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작곡가 Simeon ten Holt의 미니멀리즘 역작인 [Canto Ostinato]를 Nomo라는 퓨전 재즈 밴드의 멤버인 Erik Hall이 혼자서 직접 해석하고 연주해 담아 낸 앨범입니다. Erik Hall이 기획하고 있는 '미니멀리즘 3부작'의 두번째 앨범인데, 솔직히 첫번째 앨범이었던 Steve Reich의 [Music for 18 Musicians]은 제 취향에 그렇게까지 와닿지는 않았습니다만, 이번 앨범은 정말로 아름다운 앨범이네요. 아름답고 수려하게 흘러가는 원곡을 DIY 느낌이 물씬 풍기게 재구성했는데, 그 특유의 DIY 느낌이 너무나도 잘 어울립니다. Erik Hall의 말에 따르면 "따뜻한 느낌"을 주는 키보드들을 직접 골라서 연주했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따뜻하면서도 고요한 골방에 혼자 앉아서 좋아하는, 하지만 어딘지 좀 낡은 키보드들을 놓고는 무심하게 물 흐르듯이 연주하는 것만 같은 분위기입니다. 미니멀리즘 곡들은 조율이 잘 된 선명한 악기들로 연주하고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Hi-Fi 녹음을 해야 맛이 산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앨범은 어쩌면 정 반대라고 할 수 있을 분위기로도 원곡을 훌륭하게 살려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 같습니다. Hammond와 Rhodes 같이 '클래식이 아닌' 악기들로도 멋지게 [Canto Ostinato]를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직접 선보여 준 앨범입니다. 둔탁하지만 부드럽고 따뜻하게, 오래 된 카페트처럼 아래에서 받쳐 주다가도 반짝거리거나 찰랑거리기도 하는 Hammond와 Rhodes, 수정처럼 아름답게 울려퍼지는 Steinway, 여기에 건반을 누르는 소리라던가 악보를 넘기는 소리 같은 잡음들까지 모든 요소들이 세심하게 연주되고 다듬어져 멋진 분위기를 연출해냅니다. 올해 가장 아름다운 앨범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마지막이 될 3번째 앨범이 무척 기대되네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시도들이 더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웨일스 출신 젊은 예술가 Salvia의 첫 LP입니다. 기묘하게 불쾌한 느낌을 주는 커버에서부터 잘 보이듯이 Björk, Grimes, Arca, Fever Ray 등등 '기괴한 팝' 음악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는 앨범이지만, [001011]은 자신만의 스타일이 제법 잘 살아있는 앨범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답답한 신디사이저와 독백 느낌의 잔잔한 노래로 시작하는 "001011"에서부터 독특한 느낌이 잘 보여지는데, 은근히 전자음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특히 보컬의 질감과 연출이 뛰어납니다. '빡센' 곡이나 조용한 곡이나 상관없이 전반적으로 기력이 완전히 소진된 듯한 무력한 인상을 주는데, 이게 특유의 플라스틱 무기질 질감과 결합하여 Salvia만의 기이한 분위기를 훌륭하게 살리는 것 같습니다. 비인간적인 느낌이 매력적인데, 예를 들어 "Kiss"같은 곡에서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팝의 느낌을 흉내내며 키스와 섹스를 이야기하지만, 이게 일반적인 인간의 섹스라기보다는 Merzbow같은 음악가들이 선보였던 본디지/라텍스/트랜스휴머니즘 등으로 점철된 비인간적 성욕의 느낌을 줍니다.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앨범이 진행되면 될 수록 비인간적인 외면이 오히려 더 감정적인 내면을 강조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풍기기도 하는 것 같은게 또 매력적이네요. "Stargirls"의 인더스트리얼 풍, "Lunchbox"의 힙합 느낌, "The Game"의 '상큼한' 팝, "Pond"의 Xiu Xiu 느낌 포크까지 전부 Salvia의 분위기로 소화해내고 있으며, 특히 전반부의 진행은 굉장히 매끈하고 인상적으로 흘러가는 앨범입니다. 전반부에 비하면 후반부는 조금 늘어지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 또 듣다 보면 "Going Away", "Pond", "Outpatient" 등 차분한 곡들 사이에서도 여러 다른 스타일을 시도하는게 듣기에 나쁘지 않고, "Tera Toma"같은 곡에서 뜬금없이 플루트 멜로디와 함께 무슨 Einstürzende Neubauten 스타일의 인더스트리얼 퍼커션을 사용하는 모습도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마지막 곡 "The Man Who Watches Me Sleep"에서 등장하는 의외의 금관악기 파트는 어딘가 동양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금속성 보컬과 퍼커션에 잘 어울리는, 오묘하면서도 매력적인 부분인데, 느낌은 좀 다르지만 Radiohead의 "Life In a Glasshouse" 생각도 나네요. 가사 또한 평범한 듯 싶다가도 Salvia의 무기질적인 보컬과 잘 어울립니다. "Money" 같은 곡은 좀 깨는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만, "Summer"의 단순한 반복 후렴구와 후반부의 독백은 Public Image Ltd의 [Metal Box]가 생각날 정도의 섬뜩함을 보이는 멋진 보컬입니다. 음악 외적으로도 기괴한 외계인/비인간의 이미지를 선보이는 감각이 대단한데, 인스타그램을 보면 이미지 하나하나가 압도적이네요. "Posthuman"이라는 한 수록곡의 제목처럼, '인간이라는 생물'에서 선을 넘어 어딘가로 나가버린 존재를 음악으로 묘사해 낸 멋진 앨범입니다. 인더스트리얼 느낌의 음향과 무기력한 보컬에서 어째서인지 Portishead의 [Third] 생각도 나고... 니헤이 츠토무 작품 [BLAME!]의 '규소생물'들이 음악을 하면 이렇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2000년생이라고 하는데, 앞으로가 굉장히 기대되네요. 여담이지만 "Lunchbox"에서 자기를 욕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샘플로 쓴 것은 정말로 멋진 대응인 것 같습니다.
