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출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며, Weasel Walter의 노웨이브 밴드 Cellular Chaos의 멤버였기도 하고, 요새는 Warp에서 앨범을 내고 있는 Kelly Moran의 앨범입니다. 조용하면서도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피아노 앨범입니다. Ryuichi Sakamoto에 대한 관심이 은근하게 배어나오는 것 같기도 한, 언뜻 듣기에는 쉽게 다가오지만 또 듣고 있다보면 어느새 여러가지 복잡한 향이 입 안으로 스며들어 온 것 같은 매력이 있습니다. 올해 내내 편안해지고 싶을 때마다 큰 고민 없이 들었던 앨범입니다. 인터뷰에 따르면 피겨 스케이팅 팬이라고 하는데, 몇몇 곡들은 우아하게 빙판을 거니는 피겨 스케이팅 선수의 모습을 그려 낸 것 같기도 하네요. 왜 그런건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어폰/헤드셋으로 들을 때보다 스피커로 들을 때 훨씬 더 좋은 앨범입니다.
2021년 Pharoah Sanders와의 합작 앨범으로 파장을 일으켰던 잉글랜드 전자음악가이자, 특이하게도 신경과학 분야의 박사학위도 가지고 있는 Floating Points의 LP입니다. 캘리포니아의 사막 한가운데에서 발레 작업을 하다 떠올린 아이디어들에서 출발했다고 하는데, 여러 작업들로 바쁜 와중 COVID 사태 때문에 클럽 공연도 못하게 되며 쌓여간 '클럽에 대한 그리움'의 분출이라고 할 수 있는 앨범이라고 하네요. 그 말 대로, 그 무엇보다도 DJ로서 본격적인 음악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다시 선언하듯이 앨범 내내 화끈한 클럽 전자음악을 선보이는데, Floating Points의 탄탄한 음악적 배경지식과 신디사이저 기법으로 인해 씹으면 씹을수록 감칠맛이 더 나오는 '맛도리' 트랙들로 들어찬 앨범입니다. 배경음악으로 신나게 듣기에도, 겹겹이 쌓인 신디사이저 음향들의 만화경을 곱씹으며 즐기기에도 좋은, 멋진 전자음악 앨범입니다.
호주 멜버른의 인디 음악계에서 오래 활동해 온 Conrad Standish와 Sam Karmel이 결성한 2인조 프로젝트 CS + Kreme의 앨범입니다. 말로는 나름 '쉬운' 앨범이랍시고 만들었다고 하는데, 앨범 이름이나 커버 아트에서 보이는 것 처럼 흔히 '실험적' 이라고 분류할 수 있을 법한 모호한 음악을 선보이고 있으며, 알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의 앨범입니다. 처음에 잔잔한 어쿠스틱과 힘 빠진 보컬로 시작할 때만 해도 '다크 앰비언트' 혹은 '네오포크' 같은 음악이겠거니 싶었는데 안으로 더 들어갈수록 오히려 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로같네요. 트립합이나 클럽 전자음악의 요소를 강하게 담은 곡들도 있고 노이즈로 밀어붙이는 부분들도 있지만, 기타, 첼로, 타라왕사(Tarawangsa) 같은 어쿠스틱 악기로 청자의 귀를 천천히, 깊숙히 찌르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주술적인 분위기를 대놓고 풍기기도 하는 수수께끼같은 음악입니다. Young God Records에서 발매했던 Larsen의 앨범 [Rever] 같기도 하고, 뉴질랜드의 기묘한 밴드 This Kind of Punishment나 호주의 기괴한 전자음악 밴드 Severed Heads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안개 속을 헤메이는 듯한 앨범이지만 확실히 매력적입니다.
