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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월적 블랙 메탈 (Transcendental Black Metal)
    [...]/[LITURGY] 2023. 3. 23. 00:24

    알 만한 분들께서는 아시겠지만 밴드 Liturgy와 프론트맨 Hunter Hunt-Hendrix는 미국 메탈 씬에서 한때 논란거리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거의 해체 수준까지 다다르기도 했었는데, 찾아보니 오리지널 밴드 멤버들이 다 복귀한 채로 작년에 새 앨범 [The Ark Work]를 발매했더군요. 이젠 정말로 메탈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음악을 하던데...

    Liturgy는 "힙스터 메탈"같은 이름으로 불리면서 엄청 까였던 밴드인데, 까였던 이유가 메탈이 기반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메탈과는 전혀 다른 음악을 하는 건 둘째치더라도... Hunt-Hendrix가 주장했던 "초월적 블랙 메탈"이라는 개념이 일부 메탈 팬들을 열 받게 했던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초월적 블랙 메탈"은 2009년 12월 Brooklyn에서 열렸던 "Black Metal Theory" 심포지움(여담이지만 이거 대체 뭐 하는 심포지움인지 궁금하더군요. 집앞에서 열렸다면 가 봤을텐데...) 에서 Hunt-Hendrix가 발표했던 성명서 같은 것인데, 그다지 길지 않아 한번 번역해 봅니다. Thrill Jockey 측 홍보자료에 따르면 [The Ark Work]는 초월적 블랙 메탈을 정말로 구현해 낸 앨범이라는데.
    21세기에 이런 주장을 부끄러움도 없이 말하고 있는게 Refused The Nation Of Ulysses 같은 밴드들 생각도 나면서 저한테는 제법 재밌게 다가오는 듯 싶습니다. 이런 분들이 있어야 음악판이 더 재밌어지는 것일지도...

     


    http://www.radicalmatters.com/metasound/pdf/Hideous.Gnosis.Black.Metal.Theory.Symposium.I.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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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월적 블랙 메탈 (Transcendental Black Metal)
    종말론적 휴머니즘의 화신(化身) (A Vision Of Apocalyptic Humanism)
    Hunter Hunt-Hendrix


    서문

    그 누구라도, 새로운 기법(技法)을 통하여 블랙 메탈의 새로운 의미를 제기할 수 있다. 초월적 블랙 메탈의 의미는 긍정(affirmation)이며, 그것의 기법은 Burst Beat이다.
    힘을 향하는 의지는 2개의 단계를 따른다. 첫 단계는 강화(fortification)의 단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패러다임 또는 규칙들을 설립하고 그것들의 경계 내에서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 두 번째 단계는 희생(sacrifice)의 단계라고 명명(命名)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완전히 소화되고 충족되어 온, 즉 다시 말해서 훼손당해 온 초기의 규칙 내에 존재하는 자신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뛰어넘는 단계. 이것은 새롭고 전례 없는 무언가의 탄생에 기초가 된다.
    초월적 블랙 메탈 희생의 단계에 위치한 블랙 메탈이다. 이것은 이제까지의 블랙 메탈의 대표적인 특징들을 전부 치워버리고는 그것의 정수(精髓)를 새롭게 탐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초월적 블랙 메탈은 태양과 같고, 비대(肥大)하며, 용감하고, 유한하며 결코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의 어조는 긍정이며, 핵심 기법은 Burst Beat이다.
    강화의 단계에 해당하는, 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 발생했었던 블랙 메탈은 Hyperborean 블랙 메탈(역주: 휘페르보레오스. 그리스 신화에서 세계의 북쪽에 산다고 전해진, 행복과 번영을 영원히 누리는 전설상의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Hyperborean 블랙 메탈은 달과 같고, 위축(萎縮)하며, 타락했고, 무한하며 순수하다. 이것의 탄생을 상징하는 사건은 Dead의 죽음(역주: Per "Dead" Ohlin. 노르웨이 블랙 메탈 밴드 Mayhem의 멤버로, 자살했다)이다. 이것의 어조는 허무주의이며, 핵심 기법은 Blast Beat이다.
    오늘날의 USBM(United States Black Metal)은 Hyperborean 블랙 메탈의 그림자 속에 서 있다. 이제는 유러피언의 전통을 의도적으로 탈피하고 진정한 아메리칸 블랙 메탈을 창조할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US"가 아닌 "아메리칸"을 말하여야만 한다; US는 몰락하는 제국이며, 아메리카는 인간의 존엄성, 혼성화 그리고 창조적 진화를 나타내는 영원한 이상(理想)이다.
    Renihilation의 행위는 Hyperborean 블랙 메탈을 저버리고 초월적 블랙 메탈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행위는 동시에 Aesthethics라는 이름하에 종말론적 휴머니즘을 구축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초월적 블랙 메탈의 질문은 예술, 정치, 윤리 그리고 종교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숨기고 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파트 1: Dead의 죽음