Mgzavrebi는 2006년 조지아의 배우이자 음악가 გიგი დედალამაზიშვილი(Gigi Dedalamazishvili)가 결성한 밴드라고 합니다. 어쩌다 보니 우연하게 알게 되어 들어본 밴드인데, 이 앨범 [Kamara]는 제법 상큼하게 시작하는 멋진 포크-팝-록 앨범입니다. "Western"같은 곡에서 바로 들리는 것처럼 앨범 전반적으로 촌스럽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의 '뽕끼'가 흐르는 앨범인데, 이 뽕맛이 이상할 정도로 중독성이 있네요. 은근히 스펙트럼이 넓은데, 비교적 평범한 포크 록 곡들에서부터 나름대로의 '디스코' 곡 "Western", 포스트록 느낌도 드는 "Waltz", 심지어 유로비트 생각마저 드는 "Tsota Tsota"까지 전부 다 잘 합니다. 이제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밴드라서 그런지 전체적인 밸런스도 잘 잡혀 있습니다. 앨범 전반적으로 뭐랄까 조금은 구성진(?) 느낌의 독특한 정서가 흐르는데, 이게 캅카스 지역의 정서인지 아니면 Mgzavrebi 특유의 정서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런 '떼창'이랄까, 감상적인 정서를 개인적으로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는 편인데, 이상하게 이 앨범은 귀에 착착 붙습니다. 가사적으로는 짧은 운율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O, Moda Moda"같은 곡 처럼 선창-떼창 코러스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이것 또한 조지아어의 특성인지 밴드의 특징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상당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뜻도 모르는데 '따노 따따노 가나나투까르고' 같은 후렴구들이 저절로 입에 붙네요. 간간히 등장하는 귀여운 관악기도 찰떡같습니다. 앨범의 마무리 "Ale" 또한 제가 일반적으로는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이 앨범에서는 긍정적이고 밝은 느낌으로 멋지게 마무리하는 곡입니다. 앨범 커버가 멋진데, 딱 커버 같은 느낌의 앨범입니다. 인터뷰에 따르면 COVID19 라던가 우크라이나 전쟁 등 여러 안좋은 상황 속에서도 음악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 보려고 만든 앨범이라고 하는데, 정말 멋진 앨범입니다.
[1000 gecs]로 많은 주목을 이끌었었던 '하이퍼팝' 밴드 100 gecs의 4년만의 새 앨범입니다. 전작은 다소 장난스럽기까지도 한 전자음들을 떡칠한 채로 비교적 최근의 10대 음악을 반영하는 것 같은 앨범이었다면, 이번 앨범은 좀 더 과거로 가서 90년대~00년대~10년대 초반까지의 10대 음악들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정리한 것 같은 앨범입니다. 팝 펑크, 스카, 이모, 뉴 메탈, 브로스텝까지 추억의 밴드들과 이름들이 머릿속을 지나가는데, 다양한 스타일들을 섭렵하면서도 두루두루 다 잘 합니다. 단순한 복고풍을 넘어서 자신들이 정말로 좋아했었던 밴드들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탐구해서 스스로의 스타일로 재현해 내는데에 성공한 듯한 앨범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장난스럽고 진지하지 않은 것 같은 분위기지만, "Frog On The Floor"나 "I Got My Tooth Removed" 처럼 맥빠지는 것 같다가도 생각해 보면 좀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한 가사들도 그렇고, 음악 전체적으로 사실은 정말 진지하게 공을 들여가며 만든 앨범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커버 사진에서 보이는, 배에다 해 놓은 커다란 별/음표 문신처럼 겉보기에는 이렇게까지 진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음악에 정말로 진심인 밴드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앨범을 마무리하는 곡 "mememe"는 올해 최고의 곡들 중 하나로 뽑기에 부족함이 없는, 거의 Wire가 생각날 정도로 단순한 요소들만을 가지고도 훌륭하게 완성해 낸 명곡입니다. Dylan Brady의 프로듀싱 능력도 탁월하게 빛을 발하고, Laura Les의 보컬 또한 훨씬 더 발전한 느낌을 보이는 것이 전체적으로 음악적 성숙을 이룩한 것 같습니다. 30분도 안 되는 길이지만 나름 잘 짜여진 구성으로 순식간에, 매끄럽게 흘러가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끝내는 느낌이 듣기에 좋네요. '하이퍼팝'이라는 장르가 이미 유명무실해진 부분도 없지 않겠습니다만, 굳이 올해의 하이퍼팝 앨범을 뽑자면 [10,000 gecs]가 의심의 여지 없이 뽑히지 않을까 싶네요.
이탈리아의 음악가 Iosonouncane와 Paolo Angeli의 합작 라이브 앨범입니다. 2018년에 진행되었던 공연의 녹음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앨범이라고 하며, Iosonouncane는 상대적으로 더 '노래'에 가까운 부분을, Paolo Angeli는 '즉흥연주'에 가까운 부분을 맡아 엉성한 틀 위에서 자유롭게 흘러갔던 공연이라고 합니다. 상당히 독특한 앨범으로, 초반에 Dirty Three가 생각나기도 하는 느낌으로 분위기를 쌓아나갈 때만 해도 괜찮긴 하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Summer on a Spiaggia Affollata"에서 멋진 배음 창법 이후로 보여주는 정서는 말 그대로 압도적이네요. 뜨거운 여름 햇살의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밝음과 그림자 속의 편안한 어두움, 육체를 터뜨려버릴 것만 같은 에너지와 부드럽고 안락하게 감싸는 좌절이 복합된 것만 같은 독특한 느낌입니다. "Andira"의 어지럽게 얽혀가는 기타와 현악 또한 뭐랄까 Antonio Vivadi의 "사계"의 여름보다는 Isaac Albéniz의 "Córdoba" 라던가 Astor Piazzolla의 "Verano Porteño" 같은 여름에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쩐지 스페인 음악이 더 많이 생각나는데, 제가 이탈리아 음악을 많이 몰라서 그런 느낌을 받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Banco Delle Sentinelle"에서는 EAI 같은 장르가 생각나는 즉흥연주를 선보이다가도 "Carne"에서는 스페인의 플라멩코나 Migala같은 밴드들이 생각나는 따뜻하게 어두운 포크를 보여 주며, "Galena"에서는 또 다시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기타 연주가 뿌려진 기묘한 포스트-인더스트리얼을 펼쳐내는데, 얼핏 어울리지 않을 듯한 재료들을 하나의 줄기로 엮어내어서는 익숙한 듯 싶으면서도 생경한 풍경을 1시간 내내 펼쳐놓아내는, 놀라운 라이브 앨범입니다. "Summer on a Spiaggia Affollata"나 "Giugno" 같은 곡에서 보여주는 뭐랄까 까슬거리는(?) 보컬 또한 앨범의 독특하고 복잡한 정서에 잘 어울리는 멋진 보컬이네요. 'Jalitah' 혹은 'Galite' 제도는 사르데냐 섬과 튀니지 사이에 위치한 작은 바위섬들이라고 하는데, 대양 한 가운데에 나무하나 없이 깎아지른 바위만 떠 있는 섬의 느낌이 이런 정서일까 싶습니다. 앵콜곡이라고 할 수 있을 "Nâr"에서는 Coil이 생각날 정도로 (좋은 의미로) 복잡한 연주를 선보이는데 이것도 또 잘 하네요. '작곡'과 '즉흥'이 잘 결합한 훌륭한 공연이며, 공연의 압도적인 느낌을 잘 재현해 낸 좋은 라이브 앨범입니다.