베를린의 하드코어/테크노 2인조 Brutalismus 3000의 EP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너무 뻔하게 들리거나 쉽게 질리기 쉬운 장르인 하드코어 테크노를 장난과 진심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직설적이고 매력적으로 풀어내는 앨범이고, 너무 쉽게 쏟아내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좋게 들리는 것 같은 음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작들에 비하면 조금 더 진지해진 분위기가 있는데 그게 이 짧고 굵은 EP를 잘 감싸고 있네요. 폭발적으로 밀어치는 "Scee", "9mm" 같은 곡들도 훌륭하고, "Badthiings (RIP Avicii)"의 애잔한 마무리도 훌륭합니다. "Europaträume"의 뮤직비디오는 올해 가장 인상깊게 본 뮤직비디오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전작이었던 앨범 [ULTRAKUNST]도 좋은 곡들이 있었지만, 역시 이 쪽 장르는 EP 정도의 길이로 간단하지만 화끈하게 몰아치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많은 하드코어 테크노가 그렇듯 언뜻 듣기에는 쉴새없이 강렬하게 밀어붙이나 자세히 들어보면 안쪽은 상당히 단순한 편인데, [Goodbye Salò]는 오히려 그 단순함이 더 좋게 느껴지는, 훌륭한 센스로 잘 만들어낸 EP입니다. 여담이지만 앨범 커버아트를 정말 잘 뽑아내는 것 같습니다. 이번 EP 커버도 좋네요.
뉴욕 기반의 음악가이자 Against All Logic, Darkside 등으로도 유명한 Nicolás Jaar의 더블 앨범입니다. 라디오 연극 [Archivos de Radio Piedras] 용으로 만들었던 음악들을 가지고 다듬어서 앨범으로 발매했다고 하는데, 이 연극 [Archivos de Radio Piedras]은 "Salinas Hasbún"이라는 가상의 인물의 실종과 그를 찾아나서는 여정, 그 여정과 관련된 수수께끼의 아나키스트 단체 "Las 0cho"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Nicolás Jaar 특유의 끝을 알 수 없이 먹먹한 분위기가 잘 살아 있는 앨범으로, 칠레와 팔레스타인의 뿌리를 가진 그가 풀어내는 음악은 콩키스타도르에서부터 식민화, 피노체트, 정착촌 문제, 인티파다, 하마스 전쟁까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온갖 억압과 폭력의 잔상이 별빛만이 고요히 비추는 깜깜한 밤의 풍경 속에서 떠돌아 다니는 것만 같은 음악들입니다. 머리가 잘린 채로 도망치거나 절벽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원시적인 벽화로 그려낸 것 같은 앨범 커버 아트 그대로의 분위기인 앨범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 속에서도 나름 다양한 느낌을 선보인다는 것인데, "Rio de las tumbas"의 흥겨운 라틴 팝에서부터 "SSS"의 폭력적인 노이즈까지의 넓은 스펙트럼이 전부 특유의 '고요하지만 먹먹한 밤'의 분위기 속에 잘 녹아들어 있습니다. 시끄럽지만 소름끼칠 정도로 조용하기도 하고, 공허하고 허무하지만 또 정말 아름답기도 합니다.
폴란드의 포스트-하드코어 밴드(였던) ||ALA|MEDA||의 앨범입니다. 몇년 전 [Czarna Woda]를 듣고 토속 느낌도 나면서 나쁘지 않은 독특한 분위기의 노이즈 록/포스트-하드코어라는 생각을 하고는 한동안 잊고 지냈었는데, 이 앨범이 눈에 띄어 재생해 보자마자 바로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시작부터 Hi-NRG 디스코 느낌의 강렬한 전자음을 쏟아내며 사방으로 리듬을 두들기는데, 다소 뜬금없지만 아프리카 리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여기에 재즈/잼 연주 스타일까지 얹어가며 일종의 퓨전 음악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폴란드 포스트-하드코어 밴드가 아프리카 리듬으로 댄스플로어 음악을 한다는 뭔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짬뽕같은 컨셉이지만 재밌는 건 꽤 잘 한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리듬과 클럽/댄스 음악을 연결시키는 거야 예전부터 많이 있어 온 시도이지만, 이 앨범은 나름의 스타일을 가지고 이 퓨전을 자기만의 버전으로 잘 빚어내고 있습니다. 올해 가장 신나게 들은 앨범들 중 하나입니다. 확실히 폴란드가 유럽권에서 음악 강국이긴 한 것 같네요.
