키스트들의 도움으로 설립되기도 했었다 (Philopat, 2006). 영국 펑크와 마찬가지로 M77 운동 또한 아방가르드주의, 상황주의, 그리고 Michel Foucault 및 Roland Barthes의 철학에 대한 정치적 해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같은 시기, 볼로냐 대학에 새로 개설된 공연예술학부(Faculty of Performance Studies, DAMS)는 펑크 씬의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실제로 여러 DAMS 학생들이 직접 펑크 밴드들을 결성하기도 하였는데, 이 중에는 Skiantos, CCCP, Gaznevada 등이 있었다. 또한 당대 이탈리아 펑크는 M77 운동에서 가장 풍부한 표현을 가지고 있었던 집단인 Radio Alice와 이를 중심으로 한 지적 모임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Radio Alice는 독립 라디오 방송국으로 기호학자 Franco Berardi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이 한데 모여 혁신적인 형태의 기호학적 혁명을 창조해냈던 곳이었다. 이 문화 집단의 목표는 새로운 언어와 상호작용 형식을 창조하여 체제를 전복할 수 있을 소통을 생산해내는 것이었으며, Radio Alice가 정기적으로 송출했던 이탈리아 펑크 음악은 '영토'에 구애받지 않은, 범지역적인 펑크 하위문화 구조가 이탈리아 내에서 만들어지고 확산되는데에 기여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펑크의 발전에 기여했던 또 다른 중요한 요소로는 2개의 스쿼트(역주: squat, 비어있는 공간을 무단으로 점거하여 거주하는 장소), 볼로냐의 Traumfabrik과 밀라노의 Virus가 있었다. 이 두 스쿼트는 이탈리아의 다른 여러 지역으로도 전염되어 여러 스쿼트가 생기는데에 일조하기도 하였으며, centri sociali("사회 센터")가 설립되는 데에도 기여했다. 스쿼트는 일시적이었지만, centri sociali는 살아남아 점점 더 큰 대중의 관심을 얻었으며, 대안 하위문화가 이탈리아 전역에 퍼져나가는 데에 일조하게 되었다. 볼로냐의 펑크 문화는 M77 운동과의 교차점에서 등장하였으며, 전세계적인 펑크 물결과 볼로냐만의 펑크 문화가 합쳐진, 펑크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흥미로운 이탈리아 밴드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CCCP - Fedeli Alla Linea는 이러한 문화적 배경으로부터 만들어진 밴드였으며, 이들의 예술에는 체제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상호 소통 방식, 상황주의, 아방가르드주의적 요소들이 깃들어 있었다. 밴드의 보컬 Giovanni Lindo Ferretti는 어린 시절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원외정당 중 하나였던 Lotta Continua의 당원이기도 했지만, CCCP - Fedeli Alla Linea라는 밴드 자체는 Lotta Continua와는 그 어떤 관계도 공언하지 않았다. 실제로 밴드의 핵심 멤버들이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던 곳은 베를린이었으며, 이 때 이들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가는 이탈리아 청년 문화에서 벗어나 베를린으로 탈출했던 것이었다: "국가의 폭력과 '붉은 여단'(역주: Brigate Rosse, 이탈리아의 극좌 단체로 Aldo Moro 전 총리 납치/살해사건 등을 일으켰었다)의 폭력 사이에 짓눌린 채로, 그 젊은 운동이 창조해내었던 공간은 감금, 정신 질환, 헤로인 중독의 유산 속에서 완전히 폐쇄되어 버렸다." (Milburn, 2001). 바로 이것이 CCCP - Fedeli Alla Linea의 펑크 음악에 집중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CCCP - Fedeli Alla Linea가 거두었던 상업적 성공과 문화적 영향력일 것이다: 이들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유일한 이탈리아 펑크 밴드였으며, 이후 발생하게 될 이탈리아 얼터너티브 록 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밴드이기도 했다. 세 번째 이유는, CCCP - Fedeli Alla Linea가 헤쳐 나갔던 긴 역사와 음악적 경험이 이들을 고전 펑크와 80년대 펑크 - '진정성'을 향한 포스트모던적 탐구라는 특징을 가졌던 펑크 문화 - 의 사이를 잇는 과도기 위에 위치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밴드의 기본적인 정보와 밴드의 펑크적 정체성의 구성에 대해 논하려 한다.
