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슬레파코프(Антон Слепаков)> "ВВ"(Воплі Відоплясова)와 함께 공연을 한다고 하는, 잘 모르겠는 밴드를 보러 갈 예정이었다. 그 때에는 TV에서 흥미로운 프로그램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프로그램 A"였다. "프로그램 A"에서 아르테미 트로이츠키(Артемий Троицкий)가 말하길 미국 밴드가 소련에 방문해서 공연을 할 거라고,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빌뉴스 그리고 키이우에서 공연을 할 거라고 말하며 "ВВ"의 연주 영상을 보여주었다. 흠, "ВВ"는 이미 아는 밴드였다. 그 공연을 보고 난 후 나는 5일간이나 말을 할 수 없는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그 정도로 불가해한 음악을 난생 처음으로 들어 본 것이었다. 처음으로,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서 온 음악가들의 음악을 접했던 것이다. 그들은 나무막대기로 기타를 연주했으며, 기다란 금속 막대기를 삽입하기도 했고, 매 곡마다 기타를 바꾸었는데, 가지고 있는 기타도 정말 많았으며 딱히 악기를 소중히 다루는 것도 없이 마구 던져댔었다. '여성 베이시스트' 또한 살면서 처음으로 본 광경이었다. 이 모든 것들과 그들의 스타일은 소련의 밴드들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였다.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어렸던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소화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공연에서 상당한 자극을 받았으며 그 이후로 모든 것들을 그 때의 공연에 연관지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Sonic Youth는 이렇게 했었어." 나는 그 공연보다 약하게 살 수는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가 검열된 버전의 [Daydream Nation] LP가 소련에 유통되었고, 나는 Sonic Youth의 음악을 더 잘 즐길 수 있게 되었다.
Я И ДРУГ МОЙ ГРУЗОВИК: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베이시스트. Я и Друг Мой Грузовик의 멤버 로스티슬라프(Ростислав Чабан)가 베이스 연주의 비밀에 대해 말해주었다.
마르크 안토니(Марк Антоний)> Я и Друг Мой Грузовик는 세계에 몇 안 되는 '기타리스트가 없는 밴드'들 중 하나일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Я и Друг Мой Грузовик의 음악은 들어보았지만 공연은 가 보지 못한 사람들이, 항상 베이시스트 로스티슬라프 차반에게 앨범에 정말로 기타 연주가 안 들어가 있는지, 특별한 장비를 사용해서 악기 2개, 때로는 3개의 소리를 동시에 내려고 하는 것인지, 베이스 기타로는 어떤 특별한 기타를 사용하는지, 그리고 어째서 기타리스트를 내쫓아버렸는지 등등을 물어보는 게 아닐까?
"그냥 개인적으로 기타리스트 없이 연주하는 걸 좋아한다." - 로스티슬라프의 말이었다 - "기타리스트가 있는 밴드에서 연주를 하게 되면 항상 이런 소리를 들었다: 너무 많이 연주하지 마, 너는 베이시스트잖아, 그냥 반주를 하라고."
마르크 안토니> 그래서 기타리스트가 없는 것인지?
"Я и Друг Мой Грузовик이 공식적으로 시작하기 대략 반년 전, 나와 아는 사이였던 베이시스트와 드러머가 '기타 없는 밴드에서 노래 해 볼래'라는 제안을 해 왔었다." - 보컬 안톤이 대답했다 - "그 이후로, 이 둘은 그렇게까지 끈질기지도 않았고 뭔가 잘 돌아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무렵 나는 이미 어떤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밴드 이름도 정해놓고 있었다 - 처음에는 영어로 'My Friend Truck And I'라는 이름을 생각했었는데, 하다 보니 이름을 러시아어 버전으로 바꾸게 되었고, 그렇게 이어졌던 거다. 그러니 아이디어 자체는 이미 돌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크 안토니> 로스티슬라프, 지금 쓰고 있는 베이스 기타에 대해 말해줄 수 있을지.
"완전 평범한 베이스다. 브랜드 제품도 아니고, 그냥 아나톨리(Анатолий)라는 이름의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Дніпропетровськ) 출신 장인이 만든 것이다. 나는 현재 7대의 악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 6개가 아나톨리가 만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지금까지 기타 2대를 도난당하기도 했다."
마르크 안토니> 최고의 기타는 역시 장인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좋은 소리가 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기타일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 어떤 악기도 좋은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심지어 좆같은 우랄(Урал, 소련제 기타)도 그럴 수 있다." "심지어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 안톤이 끼어들었다 - "녹음할 때도 제법 괜찮게 사용할 수 있을 정도다. Sonic Youth를 예로 들자면, 그들은 싸구려 기타를 사용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밴드다, 스크류드라이버로 연주하면서..." "각각의 악기는 저마다의 개성과 소리를 가지고 있다." - 로스티슬라프가 마무리지었다.
마르크 안토니> 싸구려 악기, 예를 들어 대략 $300 정도의 베이스로도 당신 같은 연주를 하는 것이 가능할지?
"가능하다, 하지만 소리가 같지는 않을 것이다. 내 베이스는 나무로 된 재질에다가 거기에 잘 어울리는 수제작 픽업이 달린 베이스인데 - 드니프로제르진스크(Дніпродзержинськ)에서 개당 $15 정도에 샀었다." "이 기타에는 이상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 안톤이 말했다 - "НТВ(역주: NTV, 러시아 방송국)에서 [Антропология]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그 장인 아나톨리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했었다. 그리고 이 방송이 나간 후 아나톨리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들을 겪게 되었는데, 몇몇 사람들이 아나톨리에게 연락해서는 '이봐, 방송에서 광고 한 거 봤어. 이제 돈도 많겠는데, 우리한테 좀 주지'라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NME]같은 진보적인 잡지들을 읽지 않고 그냥 앉아서 TV만 보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마르크 안토니> 그 베이스 기타에 어떤 특별한 기능이 달려 있는지?
"흠, 특별한 점이라..." - 로스티슬라프는 코를 훌쩍였고, 오랫동안 머리를 긁적였다 - "여기 보면, 현 받침대가 부숴져 있는데, 그래서 쇳조각 하나로 지지대를 만들어 두었다... 조율용 손잡이 중 하나는 아예 돌아가지 않는다. 나사 하나가 안쪽에 박혀서 망가졌는데, 도저히 빼낼 수가 없었다..."
마르크 안토니> 그렇다면, 결국 당신의 베이스는 굉장히 특별한 악기로 다른 악기들과는 전혀 다른 악기라는 말인가?
"하다 보니 뭔가 신기한 현상이 벌어졌는데: 그 누구도 이런 베이스를, 심지어 가장 훌륭한 베이시스트들도 이런 베이스를 연주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 안톤이 다시 대화에 참여했다 - "언젠가 어떤 베이시스트가 아나톨리 제작 베이스를 가지고 우리에게 온 적이 있었는데, 로스티슬라프가 그 베이스를 받아들고는 연주를 해 봤었다. 그 베이시스트는 말 그대로 완전 놀라서 입을 딱 벌렸었다: 아니, 이 베이스가 원래 이런 소리를 내는 악기였다고?"
