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내이(內耳)에는 작은, 액체로 채워진 빈 공간 - 달팽이관 - 이 있는데, 이 공간은 전정기관과 함께 균형 감각과 세상에 대한 감지에 있어 필수적인 기관이다. 이 기관은 우리가 주변 환경을 탐색하고 움직이는 것에 있어서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기관이다. 듣는다는 것은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경청은 균형이다.
균형은 생존이다.
II.
태풍의 눈은 폭풍의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원형의 잔잔한 지역으로, "eyewall"이라 불리우는 높다란 뇌위의 탑에 사방으로 둘러싸인 공간이다.
나는 2024년, 베를린의 시체 안치소에 있다. 나는 태풍의 눈 속에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보았다, 독일어로 쓰여진 글귀를: "편히 쉬시길".
[Oceanic Refractions]에 들어갈 준비를 하며, 주변은 조용했다. 태풍의 눈 속은 조용하다.
귀는 닫히지 않는다.
III.
나는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전시는 Kuppelhalle, 시체 안치소의 애도 공간에 위치해 있다.
전시 스크린의 윗편과 주위에는 콜럼바리엄(columbarium) 안에 작은 보관 공간들이 있어 고인의 화장한 유골을 보관하는 유골함을 넣어 둘 수 있게 되어 있다.
'콜럼바리엄'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columba에서 유래하였으며, 본래는 새들을 위해 구획된 새집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 콜럼바리엄에는 새도 없고, 유골함도 없다. 대신, 우리는 피지, 키리바시, 파푸아 뉴기니의 노인들의 증언을 듣고 있으며, 태평양의 짙푸른 빛이 빈 유골함 보관소 위로 굴절되고 있다. 이 시체 안치소는 물 속에 있다. 이 공간의 애도는 액체이다.
2012년 이후로 이 시체 안치소는 '고요한 녹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 이 건물을 구입하여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던 부부는 베를린 기반의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해 설명했다: "(시체 안치소를) 구입한 후, 바깥 잔디밭에 앉아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었습니다. 고요했고, 녹색빛이었습니다... 고요한 녹색."[1]
듣는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상상하는 것이다.
이 고요함은 어떤 종류의 침묵인가?
IV.
침묵에는 여러 가지 얼굴이 있다.
고문 속에서의 침묵은 용기이며, 불의 속에서는, 비겁이다. 침묵은 죽음을 상징할수도 있다 - 더 이상 호흡하지 않는 육체, 그리고 침묵은 삶을 상징할수도 있다 - 침묵 속에서 서로를 응시하는 자들. 침묵은 신생아의 평온함, 호수의 고요함, 노인에 대한 존경심, 의식의 헌신, 밤하늘의 불가해함에서 들어볼 수 있다. 파괴 뒤에는 섬뜩한 침묵이 따른다. 회한의 침묵이라는 것 또한 있다.[2] 무덤의 침묵, 그리고 표식이 없는 무덤의 이중 침묵.
태평양과 여타 다른 곳들에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여기에 관계되어 있는 자들 전체가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는 가운데, 부검을 통해 공모의 침묵, 탐욕의 침묵이 드러난다. 자유방임주의의 침묵. 에어컨이 갖춰진 사무실 건물. 오래된 법정. 데이터시트. 이윤의 폭.
[중단: buzzkill]
한 외국인이 칠레 남부의 땅 3,000 헥타르를 구매한다.[3] 호수 하나와 그 주변 언덕들 전부를. 작은 나라군, 그가 말한다. 그는 별장에서 호수를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쉰다. 마침내, 어느 정도의 침묵이군, 벌 한 마리가 창문으로 날아드는 도중에 그는 생각한다.
그는 땅이 얼마나 넓은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보존,[4] 그는 벌목된 나무들의 좁은 길을 따라 부지를 가로질러 올라가며 대답한다. 한동안 이 길을 올라와 본 적이 없었기에, 그는 다시 차를 타고 돌아가 전기톱을 가져온다, 길을 가로막고 있는 굵은 가지 몇 개를 쳐내기 위해서.
톱의 윙윙거리는 소리가 숲을 가른다. 엔진이 멈추자 구경꾼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쉽다. 다시 침묵이군, 남아있는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시끄럽게 움직이는 동안 그들은 생각한다.