L.A.의 노이즈 록 밴드 Sprain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LP입니다. 무슨 Swans도 아니고 1시간 반이 넘는 총 길이에 25분 가까이 되는 수록곡도 2개나 있는데다가 얼핏 듣기에는 상당히 난해하다거나 좀 '있어 보이는 척'을 하는 것 같게도 느껴지는 앨범인데, 보컬 Alex Kent의 말마따나 다 듣고 나니 굉장히 진실된 앨범이 맞는 것 같습니다. "Man Proposes, God Disposes"와 "Reiterations"는 멋진 노이즈 록으로 '일반적이다'라고 할 수 있을 범주에 들어서는 곡들이지만, "Reiterations"의 후반부에서부터 분위기를 전환하더니 "Privilege of Being"부터는 본격적으로 현대음악 / 앰비언트 / Electroacoustic 등이 생각나는 특이한 분위기를 선보이면서 그 '일반적인 노이즈 록'과는 좀 다른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곳저곳에 등장하는 현악도 멋지나 특히 전자오르간의 사용이 상당히 훌륭한데, 바다처럼 맥동하는 배경 위로 온갖 전자/어쿠스틱 노이즈가 비명을 지르는 데 반하여 보컬은 완전히 지친 채로 힘없이 읊조리는 대조적인 느낌이 잘 살아있네요. 앨범 전체를 통틀어 압권이라 할 만한 "Margin for Error"는 Unwound의 "We Invent You"가 생각나는 기나긴 오르간 드론으로 시작하는 24분짜리 대곡인데, 달빛만 보이는 한밤중의 망망대해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언제 끝날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잔잔하다가도 휘몰아치기도 하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것 같은 막막함이 절절하게 담긴 멋진 곡입니다. 안개가 엄청나게 심하게 낀 인천대교에서 새벽에 혼자 차를 끌고 희미한 가로등 빛 아래에서 아무도 없는 도로를 달리는 느낌 같기도 하고... White Suns가 [Psychic Drift]에서 선보였던 막막함, Isis같은 밴드의 광활함이 생각나네요. 일렁이는 오르간 드론과 연극 느낌의 보컬이 분위기를 훌륭하게 쌓아올리는데, 어디선가 등장해 후반부의 분위기를 장악해버리는, 셰퍼드 음계(Shepard scale)같은 거대한 상승/하강 느낌과 미친듯이 두드려대는 드럼 연주도 멋집니다. 앨범의 2부는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시작하는데, 여기서는 독백 느낌의 보컬과 쓸쓸한 연주로 고독한 느낌을 훌륭하게 구현하네요. "The Commercial Nude"의 어쿠스틱 기타라던가 "The Reclining Nude"의 피아노 연주 같은, 노이즈 록이라기보다는 슬로코어에 가까운 부분들이 앨범 곳곳에 등장하면서 분위기를 잡으면서 '노이즈 록' 부분과 잘 조화를 이루는데, 사실 슬로코어라는 장르가 노이즈 록과 상당히 연결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당연하기도 한 듯 싶습니다. 또 다른 멋진 노이즈 록 트랙 "We Think So Ill of You"를 지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God, or Whatever You Call It"에서는 멋진 도입부 이후 늘어뜨린 템포 위에서 이런저런 것들이 등장하는데, 특히 후반부는 극의 마지막 장에서 주인공 혼자 남아 어두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미친 듯이 이런저런 일들을 떠올리다가 끝내 조용하고 허무한 독백으로 끝나는, 비극적 연극의 마무리 같은 곡입니다. 곳곳에 등장하는 노이즈 음향 조각들도 뭐랄까 여러 기억의 조각들을 상징하는 연극 무대 소품 같네요. 가사지에 '*Lamb Sings*'라고 표시되어 있는 최후반부의 보컬은 좀 과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가식 없는 진솔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Reiterations"의 후반부도 그렇고 "God, or Whatever You Call It"의 마지막 부분도 그렇고 혼란스럽지만 어쩐지 밝은 느낌이 드는 음향을 선보일 때가 있는데 그게 앨범 전반의 쓸쓸하고 고독한 정서를 더 강조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Radiohead의 "Motion Picture Soundtrack"같은 블랙 유머 느낌이 생각나기도 하고... 과장된 보컬 때문에 Alex Kent의 존재감이 대단하지만 다른 세 멤버 또한 훌륭한 기량의 연주를 선보입니다. 연주력 및 표현력이 이미 출중한 밴드가 어떤 '선'을 넘어 무언가 더 다른 것을 보여주려 노력한 끝에 만들어낸 훌륭한 노이즈 록 앨범이며, 너무 길이가 길어 선뜻 손이 안 가는 측면이 있기는 하나 막상 듣다 보면 길이가 그렇게 신경쓰이지는 않는 앨범입니다. "Privilege of Being"의 뮤직비디오도 그렇고, 앨범 전체적으로 한 편의 진심어린 연극을 본 것 같습니다. 음악적 느낌은 좀 다르지만 Unwound의 [Leaves Turn Inside You]라던가 Altar of Plagues의 [Teethed Glory and Injury], Dazzling Killmen의 [Face of Collapse], lowercase의 [Kill The Lights] 같은 멋진 앨범들이 생각나네요. 해체가 아쉬우나 Alex Kent의 성격을 볼 때 그렇게 멘탈이 강한 것 같지도 않고, 이런 정도의 앨범을 낸 다음에 밴드 활동을 지속하는 것도 힘들 것 같긴 합니다.