Mariam Rezaei는 잉글랜드 출신의 음악가로 턴테이블을 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Fractured]는 턴테이블리즘 앨범이라고 하는데, Peter Gabriel의 3번째 LP 커버를 장난으로 따라한 것 같은 커버처럼, 하고 싶었던 온갖 짓거리들을 자기 마음대로 다 해보는 것 같은 앨범입니다. 첫 곡 "Weirdo Club Musics"부터 미리 계산하거나 작곡을 한 다음에 그걸 따라간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그때그때 하고 싶은대로 다 쏟아내고 갈기는 느낌인데, 그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 또 괜찮습니다. "Sines"나 "Vengabussed"같은 뜬금없는 곡도 의외로 앨범 내에서 좋은 순간들로 다가오네요. "Cut"은 3인조 밴드 Mopcut의 음향 테스트 연주를 가져다가 조각내고 여기저기 기워서 재구성한 곡인데, 그냥 막 만든 것 같은데도 노련한 아방가르드/프리재즈/노이즈 밴드가 각잡고 제멋대로 연주하는 것처럼 들리는게, 센스가 훌륭합니다. "Slipping"과 "Animosity"의 마무리는 언뜻 Ground-Zero의 [Revolutionary Pekinese Opera]의 마무리가 생각나기도 하는데, Ground-Zero의 한없이 절제된, 굉장히 명상적인 마무리라기 보다는 그냥 되는대로 한바탕 다 쏟아내고 난 다음의 편안함 같은 느낌입니다. 앨범 소개글에서 펑크, 브레이크코어, 일렉트로어쿠스틱, 유로댄스, 아방가르드 록, 그라임, 힙합, 프리 노이즈 등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음악들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부분들을 떠올리면서 턴테이블을 마음가는대로 자유롭게 학대한 것 같은 앨범이고, 그게 이 앨범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올해 가장 재미있게 들은 '실험적' 앨범입니다.
미국 언더그라운드와 '실험적 음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음악가 Jeff Witscher와 Jack Callahan이 결성한 2인조 프로젝트 Callahan & Witscher의 앨범입니다. 좀 웃긴, 대놓고 옛날 스타일을 패러디한 커버처럼 앨범 또한 대중음악에 대한 패러디라고 할 수 있는 음악들을 담고 있습니다. "Boiler Room"같은 가사는 어떻게 보면 좀 너무 뻔하게 대중음악 산업계를 비꼬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앨범의 진가는 패러디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을 옛 대중적 스타일을 상당히 잘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프로듀싱/마스터링을 거친 깔끔한 기타 연주와 리듬은 LA 해안가라던가 여름날의 미국 로드 트립을 생각나게 하는, 팝펑크의 흥겨운 분위기를 제대로 연출하고 있고, 솔직히 듣기에 상당히 신나는 음악입니다. 거기에 얹혀진 맥아리라고는 하나 없이 정색한 눈빛으로 읊조리는 듯한 보컬은, 뻔하게 느껴질만한 가사들에 독특한 매력을 더해줍니다. 은근히 음향이 좀 비어있는데 그것도 단순하게 매력적이네요. Good Charlotte이나 Green Day, Sum 41 같은 다소 '말랑한' 음악으로 입문했다가 Sonic Youth 같은 밴드를 거치며 '실험적' 음악으로 넘어갔던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만한 요소가 다분한 앨범이며, 여러 맥락들을 무시하더라도 음악 자체만으로도 잘 만든 좋은 앨범입니다. 예전에 좋아했던 음악들에 대한 진심도 상당히 담겨 있는 것 같네요. "Won't Let You Go", "Long Drive" 등 음악에 대한 애증과 회한이 담담하게 담긴 가사들 전부 한번 돌아볼 만한 가치가 있지만, 특히 "The Value of Music"의 가사는 음악에 열광했던 팬이라면 움찔할 만한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But let's be honest, who wants to talk about music, anyway?"