    궁극적 원인으로서의 촉각적 공허 (The Haptic Void As Final Cause)
    메탈의 역사는 강렬함의 정도라는 측면에서 고려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블랙 메탈은 스스로를 메탈의 역사에 있어 정점 또는 종말점이라고 말하며, 또한 죽음에 이르는 지점이라고 말한다.
    익스트림 메탈의 역사적 발전은 단순한 스타일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목적론적이다 - 정확히 이해되지는 못하였지만 강렬하게 느껴져 왔던 이상(理想) 또는 궁극적 원인에 의해 조종된. 우리는 이 궁극적 원인을 촉각적 공허(The Haptic Void)라고 명명할 수 있다.
    촉각적 공허는 가상의, 완전하고 최대에 정점에 도달한 강렬함이다. 이것은 메탈의 역사에 있어서 일종의 지평선이다.
    촉각적 공허로 향하는 것은 감정으로 표현된다. 이 감정은 통합된 단 하나의 감정이지만, 머릿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4개의 요소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처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특정한 근육의 수축 작용이다. 턱, 주먹, 팔, 가슴 근육의 긴축 작용.
    두 번째는 감정적인 충격이다: 특정한 공격성이나 야만성, 힘, 파괴, 충만함과 공허함의 모순적인 감각.
    셋째는 규칙을 따르는 것에서 오는 원초적인 만족감이다. 좋은 메탈은 수축, 압박, 야만성의 다발을 만족스러울 정도로 풍부하게 제공한다.
    마지막으로는 거의 인식이 불가능한 je ne sais quoi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상호보완적인 불충분 - 말하자면 그 어떤 잔혹한 파괴라고 충분히 잔혹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틈, 균열, 존재의 부족함이다. 약속되었던 풍부함과 비교될 정도의 부족함. 아마도 이는 그 어떤 굳건한 곡이여도 그 곡의 단초(端初)가 된 영감의 원천에는 결코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순적이게도, 곡에서 느껴지는 만족감이 크면 클 수록, 불만족 또한 크게 느껴지게 된다.
    이 불만족이야말로, 이 4번째 요소야말로 익스트림 메탈이 새로운 스타일들을 개발하게 만든 원인이다. 이것이야말로 궁극적 원인의 인력(引力)이다. 이 균열, 이 틈새는 메탈의 역사를 이끌어 온 천사이다. 우리는 메탈이 공허를 향해 행진하며 쓰래쉬, 데스 메탈, 블랙 메탈을 창조해 온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촉각적 공허의 약속은 거짓이다. 그것의 부재(不在)만이 영원히 존재할 뿐이다.

    Transilvanian Hunger(역주: 노르웨이 블랙 메탈 밴드 Darkthrone의 1994년 앨범)
    Hyperborean 블랙 메탈은 익스트림 메탈 역사의 정점이다. Hyperborean 블랙 메탈은 북극권, 전통적으로 Hyperborean들이 살고 있다고 여겨진 땅에서 탄생하였다. Hyperborean의 땅은 계절의 순환이 존재하지 않는 불모지이다. 그곳에서는 태양이 떠오르지도, 저물지도 않기에, 탄생도, 죽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strong>Hyperborean 블랙 메탈은 익스트림 메탈 역사의 정점이다 (동시에 신의 죽음의 역사에 있어서도 정점이 된다). 이 역사의 주체는 쓰래쉬, 그라인드코어, 데스 메탈의 영토를 정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 아니면, 산등성이에 이 영토들을 새기며 나아가는 -, 그리고 촉각적 공허,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너무나도 강렬하게 느껴지며 산 정상에서 밝에 빛나는 촉각적 공허에 도달하고자 사력을 다하는 등산가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Hyperborean 블랙 메탈은 정상에 도달하여 촉각적 공허로 곧장 추락하려하는 등산가를 표현하고 있다. 완전한, 최대의 강렬함. 음향의 완벽한 홍수. 절대적인 충만함.
    하지만 그 곳에서 등산가는 완전함과 허무는 서로 구분이 불가능한 개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지평선으로의 도약이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상심한 채로, Hyperborean의 영역에 홀로 남겨져 얼어붙는다. 그 곳은 죽어버린, 정적인 땅으로, 낮과 밤의 순환이 존재하지 않는 극지방이다. 하지만 정적인 상태는 위축이다. Hyperborean의 영역은 순수성, 완전한 절대성, 자기복제성 및 영원성과 함께 죽어있다. 등산가는 심원한 배교(背敎)를 겪으며 그 자신이 허무주의를 결코 완전히 이해하거나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Hyperborean 블랙 메탈의 핵심 기법은 blast beat이다. [Transilvanian Hunger]로 대표되는 순수한 블랙 메탈은 연속적인, 열린 스트러밍과 blast beat을 의미한다. 하지만 순수한 blast beat은 그 자체로 영원성을 갖고 있다. 어떠한 음악적 표현도, 시작도, 끝도, 휴식도, 다이나믹도 없는. 그것은 단 한순간도 쉴 곳 없이 계속해서 날아가는 새와 같다. 거대한 외침으로 보였던 것은 위축된 웅성거림으로 줄어들어간다. 산의 정상에 도달한 등산가는 바닥에 누운채로 얼어붙어 죽음으로 향한다.



