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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and Times of Laddio Bolocko[...]/[Laddio Bolocko] 2023. 3. 24. 04:36
http://web.archive.org/web/20050310112917/www.noreasterzine.com/issuefour/interviews/blakeflemming.html
Interview by Larry Do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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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er2BJ5L8o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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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easterzine> 어떻게 Laddio Bolocko를 시작하게 되었는가?
Blake Flemming> 사실 Laddio Bolocko는 이미 시작해 있었다. Ben, Drew와 함께 3인조 밴드로 이미 결성이 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Zeni Geva 투어 전까지 세인트루이스에서 단 한 번의 공연만 했던 밴드였었다. 우리는 이제 막 서로가 듣고 있는 음악에 기반하여 밴드의 음향을 만들어가던 시기였는데, 당시에는 Dazzling Killmen의 음악을 많이 참고하고 있었다. Ben과 Drew가 Dazzling Killmen을 정말 좋아하고 있었고, 때마침 내가 Dazzling Killmen 멤버이기도 했으니. 해서, 처음에는 Dazzling Killmen의 영향력이 정말 컸는데, 뉴욕으로 이사를 온 후 부터는 어떻게 우리 밴드만의 음악을 점점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이 때가 바로 크라우트록 열풍이 불기 직전이었는데, 모두들 크라우트록을 연주하고 듣기 직전에 우리는 스스로 크라우트록에 빠져들고 있었다. Can과 Faust로부터 정말 큰 영향을 받았다. Can의 반복적이면서도 역동적인 그 리듬. 우리는 크라우트록이 얼마나 시대를 앞선 음악이었는지를 깨달았고, Laddio Bolocko의 음악에 그런 크라우트 록의 요소를 많이 불어넣었다. 드럼&베이스와 테크노 유행이 일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그런 크라우트록적인 음악이 전자 음향으로 연주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록 음악 없이 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제 더 이상 진짜 섹스는 없고, 완전히 거세된, 의학적으로 완전히 깨끗한 음악이 되었으며, 우리는 그 음악들 사이에 우리가 좋아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전자 음악을 많이 듣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주변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기에 장르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거세된 음악의 영향을 흡수한 후, 거기에 록 밴드스러운 부분을 더한다면, 뭔가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거기에 더해 좀 더 폭력적인 음향을 넣게 되었다. 앨범에 녹음된 버전은 상당히 통제된 환경에서 만들어진 곡들이라 조금 알기 어려운 편인데, 공연에서는 좀 더... 뭐랄까... 이교도의 축제 또는 의식 같은 느낌이었다.
Noreasterzine> 당신들의 공연을 직접 보았을 때, 정말 대단했었다.
Blake Flemming> 고맙다... 나는 Laddio Bolocko 활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아직까지도, 신기하게도 몇몇 사람들이 Laddio Bolocko에 대한 질문을 적어 이메일을 보내오곤 한다. 시애틀에 사는 한 남자는 Laddio Bolocko의 디스코그라피 전체의 재발매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밴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이 남자 말고도, 전 세계에서 아직 남아있는 CD를 갖고 있는지, 혹시 어떻게 구할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 이메일을 가끔씩 받고 있다. 그렇다... 사실 정말 멋진 기분이다.
Noreasterzine> Laddio Bolocko의 음악은 굉장히 독특하다. 다른 음악들로부터 영향도 받았겠지만, 작곡 과정에 있어 당신들만의 특별한 방법이 있었는가, 아니면 좀 더 직관에 의존한 방식이었나?