뉴욕 출신의 재즈 음악가 Steve Lehman과 프랑스의 실험적 재즈 빅 밴드 Orchestre National de Jazz의 협업 앨범입니다. 현대음악 그리고 특히 재즈는 거의 문외한에 가까워서 잘은 모릅니다만, 시원하고 경쾌한 드럼과 역동적인 베이스가 만들어내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리듬 위에서 재즈 풍으로 늘러붙는 관악기들이 잘 어울리는 멋진 앨범이네요. '스펙트럴리즘'(spectralism)은 이 앨범을 듣고 찾아보면서 처음 알게되었는데, 각각의 악기가 만들어내는 음향 스펙트럼과 이 스펙트럼 사이의 상호작용에 주목하여 음악을 만든다는 설명과도 같이, 묘하고 독특한 화음들이 앨범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특유의 화음들이 신비롭고 매력적인 분위기를 창조해냅니다. "39"의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 "Chimera"의 비브라폰과 전자음향의 상호작용에서 나오는 신비로운 울림, "Ode to akLaff"의 기괴한 전자음향과 화려한 드럼 솔로 등 곳곳에 멋진 순간들이 분포해 있으며, "Los Angeles Imaginary"와 "Jeux d'Anches"의 빅 밴드 느낌과 재즈 솔로 연주는 역동적인 폴리리듬 및 특유의 미묘한 화음과 놀라운 조화를 이루면서 제 안의 '재즈 빅 밴드'에 대한 선입견을 무너뜨렸던 곡들입니다. "Les Treize Soleils"는 플루트와 전자음향의 기이한 상호작용을 지나 어딘가 불안한 리듬의 흐름 위에서 독주 관악기들이 멋진 대화를 주고받는데, 현대적인 신고전주의 협주곡 같은 느낌이네요. "Speed-Freeze"는 파트 1에서는 불투명하게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오랜 빌드업을 거치며 '주제'라고 할 수 있을 연주가 언뜻언뜻 등장하는데, 이게 파트 2로 이어지며 앨범에서 가장 멋진 순간들 중 하나, 매끄럽게 흐르는 리듬 위로 자유롭게 등장하는 여러 솔로 연주들로 이어지며 같은 주제를 여러 악기로 번갈아가면서 터뜨리는, 멋진 곡입니다. "Le Seuil"은 또 전혀 다른 느낌으로 멋진 곡인데, 파트 1에서는 느린 템포로 음향들을 마구 흩뿌리면서 각각의 악기들 간, 그리고 실제 악기와 전자음향 간 상호작용을 선보이는데 이게 바람에 일렁이는 연기같은 묘한 매력이 있으며, 파트 2는 소박하지만 매력적인 리듬 위에서 미묘하게 변화하는 화음을 배경으로 깔고 '재즈 풍'의 솔로 연주들로 멋지게 앨범을 마무리합니다. 앨범 전체적으로 등장하는, 복잡하지만 매력적인 리듬 패턴들 때문인지 기하학적인 느낌도 드네요. 또한 밀물-썰물처럼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화음이 앨범의 곳곳에서, 금관악기부터 전자음향까지 구성을 다양하게 바꾸며 등장하는데 이게 앨범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에 크게 일조하는 것 같습니다. 스펙트럴리즘의 거장 Gérard Grisey의 대표작 "Partiels"의 화음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어째선지 Paul Hindemith의 곡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좀 많이 다르지만 Black Eyes의 [Cough]같은 앨범도 생각이 나고... 또한 흥미로운 부분은 앨범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전자음향인데, 인터뷰에 따르면 이 전자음향은 실제 악기와의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만들어져 때로는 배경 화음으로, 때로는 즉흥연주의 파트너로 활용되면서 의도적으로 실제 악기 연주와 구분이 잘 안 되도록 융합시켜 두었다고 합니다. "Chimera", "Le Seuil" 등 몇몇 곡들에서 실제 악기 - 전자음향의 상호작용이 언뜻 수면 위로 드러나 보일 때가 있는데, 불가사의한 매력이 있습니다. 회화로 치자면 Piet Mondrian의 추상화도 생각이 나지만 무엇보다도 커버 아트를 장식하고 있는 Julie Mehretu의 그림이 찰떡같이 들어맞는 그림인 듯 합니다. 딱 Mehretu의 그림들처럼, 추상적이고 무작위적이지만 규칙적이고 화려한 색채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구조체가 연상되는 앨범입니다. '실험적 빅 밴드'라고 하면 Fire! Orchestra가 딱 떠오르는데, 포스트록을 예로 들어보자면 Fire! Orchestra쪽이 Godspeed You! Black Emperor나 Mogwai 등에 가깝다고 한다면 이 앨범은 Slint, Tortoise 같은 밴드들에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재즈 밴드 느낌이 현대음악 풍에 이런 식으로 잘 어울릴줄은 몰랐습니다. 아주 멋진 앨범입니다.
시카고 기반의 음악가 Lia Kohl의 두 번째 LP입니다. 'Electroacoustic' 혹은 음향 콜라주라고 말할 수 있을 음악이 담겨 있는데, 아름다운 앨범입니다. 첼리스트로써 정식 교육을 받았던 배경 때문인지 본인의 첼로 연주 및 키보드 등 여러 악기 연주들을 담았으며, 여기에 추가로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라디오 샘플들, 그리고 새의 소리를 비롯한 여러 일상적인 음향들이라는 3가지 요소를 가지고 여기저기에 배치해 두었습니다. 처음에는 샘플링이 주가 되는 필드 레코딩 스타일의 앨범인가 싶었는데, 듣다 보니 악기 연주 및 음향의 구성과 배치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네요. 인상적인 순간들이 곳곳에 있는 앨범이며, "when glass is there, and water,"는 Karlheinz Stockhausen이라던가 Severed Heads 등등이 생각나는 다소 으스스한 합창 샘플링으로 시작해서 첼로와 새, 키보드가 서로 주고받는 상호작용으로 넘어가다가 마지막에는 우연히 녹음했다고 하는 트럭-새-닭이 나누는 대화의 순간으로 마무리하는, 멋진 곡입니다. "or things maybe dropping"에서는 비교적 잡혀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재즈 느낌도 살짝 가미하면서 풀어나가다가 바로 다음 곡 "the moment of zipper"에서는 구조를 버리고 키보드를 마구 두드려대면서 부드러운 첼로 연주와 대비시키는 것도 듣기에 좋네요. 일상을 보내며 느끼곤 하는 여러 순간들의 인상적인 순간들을 포착하여, 음향을 재료로 사용해 그 순간들을 시적으로 표현한다는 목표를 잘 달성해낸 것 같습니다. 예전에 맨해튼에 여행을 갔을 때 비가 많이 온 다음에 날씨가 개면서 햇빛이 아름답게 시가지를 비추는 모습을 인상 깊게 본 적이 있었는데, 저에게는 바로 그런 느낌을 주는 앨범이었습니다. 라디오 샘플 때문인지 자연은 자연인데 '도시의 자연'같은 느낌이 드네요. Takashi Kokubo의 90년대 'Ion Series' 앰비언트/뉴에이지 앨범들의 커버 같기도 한, '인공적 자연'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스타일은 좀 다르지만 Rachel's의 [Systems / Layers]나 Ryuichi Sakamoto의 [async]가 생각도 납니다. 출근길에 듣기 좋은 앨범입니다...