마르크 안토니> 로스티슬라프, 그런 베이스 연주는 대체 어디에서 배웠던 것인가?
"선생 한 명에게 배웠었는데, 한 3개월 정도 배웠었다. 한 달에 ₽30이었다. 1989년이었나 그랬는데... 나한테는 엄청나게 큰 돈이었는데, 배우다 보니 깨닫게 된 것이 그 선생은 나를 좋은 음악가로 만들어주려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선생은 그냥 나에게서 ₽30을 받아가려고 했던 게 다였다. 그게 실제로는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당시의 나에게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이해였다. 그래서 나는 그 선생을 떠났다. 여담이지만 나에게 아나톨리를 소개해 주었던 사람이 바로 그 선생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 듣고, 연주하고... 한번은 집시 악단에서 연주하기도 했었는데, 북캅카스 지방의 산골짜기 마을에서 Песняры라는 밴드를 만나게 되었었다. 콜랴(Николай Неронский)라는 이름의, 콧수염을 기른 베이시스트가 있었는데, 그의 슬랩 연주는 환상적이었다. 당시의 나는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 어느 문을 박차고 들어가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영광의 문으로 가야 하는지, 망각의 문으로 가야 하는지... 콜랴는 내가 영광의 문을 열도록 도와주었다 - 나에게 몇 개의 베이스 연주법을 보여주었을 뿐이었지만, 그 후로는 모든 것이 제 갈길을 찾아 가게 되었던 것이다."
마르크 안토니> 음악적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는지?
"모르겠다... 휴가를 즐긴 후 바로 다음날 찾아오던가, 아니면 다리 위에서 타이어가 터져서 멈추게 된 베스 안에 앉아 있다가 아이디어를 얻던가..." "우리도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다." - 안톤이 로스티슬라프를 구해주기 위해 끼어들었다 -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는 뭐랄까, '제철소'의 분위기가 강하게 풍기는 곳인데도..." "일종의 규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선 내가 온갖 잡동사니 쓰레기들을 연주한다." - 로스티슬라프가 이어갔다 - "그리고 그 쓰레기더미에서 안톤이 몇 가지 말이 되는 아이디어들을 낚아 낸다. '그 부분 기억해봐!' 라고 외치곤 한다..." "로스티슬라프는 굉장히 풍성하고 다양한 의식의 흐름을 가지고 있는 친구다 - 굉장히 거대하지만 또 말도 안 될 정도로 부주의하고 경솔하기도 하다." - 안톤의 말이었다 - 블라디미르(Владимир Бусель, 밴드의 드러머)와 나는 좋은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고 잡아내기 위해 항상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입장이다. 로스티슬라프가 그 좋은 아이디어를 완전히 까먹어 버렸을 때 마다 우리는 이 녀석에게 싸구려 중국제 녹음기를 반드시 사 주겠다고 다시금 맹세하곤 한다. 예를 들어, "Рыбу"라는 곡은 - 밴드의 그 누구도 원래 처음 아이디어가 뭐였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완성된 곡보다는 훨씬 더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하는데, 로스티슬라프가 그냥 완전히 까먹어 버렸다. 그래서 처음부터 새롭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가사만 그대로 두고.
마르크 안토니> 하지만 그 덕에 밴드가 정체되는 일 없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도 아닐까.
"오늘 음향 점검에서," - 안톤이 이어나갔다 - "하나를 더 기억해 냈는데..." "...잊혀졌던 두 번째 연주를!" - 로스티슬라프가 웃었다. "...노래로 완성하고 싶어했었던 연주를. 공연장에서 음식을 먹고 있던 사람들이 꽤 놀랐었다 - 아마 '공연이 왜 벌써 시작한거지'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마르크 안토니> 밴드 내 악기 수가 적다는 것에 장점도 있는 것 같다 - 모든 사람에게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무엇을 연주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는 일이 줄어드는...
"그렇지는 않다, 거의 모든 밴드들에서 '주제'는 보컬과 어쿠스틱 기타로 들어오니까." - 안톤의 말이었다 - "보컬이 들어와서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며 말하는 거다: 좋아, 여기서 솔로를 연주해 줘..." "그리고 베이스 연주는 많이 하지 말아줘." - 로스티슬라프가 끼어들었다 - "너무 많이 연주하면 내 가사가 먹히잖아." "결국 그 '보컬'이 다른 모든 연주자들에게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를 지시하는 형태가 된다. 그러나 우리 밴드에서는, 모든 것이 협업으로 만들어진다. 음악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사도 그렇다. 그러니까 가사를 쓰는 것이 나이기는 하지만, 나는 내 친구들의 말과 구절에 항상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로스티슬라프와 블라디미르에게서."
마르크 안토니> 베이스 기타로 돌아가서. 대다수의 베이시스트들은 훌륭한 연주 기량을 갖고 있으며 리허설에서 그 어떤 연주도 선보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 Red Hot Chili Peppers의 Flea 같은 사람을 보면. 하지만 그 베이시스트들이 실제 밴드의 곡을 연주하는 것을 보면, 다들 놀라울 정도로 단조롭고 지루한 연주를 보여 준다. 어째서 그럴까?
"이는 다시 한 번, 많은 밴드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음악 전부를 만들어내고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조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 로스티슬라프의 대답이었다 - "그리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듣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르크 안토니> 공연에서 보면 당신과 블라디미르는 마치 굉장히 복잡한 점프 동작을 선보이는 곡예사를 바라보는 서커스 오케스트라 단원처럼 안톤을 바라본다. 이게 음악을 굉장히... 상호작용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항상 고민해 왔다." - 안톤의 말이었다 - "말로 설명하기 굉장히 힘들다. 어째서인지 그냥 알아서 그렇게 되는 것이..."
마르크 안토니> 로스티슬라프, 당신이 보여 주는 온갖 복잡하고 어려운 베이스 연주 기법은 스스로 고안해 낸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음악가에게서 빌려 온 것도 있는지?