Blake Flemming> 거의 직관과 영감에 의존했었다. 대부분이 완전히 즉흥적이었던 합주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렇게 녹음한 즉흥연주를 다시 들어보면서, 우리는 괜찮아 보이는 아이디어를 잡아 그 아이디어에 매달려 연주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좋은 음악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즉흥연주에도 특정한 기술이나 연주법이 엄청나게 많이 존재하지만, 록 음악 스타일로 즉흥연주를 하다 보면, 그저 한 모티프에서 다른 모티프로 뛰어다니기만 하다 보면 쉽게 지루해지게 된다. 특히 리듬 부분이 그런데, 우리는 리듬에 아주 큰 비중을 두던 밴드였고, 연주를 하다가 괜찮아 보이는 리듬 패턴이 나오면 그 패턴을 계속 반복해 나갔고, 그러다 보면 머릿속에 이 리듬 파트에 걸맞는 모티프가 떠오른다. 그렇게 언제나 리듬 파트 위에서 이것저것 시도를 해 볼 수 있게 된다 - 현재의 영역을 벗어나 돌아다니지만 언제든지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곡을 "a"파트/"b"파트 등으로 작곡해 나갔고, 어떻게 "a"파트에 도달했는지, "b"파트를 만들었는지 등은 파트마다 아주 달랐다. 곡이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언제나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습실에 있는 모두가 자유롭게 뻗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뻗어나갔고 같은 방향으로 되돌아왔다. 물론 이런 경우는 가장 이상적이었던 경우로, 언제나 이런 식으로 좋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밴드의 말기 무렵, 시기상으로는 작년에, 우리는 우리가 하는 연주를 상당하 잘 조절해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우리들만의 작곡/즉흥연주용 언어와 의사소통 방식을 개발할 수 있었다. 이런 부분이야말로 밴드 활동의 가장 특별한 점 중 하나일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멤버들만의 의사소통 방식이 발전되는 것이다, 단순히 같이 연주를 하는 행위로부터... 다른 멤버의 연주를 듣는 과정에서, 직관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Noreasterzine> 당신이 생각하기에, 그런 분위기가 녹음으로까지 잘 전달되었다고 보는가?
Blake Flemming> 흠... 그게 제일 안타까운 부분이다. 우리의 마지막 앨범이야말로 밴드의 음악을 앨범으로 잘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던 앨범이었다. 왜냐 하면, 우리는 그 전까지 언제나 녹음실과 공연장을 전혀 다른 곳으로 생각해 왔었기 때문이었다. 공연에서는 언제나 관객들을 완전히 날려버리고 싶었고, 또 관객들이 그런 음악을 기대하면서 앨범을 사기를 바랬다. 하지만 앨범을 구매한 관객들이 집에 돌아가 앨범을 직접 들어 본다면, 앨범에 담긴 음악은 공연과는 완전히 다른 음악일 것이고, 그래서 관객들이 다시 한 번, 어쩌면 더 큰 충격을 받고, 가능하다면 앨범을 만든 밴드와 공연을 한 밴드가 아예 다른 밴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할 정도가 되기까지를 바랬다. 공연과 앨범 둘 다 동등하게 좋지만, 서로가 완전히 다른 음악이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같은 밴드에서 나온 음악이 되도록. 많은 밴드들이 공연을 그대로 재현하는 앨범을 만들기를 바란다. 우리는 앨범으로 녹음 된 곡들 자체를 공연에서 거의 연주하지 않았다. 우리는 몇몇 곡들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전혀 다른 해석으로 연주하곤 했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청자를 가장 좋은 방식으로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었다.
Noreasterzine> [Strange Warmings of Laddio Bolocko] 앨범은 브루클린에서 살던 시절에 만든 앨범인가?
Blake Flemming> 맞다.
Noreasterzine> 그 시절에는 녹음하는 장소에서 실제로 살기도 했었나?
Blake Flemming> 정확히 말하자면 밴드가 진지하게 활동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우리는 Dumbo에 연습장소를 막 구한 참이었다. 그 곳은 정말로, 진짜로 멋진 지하실이었다. 거기에는 싱크대와 화장실이 있었는데 그 무렵의 우리에게는 그 정도도 꽤나 고급스러운 옵션이었다. 멤버 전부가 그냥 거기로 전부 이사를 와버렸었다. 집세는 한달에 총 $450 이었으며 4명이서 분담했다. 우리는 '이야 쩐다! 마침내 뉴욕에 왔는데 집세를 대려고 열심히 일할 필요도 없네. 하루종일 연주할 수 있겠다!' 같은 생각을 했었고, 정말로 그렇게 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97년의 여름을 온통 그렇게 보냈다. 우리는 그냥 매일같이 하루종일 합주를 했으며 [Strange Warmings of Laddio Bolocko] 앨범을 만들었다.