식민화한다는 것은 비명의 숲 속에서 침묵을 듣는다는 것이다.[5]
IV.
세계를 부검할 수 있을까?
"고요했고, 녹색빛이었습니다... 고요한 녹색."[6]
이곳이 이렇게나 고요하려면, 어떤 장소들이 시끄러워야 하는 것인가?
이곳이 이렇게나 건조하려면, 어떤 장소들에 홍수가 몰아쳐야 하는 것인가?
폭풍의 눈, 아니 오히려 폭풍의 귀에서, 높이 솟아오른 뇌우와 강풍의 고리를 향하고 있는 이 귀에서, 우리는 이 질문들을 던진다.
이 도시, 이 시체 안치소, 더 이상 이곳에 없는 재, 이 침묵,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이 침묵으로부터, 나는 태평양 원주민 노인들의 말을 떠올린다: 우리는 한 개의 입을 가지고 있지만 귀는 두 개를 가지고 있다.
어떤 종류의 세심함이 필요한 것인가? 경청의 공간은 얼마나 절실한가?
충분한 연설대; 우리는 이 유골함 전체, 한때 백만 개의 재, 백만 개의 이야기, 백만 개의 경고, 백만 개의 또 다른 경청들을 담았었을지도 모르는 이 유골함이 필요하다, 지금 이 경청을 담을 수 있도록. 우리는 세계를 부검해야 한다.
부검(autopsy), αὐτός(자신)과 ὀπτός(보여지는; 보이는)에서 유래. 죽음의 원인을 자기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알아내는 것.
병리학자가 속삭인다: "화장 후에는 부검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재가 그러하듯이 우리 또한 세계의 유골함으로 들어가며, 이를 설명할 입을 가지지 못한 귀의 세심함을 가지고 귀 기울여 듣는다. 이 것은 자유로운 귀다. 균형 속에 자리잡은.
선언의 바깥에는 경청의 섬이 있다. 생존은 우리의 내이의 틈새로부터 말한다: "더 많은 단어들을 퍼부어 잠기게 하지는 말기를: 이미 침묵으로 홍수를 이루었기에."
VI.
2005년경, 칠레 산티아고의 중심에서 도보로 대략 1시간 거리에 있는 지역인 퀸타 노르말(Quinta Normal)의 카라스칼(Carrascal)에서, 12세 소년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이 소년은 서기 1470년에서 1540년 사이에 매장되었는데, 피리를 머리 옆에 두고 연주하는 자세로 묻혔다.[7] 이 피리는 매장 전에 미리 구멍이 뚫려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어떤 종류의 침묵인가?
침묵의 홍수. 이는 단순히 연주되지 않는 피리의 침묵만은 아니다. 이는 연주 불가능성의 침묵이다. 음향 발생의 불가능함. 구멍이 뚫린 피리 속에서는 공기가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너무나도 잘 흐르기에,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압축 과정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된다.
칠레 산티아고에 있는 Museum of Pre-Columbian Art 에서 진행되는 전시 [Quiebres y Reparaciones]는 3개의 구멍 뚫린 피리를 전시하고 있으며, 이 3개의 피리는 각기 칠레의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들은 이 피리를 flautas matadas라 부른다. 살해당한 피리들. 벽면에는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보여지는, 의도적인 파괴라는 현상은, 물질적인 영역과 비물질적인 영역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드러내고 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우연히 이 전시를 찾았던 한 마푸체족 노인은, 벽면에 쓰여진 문구의 모호한 의미를 본 후에 큐레이터들에게 힌트를 준다: "죽음의 원인이 분명하지 않을 때", 노인은 말한다, "물체에 구멍을 뚫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시신에 부검을 한다. 죽음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한 방법이다."[8]
피리에는 구멍이 뚫려서, 연주가 불가능해져야만, 침묵이 되어야만 한다, 죽음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서.
세계를 부검할 수 있게 되려면 어떤 종류의 침묵이 필요한가?
듣는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상상하는 것이다.
귀는 닫히지 않는다. 상상은 잠들지 않는다. 경청에서 비롯되는 정치는 상상의 정치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정치,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의 정치: 세계의 내이로부터의 정치.