일본-스코틀랜드 혼혈의 캐나다인 예술가 Saya Gray의 두 번째 앨범입니다. 20분도 안 되는 짧은 길이의 EP인데, 그 길이에 말 그대로 온갖 잡탕이 다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다채로운 앨범입니다. 첫 곡 "DIZZY PPL BECOME BLURRY"부터 온갖 스타일을 이곳저곳에서 던져댑니다. 음향을 상당히 잘 다루고 적재적소에 잘 배치하는 것 같은데, 프로덕션/마스터링도 훌륭하게 되어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질감들이 자주 등장하더군요. 추억의 90년대 UK 전자음악가들 몇몇이 떠오르기도 하고... 동시에 첫 앨범의 'Folktronica'라던가 'Freak Folk' 같은 느낌도 여전히 풍기고 있습니다. 문득 Animal Collective의 [Sung Tongs], [Feels] 같은 앨범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Radiohead의 [Hail To The Theif]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2 2 CENTIPEDES"의 마지막 기타 리프처럼 여러군데에 꽤나 멋진 팝 아이디어들이 등장하는데, 이 아이디어들을 너무나도 쉽게 써버리고 바로 넘어가버리는 모습이 흥미롭습니다. 무언가 시작할 것만 같을 때에 던져버리고 다른 분위기로 전환하는 것도, 아쉽다기보다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네요. "PREYING MANTIS !"같은 좋은 팝 송과 ";)"같은 으스스한 분위기의 전자음악이 공존하는데 그렇게 어색하지도 않고, 산만하기는 하지만 그 산만함이 단점이라기 보다는 장점으로 다가오는 EP입니다. "ok FURIKAKE"의 행진곡 풍도 은근히 애수가 어린 멋진 마무리입니다. 이런 스타일은 자칫 잘못하면 난잡해지기 쉬울 것 같은데, 온갖 것들을 자연스럽고 매력적으로 잘 엮어내어 EP 길이로 깔끔하게 정리한 좋은 앨범입니다. 다음 앨범이 기대되네요. 여담이지만 뮤직비디오에서 첫 두곡을 라이브로 재현하는데, 정말 멋집니다.
'하이퍼팝' 계의 유명 음악가 underscores의 두 번째 LP입니다. 첫 곡 "Cops and Robbers"에서부터 시원하게 치고 나가는 앨범인데, 전작과는 좀 다르게 '메인스트림 팝' 느낌이 상당합니다. 여러 하이퍼팝 앨범들처럼 좀 기묘하다거나 'quirky'한 느낌보다는 잘 빠진 팝 펑크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와중에 나름대로의 개성도 유지하고 있는, 음악가로서 더 성숙한 것 같다는 인상을 주는 앨범이었습니다. 하이퍼팝의 껍질을 벗으니 괜찮은 미국 틴에이지 팝이 나오는 느낌인 것 같기도 하고... "Locals (Girls Like Us)"는 훌륭한 싱글로, 조금은 가벼운 느낌의 R&B 파트도 그렇고 시원하게 잘 만든 팝 펑크/댄스곡입니다. 앨범 전반적으로 꽤 스펙트럼이 넓은데 전부 미국적인 느낌이 강한 것도 흥미롭네요. "Old Money Bitch"같은 댄스 풍에서부터 "Duhhhhhhhhhhhhhhhhh"나 "You Don't Even Know Who I Am" 같이 The Smashing Pumpkins가 생각나기도 하는 서정적인 음악, "Horror Movie Soundtrack", "Uncanny Long Arms"처럼 앰비언트 느낌으로 쌓아올리다가 폭발시키는 곡들도 두루두루 잘 하는 편이며, "Geez Louise"는 컨트리/래그타임 풍까지 가미하며 전반부-중반부-후반부의 분위기 전환을 어색하지 않게 엮어낸, 앨범에서 가장 훌륭한 곡입니다. "Good Luck Final Girl"도 잔잔하고 장난스러운 느낌이면서도 동시에 사뭇 진지하고 단호한 듯한 매력적인 마무리로,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 같은 곡이기도 하네요. 하지만 앨범 전체적으로 조금 늘어지는 느낌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40분 내외로 끝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인트루이스 출신, L.A. 기반 여성 음악가 Slayyyter의 두 번째 LP입니다. Britney Spears와 Lady Gaga의 열성적인 추종자라는 설명에 딱 어울리는 여성 팝 음악을 담고 있는데, 자세히 들어 보면 은근히 스펙트럼도 넓고 전반적으로 다 잘 합니다. "Erotic Electronic", "Purr", "Plastic" 같이 처럼 KMFDM 느낌의 에로틱한 전자음악이나 Nicki Minaj, Cardi B 등등이 생각나기까지 하는 곡들과 "Memories of You", "Girl Like Me" 처럼 거의 Magdalena Bay 정도로 새벽처럼 반짝이는 곡들이 함께 등장하는데, 다 앨범의 전체적인 줄기에 잘 녹아들어 흘러갑니다. "My Body"의 테크노 풍 비트와 가창도 인상적이고, "Rhinestone Heart"는 진짜 90~00년대 음악이 생각나네요. 첫 앨범과는 상당히 달라졌는데, 음악적으로 고민도 많이 하고 성숙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앨범의 커버 및 첫 곡 "I Love Hollywood!"의 가사처럼, 화려하지만 퇴폐적이고 타락했지만 보석같이 빛나는 할리우드 연예계의 느낌을 음악으로 옮겨 놓은 듯한 분위기인데, Chateau Marmont에서 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진심으로 했다고 하는 말이나 스타퍼커 짓을 하기도 하고 당하기도 했었다는 말 등등을 보건대, 할리우드를 진심으로 탐구하며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명과 암 전부를 사랑하는 사람이 그려 낸 '할리우드의 초상' 같은 앨범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앨범의 커버 또한 Slayyyter 본인이 표현하려는 그 느낌, 퇴폐적이지만 어딘지 애수어린 그 느낌을 잘 표현한 멋진 커버입니다. 화려하고 방탕한 애프터파티, 그리고 그 애프터파티가 끝나고 난 후의 고요한 럭셔리 호텔 방 같은 음악입니다. 음악적 스타일은 많이 다르지만 Duran Duran의 명곡 "The Chauffeur"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다 벗고 거리를 활보하는 "Erotic Electronic"이나 라텍스 페티쉬 복장을 보여주는 "I Love Hollywood!" 등 뮤직비디오에서 은근히 막나가는 부분이 있는데, 종종 보이는 할리우드 스타들의 기행이 생각나면서 앨범의 분위기에 잘 맞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나이트 팝 앨범입니다.