우리는 상당히 구린 레코딩 장비들을 가지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었다. [Strange Warmings of Laddio Bolocko] 앨범이 심히 뒤틀리고 시끄러운 것은, 당시 가지고 있던 쓰레기같은 장비들과 연주들로 그나마 좋은 소리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딴 방식으로 하는 것 뿐이기 때문이었다 (웃음). 우리는 '다 좆까고 그냥 전부를 날려버리자' 같은 식으로 했었는데, 평범한 방식으로 하면 우리 장비로는 곡들이 힘없이 축 처지게 되어버렸기 때문이었고, 돈이 없어서 연습실의 분위기를 제대로 포착할 수 있는 비싼 마이크를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들을 한 데 몰아넣고는 극단으로 밀어붙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했었던 것이 잘한 일이었다. 필요에 의해 그런 식으로 했던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의도적인 방식이었다. [Strange Warmings of Laddio Bolocko] 앨범의 멋진 특징이 바로 그 점인 것 같다. 우리의 모든 앨범은 우리들 스스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는 좆같은 홈 스테레오로 모든걸 진행했었다. 우리는 스테레오 스피커로 믹싱을 했다. 우리가 가졌던 마이크들 중 가장 비쌌던 것은 $100 짜리 Shure Condenser 마이크였다. 우리는 그 당시에 레코딩 과정에 대해서 이제 막 배워가고 있었다.
Noreasterzine> 그렇게 해서 괜찮은 음악을 건졌다.
Blake Flemming> 모든 장비를 직접 가지고 있는 것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몇 시간이고 죽치고 앉아 이것저것 조금씩 조절해 가면서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끈질기에 시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는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Dazzling Killmen 시절에는 모든 프로듀싱/마스터링을 Steve Albini와 같이 진행했고, Steve Albini의 기여 중 몇몇은 마음에 들었지만 다른 몇몇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었다. Laddio Bolocko 작업에 있어, 우리는 스튜디오 사용료로 들어갈 몇 천 달러를 그냥 장비에 투자한 후 우리 스스로 녹음을 진행해 앨범을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Noreasterzine> 그거 굉장히 Can스러운 방식인 것 같다.
Blake Flemming> 맞다, 정확하다.
Noreasterzine> Dumbo에서 살 때, 뉴욕 공연을 자주 했는가?
Blake Flemming>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그 부분이 밴드의 끝을 불러 온 원인들 중 하나였었다. Laddio Bolocko 활동을 끝내기 직전까지도 우리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밴드였었다. 해체하기 6~8개월 전이 되어서야 조금씩 알려져서 뉴욕에서 어느 정도 관객을 모아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었다.
Noreasterzine> 뉴욕에서 98~99년에 살았었는데, Laddio Bolocko 공연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Blake Flemming> 97년 가을, 우리는 뉴욕시에서 벗어나 Catskill Mountains로 거처를 옮겼다. 그 곳에는 아주 오래된 스키 리조트 건물이 있었는데, 말 그대로 멋진 맨션이었는데도 뉴욕시에서 지불하던 월세에서 $200만 더 지불하면 되는 가격이었다. 그 건물에는 나무 바닥으로 된 엄청나게 큰 연회장도 있었고, 엄청나게 큰 화롯가도 있었고, 엄청나게 화려한 샹들리에도 있었다. 2층에는 6개의 침실이 있었으며, 2개의 거대한 거실과 1개의 거대한 부엌도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엄청난 건물에 살게 되었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완벽하게 아름다우면서도 고요한 장소였고, 우리는 그 장소에서 두 번째 앨범 [As In Real Time]을 녹음했다. 이 두 번째 앨범에는 당시의 우리가 느낀 심경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사를 하면서 변한 주변의 분위기라던가, 우리 자신의 마음이라던가.