"한번은 프랑스 랩 그룹에게 영감을 얻기도 했었다, 그들의 화음 진행이 좋았다..." - 로스티슬라프는 다시 한 번 머리를 긁적였다 - "나는 그 어떤 밴드의 그 어떤 앨범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지 못한다. 5~10분이면 나에겐 충분하다, 그 이후에는 바로 지루함을 느낀다. 어느 곳에나 딱 '감자 한 개'만 있다 - 붐-붐... 그리고 나는 이런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버린다: 여기에서 나라면 이렇게 다르게 연주했을 텐데, 여기에서도 나라면 다르게 했을 텐데..." "그리고 나는 로스티슬라프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베이시스트라고 생각한다," - 안톤이 갑작스럽게 말했다 - "정말로." "미안, 안톤, 나는 너에게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겠어," - 로스티슬라프가 말했다. "나도 알아." - 안톤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알렉산드르 고르바쵸프(Александр Горбачёв)> 이번 앨범 [Годы Геологов]는 이전 앨범들보다 더 추상적인 앨범으로 들린다. 이야기가 제대로 담겨 있는 곡이 나오기 전에 절반의 힌트와 절반의 음정만이 등장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안톤 슬레파코프(Антон Слепаков)> 내 생각에는 우연히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다. 정말로 - 앨범 수록곡들이 만들어졌을 때, 그 곡들 속에는 다른 여러 곳에서 가져 온 상징들이 가득했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И Друг Мой Грузовик…을 처음 시작했을 때 부터 모든 것이 다 그런 식이기는 했었다. 몇 개의 구절만이 있고,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은 채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내면의 어떤 변화를 겪었을 때에도, "Грузовики"(역주: Я и Друг Мой Грузовик, …И Друг Мой Грузовик, И Друг Мой Грузовик… 등 기본적인 밴드 프로젝트)와 "НеГрузовики"(역주: "Грузовики"가 아니라는 의미를 가진 사이드 프로젝트)를 어떻게 분리해야 할 지에 대한 생각들에서도... 결국, 우리는 이야기, 줄거리 등등을 НеГрузовики를 위한 것으로 남겨두기로 결정했고, 지금의 스타일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나 자신과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동시에 수록곡들 중 "Годы Геологов"나 "Паровозы"같은 곡들은 굉장히 옛날에 쓰여진 가사로 만든 곡이기도 했다 - 상당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는데, 어린 시절의 내가 써 두었던 가사들을 가지고 지금 곡을 만든 것이었으니. 대다수의 작가들은 그러한 '어린 시절의 작품'에 대해 굉장히 당혹스러워하며 숨기려고 노력한다거나, 지워버리려 한다거나, 잊어버리려 하지만.
알렉산드르 고르바쵸프> 그런 작업은 어떤 경험이었는지? 그 옛 가사들 중 현재의 당신과 일치하는 부분들도 있었는가?
안톤 슬레파코프> 일치했다, 일치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추상화하는 것이다. 내가 만든 가사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그냥 부르는 거다 - 그게 전부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커버 버전'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첫 앨범을 녹음했을 때가 기억나는데, 페스티벌에서 공연하기 위해 밴드를 만들어낸 시점 - 뭐, 이제는 이 밴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든 것이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다 알고 있겠지만 - 으로부터 3년 가량이 지났을 때 였는데. 당시에는 전반적으로 모든 것을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순식간에 해치웠었기 때문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Добролет' 스튜디오의 마이크와, 음향 엔지니어링의 구루와도 같았던 안드레이 알랴크린스키(Андрей Алякринский) 앞에 서 있을 때, 나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부끄러웠었다! 만약 내가 앞으로 계속해서 진지하게 음악을 할 것이라는 미래를 알았더라면, 그 때의 나는 훨씬 더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가사를 만들었을 것이다. "Колёса"나 "Черешни"가 향후 남기게 될 족적을 알았더라면, 더 깊게 생각했었을 것인데... (웃음) 이 곡들의 가사들과 같았다. 한 측면에서 보자면 - 서투르고 순진하며 애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 그래도 여전히 당신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곡들을, 배경 스토리를 모르고 듣는 많은 사람들이, 딱히 질문이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듣는다. 어떤 외부 요인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는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17~18년간 우리는 딱히 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여전히 똑같다.
...
알렉산드르 고르바쵸프> 이번 앨범은 밴드의 15주년을 기념하는 연도에 발매되는 앨범이다. 그리고, 내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도는 질문은 - 대체 어떻게 한 밴드를 15년동안이나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인가? 그러니까, 당신 세대의 밴드들은, Би-2나 Мумий Тролль 처럼 메인스트림에 올라 거대 밴드가 되거나 레이더망에서 그저 사라져버리는, 둘 중 하나의 운명으로 향했는데. 반면 당신들은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 - 게다가 그 두 가지 운명하고도 거리가 멀다.
안톤 슬레파코프> 이게 그 이유인 듯 싶다. 우리 음악은 메인스트림에 들어가기에는 좀 어려운 스타일의 음악이다, 메인스트림, 그 '사이클' 속에 끼어들기는 좀 어렵다. 그리고 아마 그러한 사실이 이 밴드를 구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동년배 밴드들이 겪었던 그 모든 난리통과 소란과 폭풍, 미친 것 같은 스케쥴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풍파를 겪지 않았다. 뭐, 모두 다 알듯이 음악가란 공연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이고, 매 공연마다 최선을 다 해서 긁어대야 하는 것이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 - 프로듀서가 나를 내일 해고한다면 어떻겠는지, 아니면 또 다른 사태가 일어나면 어떻겠는지 - 매일 그렇게 사는 거다. 우리는 그렇게까지 유명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러한 '영광'을 얻어 본 적도 없었으며, 라디오에서 계속해서 재생된 적도 없고, 길거리의 모든 개들마저 우리를 알아본 적도 없고, 거리에서 5미터 이상 끊김없이 걸어가지 못하는 정도의 상황에 처해 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점이 И Друг Мой Грузовик…라는 창조적 유닛을 구해준 것이 아닌가 싶다. 15년동안 음악을 하면서 항상 "좁은 영역에서 널리 알려지기"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 행복의 기억들, 환희의 추억들,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 듯한 경험들이 있었다... 어째서인지 우리는 모든 것들을 철학적으로 대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가 아직 지루해하지 않고 있다는 부분이다. 전반적으로 좋은 '트레이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충 말해서, '망쳐진' 상태가 아니라면.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 많이 봐 왔었다. 우리보다 더 성공적이었던 음악가들 옆에서 공연을 종종 해 오기도 했고. 솔직하게 말해서, 그 음악가들이 공연하는 걸 보는 건 사뭇 슬프기까지 했었다 - 그들에게는 공연이 일상이었던 것이다. 무대에 올라 그 누구도 이길 필요 없이, 그 누구에게도 무엇도 증명할 필요 없이. 그렇게 보자면 나는 우리가 그들보다 더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알렉산드르 고르바쵸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들 또한 그 '시스템'의 일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 적은 없었는지?
안톤 슬레파코프> 우리는 항상 우리가 어딘가 맞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해 왔었다. 웃기기도 하고 좀 순진해 빠지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시작부터 스스로에게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 맞선다고, 그 어떤 팝 음악에도 스스로를 팔아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거짓말이 아니다: 밴드를 막 시작했을 때, 첫 자작곡들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 나는 우리가 뭐랄까 '인디 팝'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게 우리의 '맨체스터 웨이브'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유명해져서 모두가 우리의 카세트를 살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1~2년 정도 지나자 우리는 우리의 음악이 일반적인 청자들에게는 상당히 난해하게 들리는 음악이라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그 당시의 우크라이나에서 유행하던 음악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음악이었다. 그래서 러시아로 옮겨가 활동했던 것이다 - 러시아에서라면 우리가 자리를 잡을 만한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물론 무슨 100만 명의 관객이라던가, 거대한 경기장 공연 같은 걸 바랬던 건 아니었다. 그냥 누구라도 우리 음악을 듣기를,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곡을 만들어내 들려줄 수 있기를 바랬을 뿐이다. 하지만, 지난 12년간 내내, 어째서인지 러시아에서도 그 누구도 우리를 두 팔 벌려 환영해주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어깨를 두드렸고, 우리를 존중해 주었고, 우리 정도의 음악가는 없다고 말해주었지만, 우리는 '자립'할 수 없었다. 모르겠다. 어쩌면 시작부터 너무 뻣뻣했던 것일지도.