L.A. 기반 재즈/훵크 팝 듀엣 Knower의 다섯번째 LP입니다. 처음 들었을 때에는 유튜브에 흔히 돌아다니는 '코딩할 때 듣기 좋은 로파이 재즈힙합' 리스트 같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결이 같은 부분은 있습니다만 이 앨범은 상당히 잘 만든 앨범입니다. 듣기 좋은 느낌으로 정신없게 흘러가는 재즈/훵크 연주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잘 어울리는 Genevieve Artadi의 보컬, Louis Cole의 독특한 유머 센스가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Knower도 활동한 지 15년이 넘어가는 듀엣인데, 그래서인지 Artadi와 Cole의 합이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무르익었다는 생각이 드는 앨범이네요. 각각의 수록곡 안에서, 그리고 앨범 전체적으로도 진행이 매우 자연스러우며 리듬을 가지고 마음대로 노는 느낌입니다. '진정성이 있다는 것이 꼭 진지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Cole의 말마따나 "I'm The President", "The Abyss", "Nightmare" 등등 여러 곡들에서 칩튠이나 컴퓨터게임 음악이 생각나는 유머감각이 드러나는데 이런 부분도 잘 어울리네요. "Real Nice Moment"의 신디사이저 멜로디, "Do Hot Girls Like Chords"의 기타 리프, "Ride That Dolphin"의 8비트 풍 키보드처럼 좋은 센스가 엿보이는 부분들도 괜찮고, 밴드가 가지고 있는 강한 DIY 성향으로 대부분을 집구석에서 스스로 처리해서 그런지 느껴지는 오밀조밀함과 합이 딱딱 맞는 느낌이 훌륭합니다. Young Marble Giants의 간결하고 아기자기하게 세련된 느낌과 Satanicpornocultshop의 정신없는 미학을 함께 잘 구현한 멋진 재즈/훵크 앨범입니다. "It Will Get Real"은 모든 작고 복잡한 조각들이 전부 잘 맞아떨어지는 멋진 곡이며, "Crash The Car"는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좋은 마무리입니다. 훌륭한 DIY 앨범이네요. 프로덕션/마스터링이 조금 더 선명하고 깔끔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DIY 특성상 그러기는 어려울 테고, 또 DIY 성향을 고수해 왔기에 지금처럼 좋게 들리는 부분도 있을 테니 별 수 없겠습니다...
말레이시아 화교 출신 DJ Tzusing의 2번째 LP입니다. 독특한 커버가 눈길을 사로잡는데, 앨범의 이름 '绿帽 Green Hat'의 의미, 아내가 외도를 하는 걸 하나도 모르는 채로 바깥으로 나도는 남자를 '초록 모자를 썼다'고 말하며 멍청하고 한심하게 바라보는 중화권 문화를 알고 나면, 대놓고 초록색 모자를 쓰고 있는 Tzusing의 모습이 도발적이기까지 한게 흥미롭네요. 첫 LP [東方不敗]에서 선보였던 '빡센' 인더스트리얼 테크노와 은근한 중국 느낌의 결합이 이번 LP에서도 보여지는데, 이런 개성이 듣기에 좋은 앨범입니다. 중국어 제목도 가지고 있는 곡들이 특히 매력적인데, "趁人之危 (Take Advantage)"에서 등장하는, [There Will Be Blood]에서 가져 온 '밀크쉐이크' 샘플은 주제면에서나 음향적으로나 앨범에 전반적으로 잘 어울리는 멋진 샘플이고, "偶像包袱 (Idol Baggage)"는 어쿠스틱 타악기 느낌의 리듬과 차갑고 높은 멜로디가 뮤직비디오에서 보이는 그 느낌, 거대하지만 차갑고 어두운 콘크리트 지하실 같은 느낌을 제대로 선보입니다. "孝忍狠 (Filial Endure Ruthless)"은 둔탁하고 강하게 밀어붙이면서도 Tzusing 특유의 음향적 질감, 깡깡(?)하면서도 서늘한 금속성의 질감을 잘 표현하고 있네요. 남성성, 가부장제, 상대적인 문화 등 기존의 질서에 질문을 제기한다는 주제를 가진 앨범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가사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테크노/EBM 앨범이지만 나름대로 메시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곳곳에 드러나는 목소리 샘플들을 잘 활용하지 않았나 싶네요. 하지만 어쩐지 곡들이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면서 지루해지는 순간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할 앨범이기도 합니다. "Exascale"처럼 아예 대놓고 클럽풍으로 가는게 오히려 더 괜찮기도 하네요. 후반부의 "戴綠帽 (Wear Green Hat)"는 기묘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멜로디와 이상한 음향들이 매력을 더하는 멋진 곡인데, 이런 분위기가 더 있었더라면 더 괜찮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뉴욕의 디지털 하드코어 듀오 Deli Girls의 4번째 LP입니다. 개인적으로 Machine Girl을 비롯한 여러 디지털 하드코어 음악을 들어보았을 때 괜찮지만 어쩐지 물리는 느낌이 거의 항상 들었었는데, 이 [Deli Girls]는 디지털 하드코어라는 틀 안에서도 나름대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 앨범입니다. 첫 곡 "Bryt's Song"의 아나운서 인트로부터 제법 인상적인데, 피아노 연주를 지나 서정적인 느낌으로, 일출처럼 천천히 쌓아올리는 분위기가 꽤나 괜찮습니다. 보코더를 마구잡이로 먹이고 전환이 너무 심한 느낌이 있는 보컬도 오히려 디지털 하드코어라는 장르에 잘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The Brain Is The Weapon"같은 곡은 정통 록 느낌이 있는데, "thankgodidontownagun"같은 곡은 개버 느낌도 나고, "STAY"라던가 "chains in alice xxxxx"같은 곡에서는 서정적이고 '앰비언트적'인 느낌도 줍니다. "inspiration porn addiction"은 언뜻 hi-NRG나 트랜스 느낌도 나고, "Brain Slew"의 풀벌레 소리 같은 인더스트리얼 느낌 음향도 괜찮네요. 좋게 보자면 다양한 스타일을 잘 섭렵했다고 할 수 있겠고, 나쁘게 보자면 전부 어딘지 비슷하게 들리는 감이 없지 않아 물리는 느낌이 들 때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뭐랄까 '뽕끼'가 있는 곡들, "MY DICK"이나 "Power Up (ashes)" 같은 곡들이 상당히 빛을 발하는 편이며 특히 "the human body is an incredible machine"은 거의 Агата Кристи 수준의 뽕끼가 훌륭합니다. 다음 앨범이 나온다면, 아예 이런 쪽으로 더 나가면 멋진 앨범이 나올 것 같습니다.