2. CCCP: 전기 및 펑크로서의 정체성
펑크 문화는 시각적이고 언어적인 상징과 아이콘들을 본래의 사상적, 정치적, 종교적 맥락에서 마음대로 분리하고 전용하여 기존과는 다른, 초월적인 의미로 재구성하는 행위를 장려하는 문화이다 (Hebdige, 1979). CCCP - Fedeli Alla Linea, 해석하자면 "소련 - 선(line)에 충실한"이라는 밴드 또한 이러한 분리와 전용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밴드의 이름부터가 소련의 키릴 문자 이름의 약자, "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를 라틴 알파벳으로 오역한 경우들에서 따 온 이름이었다, 키릴 문자 С를 라틴 알파벳 C로 부정확하게 옮긴 경우들에서. 따라서, 이들의 이러한 밴드 이름 선정은 소비에트적 미학이 대중적인 민속 문화로 번역되어 물밀듯 들어오던 현상, 이탈리아 노동자 계급의 일상에 소비에트주의가 전용되어 들어오던 현상을 반영하는 이름이었다 (Hoggart, 1957).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소비에트주의의 상징이 전혀 다른 의미로 쓰여졌던 예시는 1970년대 초반, Malcom McLaren이 New York Dolls에게 붉은 비닐 옷을 입히고 상황주의로부터 영감을 받은 슬로건과 함께 러시아 국기 아래에서 공연을 하게 만들었던 사건이 있을 것이다: "지루함의 정치란 무엇인가, 죽음보단 붉은 색을 택하겠다!" (What are the politics of boredom, better red than dead!) '레드스킨 펑크'가 등장하곤 하던 미국이나 다른 여타 국가들과는 다르게,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공산주의에 딱히 심한 낙인을 찍는 분위기가 없었다. 실제로, 1970년대 후반 이탈리아는 서구권에서 가장 강력한 세를 가진 공산당이 존재하는 국가였다. 레지오 에밀리아 (Reggio Emilia) 를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는 PCI가 75%가 넘는 득표율을 성취하기까지 했었다 (Colarizi, 1988). 이러한 문화적 맥락에서 '소비에트주의'란 다음 세 가지 현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점차 사라져가고 있던, 소규모 원외 좌파들이 갖고 있는 소련에 대한 향수 / 'Autonomia'의 적으로 간주되던 군사적 규율과 억압의 정수 / 신자유주의에 대한 아이러니한 대안이자 예술가적인 유토피아. CCCP - Fedeli Alla Linea의 이름은 따라서 부정적이고 불경한 대상을 긍정적인 힘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전형적인 펑크 문화 와는 다른 결을 따르는 이름이었다 (Nehring, 1993: 232): 대신 이들의 이름은 구성적인 '양면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시에, 이들에게 있어 소비에트주의는 자발적인 '신념'을 상징하고 있었다 - "선에 충실하라, 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CCCP" 가사 중 일부) - 자본주의로부터의 구원이자 동시에 자발적인 억압이라는 신념을. 이러한 '진정한 비진정성' (Grossberg, 1992) 은 CCCP - Fedeli Alla Linea로 하여금 공산주의자의 상징들을 자유롭게 인용하고 재구성하도록 이끄는 요인이었다. 예를 들어, CCCP - Fedeli Alla Linea의 두 번째 앨범 [Socialismo e Barbarie] (사회주의와 야만) 은 Rosa Luxembourg의 에세이 [Juniusbroschüre] (1915) 에 나오는 격언 "사회주의인가 아니면 야만인가"를 패러디한 이름을 가진 앨범이었다. CCCP - Fedeli Alla Linea는 1981~82년, Massimo Zamboni (기타) 와 Giovanni Lindo Ferretti (보컬 및 작사) 와의 만남에서 출발했던 밴드였다. 밴드는 Umberto Negri (베이스) 와 또 다른 두 예술가, Annarella 및 Fatur의 합류로 완성되었다. 창립 멤버들 (Ferretti, Zamboni, Negri) 은 모두 볼로냐 근교의 중소도시 레지오 에밀리아 출신이었지만, 막상 서로간의 첫 만남은 베를린에서 이루어졌고, 이들은 베를린의 인더스트리얼 록, 펑크, 뉴 웨이브 음악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1982~84년의 기간동안 이들은 베를린과 그들의 고향 에밀리아-로마냐 (Emilia‑Romagna) 를 오가며 지내고 작업하였다 - 대도시적 국제주의와 반물질주의적 지방 생활이라는 양면성을 대변하는 듯한, 장르와 주제에 있어 양 극단에 해당하는 두 도시를 오가면서. CCCP - Fedeli Alla Linea의 공연은 반-의식 (counter‑ritual), 저항의 의식, 아방가르드 표현 예술을 동시에 달성하고 있는 공연이라고 간주될 수 있을 만한 공연이었다. 고전적인 펑크 밴드들이 그랬듯이 CCCP - Fedeli Alla Linea의 공연 또한 혼란, 분열, 관객의 거부를 야기하는 것을 목표로 짜여진 상황주의적 공연이었다 (Henry, 1984). M77 운동에 뿌리를 둔 이들의 상황주의적 공연은 CCCP - Fedeli Alla Linea에게 "아방가르드의 필수적인 연결고리... 