알렉산드르 고르바쵸프> 무슨 뜻인가?
안톤 슬레파코프> 그러니까,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예전에 'Мистерия Звука'라는 레이블과 계약했었던 적이 있었는데 - 레이블이 모스크바로 우리를 불러내서 Король и Шут의 오프닝 무대를 서 달라고 했었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히, 반발했다. 우리는 그런 공연은 멍청한 아이디어라고, Король и Шут의 관객들은 우리의 음악과는 아예 상관없는 관객들이라고, 그 관객들은 우리의 음악을 절대로 듣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물론, 우리는 대답 겸 해서 그들로부터 면상에 크게 한 방 맞게 되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부터 레이블은 명백히 우리를 아예 신경쓰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를 곤경에 처하는 방향으로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여러 음악가들만 해도 이런 제안이 들어오면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갔었을 것이다. 커다란 클럽에서, 몇천 명의 사람들 앞에서, 물론 화끈하게! 하지만 우리는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우리라면 그 공연을 실패했을거라는 걸, 최선을 다 해도 가장 좋은 반응이라고는 관객석에서 날아오는 맥주 캔 뿐이었을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런 일화가 넘쳐나게 있었다. 무언가가 싫을 때 마다 우리는 우리만의 아주 작은 영역에 머물러 있는 방향을 선택했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그 작은 영역이 우리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고르바쵸프> 기이하군, "Грузовики"의 여러 앨범들을 듣고 난 후 내가 가졌던 당신에 대한 인상이 거칠게나마 있었는데, 물론 이 인상이 틀렸을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나는 당신이 어디에 사는지에 대해 아예 전혀 모르고 생각조차도 안 하고 있었다,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안톤 슬레파코프> 잘 알겠지만,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라는 도시 자체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에 대한 해답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 도시는 뭐랄까, '믿을 만한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 그 어떤, 심지어 우리가 겪었던 가장 시끄러운 성공의 한가운데에서도, 언제든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정신머리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도시는... 이 도시는 거대하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도시들 중 하나이며, 공업 도시다. 수도가 아닌 곳에 사는 사람, 지방이라는 것이 어떤지를 바로 아는 사람이라면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의 풍경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헤비 메탈이 크게 유행하는 곳이며, 우리 같은 밴드들은 지난 십수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조차도 등장하면 놀라움, 비웃음, 당혹스러움을 일으키게 되는, 그런 도시다. 하지만 내가 이 도시에 무슨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일종의 아이러니를 가지고 있으면 있겠지. 가끔은 이사를 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있는데, 이사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우리는 3명의 성인이며, 각자 가족들, 반려동물들도 있고, 그 '다른 곳'에 가게 된다면 방이든 집이든 하나를 빌려 우리 모두가 같이 살아야만, 살아남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상만으로도 곧바로 무서워진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어쩌면 말이지.
안나 다비도바(Анна Давыдова)> 최근에 유명해진 주제 중 하나는 우크라니아 문화부에서 발표한, "라디오에서 재생하는 음악 중 최소 75%는 우크라이나어 음악이어야 한다"는 '쿼터제'의 계획일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안톤 슬레파코프> 안타깝지만 나는 그런 계획이 그다지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킬 거라고 생각치 않는다. 라디오 방송국들은 어떻게든 우회할 수 있을 우회로를 찾아낼 것이다 - 예를 들자면, 우크라이나 음악은 심야 시간에만 몰아 넣고 틀어준다거나 등등으로. 하지만, 나로써는, 뭐랄까 판단하기 어려운 주제다, 나는 애초에 라디오를 잘 듣지 않는다 - 보통 다른 방법으로 음악을 듣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직도 뭐랄까 강제적인, 그런... 최근에 르비우(Львів)에서 공연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 우크라이나어에 가장 친화적인 도시이다 - 택시를 여러 번 탔었다. 기사들은 전부 러시아어 샹송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깊숙히 뿌리박은 것을 사람들의 두뇌 속에서 끄집어내 지워 버릴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 쿼터제 같은 걸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나는 분개하고 있기도 하다: 어째서 기회주의자들이 우크라이나어 샹송을 만들지 않은 것이지?! (웃음) 그 부분을 메꾸기 위해서 말이다. 키이우(Київ)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최근까지도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에서는 Бутырка(역주: 러시아 샹송 그룹)의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었다. 계절마다 매번 공연장을 매진시키고 있는 밴드이다. 어째서 우크라이나 샹송 그룹은 없는 것인지, 우크라이나어 특유의 유머감각을 살려 그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그룹은 없는지, Бутырка만큼 진지하게 하는 그룹이 없는 것인지?
안나 다비도바> 수요는 있지만 - 공급은 없는?
안톤 슬레파코프> 어쩌면 그럴지도.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크라이나 음악의 질적 수준과 독창성에 대해서라면 굉장히 긴 대화가... 르비우의 또 다른 예시를 들어보겠다: 르비우의 전설적인 장소 "Криївка"에 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 곳은 우크라이나 록 밴드의 음악만이 울려퍼지는 곳이었다. 한 2번정도 방문했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들어간 지 35분이 지나자 완전 지쳐버렸었다. 이 경험을 형식적으로만 해석한다면 내가 우크라이나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심지어 나 스스로가 우크라이나 음악가인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맞다 - 완전 스트레스였다. 그 모든 밴드들이 - 전부 한 분야, 한 장르에서, 똑같은 어떤 '메인스트림'에서, 우크라이나에서의 삶에 대한 웃긴 가사, 새끼돼지에 대한 가사, 돼지비계에 대한 가사만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음악이 우크라이나 음악이라면, 그런 음악이 반드시 사랑받아야만 한다면, 나는 우크라이나 음악의 애국자가 아닐 것이다 - 그러니까, 그런 음악들만이 우크라이나 음악이라면 말이다. 다른 극단으로 가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오, 여기 우크라이나 음악의 새로운 물결이다!"라고들 말하지만, 그 밴드들은 들어보면 완전 스웨덴, 덴마크, 심지어 북아일랜드 등에서 온 밴드들처럼 들릴 뿐이다. 질적 수준도 높고, 우크라이나 음악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맞지만, 다르게 보자면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카페 같은 곳에서 항상 틀어 주는 여타 외국 밴드들과 아예 구분이 안 되는 밴드들이기도 한 것이다.
안나 다비도바> 하지만 서구권의 시장으로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들과 비슷하게 들려야 하는 것도 맞지 않는지?