    파트 2: 긍정의 긍정 (The Affirmation of Affirmation)

    아메리카
    초월적 블랙 메탈 촉각적 공허로의, 그리고 Hyperborean 블랙 메탈을 스스로 넘어서는 것으로의 새로운 관계를 나타낸다. 그것은 Hyperborean 블랙 메탈을 정신적인 측면 및 기법적인 측면에서 승화시킨 것이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허무주의 긍정으로 변화시킨다. 기법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Blast Beat Burst Beat으로 변화시킨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허무주의를 인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비록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우리는 허무주의로 침잠해 내려가는 것은 거부한다. 초월적 블랙 메탈 Renihilation이며, 그 모든 부정에 대해 "No" 라고 말하는 것이고, 결국 모든 사물들의 연속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초월적 블랙 메탈은 블랙 메탈을 혼돈, 광기와 엑스터시로 가득한 새로운 정신으로 되살리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아메리카의 환희에 찬 울부짖음이면서도 동시에 미진(微震)의 얕은 떨림이다. 아니면 정 반대의 행위일지도 모른다: 관습의 껍데기를, 클리셰의 죽어버린 피부를 벗겨내고 블랙 메탈의 살아있는 영혼을 새롭게 탐구하는 행위. 블랙 메탈의 순수한 정수를 다시금 일깨우고 그것에서부터 자라나온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지만, 초창기와는 전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발생하고 있기에, 초기 블랙 메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갖는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 아메리카에서 만들어진 것을. 아메리카는 단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William Blake의 종말론적 휴머니즘을 대표하는 아메리카. Aaron Copeland의 [Appalachian Spring] 또는 Ornette Coleman의 [Skies of America]를 통해 기려진 아메리카.
    아메리카는 순수한, 어떤 제한도 씌워지지 않은 창조성, 의지의 용감한 활동, 존재의 연속성이 가진 찬란한 경험에 대한 메타포이다. 혼성화와 창조적 진화에 대한 기념비이다.