잉글랜드의 6인조 포스트펑크/노이즈 록 밴드 Opus Kink의 세 번째 EP입니다. 노이즈 록이라는 장르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을 '술주정뱅이 록'을 잘 구현해 낸 EP입니다. 첫 곡 "Chains"부터 흥겨운 리듬과 코러스, 멋진 질감의 관악기, 만취한 것 같은 보컬에서 딱 괜찮은 포스트펑크/노이즈 록이라는 직감이 드네요. 따져보면 결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어째선지 The Birthday Party의 "Junkyard" 라이브(1982년 Götterdämmerung), 특히 그 라이브에서의 Tracey Pew가 생각나는 앨범이었습니다. 거기에 뭐랄까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잉글랜드 풍'을 끼얹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Dust"의 키보드 파트가 딱 그 잉글랜드 풍의 느낌이 물씬 느껴지는게 제법 괜찮네요. "Chains"-"Dust"-"Children"의 몰아치는 구성은 에너지도 넘치고 훌륭하며, 늘어지기 전에 EP 길이로 비교적 깔끔하게 끝낸 것도 괜찮은 선택이지만, 어쩐지 전반적으로 좀 뻔하긴 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긴 한 듯 싶습니다. 하지만 뻔하더라도 좋은, 안정적이고 멋진 노이즈 록인 것도 사실입니다. 마지막 곡 "1:18"의 긴박한 리듬 파트와 관악기, 광적인 보컬과 울부짖는 후렴은 훌륭한 마무리입니다. 하지만 곧 나온다고 하는 LP에서 앨범 전체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프랑스의 보컬/베이스/드럼 3인조 노이즈 록 밴드 Donna Candy의 첫 LP입니다. The Knife 수준으로 변조되어 제멋대로 날라다니는 보컬, 느긋하게 찐득거리다가도 잔뜩 뒤틀린 채로 마구 갈겨대기도 하는 베이스, Fudge Tunnel같은 밴드가 생각날 정도로 때려박는 드럼이 좋은 조화를 이루는 앨범으로, 환기가 잘 안 되서 연기로 자욱한 너구리굴 같은 지하실 클럽에서 막 설정한 것 같은 음향을 가지고 되는 대로 최대한 시끄럽게 공연하는 노이즈 록 밴드의 라이브 앨범 같은 느낌입니다. 전반적인 음향 세팅과 분위기를 하나로 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우직하게 밀어붙이는데, 그게 사뭇 단순해 보이기도 하지만 또 매력적이네요. "She Danced That Night With the Mare and She Kissed the Yellow Teeth"처럼 은근히 '댄서블'하기도 하고, "Beez"같은 곡에서는 나름 스페이스 록 느낌도 나는 것이 Spacemen 3 같은 추억의 밴드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앨범의 싱글 곡이라고 할 수 있을 "H4T"의 고무줄처럼 늘어지는 유머러스한 베이스, 막 갈겨대는 느낌, 과장된 보컬은 문득 Acid Mothers Temple 같은 밴드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첫 LP로서는 멋진 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펙트를 잔뜩 먹여 변조했지만 보컬이 기여하는 부분이 은근히 상당합니다. 전환을 자주 하면서 분위기를 제법 주도해 나가네요. 결이 안 맞을 때에는 단조로운 느낌이 가득한 그냥 시끄럽기만 한 앨범이겠지만, 느낌이 잘 맞을 때에는 특유의 난장판스러운 노이즈 록 공연을 생생하게 잘 살린 괜찮은 앨범입니다. 프랑스에서 이런 스타일의 노이즈 록 밴드가 나왔다니 좀 신기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앨범 커버는 좀 아쉽네요...
뉴욕의 4인조 노이즈 록 밴드 Model/Actriz의 첫 LP입니다. 첫 곡 "Donkey Show"부터 상당히 '빡센' 리듬으로 우직하게 밀어붙이는데, 이 리듬이 앨범의 전반부 내내 휘몰아치며 청자를 압도합니다. "Crossing Guards"같은 곡에서는 사실상 Ministry나 Nine Inch Nails같은 인더스트리얼 록 밴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강렬한 리듬파트를 선보이며, 기계적인 록 밴드 연주라는 점에서는 어쩐지 Joy Division에서의 Stephen Morris 드럼이 생각나기도 하네요. 전반적으로 뭐랄까 '습도'가 상당히 높은 앨범이며 끈적거리고 질척이는 느낌마저 드는데, Interpol이 보여주었던 정서와도 좀 맞닿아 있는 느낌이 있습니다. 하지만 Interpol의 경우 에로틱하긴 하지만 그 와중에도 좀 세련된 느낌이 있다면, Model/Actriz는 아예 바닥으로 내려가 한밤중의 뉴욕 게이 클럽에서 문란하게 즐기기도 하다가 문득 화장실에서 홀로 흐느끼기도 하는 듯한 그런 진솔한(?) 정서에 가까운 것 같네요. 축축한 보컬과 거기에 더 질척거리는 가사 또한 음악과 잘 어울립니다. "Slate"나 "Maria"같은 곡의 가사는 말 그대로 진창 속에 빠져서 애처롭게 애정을 갈구하는 것 같은 훌륭한 가사입니다.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는 힘이 좀 부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 "Sleepless"나 "Sun In"의 살얼음같이 여리여리한 정서는 The Rapture의 "Infatuation"이나 Nine Inch Nails의 "Hurt"같은 곡이 생각나는, 에로틱한 정서에서 아름답고 감성적이며 쓸쓸한 보컬로의 전환이 빛을 발하는 훌륭한 곡들입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종소리가 떠오르는 음향과 'It's so bright...'라고 부서질 것 처럼 내뱉는 대목은 정말 아름답네요. 멋진 앨범입니다.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듀오 Raja Kirik의 세 번째 앨범입니다. 보컬 Silir Wangi 및 안무가 Ari Dwianto와의 협업 프로젝트를 담은 앨범이라고 하며, Jathilan이라는 것은 자바 섬의 전통적인 '트랜스 댄스'로서 불규칙적으로 춤을 추는 말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냥 평범(?)