브라질의 25세 청년 Paulo Vitor Castro의 프로젝트 Caxtrinho의 첫 LP [Queda Livre](자유낙하) 입니다. 삼바와 사이키델릭 록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다양한 것들이 복잡하고 어지럽게 얽혀들지만 그 난잡함 속에 묘한 매력이 쉴새없이 뿜어져 나오는 훌륭한 앨범입니다. 개인적으로 브라질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이 없고, 음악이라고 해도 Heitor Villa-Lobos의 음악들, Antônio Carlos Jobim의 유명한 곡들, Metá Metá와 Juçara Marçal 정도 밖에는 모르는데, 그 특유의 정서가 공유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한밤중에 아마존의 깊은 정글 속에서 길을 잃고 헤메는 것 같다가도, 화창한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기타 한 대 들고 흥겹게 연주하는 것만 같다가도, 또 찌는 듯 더운 여름에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모인 인파 속에서 카니발의 열기에 취하는 것 같기도 한 앨범입니다. 삼바 답게 리듬파트가 아주 매력적이지만, 확실하게 때려주는 드럼과 고전 사이키델릭 록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신디사이저/Rhodes, 제대로 불어주는 관악기도 멋집니다. 리우데자이네루가 이런 느낌일까 싶네요.
2019년에 [The Sacrificial Code]로 반향을 일으켰던 작곡가/오르간 연주자 Kali Malone의 신작입니다. 늘 그랬듯이 긴 호흡을 가지고 천천히 진행하는데, 오르간, 금관악기 밴드, 합창단의 세 조합을 가지고 몇 가지 간단한 주제들을 아주 조금씩 변화시켜가며 느릿하게 끌고 가는 앨범입니다. 애초에 무겁고 길게 진행하는 음악이고, 계속 똑같은 짧은 주제가 반복되는 것이 단조롭게 들리기도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레고리안 성가나 바로크 오르간 연주곡들처럼 청자의 명상과 성찰을 유도하기에 최적인 음악이기도 합니다. 어떤 영원성, 찰나, 신성함이 떠오르는 아름다운 앨범이지만, 이 신성함은 교회라던가 사원 같은 장소의 신성함이 아닌, 커버 아트에서도 보여지는 버려진 콘크리트 폐허의 신성함인 것 같습니다. 아무도 없는 외딴 장소에 있는, 철거된 건물들의 폐허 속에서 조용히 홀로 있다 보면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바로 이 앨범에서 전달하는 그 기분이 아닌가 싶네요. 안 맞을 때에는 솔직히 지루한 앨범이지만, 좋게 들릴 때에는 정말 훌륭한 앨범입니다.
Frank & Tony는 두 명의 브루클린 출신 DJ Francis Harris와 Anthony Collins가 2012년에 결성한 2인조 프로젝트로, 이 앨범이 프로젝트의 두 번째 LP입니다. 많이 절제된, 반복적이고 큰 변화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것 같은 하우스/테크노를 1시간이 넘게 선보이는 앨범인데, 나쁘게 보면 지루해지기 쉬운 스타일인데도 불구하고 곳곳에 섬세한 뉘앙스 변화를 주면서 오히려 통일감을 가진 멋진 앨범으로 빚어냈습니다. 피쳐링도 과하지 않게, 하지만 확실한 매력 포인트를 주는 식으로 들어가 있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앨범의 흐름이 처음부터 끝까지 부담없이 듣기에 좋은 앨범입니다. 앨범 커버도 그렇고, "Olympia"의 뮤직비디오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어떤 아련함이 어려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이를 먹어버린 '클럽 키드'들이 과거를 돌아보는 것 같기도 하고... "Continuity"는 앨범의 주제라고 할지, 두 멤버들의 생각이라고 할지를 짧은 인용구 샘플로 잘 담아낸 멋진 마무리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앰비언트 느낌의 하우스/테크노'라는 설명이 붙은 음악을 들을 때, 바로 이런 앨범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혼성 2인조 YUKO의 멤버였으며 현재는 솔로로 활동중인 우크라이나 음악가 Stas Koroliov의 두 번째 솔로 LP입니다. 본격적인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발매되었었던 첫 앨범 [O_x]에서 방황하며 분노를 쏟아내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히려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며 제대로 된 결말도 안 보이는 지금 이 시점에서 이런 재즈 록을 선보이는지, 처음에 들었을 때에 정말로 이게 뭔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앨범입니다. 