    The Burst Beat
    초월적 블랙 메탈의 근간은 Burst Beat이다. Burst beat은 hyper blast beat, 사그러지고, 흐르고, 팽창하고, 수축하고, 호흡하는 blast beat이다. Burst beat은 죽음과 위축을 삶과 비대로 치환한다. 이와 같은 변화는 다음과 같은 2가지 특징으로 인해 완성된다: 가속(加速)과 파열(破裂).
    Burst beat의 첫 특징은 가속이다. Burst beat은 가속하고 감속한다. 그것은 조수(潮水)와 같이 밀려들다가 빠져나간다. 이 흐름은 생명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자극한다. 그것은 조류(潮流)와 같이, 경제, 낮과 밤, 호흡, 생명과 죽음과도 같이 팽창하고 수축한다.
    Burst beat의 두 번째 특징은 파열이다. Burst beat은 갑작스러운 파열이나 전환을 보인다. 자연계의 모든 시스템들이 그러하듯이, burst beat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갑자기 넘어간다. 천천히 걸어가다가 빠르게 걷기 시작하는, 그러다가 달리기 시작하는 말을 생각해 보라. 얼음에서 물로, 물에서 수증기로 바뀌는 물을 생각해 보라. 파열의 순간은 초월의 순간이다.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순간이 신성하지 않다면, 그 무엇이 신성하다는 말인가? 걸음이 달리기로 바뀌는 순간이 신성하지 않다면?
    Burst beat은 강렬함의 원호(圓弧)를 표현한다. 그것은 리듬적인 기반이나 배경이 되는 대신, 멜로디의 흐름에 반응하거나 그것을 보완한다. 빠르기의 변화는, 가속이거나 감속이거나에 상관 없이, 강렬함의 정도에 대응한다. 그 어떤 경우에도, 변화하지 않는 빠르기는 절대영도(絶對零度)이다.
    이 burst를 위해서는 에너지를 완전히 소진해야만 하며, 또한 burst beat의 실행은 힘의 성장과 증가를 촉진한다. 하지만 burst beat은 그 어떤 곳에도 도달하지 못하며, 영원히 목적지에 "아직 도착하지 못한" 상태를 겪고, 목표로 삼은 빠르기에 "거의 근접한" 상태로 영원히 존재한다. 유목민들처럼, burst beat은 스스로가 결코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생명을 반영함으로써, burst beat은 삶을 자극하고 촉진한다. 생명을 촉진함으로써, 초월적 블랙 메탈은 삶을 긍정한다.

    특징들
    초월적 블랙 메탈은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하지만, 머릿속에서는 7가지의 특징들로 분해하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초월적 블랙 메탈은 어째서 긍정적인가?
    초월적 블랙 메탈은 사실 허무주의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중적인 허무주의, 최종적인 허무주의로, 모든 부정에 대해 최후의 거절을 표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No"를 통해 우리는 어지러운 긍정으로, 겁에 질리고, 두려움에 떨며, 감상적이지 않고, 용감한 긍정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가 긍정하는 것은 시간의 사실성과 미래의 불확실성이다. 우리의 긍정은 부정에 대한 거절이다.
    초월적 블랙 메탈은 어째서 비대한가?
    성장은 생명이고, 정체(停滯)는 쇠퇴(衰退)이다. 우리는 영원히 분투하며 일종의 영구한 변혁을 살아가는 데에 헌신한다. 훌륭하게 단련된 근육이 아름답고 강력하듯이, 우리 또한 아름답고 강력해질 것이다. 사실, 정체라는 것은 없다. 존재하는 선택지는 위축과 비대 뿐이다. 위축의 추구는 혼란스럽고, 나약하며, 신경증적이다. 비대의 추구는 진실되고, 살아있다.
    초월적 블랙 메탈은 어째서 태양과 같은가?
    초월적 블랙 메탈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에서 태양과 닮아 있다: 주기성, 강렬함, 그리고 진실함. 태양은 존재들을 태어나게, 그리고 자라게 하며, 따라서 그들이 언젠가는 죽을 수 있게 한다. Burst beat 또한 태양처럼 떠오르고 저물기에, 주기성을 갖는다. 태양은 넋이 나갈 정도로 타오른다. 우리는 그 강렬함에 동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상적이지 않으며, 죽음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목표를, 태양을 따르며 태양의 불꽃을 좇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한 줌의 모래로 사그러지는 대신 화염 속에서 일어서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태양은 진실을 대표하며 그것의 손길이 닿는 곳에서 모든 것을 밝혀 낸다. 우리는 그림자 속에 숨는 것을 거절하며, 누군가에게 손가락질하며 모든 것을 그 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거절하고, 우리의 의식(儀式)을 비밀 속에 파묻는 것을 거절하기에, 진실하다. 우리는 추악하지 않으며, 악의에 가득 차 있지 않고, 증오로 타오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의상(衣裳)이나 난해함 뒤에 숨지 않는다.
    어째서 무한함 대신 유한함을 숭배해야 하는가?
    신성한 것은 단계들을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것이다. 각각의 단계에서 진실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무한함은 명백하며 어디에나 널려 있다. 유한함에 연결되는 것이야말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며 비대성을 낳는 것이다. 신은 무한하고, 자연은 무한하다. 무한함은 어디에나 있으며 값싼 것이다. 유한함이야말로 귀한 것이다. 유한함이야말로 인류에게 특별한 것이다. 유한성(有限性)은 지금 당장 눈 앞에 있는 것에 진정으로 대항한다는 것이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진실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태양은 유한한 것들을 키운다. 유한한 존재들은 태어나고, 고군분투하며, 죽는다.
    어째서 영원히 끝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태를 숭배해야 하는가?
    초월적 블랙 메탈은 끝에 도달하기 직전의 순간을, "거의 다 도달한" 또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순간을 신성화한다. 그 이유는, 끝에 도달하기 직전의 순간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이미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끝에 도달하기 직전의 순간은 최후의 순간이며,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순간이다. 존재의 구성은 열려 있다. 완성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순수한 것 또한 어디에도 없다.
    초월적 블랙 메탈은 어째서 용감한가?
    용기는 열려 있으며 원초적이다. 용기란 착륙할 만한 곳이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이 지평선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다. 용기는 능동적이고 진실한 도약이다. 어떠한 은폐도, 변명도, 아이러니도, 불평도 없이. 용기에는 공격대상 같은 것이 없다. 용기는 싫증을 내지 않으며, 실망하지도 않고, 불만을 갖지도 않는다. 용기는 환상이나 노스탤지어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 아니다. 용기는 타락(墮落)의 정 반대에 위치한다. 타락은 거짓 자유이다. 진보처럼 보이는 후퇴이다. 실제로는 방패밖에 되지 못하는 공격이다. 타락은 위장(僞裝)이다; 용기는 진실함이다. 용기는 자신의 이미지를 갖지 않는다. 용기는 개척한다. 용기에게는 따라가는 길이 없다. 오로지 용기가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길이 생겨날 뿐이다.