한, '전통음악 느낌을 담은 포스트-인더스트리얼'인 줄 알았는데, 첫 곡 "Sigra Sigra"의 중반부 즈음부터 상당히 흥미로워집니다. Yennu Ariendra의 전자음향과 비트는 인더스트리얼 테크노가 생각날 정도로 빡세며 Silir Wangi의 보컬은 구성진 가락을 뽑아내며 존재감을 압도적으로 과시합니다. Johanes Santoso Pribadi의 다양한 수제작 '쓰레기' 어쿠스틱 악기들 또한 잘 스며들어 분위기를 형성하네요. 두 번째 곡 "Budhal Gumuruh" 부터는 정말로 콘크리트 지하 클럽의 무대에서 굿판을 벌여대는 느낌으로, 번잡하고 정신없지만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마력을 뿜어댑니다. "Slompret Slompret" 초반의 Autechre 스타일의 음향은 좀 뜬금없지만 또 잘 어울린다는게 포인트네요. Ariendra 특유의, 트랜스 상태로 빠져드는 느낌을 일관되게 유지하면도 다채롭게 변화하기도 하는 표현력이 돋보이며, Wangi의 존재감은 언급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앨범 전체를 지배하고 있지만, Pribadi의 수제작 악기들, 특히 가끔씩 치고나와 분위기를 지배하는 관악기들 또한 어떻게 만든 것인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Ghost 같은 일본 밴드들이 생각나기도 하나 그 보다는 더 '댄서블'하고 상당히 빡센 음악입니다. 어째서인지 불현듯 이박사가 생각나기도 하고... 마지막 곡 "Waru Doyong"은 대단원을 장식하는 느낌으로 빠른 비트 위에서 어쿠스틱 타악기와 전자음향이 서로 번갈아 등장하다가 다시 사라지기도 하며 융합되는데, 멋진 마무리입니다. Jathilan은 1825년 네덜란드 식민 정부에 대항하여 큰 규모의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던 디포네고로(Diponegoro) 왕자의 이야기를 신화화한 민속 예술로, 실패한 반란을 악의 무리에 승리하는 내용으로 변형해 자바 섬 민중들의 애환을 달래는 수단 중 하나로 작용했다고 합니다. 그 이전 시대인 마자파힛(Majapahit) 제국 시기의 반란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온 밴드의 이름 '개(Kirik) 왕(Raja)' 하고도 연결이 되면서 이 앨범에 어떤 해방감, 수백년 동안 억눌려 온 사람들의 외침 같은 정서가 녹아들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생각했던 것 보다 전자음악 느낌이 강해서 더 매력적이었으며, 동시에 뒷편에서 어쿠스틱 악기들이 물흐르듯 잘 결합해 분위기를 잡아주는 것도 매력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좀 길게 느껴지는 편이긴 하네요. 여담이지만 앨범 커버가 정말 멋진 것 같습니다.
Ryuichi Sakamoto의 마지막 LP로, 일종의 유언에 가까운 앨범이며 따라서 사실 평가가 의미없는 앨범입니다. [async]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이니 하고 싶었던 것들은 전부 해 봐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만들었던 앨범이라면, [12]는 앞에 바로 다가온 죽음을 두 눈으로 바라보며 하나하나 마지막 일기를 써 내려간 듯한 느낌입니다. 음향적으로 보자면 그의 피아노 연주, 앰비언트 풍의 전자음향, 그리고 연주하며 남긴 숨소리와 잡음들 정도가 전부인 구성이며, 상당히 단조롭고 길게 늘어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 사실 그런 것도 딱히 중요하지는 않은 앨범입니다. 수십년의 음악가 경력과 인생 그 자체를 끝마치며 돌아보는 음악 치고는 독특하고 멋지게, 진솔하게 풀어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해 보면 첫 LP였던 [Thousand Knives]도 (음악의 느낌은 많이 다르지만) 상당히 단순한 앨범이었으니, 마지막 앨범인 [12]가 소박한 느낌인 것도 일종의 수미상관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고전음악에 대한 Ryuichi Sakamoto의 애정이 담겨있는 듯한, 유일하게 부제가 붙어있는 사라방드 풍의 곡 "20220302 - sarabande"는 아마도 올해 만들어진 음악들 중 가장 아름다운 곡일 것입니다.
소련의 전설적인 록 밴드 Аквариум의 전설적인 명반, [Радио Африка]의 '최종본' 버전입니다. 원래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불법 유통(사미즈다트) 버전이 중간에 유실되어버리는 바람에 '정식 버전'으로 돌아다니던 것은 불완전한 편집본이었는데, 우연히 '최종본'의 마스터 테이프 복사본을 발견하게 되어 리마스터한 후 발매했다고 합니다. 이 버전이야말로 사미즈다트로 유통되던 버전이라고 하는데, 소련인들이 몰래 숨어서 듣던 버전에 더 가까워졌다는 점에서 원래 낭만적이던 앨범이 훨씬 더 낭만적이게 되었습니다. 시중에 돌아다니던 버전과 비교해 보자면 세세한 음향들이 바뀌었고, 전체적인 큰 줄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만, 디지털 리마스터 덕분인지 음들이 더 깔끔하게 다듬어졌네요. 개인적으로는 이 버전이 더 좋은 듯 합니다. 정부의 감시를 피해 밤을 새워가며, 구토를 해 가며 겨우 완성하고, 불법복제로 유통하면서 믿을만한 사람들끼리만 모여 몰래 듣고, 소련에서 유일하게 록 음악 공연이 허용되었던 곳인 '레닌그라드 록 클럽'에서 KGB의 눈총을 받으며 즐겼던 앨범이지만, 그 수록곡들이 뻔한 '저항'같은 것이 아닌 여름날의 자전거 여행에 대한 추억, 겨울밤에 친구의 집에서 가졌던 모임, 밤길을 걸으며 떠올렸던 생각들 같은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부분이, 이 앨범을 그 어떤 앨범보다도 더 낭만적이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