[Strange Warmings of Laddio Bolocko] 또한 제작 당시 우리의 경험을 그대로 담은 앨범이다. 시궁쥐, 도시의 소음, 길 바로 건너에 있는 쓰레기장과 싸우던 시절의 경험. Dumbo가 바로 그런 장소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나 나올 법한 풍경의 환경으로 이사를 갔을 때, 모든 것이 완전히 변해버린 느낌이었다. 모든 색채들, 아무것도 없는 주변 환경, 엄청나게 넓은 공간. 그 동안 상상도 못한 공간이 눈 앞에 있었고 그 공간이 우리의 것이었다. 이런 변화로 인해 음악의 방향성이 아예 바뀌어 버렸던 것이었다. 좀 더 강력했고, 좀 더 신비로웠으며, 정말로 황홀했다.
Noreasterzine> 그 마을의 이름은 무엇이었나?
Blake Flemming> Elka Park라는 동네였다. 두 종류의 종교 그룹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마을이었다. 마을에는 대략 200명의 거주민이 있었고, 그 중 150명이 종교 그룹 중 하나에 소속되어 있었으니. 정말로 산골에 위치한 마을이었고, 집들은 드문드문 떨어져 있었다. 우리의 거처와 가장 가까운 집도 풋볼 경기장 하나만큼의 숲으로 떨어져 있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이교도적인 미친 짓거리를 하곤 했었다. 한밤중에 마당을 다 벗고 뛰어다니면서 폭죽을 쏴 대고, 드럼을 쳐 대고. 말 그대로 그렇게 해도 괜찮은 환경이어서 그랬다. [파리대왕]이나 [샤이닝]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아름다움과 동시에 어떤 종류의 어두움이 함께 하는.
Noreasterzine> 경제적으로는 어떻게 버틸 수 있었나?
Blake Flemming> 그거다, 바로 그 부분에서 좆됐었다. 경제적 부분이야말로 밴드를 끝장낸 원인들 중 하나였다. 가끔씩 미래가 안 보일 정도였으니. 당시 우리는 밴드에 너무 과하게 몰입하고 있었고, "좆까라 그래... 씨발 뉴욕 좆나 싫어. 떠나자"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2주 후, Elka Park의 그 집을 발견했고 발견하자마자 바로 떠났다. 정말로 빠르게, 극단적일 정도로 빠르게 이사했었다. 당시에는 우리 모두 아무것에도 매여있지 않아 몸만 떠나면 되었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음악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삶의 방식 측면에서도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고 있었다. Dumbo의 지하실에서 Catskill 산맥 북쪽의 다 쓰러져가는 스키 리조트 건물로, 대단한 여행이었다.
Noreasterzine> 미국에서는 얼마나 자주 투어를 돌았는가?
Blake Flemming> 미국 전역 투어는 단 한번 돌았는데, 내가 직접 예약을 진행했고 대략 2달동안 진행한 투어였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으로 진행한 투어이기도 했었다.
Noreasterzine> 그 투어는 어땠는가?
Blake Flemming> 상당히 괜찮았었다. 당시에는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돈도 제법 벌 수 있었다. 내가 Dazzling Killmen 및 Zeni Geva 의 멤버였다는 사실이 공연장 예약의 성공 여부에 크게 기여했었다. 공연을 실제로 진행한 후에는 공연을 한번 본 사람들 덕분인지 대다수의 공연장에서 다시 오라는 초청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공연장들을 엉망진창인 채로 전전했으며, 좆같은 파파존스 피자 같은 거나 처먹고 다녔다. 몇몇 날들은 밴에서 자야만 하기도 했다.
Noreasterzine> 유럽 투어를 꽤 돌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쩌다가 그랬던 것인가? 해외 활동에 주력하게 된 원인이 있었는가?