안톤 슬레파코프>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떠오르는 예시로는 Motorama가 있는데: 로스토프-나-도누(Ростов-на-Дону) 출신의 밴드로 1989년의 음악, 영국식 포스트펑크를 하는 밴드다. 이들은 단순히 러시아를 넘어서 우크라이나, 유럽,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유명하다. 물론 이들의 음악은 조안나 스팅레이(Joanna Stingray)가 가져다 준 멋진 앨범들의 영향을 받아 빅토르 초이(Виктор Цой)와 그의 친구들이 1,000년도 전에 연주했었던 그런 음악을 그대로 보여주는 음악이긴 하지만 말이다. '레디-메이드' 레시피라는 건 없다. 우리는 어쩌면 이제서야 막 모든 것들, 가치, 협동, 클럽, 페스티벌의 시스템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서야 마침내 우리의 음악을 좋아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И Друг Мой Грузовик 시절, 우리는 종종 러시아라던가 몰도바 등지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우크라이나 페스티벌에서 공연하고는 했는데, 그 친구들은 단지 "어딘가"에서 온 밴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페스티벌에 초청받았던 밴드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음향 점검때 찾아가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만으로도 만족했었다: 당시에, 막상 우리는, 우크라이나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안나 다비도바> Вагоновожатые의 음악은 "Грузовики"의 음악과 비슷하게 가사에 상당한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런 측면이 당신의 개인적인 문화적 역량의 확장과 충돌하는 부분은 없는지?
안톤 슬레파코프> 알다시피 가사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솔직하게 말해 보자면: 수백 개의 공연을 다니다 보면 솔직히 가사를 아예 알아듣지 못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 일부 구절은 알아들을 수 있다고 쳐도 가사 전체의 깊이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면 Red Snapper처럼 가사 없이 연주만 하는 밴드들도 있고: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이를 음악적 진동의 흐름으로 접근하여 듣는다, 단어들의 뉘앙스 같은 건 필요치 않다. 이러한 측면은 사실 상당히 긴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러시아의 음악 팬들은 오랫동안 서구권의 음악을 들어 왔지만 그 음악의 가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들어 왔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서구권의 음악 팬들을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웃음) 핀란드에서 공연을 할 예정이며, 오는 5월에는 여러 개의 유럽 공연을 할 예정이기도 하다. 공연의 반응이 어떨 지 기대하고 있다. "Грузовики" 시절에는 유럽 경험이 거의 없었으며, 이에 기반해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의지와 추진력만 있다면, 전투의 반은 이미 진행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안나 다비도바> 외부에서 다시 우크라이나로 돌아와서 - 르비우 공연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다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었는데: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에 도는 '미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서 러시아어로 공연을 하면 분노한 사람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지게 된다고들 한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상당히 놀랐었다: 작년 내내 드니프로 지역은 우크라이나 동부 테르노필(Тернопіль) 같다는 인상을 계속해서 주고 있는 지역이니... (역주: 2014년 돈바스 내전 사태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안톤 슬레파코프> 맞다, 그렇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드니프로 지역은 아직도 러시아어를 쓰고 있다 - 러시아어를 쓰는 사람이 절대다수인 지역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 우크라이나로써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에 방해가 되는 부분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미신'은 - 음악가들이 처해 있는 환경에서는 보다 더 실제에 가깝기는 하다: 말하자면 우크라이나어로 노래하는 밴드들이 르비우에 초청받을 확률이 더 높긴 하다. 아마도 그저 상업적인 이유에서일 것이다: 주최측은 어떤 밴드를 초청하건간에 일단 공연장 매진을 바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미신'은 상당히 오래 전에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미신이다 - 러시아어 밴드들이 르비우에 초청되기 시작한 이후로 쭉. 가장 최근의 공연들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7раса, Сплин, Дельфин 등등이 르비우에서 전석 매진 공연을 했었다. 르비우 청년들이 흥미를 보이고 있는 거다: 그들은 언어에 관계 없이 '시'(poet)에 친숙하다.
안나 다비도바>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에서 작년 한 해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안톤 슬레파코프> 그러니까, 사람들은 아마도 근처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현실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전쟁을 원하던가 원하지 않던가, 어떤 식으로든 변화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법이다.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 벌어지는 지역에 친척들이 있으며, 그들 모두 "러시아의 세계"와 수반되어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을 보아 왔다. 어쩌면 내가 너무 순진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떤 '보호'를 원한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께서 향을 피우고, 당신은 "집 안에" 있을 때의, 그런 보호의 느낌을. 그러니, 이렇게, 비쉬반카(вишиванка, 우크라이나 전통 의상)를 입고, 리본을 매고, 생각할 수 밖에 - 뭐, 만약 모든 것이... (웃음)
안나 다비도바> 모든 것이, 결국 '선택'을 했다는 말인가?
안톤 슬레파코프> 그렇다.
안나 다비도바> 그렇다면, 드니프로가 지난 한 해 동안 '선택'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인지?
안톤 슬레파코프> 어느 정도는... 여전히 거주지 곳곳에 똑같은 고프닉(역주: гопник, 러시아 양아치)들과 할머니들이 있으며, 그들은 야누코비치(역주: Віктор Янукович, 우크라이나의 4대 대통령으로 흔히 '친러파'라고 여겨지는 인물)와 야누코비치의 수하들이 돌아오기만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게 확실하다. 기본적으로 분리주의 및 "러시아의 세계"는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에서 강제로 쥐어짜져 나오게 된 개념들이다.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될 수도 있었다: 지방정부 청사 앞에서 벌어졌던, 불안감을 조장했던 일들을 기억한다: 티투슈키들(역주: Титушки, '정치 깡패'와 비슷한 의미), 성 조지 리본(역주: 러시아 군 관련 심볼 중 하나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승전한 '승리의 날'에 많이 사용됨)을 단 행진 - 모든 것이 그 앞에서 일어났었다. 하지만, 지금은 떠나고 없는 사람들이,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 했었다. 내 눈에는 시민들이 - 이런 일을 원했던 사람이나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나 모두 - 지금 이런 식으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다른 식으로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끼는 것 같이 보인다.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는 이제 '최전선'에 위치한 도시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앰뷸런스, 사이렌, 많은 군인들,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들. 전쟁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병원과 그 주위를 돌아다니는 병사들의 장면 같다.
안나 다비도바> "Грузовики"는 러시아에서 상당히 잘 알려져 있던 밴드였으며, Вагоновожатые(역주: "Грузовики" 해체 이후 안톤 슬레파코프의 다음 밴드) 또한 러시아에서 꽤 인기를 얻고 있는 중이었다. 여전히 그런지?
