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zndpi8tNZyQ "Hallogallo"*********************************************************************************************https://www.thewire.co.uk/issues/242길 위에서Biba Kopf[The Wire]2001년Klaus Dinger와 Michael Rother의 1970년대 그룹 Neu!는 독일 록의 기어를 '보다 더 조화로운 미래'를 향한 오버드라이브로 전환시킨 밴드였다. 하지만 둘의 개인적인 불화로 인해, Neu!의 모토릭(motorik) 3부작은 계속 정식 발매 및 유통이 안 되는 채로 남아 있었다 - 지금까지는.'새로운 것'으로 인한 충격은 그 참신함이 불러일으키는 '마그네슘의 순간'을 넘어 유지되지는 못하곤 하지만, Neu!의 음향은 과거로부터 가속하여 대지가 하늘과 입맞추는, 닿을 수 없이 멀어지는 소실점을 목표로 전력질주를 할 때 마다 당신을 완전히 멈춰 세워버리는 음악이다. Klaus Dinger의 독특한, 메트로놈 수준으로 정확한 드럼 연주, 그리고 Michael Rother의 회전하는 기타 리프를 추진력으로 삼아, Neu!의 음악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움직임을 통해 스스로를 끝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그 누구라도 곧바로 알아챌 수 있을 리듬의 역동은 접선 방향으로 미끄러져 풀어지며 나오는, 회전하는 중심부로부터 벗겨져 나오는 기타 멜로디를 통해 질주하고 있는 그 도로를 찢어발기고 있으며, 이는 영원히 새롭고, 또 언제나 동일하다.1970년대 초, 3장의 앨범을 통해 Neu!는 너무나도 강력하고 어마어마한 '로드 뮤직' - 종종 '모토릭'(motorik)이라 불리우지만 Dinger는 이 표현이 너무 기계적인 느낌의 표현이라고 말하며 거부하고 있었다 - 을 다듬어 세공하였으며, 그들의 아우토반 네트워크를 통해 독일의 정신계를 탐사했다. 동시대 독일의 영화감독 Wim Wenders의 로드 무비들처럼, Neu!의 여정 또한 그 여행의 경로와 목적지보다는 그 여행에 따르는, 여행자 자신에 대한 영혼의 탐구와 질문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는 여정이었다. 불행히도 두 사람은 그다지 멀리까지는 여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간의 성격과 기질의 차이, 앞으로 드리워질 여러 어려움들을 미리 짐작할 수 있게 해 주었을수도 있을 그 '차이'를 많이 경험하지 않았던 채로 여정을 끝내게 되었었다. "Klaus와 나는 서로 다른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 혹은 모순과 갈등을 대하는 방식이 아주 다른 사람이다." 작년 가을, Harmonia의 Dieter Moebius와 함께한 런던 공연을 마친 다음 날 아침, 미국 커피 프랜차이즈 Swiss Cottage의 한 자리에 앉은 Michael Rother가 말했다. 더 차분하고, 더 이성적으로 보이는 멤버인 Rother는 이전 동료이자 Neu!의 또 다른 멤버가 보여줘왔던 다소 괴팍한 행동들, 그리고 Neu!의 공식 CD 발매를 10년도 더 넘게 지연시켰던 행동들에 대한 짜증을 아주 가끔씩만 내비쳤으며, 전반적으로는 냉정하고 명료하게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Klaus와 나 정도로 서로 다른 사람이라면 보통 함께 뭘 하지는 못할 것이다." Rother는 이어갔다. "그리고 우리 둘 다 그걸 잘 알고 있었다. Klaus 탓을 하는 건 너무 쉬운 방식이다. 나도 그와 동등한 정도로 고집이 세지만, 아마도 내가 조금 덜 공격적일 것이다." Rother는 잠시 멈추었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마치, 내가 '천사'인 것 처럼."심지어, 지난 봄 정식 발매 직전까지도, Dinger와 Rother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까지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Rother의 런던 공연을 며칠 앞두고 언론용 비디오 장면을 찍기 위해 둘이 다소 불편하게 앉아있었던 것 이후로, 올 봄 CD 리마스터 세션이 시작된 때에는 Dinger가 괴팍한 성미를 드러내며 Rother가 있던지 말던지 상관 없이 사진은 찍을 수 없다고 [The Wire]지의 사진작가에게 거절을 내비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날 호텔 방에서, 무사히 독일로 돌아 온 Rother와 함께, 좀 더 차분해진 Klaus는 자신의 비협조적이었던 태도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사과의 뜻을 전달하긴 했었다. 이 순간을 너무나도 오래 기다려왔다는 그는 지금 이 리마스터 작업에 집중해야 한다고 중얼거렸다. Dinger가 느끼기에는 지금 주위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소란을 피우고 있었으며, 반면 리마스터 작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 적어도 Herbert Gronemeyer, 독일의 록 스타이자 개인적인 열정으로 Neu!