Blake Flemming> 흠, 처음 유럽 쪽에서 연락이 온 것은 미국 투어를 돌던 중이었다. Laddio Bolocko CD를 유럽 쪽에 보냈었는데, 그 쪽 에이전트가 CD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진행될 한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하도록 일정을 잡았었는데, 그 페스티벌이 취소되는 바람에 그냥 Laddio Bolocko 투어를 돌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 경험이 우리에게 정말 큰 영향을 끼쳤다. 첫 유럽 투어는 2달간 진행되었고 13개의 나라를 돌아다녔다. 돈도 벌 수 있었고, 정말 많은 관객이 공연을 보러 왔었으며, 상당히 괜찮은 식사도 할 수 있었다. 마음 놓고 지낼 수 있는 숙소가 주어졌으며 좋은 음식, 와인, 해쉬 등등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공연 따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객들이 와 주기도 했었고. 관객들은 모든 멤버들을 그냥 길바닥에 지나다니는 한 녀석 정도로 취급하지 않고 정말로 존중해 주었다. 배척당하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우리가 뉴욕 출신이라는 것 또한 도움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유럽 사람들은 뉴욕에 대한 어떤 환상을 갖고 있어서, 우리가 뉴욕에서 왔다는 사실이 여러가지 측면에서 상당한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었다. 우리는 갑자기 무슨 록 스타 스러운 대접을 받았으며, "와우, 지금 이런 게 되잖아? 어쩌면 밴드 활동만 해서도 먹고 살 수 있겠는데?"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첫 유럽 투어 이후, 유럽에서의 활동에 좀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미국 투어 시 겪을 수 있는 여러가지 좆같은 일들을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유럽은 전반적으로 훨씬 더 체계가 잡혀 있다. 대부분의 클럽이 공연자용 숙소를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숙소가 부엌 포함이다. 그러니 식사의 대부분을 정말 괜찮은 집 요리로 해결할 수 있다 - 로스트 치킨, 매쉬 포테이토. 물론 빵과 치즈도 언제나 아주 훌륭하다. 좀 더 문명 사회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거기에 더해, 관객들 또한 우리의 연주를 좀 더 신경써서 듣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국에서의 공연보다 관객들이 음악을 훨씬 더 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미국에서도 괜찮은 공연을 몇 번 했었지만, 상당수의 공연이 뭐랄까, "좋아, 좋아, 좋아." 그리고는 조명을 다 켜버리고는, "전부 나가! 꺼지라고!" 같은 식으로 끝내버리곤 했었다. 연주를 마치고 나서 듣는 소리라고는 "좋아 전부 당장 여기서 꺼져!" 같은 외침 뿐이었다. 맥주 한 잔도 마시지 못했고,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하고도 한 마디의 인사조차도 나누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전혀 이렇지 않았다. 두 번째 투어도 대략 2달간 진행했었고, 정말 멋진 투어였다. 유럽 전역, 전부 아직까지도 가장 공연하고 싶은 장소이다.
Noreasterzine>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Laddio Bolocko 음악은 뭐랄까, 미국적이지 않은 느낌으로 들린다.
Blake Flemming> 그렇다, 나 또한 어째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첫 번째 유럽 투어에서, 우리가 미국 밴드인지 잘 모르는 관객들 대부분이 우리를 절대로 미국 밴드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도 정확히 왜 그렇게들 생각했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전통적인 록 앤 롤 느낌이 아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Noreasterzine> 나에게는 뭐랄까 동유럽,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느낌으로 들린다.
Blake Flemming> 흠, 동쪽으로는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까지는 공연을 가 봤었다. 슬로베니아에서도 공연을 해 본 적이 있었는데, 두 곳 모두 유럽에서 가장 좋았던 공연 장소들에 속한다. 관객들은 정말 멋진 사람들이었다. 우리 밴드를 진심으로 존중해 주었고, 우리 또한 그들을 진심으로 존중했다.