안톤 슬레파코프> 우리는 '특별한 정도'의 상업적 이해의 당사자가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올해는 특별히 더 감소하여 0.01% 정도로 바닥을 쳤다. 물론 기본적으로 이제는 러시아에서 홍보 자체를 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긴 하다: 그냥 '우크라이나 밴드를 초청한다'는 사실 자체가 좋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국경을 넘는다는 일 자체도 힘든 만큼, 국경을 넘어 간 후에도 여러 구조적인 문제들이 많이 생겨버렸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굉장히 엄격한 검열이 가해지고 있다. Сергій Бабкін(역주: 세르히 바브킨, 우크라이나의 유명한 음악가)이 겪었던 문제들에 대해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 그는 우크라이나어 노래를 '너무 많이' 불렀으며, 어째서인지 Андрей Макаревич(역주: 안드레이 마카레비치, Машина Времени의 창립 멤버이자 리더)의 노래도 불렀으며, 쿠르스크 함 침몰 사건에 대한 실질적인 언급도 했다는 등등의. 그리고, 우리 나라 쪽에서는 모든 것이 훨씬 더 심각하고 날카롭다. 6개월 전에는 러시아에서 조금이나마 제안이 들어왔었다고 친다면, 이제는 그 조금마저도 아예 증발해 버렸다. 이번 봄에 Вагоновожатые의 첫 앨범을 발매할 계획이었으나 가을로 미루게 되었다 - 그래서 아직 어떤 수록곡도 제대로 녹음되지 않았다. 그래도 새해가 되기 전에 "Хундертвассер Хунта"를 만들고 뮤직비디오도 작게나마 완성할 수 있긴 했었다. 그나저나, 이 뮤직비디오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우리 동지 알렉산드르 로자노프(Александр Розанов)가 만들었다.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안나 다비도바> 당신들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는 것 때문에 그가 별다른 일을 겪진 않았는지? (역주: "Хундертвассер Хунта"와 뮤직비디오는 군사정권의 압제와 전쟁범죄를 비판하는 뉘앙스의 내용임)
안톤 슬레파코프> 아무런 일도 겪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에게 이런 메세지를 보냈었다: "사샤, 알겠지만 이런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는 것 만으로도 실질적인 피해를 입을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러시아에서도 일반 상식이 '상식'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단순히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소를 당하거나 하지 않기를. 게다가 뮤직비디오에 실제로 등장하는 건 사실 아무것도 없다 - 그냥 1960~197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군사정권들을 담은 장면들 뿐이니까.
오로 우오스타스(Oro Uostas)> 벨라루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난 3~4년간 우크라이나에서는 진짜로 '새로운 음악의 붐'이 일어났었던 것 같으며, 여러 새롭고 흥미로운 밴드들이 등장했고, 이는 올해 Mirum 페스티벌(역주: 벨라루스 미르(Мір)에서 진행되는 음악 페스티벌)에 공연하는 밴드들 중 거의 절반이 우크라이나 밴드라는 사실로도 쉽게 증명된다. 우크라이나의 입장에서도 이 '붐'이 실제였는지?
안톤 슬레파코프> 사실이다, 지난 2~3년은 당신의 말 그대로였다. 어쩌면 좀 인위적으로 일으켜진 붐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마침내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신들의 음악의 진가를 알아보고 인식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전 국가적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으며, 바깥으로, 외부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는 외국 곳곳에서 밴드들이 우크라이나에 방문했으며, 공연 주최측이나 관객들이나 전부 그 외국 밴드들이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을 하며 그들에게 더 편리하게 시간을 분배해야 한다는, 그들에게 헤드라이너 자리를 줘야 한다는, 그리고 우크라이나 음악가들에게는 항상 이런 식으로 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했었다: 우크라이나 밴드들은 항상 부르면 와 줘야 하는 '대기조'이며, 우리가 우크라이나 밴드를 '초청'해 주어야 와서 공연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하지만, 이제는, 나는 벨라루스 청년들이 비슷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이름을,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식이었다: 벨라루스 밴드들이 등장하고, 페스티벌의 시작 부분에 줄을 지어서 촤르륵 공연을 하며, 그들이 다 하고 난 다음에 헤드라이너가 등장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달갑지는 않은 모습이다. 나도 그런 상황에 여러 번 처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신경쓰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를 젊고 유망한 밴드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하지만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인 것도 맞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해 말하자면 - 맞다, 매 주말마다 6~7개 정도의 좋은 공연들이 열리며, 모든 공연들이 거의 매진이다. '독립' 이후 1/4세기가 지나 드디어 우리 스스로를, '우리 사람'들을 지원하고 지지하는 법을 배웠다는 것에 기쁘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 흥미로운 우크라이나 밴드들에 대한 벨라루스, 네덜란드, 프랑스, 심지어 러시아에서의 흥미 또한 생겨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기도 하다.
오로 우오스타스> 밴드 이름 몇 개만 알려줄 수 있을지.
안톤 슬레파코프>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씬을 내가 긴밀하게 따라잡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겠다. 게다가 나는 온갖 것들을 여러 주관적인 이유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기 시작하면 다들 내가 거만하다고, 나라는 사람은 '나'만을 멋진 음악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기 일색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러한 새롭고 흥미로운 밴드들이 존재하며 사람들이 그들의 음악을 듣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내일 Onuka가 공연할 예정인데 - Onuka는 우크라이나 내에서도 그리고 우크라이나 바깥에서도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밴드다. 그 정도로 양질의, '진짜' 일렉트로 팝은 우크라이나에서는 굉장히 드문 것이었다.
오로 우오스타스> 바깥의 사람의 시선으로 보자면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오랫동안 모든 것이 돈 때문에, 돈이 유일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던 것 같다. 벨라루스에서는 대부분의 것들이 '친밀한 관계'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우크라이나에서는 모든 것이 언제나 '계산'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지금은 돌아다니는 돈이 훨씬 더 적어졌으며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래서 온갖 새로운 문화가 등장하고 있는 것 같다 - 페스티벌, 공연, 프로젝트, 자원봉사, 모든 사람들이 공통의 목적을 위해 많은 것들을 무료로 해 주는 일들이. 당신도 이러한 변화를 보고 있는지?
안톤 슬레파코프> 당신의 나라가 전쟁에 휘말리고, 극빈한 사람들, 장애를 얻은 사람들, 집과 건강,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보게 되면, 당신은 원하든 원치 않든간에 좀 더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현재 여러 노력과 수고들, 물리적인 것들을 포함한 노력들이 전혀 모르는 타인들, 갑자기 문제를 겪게 된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사람들 모두가 현재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에 친척 한 명 쯤은 갖고 있다. 음, 그리고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는 비단 전쟁에 대한 것 뿐만은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암에 걸렸다거나, 어떤 아이가 수술이 필요하다거나 하는 상황이 오면 사람들은 기꺼이 도울 것이다. 이 상황은 우리가 서로를 한층 더 가깝게 붙들도록 만들었으며 아예 모르는 사람 또한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상업적인 공연을 하고, 로열티를 받고, 음악에 투자하고, 앨범을 발매하고, 더 좋은 악기를 구매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상업적인 공연들도 아직 존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벌어들인 수익으로 또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도 있다. 조국에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 누구라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없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이러한 가슴을 울리는 듯한 배경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모든 것들은 그렇게까지 나쁘게 흘러가고 있지만은 않다. 큰 위로가 되는 일이다.
오로 우오스타스>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런 논의도 나오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노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당신은 이 논의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답하고 있는지?