    에필로그

    Aesthethics의 7가지 논지(論旨)
    1. 블랙 메탈 반문화의 자기극복과 Aesthethics의 탄생을 대표한다.
    2. Aesthethics는 희극과 비극에 이은 예술의 3번째 양식(樣式)이 될 수 있다. 지나치게 감상적이지도, 아이러니하지도 않으며, 형언할 수 없는 진실이나 너무-뻔한-것들을 고려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중립적인 예술이며, 환희, 건강, 공명, 깨어남, 변형, 그리고 용기를 만들어낸다.
    3. Aesthethics는 미학적이며(aesthetic), 금욕적이고(ascetic), 윤리적이다(ethical).
    4. 고대인들은 진(眞), 선(善), 미(美)를 밝혀냈었다. 온갖 소란이 잠잠해진 후, 그리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작업이 끝난 후, 그리고 고급 문화, 대중 문화와 반문화를 가르는 경계가 지워진 후에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하나의, 빛나는 문화, 진(眞)이자 선(善)이면서 미(美)인 것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5. 정보 문화의 시대는 최상위의 구조에서 바닥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문화는 강압적인 힘 따위는 이미 오래 전에 벗어버렸고, 오늘날에는 미증유(未曾有)의 경제적 영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 영향력은 문화의 정신적인 힘을, 인간의 정신과 마음에 영향을 주는 힘을 강화시키고 있다. 이제 남아있는 문제는 이 힘이 어떤 기능을 가져야만 하는지이다.
    6. Varg Vikernes(역주: 노르웨이 메탈 프로젝트 Burzum의 리더)의 Euronymous(역주: Øystein "Euronymous" Aarseth. 노르웨이 블랙 메탈 밴드 Mayhem의 멤버로, Varg Vikernes에게 살해당했다) 살해 사건은 블랙 메탈 전통의 기반이 되는 제스처로 여겨져 왔었다. 하지만 사실 이 사건은 단순한 설화에 불과한 것이며, 진정으로 블랙 메탈의 기반이 된 사건을 배제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건은, 악명은 덜할지라도, 바로 Dead의 자살이었다. Kurt Cobain의 "나는 반문화를 배반했다"라는 유서와 Dead의 "나는 반문화를 위해 스스로를 배반한다"라는 유서를 비교해 보라. Dead의 죽음은 비밀 속에서 블랙 메탈의 탄생을 선언하였으며 반문화의 죽음 또한 선언하였다. Dead의 목소리의 부재가 앨범 [De Mysteriis Dom Sathanas]를 영원히 따라다니는 것 처럼, 최근 Attila Csihar가 Mayhem으로 복귀한 것은 우리가 Dead의 자살이 불러일으켜 왔었던 영향을 탐구해 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7. Aesthethics는 아우라의 부활과 의미를 갖고자 하는 행위의 의미가 갖는 힘의 긍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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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Ark Work] :: https://liturgy.bandcamp.com/album/the-ark-work

     

    2016/04/14 1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