아방가르드의 원류와 펑크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를 부여했으며 (Nehring, 1993: 224), 관객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인식을 만들어 주는 하나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Johnson, 2014: 67). 이들은 자신들의 공연을 집단적 치료 행위로, "'원치 않는' 세대가 창조하고 또 스스로 수행한, 일종의 자발적인 치료 행위"로 정의했다 (Reddington, 2007: 12). 1984~85년, CCCP - Fedeli Alla Linea는 첫 앨범들 (3장의 EP와 1장의 LP) 을 인디 펑크 레이블 Attack Punk를 통해 발매한다. 첫 두 EP의 이름은 [Ortodossia] (정통성) 와 [Ortodossia II] 였으며, 소련의 군사적, 사상적 '정통성'을 연상시키는 이름이었다. 반면 세 번째 EP의 이름은 [Compagni, Cittadini, Fratelli, Partigiani] (동지들, 시민들, 형제들, 빨치산들) 로 - 1960년 7월 집회 도중 이탈리아 경찰에 의해 사망한 다섯 명의 노동자를 기리며 Fausto Amodei가 만든 노래 "Per i morti di Reggio Emilia"의 첫 구절에서 따 온 이름이었다. 이러한 소비에트주의에 대한 찬사는 옛 이탈리아 좌파 정치에 대한 향수 (하지만 여전히 패러디적인) 와 연결되기도 했었다. 이들의 첫 LP의 이름은 [1964/1985 Affinità-Divergenze fra il Compagno Togliatti e Noi – Del Conseguimento della Maggiore Età] (1964/1985 Togliatti 동지와 우리 사이의 유사한 점들과 다른 점들, '성관계 승낙 연령'(age of consent)에 도달함에 따라) 으로, 이 제목은 중국공산당이 PCI에게 보냈던 서한의 제목을 따와 만든 이름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사상을 패러디한다'는 개념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다. 이탈리아 공산당 및 연관된 좌파 단체들, 빨치산들, 노동 조합 및 기타 모든 좌파와 관련된 사회/정치적 주체들은 '정치적인 노래'에 대해 굉장히 정통파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정통파적인 견해에 부합하는 노래들만이 이들의 파티, 페스티벌, 대회에서 연주되었었다. 하지만 CCCP - Fedeli Alla Linea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아이러니를 잔뜩 담은 노래 ("Oh! Battagliero") 를 통해 빨치산의 신성한 지위를 감히 조롱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는 CCCP - Fedeli Alla Linea가 사용한 '소비에트주의'가 기호학적인 층위에서부터 이미 다른 단체들의 소비에트주의와는 완전히 달랐다는 측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CCCP - Fedeli Alla Linea에게 있어 소비에트주의란 공산주의와 신자유주의 모두로부터의 차별화라는 아주 중요한 일상적 기능을 담당하는, 역사적 및 문화적 맥락에서 아주 정확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사상적인 측면을 넘어, CCCP - Fedeli Alla Linea의 음악과 공연 또한 이탈리아 음악계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였으며, 따라서 밴드는 즉각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들은 여러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선보였으며 심지어 국영 TV 방송에서도 몇 번 등장하기까지 했었다. 이러한 성공은 1985년 Virgin Music과의 계약으로 이어졌으며, 이후 CCCP - Fedeli Alla Linea는 Virgin에서 3장의 LP를 발매하게 된다: [Socialismo e Barbarie] (1987), [Canzoni, preghiere, danze del II millennio - sezione Europa] (1989), 그리고 [Epica Etica Etnica Pathos] (1990). 이들의 첫 앨범은 순수한 펑크 앨범이었지만, Virgin에서 발매한 앨범들은 펑크와 인더스트리얼 하드코어, 이탈리아 민속 음악, 월드 뮤직, 실내악, 디스코 등을 혼합하여 Frank Zappa적인 장르와 시의 혼합 음악으로 빚어낸 음악들이었다. 1991년, 밴드는 이름을 C.S.I. (Consorzio Suonatori Indipendenti – 독립 음악가 연합) 로 변경하였다 (역주: 소련 붕괴 후 구 소련권 국가들이 결성했던 '독립 국가 연합'의 이탈리아어 표현이 Comunità degli Stati Indipendenti로, 약자가 C.S.I. 입니다). 이는 붕괴되어버린 소련의 영향력이 이제는 끝나버렸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으며, 동시에 음악적으로도 펑크를 떠나 보다 더 얼터너티브 록 사운드로 나아간다는 새로운 방향을 공표하면서도 밴드의 새로운 멤버들을 소개한다는 의미도 있는 이름 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