안톤 슬레파코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한 시도 빼놓지 않고 항상 압박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건, 항상 슬퍼하며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며, 같은 군인들, 방어자들, 그들 또한 전선의 뒷편 어딘가로 돌아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싸워왔는지 두 눈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 도시들의 '삶'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마치 역병의 한복판에서처럼 검은 빛으로 돌아다니고, 모든 것에 커튼이 드리워지고, 빛은 가려지고, 그러한 풍경은 '삶'이 없는 풍경이다. 게다가, 나도 이해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음악가' 또한 '직업'이라는 사실을, 일종의 사명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 '직업'을 갑자기 하지 못하게 막는다면, 음악가는 아무것도 도울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더해서 기부를 할 기회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파블로 슬로보댜뉴크(Павло Слободянюк)> 음악 평론가 올렉산드르 필리모노프(Олександр Філімонов)는 리뷰에서 이렇게 언급했었다: "천재는 무용한 것들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시대의 정신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통해 그 시대의 정신을 포착한다. Вагоновожатые는 다른 누구와도 다른 방식으로 이를 달성하고 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당신은 어떤가?
안톤 슬레파코프> 시대의 정신에 대해서 말인가? 나는... 아마도, 동의한다. 맞다, 현재를 느끼는 것은 중요하다.
파블로 슬로보댜뉴크> 그렇다면 오늘날의 정신은 무엇인지?
안톤 슬레파코프> 한편으로는 자유, 다른 한편으로는 정보의 과부하.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파블로 슬로보댜뉴크> 당신은 1990년대 후반에 성공적으로 음악 경력을 시작했었다. 음악을 만든다는 일에 관해서,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2020년대 사이에 가장 크게 변화한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안톤 슬레파코프> 나는 아마 1992년 초에 본격적으로 시작했었다. 이 시기는 그렇게까지 눈에 띄지는 않는 시기였는데... 그러니까, 그 때에는 '매스 미디어'가 없었다. 인터넷도 없었고. 앨범을 만들고, 괜찮은 뮤직비디오를 찍고, 그럴싸한 장비를 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전자 음악을 만든다는 것 자체도 거의 불가능했다. 이 시기에 영국, 미국, 유럽의 전자 음악가들은 이미 멋진 장비들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고 있었다 - 샘플러들, 시퀀서들. 하지만 우리가 살 수 있는 거라고는 체코나 불가리아산 저렴한 기타들 뿐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최첨단 음악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모든 도구들을 전부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진짜로 모든 기기들을 다 말이다: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까지. 멋진 일이다. 하지만, 반면에, 이러한 '컨텐츠'가 너무 많은 바람에 청자들이 빠져들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청자가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컨텐츠를 찾아내는 건 또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런 부분이 나에게는 가장 큰 변화인 것 같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뭐든지 원하는 방식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기타 판매점에 가서 아무 기타나 다 살 수 있는 것 처럼 - 커트 코베인의 기타라던가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라던가... '가능성의 바다'가 앞에 펼쳐져 있는 것 같다.
파블로 슬로보댜뉴크> 현재의 음악계에 대해서 - 장점이 더 많다고 보는지, 아니면 단점이 더 많다고 보는지?
안톤 슬레파코프> 흠. 웅덩이에 빠져 죽는 게 더 좋은지, 아니면 바다에 빠져 죽는 게 더 좋은지? 누군가는 술에 취해서 웅덩이에 넘어져서는 내 눈 앞에서 질식했다. 누군가는 수영복을 입고 몸을 담그고 놀다가 태풍의 희생향이 되었고. 어느 쪽이 더 좋은 지는 잘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나는 지금의 젊은 세대를 딱히 부러워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엄청난 양의 정보가 그들의 머리 위로 직접 떨어지고 있으니. 20년 전에는, '새로운 이름'들은 아주 조금씩만 등장했었다. 누군가가 도와주어야만 했고. 예를 들어보자면 한때 어떤 큰 규모의 잡지에 어떤 음악 평론가가 있었다. 그 평론가가 말하길 "이 밴드나 이 장르를 반드시 들어보아라"라고 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밴드와 그 장르 말고는 딱히 선택지도 없었다. 당신은 이미 그 새로운 밴드의 팬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미 그 밴드의 앨범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외국의 누군가가 당신에게 테이프를 보내줄 때 까지 기다린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 가지 극단이 있다는 것이 명확히 보이지만, 그 접근 방식들을 결합하여 활용할 수도 있다. 현재 벌어지는 정보의 흐름을 "듣고", 의미를 잃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나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새로운 음악을 그렇게까지 많이 듣지는 않는다. 이미 내 '스타일'을 찾았다.
파블로 슬로보댜뉴크> 당신이 말한 '과포화'의 문제는 팝 음악의 평가 절하로 이어지게 되는 것 같다. 당신도 이제는 더 이상 '위대한 예술가'가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안톤 슬레파코프> 어떻게 보자면 그래 보이기도 하지만, 또 다르게 보면 나는 최근 몇 번의 공연들에서 '진짜'를 보기도 했었다. 예시를 들어보자면, 작년에 Twenty One Pilots가 키이우의 Палац Спорту에서의 공연을 매진시켰었다. 몇 번이고 더 매진 공연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정말 멋진 공연이었으니까. 그들의 음악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이 얼마나 '멋진'지는 볼 수 있었다. '스타디움 레벨'이라고 의심의 여지 없이 말할 만한 예술가들이었다. Imagine Dragons도 비슷하다. 독특하거나 뭔가 다른 공연은 아니다. 그냥 '알파 메일'이 반바지를 입고 나오고, 스타디움 전체가 그의 무대가 된다. 거기에 모든 것이 있다. 어쩌면 보다 더 작은 공연장에서, 보다 더 단순한 장비로. 그런 사람들이 "젠장, 언젠가는 스타디움 스타가 되겠어!"라는 마음을 가지고 음악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그저 음악을 만들고, 인터넷에 올리면, 붐! 모든 10대 청년들이 그 음악을 듣는다. 어떻게 스마트폰 스피커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먹힌다는 것이다! 젊은 청자들은 그 음악을 기억하고, '스타디움' 없이도 친구들끼리 음악을 공유하고 있다, 이것 또한 멋지게 작동하고 있다. 결국 다시 "이것도 가능하고, 저것도 가능하며, 다른 방법도 가능하다"라는 명제로 돌아오게 된다. 스타디움이 어딘가로 가 버린 것이 아니다. '위대한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대조적으로, 한때는,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들이 찾아올 수 없기도 했었다. 지금이라면 Radiohead 공연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거라고 확신한다. 아니면 AC/DC 라던가.
파블로 슬로보댜뉴크> 맞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기에 과거의 '스타'들이 더 밝게 빛나는 것 같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에는 뭐랄까 혜성의 본체가 아닌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안톤 슬레파코프> 그렇기도 하지만, Billie Eilish가 현재 끌어모으고 있는 청중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만약 그녀가 외부에서 온 예술가라면? Billie Eilish는 완전 새로운 예술가이며, 90년대, 00년대와 비교해 보더라도 여전히 '새롭고 젊은', 스타디움 레벨의 예술가일 것이다.
파블로 슬로보댜뉴크> 그건 맞는 말이다. 최근의 젊은 음악가들은 홍보를 어떻게 하는지? 전문적인 평론가의 의견이나 "거대" 미디어의 출판이 지금도 중요한가?