인터뷰에서 '라운지 재즈 음악' 운운할 때만 해도 그냥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이런 음악을 만들었네요. "1991" 같은 곡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곡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전쟁 발발 직전의 온갖 음모론과 진위여부를 알 수 없는 뉴스들이 범람하고 한 치 앞도 안 보였던 상황이 끝나고, 오히려 전쟁이 정말로 발발하게 되며 많은 것이 명확해지게 된 것을 바라보는, 그런 심경을 담은 것 같기도 합니다. 앨범 전체로 보면 조금 처지는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만, 어쩌면 전쟁이라는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오히려 이런 부드러움이 더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리투아니아의 '얼터너티브 일렉트로어쿠스틱' 2인조 Ambulance on Fire의 2번째 LP입니다. '얼터너티브 일렉트로어쿠스틱'이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첫 번째 LP의 연장선 위에서 클럽 느낌의 전자음악을 기반으로 여러 오묘한 맛을 더한 '아트 팝'스러운 음악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감초처럼 등장하는 플루트 연주도 잘 어울리고, 무엇보다도 "The Big Sad"나 "Bermuda" 같은 곡에서 잘 드러나는 특유의 센스, 그 답답하게 부드럽고 좀 기분 나쁘게 뭉툭한 그 느낌이 매력적인 앨범입니다. 군데군데 The Knife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보다 덜 진지하고 더 장난스러운 The Knife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영어 가사 말고도 모국어인 리투아니아어로 부르는 노래도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네요. 그냥 제가 개인적으로 Paavoharju나 Vágtázó Halottkémek 처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가사더라도 각 언어 특유의 느낌이 음악에 묻어나오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첫 LP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던 잉글랜드의 포스트펑크 밴드 The xx의 핵심 멤버이자 DJ로도 활동중인 Jamie xx의 2번째 솔로 LP입니다. [In Colour] 보다 더 직설적이고 더 신나게 달리는 앨범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무난하게 진행되며 곳곳에서 Jamie xx의 DJ '짬'이 느껴지는, 잘 빠진 앨범입니다. 크게 흠이 잡히거나 모자란 부분이 없지만,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Baddy On The Floor", "Life", "All You Children"같이 가장 떠들썩하고 흥겨운 곡들입니다. 부담없이 듣기에 좋은 하우스 앨범이지만 달리 말하면 큰 특색도 딱히 느껴지지는 않는 앨범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듣기에 좋은 앨범인 것은 분명합니다. 음향적으로도 훌륭하게 프로듀싱/마스터링이 되었고, 각각의 곡들이나 앨범 전체의 전개도 이상하거나 막히는 부분 없이 청자를 만족시키는 좋은 앨범입니다.
호주 멜버른의 음악가 Uboa의 새 LP입니다. 2019년의 앨범 [The Origin of My Depression]을 괜찮게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 앨범도 꽤 괜찮더군요. 기본적으로 파워 일렉트로닉스/데스 인더스트리얼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이번 앨범에서는 좀 더 앞으로 나아가 나름의 변화를 꾀한 흔적이 보입니다. 공허하고 절망적인 앰비언트라던가 Isis같은 밴드가 생각나기까지 하는 부드러운 노이즈의 광활한 파도 등 여러 매력적인 부분들이 존재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번 앨범에서는 "Gordian Worm"이나 "Sleep Hygiene"에서 들리는 인더스트리얼 메탈 느낌이 가장 멋지게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스타일은 좀 많이 다르지만 The Body의 [I Shall Die Here]가 생각나기도 하는 앨범이었습니다. 파워 일렉트로닉스나 하쉬 노이즈 쪽은 뻔해지고 지루해지기가 너무 쉬운 장르인데, 아직까지도 이 쪽에서 나름대로 여러 시도를 하며 많은 것들을 표현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개인적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담이지만 Uboa는 앨범 제목과 커버를 정말 잘 뽑는 음악가들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Impossible Light"이라는 앨범 제목 선정은 센스가 좋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멋진 제목 선정이고, 커버도 앨범 제목에 걸맞게 잘 뽑아냈네요.