Noreasterzine> Trans Am과의 투어는 어쩌다가 계획된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Blake Flemming> 기본적으로는 Trans Am이 공연을 하려던 클럽에서 Laddio Bolocko 음악이 울려퍼지는 것을 그들이 듣게 되었고, 그 것을 계기로 우리와 엮이게 된 것이었다. Trans Am 멤버들은 우리 음악을 정말로 마음에 들어했고, 이 음악을 만든 밴드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려 했고, 마침 그 클럽이 가지고 있던 Laddio Bolocko CD 뒷면에는 밴드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이 때 우리는 그 Catskill Mountains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Trans Am 멤버로부터 연락이 와서 우리 CD를 들어봤다고 했다. CD 끝내줬다고, 그리고, 혹시라도 언젠가 자신들과 투어를 함께 돌 의향이 있는지 넌지시 물어보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물론, 당연히 좋다"고 대답했었고. 우리는 Trans Am이라는 밴드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었고, 관객 동원력이 괜찮은 밴드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Trans Am 음악을 제대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Trans Am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연락을 받은 후 Trans Am이라는 밴드가 상당히 멋진 밴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명백히 우리들보다 관객을 더 많이 끌어모을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우리는 "좋아 해 보자고" 같은 느낌이었고 상당히 기대에 차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실제 투어는 대략 1년 후에나 이루어지게 되었다. 우리는 1주일간의 짧은 투어를 Trans Am, Pan Sonic과 함께 진행했는데 진행도 매끄러웠고 정말 재미있는 투어였다. 그들은 멋진 사람들이었고 우리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리하여 2000년 가을 투어도 함께 하게 되었다.
Noreasterzine> Laddio Bolocko가 레이블 수준의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정말 안타깝다. 특정 레이블로부터의 지원을 바라고 있었는가?
Blake Flemming> 흠... [오랜 침묵] 우리는 그런 부분에서는 뭐랄까 잘 못 했었다. 우리는 사회적인 활동에 아주 약했으며 비즈니스적으로도 뭔가를 제대로 진행할 만한 성격이 아닌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것을 정말로 못 했었다. Laddio Bolocko의 최대 단점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밴드의 비즈니스 측면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 일들을 정말로 제대로 처리한 적이 없었다. 나는 우리가 녹음한 음원들 중 단 하나라도, 단 한번이라도 어떤 레이블에 보내 본 적이 있었기는 했는지 모르겠다. 내 기억에 따르면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우리는 몇몇 측면에서 순진해 빠진 사람들이었으며, 그러다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다음 번 고지서를 처리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데에 신경이 쓰여 음악에 집중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Noreasterzine> 그런 부분이 해체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Trans Am과의 투어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지?
Blake Flemming> 투어는 밴드 해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 투어를 돌기 전부터 이미 이것저것 삐걱대기 시작했다. 대략 1년간 쌓이다가 해체를 결심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이런저런 문제가 쌓이기 시작했고... [긴 침묵] 결국은... 내가 이 밴드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허설 직후 다른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우리는 당시 새 앨범이 될 곡들을 다 같이 직접 녹음하고 있었다. 나는 각 멤버들에게 말했다... 나는 그만 두어야 겠다고. 각자에게 이유를,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설명했다. 이 때 나는 진심을 솔직하게, 직설적으로 전달했다. 나는 "그냥 이제는 더 못 하겠어." 라고 말했다. 더 이상 재미있지 않았고, 더 이상 생산적이지도 않았다. 리허설을 위해 모든 멤버들을 불러모으는 것 조차도 마치 이빨을 뽑는 것 처럼 고통스러웠다. 이상한 일이었고, 나는 점점 더 진짜로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당시 나는 정말로 몸이 아팠다. Laddio Bolocko는 내 인생 처음으로 이렇게 긴 시간을, 이렇게 많은 노력을 쏟아 부은 밴드였었고 이는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때 Laddio Bolocko는 완전히 죽어가고 있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는 진심으로 이 밴드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밴드야말로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이라고 생각했었고, 이 밴드는 지금 너무 나쁜 상황에 있었다. 음악의 멋진 부분이 밴드의 세세한 잡음들에 가려지고 있었고, 이 때야말로 밴드를 끝낼 시점이었다. 이게 작년(역주: 2000년) 1월 무렵이었다.