(미국) 영어로 쓰여짐
2024년 4월 21일 출판됨
[1] Olivia Logan, "Silent Green: Crematorium turned cultural centre", [The Berliner], 2022년 9월 19일, https://www.the-berliner.com/berlin/silent-green-crematorium-to-cultural-centre/
[2] Unaisi Nabobo-Baba의 말에 따르면, "부갈레이(Vugalei) 지역의 마을에서 죽음은 기나긴 침묵의 기간을 뜻한다 - 1주에서 3주까지의 침묵을." Unaisi Nabobo-Baba, "Silence, Clan Boundary, Space and Gifting as Ways of Knowing", [Oceanic Refractions] (2024년 1월), Elise Misao Hunchuck, AM Kanngieser, Merewalesi Nailatikau 편집. https://www.oceanicrefractions.org/?article=silence-clan-boundary-space-and-gifting-as-ways-of-knowing
[3] Jonathan Franklin, "‘It’s like a plague’: land buying by outsiders threatens Patagonia’s peace", [The Guardian], 2023년 10월 27일, https://www.theguardian.com/global-development/2023/oct/27/its-like-a-plague-land-buying-by-outsiders-threatens-patagonias-peace
[4] 칠레에서부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지까지, "보존"은 친환경으로 위장한 벤처사업들이 사용하는 마법의 단어이다. 이러한 사업은 원주민들이 수세기 동안 거주하고 사용해 온 땅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생태계를 생각하는 사업 목적이라는 명목으로 원주민들을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땅에서 결과적으로 쫓아내게 된다. 무엇이 보존되고 있는가? 누구를 위해서? 이 새로운 침묵 속에서 무엇이 침묵되어지고 있는가?
[5] 1850년부터 1875년까지, 약 30,000명의 독일 이민자들이 국가 주도의 식민화 계획으로써 칠레 남부의 발디비아(Valdivia), 오소르노(Osorno), 양키우에(Llanquihue) 지역에 정착하였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출신의 이민자 그룹들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 또한 존재한다. 이 국가 주도의 칠레 남부 식민화는 이전 수세기 동안 그 지역의 원주민이었던 마푸체(Mapuche)족과 다른 여러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사용해 오던 땅을 포함하고 있었다.
[6] 어째서인지 이 이름에는 정착민 사회의 듣기 관행들, 녹색을 자동적으로 침묵으로 간주하는 관행들의 모든 함정들이 내포되어 있다.
[7] Claudio Mercado, “Con mi Flauta hasta la tumba” (내 피리를 무덤까지 함께), Boletin del Museo Chileno de Arte Precolombino 10, no.2 (2005년): 29–49, https://boletinmuseoprecolombino.cl/wp/wp-content/uploads/2005/12/Vol.10-N%C2%B02_Artic.-2.pdf
[8] 이 이야기는 미술관의 시청각 미디어 담당자인 Claudio Mercado가 나에게 해 준 이야기이다.
Nicolás Jaar Nicolás Jaar는 34세로 뉴욕에서 칠레 출신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산티아고와 뉴욕을 오가며 자랐다. 2008년부터 그는 여러 이름 아래에서 음악을 발표해 왔으며, 팝, 앰비언트, 노이즈, 클럽 음악을 아우르고 있다. 2013년부터 그는 Other People 레이블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 레이블을 통해 실험적인 전자음악과 어쿠스틱 음악을 발매하고 있다. 최근 Nicolás는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칠레 산티아고의 Museo de la Memoria,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의 Sonica, 팔레스타인 베들레헴의 Dar Jacir와 Alrowwad, 그리고 여타 다양한 장소에서 이제 막 시작하는 음악가들 그리고 음악가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음향 편집과 청취에 관련된 워크숍을 진행해 왔다. 그의 최근 프로젝트는 [Archivos de Radio Piedras]로, 17회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가까운 미래의 칠레를 배경으로 한 라디오 연극이다. 그의 첫 소설집인 [Isole]는 이탈리아의 출판사인 Timeo를 통해 2024년 2월에 발간되었다. Nicolás는 또한 연구 집단 Shock Forest Group, 밴드 Darkside의 멤버이며, Musicians for Palestine의 창립자들 중 한명이기도 하다.
인용 Nicolás Jaar, “The Ear of the Storm,” Oceanic Refractions, (2024년 4월), 편집: Elise Misao Hunchuck, AM Kanngieser, and Merewalesi Nailatikau. https://www.oceanicrefractions.org/?article=the-ear-of-the-stor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