안톤 슬레파코프> 한편으로 보자면 음악 잡지 업계는 거의 전부 사라져 버렸다. 아직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예전에는 굉장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체였었다. 반짝거리며 빛나는 음악 잡지나 패션 잡지들은 모두가 "새로운 앨범" 섹션을 가지고 있었다. 새롭게 발매된 CD에 대한 리뷰와 밀도 높은 조언들. 그런 것들이 실려 있었다. 그 잡지의 유명세와, 잡지에 글을 쓰는 평론가의 유명세에 따라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었다. 딱히 설명할 것도 없지만, 몇몇 잡지들은 리뷰만을 출판했으며 청자들은 그 리뷰들을 기반으로 앨범을 구해다 들었었다. 이제는 앨범을 발매할 때 리뷰를 받는 것 자체가 어려울 정도다. [Neformat]이라던가 [Varianty Lviv] 같이 흥미로운 창구들이 아직 남아있기는 하다, 특히 [Varianty Lviv]는 정말 훌륭한 글들을 출판하고 있다. '곤조 저널리즘'(역주: 미국의 작가 헌터 S. 톰슨의 개념으로 객관성과 중립성으로부터 벗어나 1인칭 시점에서 주관적인 관찰과 생각,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의 저널리즘) 측면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글들이 [Varianty Lviv]에 나오고 있다. 이 맥락에서는 음악 자체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음악은 그저 멋진 에세이를 쓰기 위한 일종의 플랫폼으로써 기능할 뿐이다. 그러한 저널리스트들은 더 많은 숙고와 성찰을 담아내며, 다른 밴드들도 이것저것 끌어 와 글을 엮는다. 다른 장르들, 다른 예술가들도 전부 포함해 자신의 글에 녹여내는 것이다.
파블로 슬로보댜뉴크> 이제는 음악 업계에 '칭찬'의 어조를 담은 리뷰들이 대다수인 것 같다. 평론가가 되기 위해서는 좀 터프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지, 아니면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지?
안톤 슬레파코프>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모르겠다. 굉장한 분노를 담은, 강렬한 비판의 리뷰들이 넘쳐나던 시대가 기억난다. 그게 젊은 음악가들에게 용기를 주었냐고 하냐면, 그렇게는 말하지 못하겠다. 젊은 나이에, 활력이 넘치는 정신을 갖고, 스스로가 가장 멋지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다가 어느 날! 여정을 시작하자마자 면상에 바로 한 대 얻어맞고 아스팔트에 처박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뭘 만들어 둔 거지? 네 노래라고? 우웩! 이런 종류의 부정적인 분위기는 사실 굉장히 불안감을 조성하고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음악이라는 업계에 진지하게 뛰어들었다면 평론가를 포함해 어딘가로부터 얻어맞을 각오는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파블로 슬로보댜뉴크> 개인적으로는 공격적일 정도로 부정적인 리뷰는 못 쓰겠더라. 부정적인 피드백도 못 주겠고.
안톤 슬레파코프> 나도 그렇다.
파블로 슬로보댜뉴크> 나 또한 음악을 만드는 사람으로써, 가장 힘이 약하고 매력없는 곡도 상당한 작업과 노력의 결과물일 때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가끔은 정말로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결과물이 그럴 때가 있다.
안톤 슬레파코프> 그럴 때가 분명 있다. 전반적으로, 리뷰를 생각해 보면, 나는 좀 이상한 대화를 하게 된다. '그들'이 이렇게 보내 오면: 여기 곡이 있으니, 평점도 매겨 주고, 어떤 생각이 드는지도? 이런 요청이 오면 나는 이렇게 질문하여 명확하게 하려고 한다: 내 리뷰가 정말로 필요한 것인지? 나는 그냥 모든 것을 주관적으로밖에 평가할 수 없는 한 명의 사람일 뿐인데. 어느 날은 그냥 안 좋은 자세로 자다가 일어난다거나, 아니면 그냥 기분이 나쁜 상태로 일어난다거나, 아니면 누구랑 싸우게 되었다거나 하고 난 다음에 젠장, 여기에 니 앨범이 있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평가'를 한다는 말인가? 결국 내 의견은 진실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나는 그 음악이 노리고 있는 청자에 해당하지 않을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냥 내가 해당 장르를 안 듣는 사람일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렇기에 '평가'는 굉장히 주관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하나가 전부 다른 사람들이며, 제각기 서로 판이하게 다른 세계관과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건 그렇고, 말 그대로 모든 컬트 음악 전문가들이나 평론가들은 당신이 좋아하는 밴드의 첫 앨범을 비판적인 평론으로 "박살낼" 것이다. 당신은 젠장, 나는 그 평론가를 진심으로 믿었었는데! 같은 생각을 하겠지만, 그는 밴드를 말 그대로 부숴버릴 것이다, 헤...
파블로 슬로보댜뉴크> 재능을 가진 음악가가 홍보 없이도 성공할 수 있을지?
안톤 슬레파코프> 그렇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성공"은, 포괄적으로 보자면, 여러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무언가이다. 어느 정도의 모험, 어느 정도의 기발함과 독창성, 어느 정도의 운이 따르면 - 붐! 성공을 거두게 된다. 성공은 운에 달린 것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발매했는데 거기에 딱 들어맞을 사람들이 제때에 들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청자들이 "우와, 이거 누구야?! 이 사람 분명히 스타가 될 거야, 연락처좀 당장 줘!"라는 반응을 보여주어야 하고. 1990년대에는 모두가 '스폰서'를 찾아 다녔다. 음악가들은 백만장자가 아니며 악기라던가 스튜디오 대여비를 충당할 만한 재정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일부 음악가들이, 소위 말하는 '든든한 삼촌'을 갖고 있는 것이다. 돈이 있는, 든든한 삼촌을.
파블로 슬로보댜뉴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는지?
안톤 슬레파코프> 솔직히 말해서 정말 불쾌한 일이다. 대체로 '특정한 관계'로부터 출발한 경우가 많았다. 가수, 프로듀서... 그런 경우 창작 능력이 배경에 깔려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휴일이나 명절에 '성공적인'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것으로 돈을 벌곤 했다. 뭐, 무슨 말인지 잘 알 것이다.
파블로 슬로보댜뉴크> 기업 내부 파티들!
안톤 슬레파코프> 뭐 그런 것들. 그나저나 우리(저자주: …И Друг Мой Грузовик이다)도 그런 공연을 한번 해 본 적이 있었다. 진짜 갱스터들 앞에서.
파블로 슬로보댜뉴크> 우와! 어땠었는지?
안톤 슬레파코프> 클럽에 도착했는데, 기생오라비 같아 보이는 녀석들이 있었다. 근처에는 여자들이 힐을 신고 짧은 드레스 차림으로 있었고. 분위기는, 최대한 부드럽게 표현해서, "부정적"이었다.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러 바깥으로 나갔는데, 그 "방문객"들의 차에 진짜 총기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좀 무서웠다. 전반적으로 그런 시스템 안에서 공연하고 일하면서 사는 것 자체가 때때로 정말 무섭게 느껴지곤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