Noreasterzine> 해체 직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Blake Flemming> Trans Am과의 투어 중, 우리는 LA에서 두 번의 공연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 2명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이 말하길 자신들은 At The Drive-In이라는 밴드의 멤버라고 했다. At The Drive-In은 1년인가 2년 전쯤 대단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Grand Royal 레이블에서 앨범도 발매했었다. 어쩌구, 저쩌구, 어쩌구 저쩌구. 리드 기타리스트 Omar와 보컬 Cedric이 Laddio Bolocko의 공연 2개를 전부 보았고, 우리를 숙소로 초대했다. 그들과는 제법 죽이 잘 맞았고, 멋진 사람들인 것 같았다. 멤버들 모두가 At The Drive-In이라는 밴드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없었지만, Omar와 Cedric이 들려주는 At The Drive-In의 이야기는 정말 대단했다. 투어가 끝난 후, 뉴욕으로 돌아 왔을 때, 사방에서 At The Drive-In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와, 저 사람들하고 방금 전만 해도 같이 있었는데 말이지."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3월, Omar가 내게 연락해서 Cedric과 함께 At The Drive-In을 탈퇴하고 새 밴드를 시작할 생각인데, 혹시 참여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어 왔다. 나는 "당연하지, 씨발, 당신들 음반 백만 장씩 팔아치우는 사람들이잖아. 당연히 해 봐야지."라고 대답했었다. 그들은 비록 메이저 레이블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었지만, 내가 존중할 만한 그 어떤 음악적 진실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나는 음악적으로 우리가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지난 해 나는 5개월동안 LA에서 살았다. Omar 및 Cedric과 새 밴드를 시작했으며, 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싱글을 만들고, 이 싱글은 Grand Royal 레이블에서 제작하고 Virgin 레이블을 통해 유통될 예정이었다. 그 때만 해도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우와! 드디어 꿈을 이뤘어. 어쩌다 보니 이제는 좆같은 일들 안 해도 되겠군. 진짜 드럼만 연주하고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잖아. 새 심벌즈도 샀고. 나만을 위한 드럼 세트를 만들 수 있겠다고." 그리고 5개월인가 6개월 반인가 지나서, 다 끝나버렸다.
Noreasterzine> 어쩌다가 끝나게 되었는지, 개인적인 충돌이었는지?
Blake Flemming> 흠, 뭐랄까, 그 때도 나는 LA에서 새 밴드의 모든 멤버들과 같이 살고 있었다. 누군가와 처음 같이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 정말 멋진데"라고 생각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알고 싶지 않았던 모습들을 알게 되고, 이런 모습들 때문에 좋았던 첫인상이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점점 서로에 대해 신경질적이게 되었다. 결국 나는 더 이상 생활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고 떠나게 되었다. 이 결정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드럼 연주만 해서도 먹고 살 수 있는 기회였기에. 밴드 활동만 해서 먹고 산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다수 뮤지션들의 꿈일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은 그냥 나한테 안 일어나게 되어 버렸다. 그저 밴드 활동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뉴욕으로 돌아와 음향 엔지니어링이나 녹음 관련 일을 엄청나게 해 댔다. LA로 떠나기 전 잠깐 일했던 스튜디오로 돌아가 일을 다시 하게 되었다. 이제는 새로운 밴드를 시작했으며, 물론 그 밴드에 시간을 대부분 투자하고 있고, 남는 시간에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음향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이 일을 하면서 돈도 점점 더 괜찮게 벌고 있다. 이 모든 일들, 전부 Laddio Bolocko 시절과 같은 일이다. 그저 홈 스테레오 시스템으로 하던 일들을 진짜 스튜디오에서, 2인치 테잎을 가지고 하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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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3V5M38Cq_KM
2020/11/25 04:17'[...] > [Laddio Bolocko]'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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