작년 [The Ceiling Reposes]로 멋진 일렉트로어쿠스틱 콜라주 앨범을 선보였던 시카고 기반의 음악가 Lia Kohl의 새 앨범입니다. 전작과 비슷한 콜라주 기반 음악을 선보이고 있는데, 특기할 만한 점으로 이번 앨범은 "Normal Sounds"라는 제목처럼 일상의 소리들을, 특히 자연적인 소리가 아닌 인간과 인공물의 소리들을 기반으로 만든 앨범이라고 합니다. 전작이 화창하고 아름다운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다소 방향을 틀어 좀 더 도시적인 분위기, 서늘한 콘크리트와 가로등의 불빛, 한산한 새벽 공항 안에서 여러가지 기계들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그런 식의 분위기를 가진 앨범입니다. 실제 악기 연주와 일상적인 음향들을 버무리는 능력이 여전히 탁월하며, 특히 "Car Alarm, Turn Signal"의 미묘한 전주, "Car Horns"에서 Patrick Shiroishi의 아련한 색소폰 연주와 이 주변을 맴도는 키보드 소리가 눈에 띄네요. 잘 보면 메모리 폼 매트리스를 고무줄로 묶어 의자 위에 얹어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보다보면 또 뭔가 있어보이는 작품 같은 느낌의 커버 아트처럼, 일상적인 소리들과 간단한 연주이지만 하나로 엮이며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앨범입니다. 하지만 뭐랄까 나쁘게 보자면 전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앨범입니다. 좋게 보자면 여전히 잘 빚어내고 있는 음향 콜라주입니다만...
2021년 멋진 신스팝 앨범 [Mercurial World]로 첫 LP를 선보였던 플로리다 출신의 혼성 2인조 Magdalena Bay의 새 LP입니다. 첫 LP도 앨범 전체적으로 공을 들였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번 LP도 개별 곡 수준에서도, 앨범 전체 수준에서도 완성도가 상당히 뛰어납니다. 전작과는 스타일을 조금 바꿔서 좀 덜 신스팝스럽게, 실제 악기 느낌 음향을 좀 더 많이 사용했는데 구성도 딱히 허전한 느낌 없이 탄탄하고, 특히 리듬파트가 인상적이네요. 수록곡 하나하나 매력이 살아있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없이 한 편의 영화처럼 잘 흘러가는 좋은 앨범입니다. 특히 첫 곡 "She Looked Like Me!"와 마지막 곡 "The Ballad of Matt & Mica"가 수미쌍관 구조로 연결되며 마무리되는 건 앨범에서 가장 멋진 아이디어인 것 같습니다. 밴드캠프 프로필 사진에 나온 두 멤버들이 입은 은빛 재킷/드레스처럼 흐릿하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훌륭한 앨범입니다. 문득 들리는 가사들도 매력적이네요.
===================== 가장 좋게 들었던 음반들 =====================
올해는 어쩌다보니 일본 음악을 자주 듣게 되었습니다. 일본쪽 스타일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아닌데, 명반들을 다시 들어보니 명반은 과연 명반이다 싶더군요. Fishmans의 [Long Season], Capsule의 [Fruits Clipper], Boat의 [Roro], Ryuichi Sakamoto의 [Thousand Knives], Satanicpornocultshop의 [Takusan No Ohanasan]을 많이 들었습니다. 일본 음악 특유의 계절감이라고 해야 할지, '여름 느낌'이 좋게 와닿았던 한 해였습니다.
그리고 또 어쩌다보니 전자 음악을 좀 듣고 지냈습니다. 저도 나이를 먹었는지 "쌍팔년도 일렉트로닉"에 귀가 많이 가더군요. Underworld의 [Dubnobasswithmyheadman], 808 State의 [Ninety], Orbital의 [In Sides], The Orb의 [Adventures Beyond the Ultraworld]를 많이 들었습니다. 특히 Underworld는 예전엔 왜 그냥 지나쳤을까 싶을 정도로 괜찮더군요. 예전에는 굳이 비교하자면 The Chemical Brothers나 The Prodigy에 손이 훨씬 더 많이 갔었는데, 아무래도 사람이 늙어가면서 변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