를 자신의 레이블 Grönland와 계약시켜 앨범을 정식 발매하게 만든 그가 마지막 순간에 베를린에서 날아와 현장을 감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놀라울 정도로 기민한 느낌의 매처럼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한 Dinger는 마치 어젯밤 야생 고양이와 한바탕 혈전을 벌였고 거기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나올 수 있었다는 듯 살짝 헝클어져 있었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에, 예술가는 항상 기어박스의 모래와 같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예술가가 아닌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 부드럽게, 문제 없이 흘러가고 다 괜찮다면, ja, 뭐 미디어라던가 그런 것에는 좋을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째선지 Vincent Van Gogh 식의 행동을 정말 좋아한다."아직 자기 귀를 자른 것은 아니었지만, 바깥에서 보는 외부인들에게 Dinger의 당혹스러운 행동들은 마치 그가 스스로 코를 잘라 자해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주는 행동들이었다. Dinger의 Van Gogh 스러운 결단력이 없었더라면 Neu!의 질주하는 느낌 또한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기어박스에 모래 뿌리기'는 결과적으로 Neu!의 엔진도 멈추었으며, 상업적으로 성공했던 그 다음의 밴드, La Düsseldorf의 해체에도 일조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이러한 행동들은 음악 산업계에서 거의 불가능한 정도의 명성을, Dinger의 주장에 따르면 그 명성 때문에 지난 20여년간 자신을 보이콧해 온 음악계에서의 명성을 얻어 주기도 했었다. 거기에 더해 CD 발매의 권리에 대한 레이블 회사와의 분쟁은 결국 독일 법정에서의 재판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Neu!의 경우 Dinger 쪽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으며, La Düsseldorf의 경우는 아직도 재판 중이다). 이 법적 분쟁들, 그리고 Rother와 Dinger 사이의 개인적인 갈등들 속에서, Neu!는 뭔가 기이했으나 어쨌든 일어났었던 '크라우트록' 부흥기를, Julian Cape의 열정적인 팬북 [Krautrocksampler]가 불러왔던 재유행에 올라타지 못하게 되었었다. 더 절망적인 부분은 이 위대한, 가장 영향력이 강한 독일 음악들 중 하나에 해당하는 앨범들이 열악한 해적판 CD 말고는 정식으로 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1970년대 초 독일의 활발한 대중 음악 문화 르네상스 시기에 Neu!가 담당했었던 역할이 이해받지 못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현재의 통일 독일의 모습은 Neu!와 같은 밴드들을 탄생시켰던 서독의 모습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아주 조금의 단서만을 제공하고 있다. Rother와 Dinger가 뿌린 씨앗, 그리고 당대 다른 음악가들과 영화 제작자들이 뿌렸던 씨앗으로부터 지금의, 자신만만하게 모국어를 사용하며 스스로의 취향과 욕망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팝 문화가 발전해 나왔던 것이다. 오늘날의 독일은 비옥하기 그지 없는 하위 문화를 유지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온갖 음악적 세포들이 발생해 나와 세계 수준의 언더그라운드 네트워크에 당당히 참여하고 있다. 반면, Neu!가 활동하던 시기에 서독에서 자생하던 음악들에 대한 반응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독창적이지 못하고 이류에 불과하다는 취급, 그저 영국이나 미국, 아프리카계 미국 음악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받는 그런 취급이었으며, 이는 국내외로 전부 동일했었다."나는 영국 음악이나 미국 음악들을 많이 좋아한다." Dinger는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는 영국인도 아니었고 미국인도 아니었다. 그리고, 음악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상당히 거대한 과거를 갖고 있다.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들과는 달라지고 싶어하는 욕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러니까 나는 언제나 '개인'을, '오리지널'을 강조해 온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The Beatles라던가 비슷한 걸 연주하는 건 말이 안 되는거 아닌가."'Year Zero', 1945년 제3제국이 파국을 맞이하던 '0의 시간'(Stunde Null) 무렵에 태어났던 Neu!와 그 동시대의 음악가들은 독일 연방 공화국의 훨씬 더 차디찬 문화적 환경 아래에서 성장했던 사람들이었다. 이 환경의 온도는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되어졌었다: 점령과 전후 분단의 트라우마, 전 세계를 상대로 홀로코스트 전쟁을 벌였다는 죄책감, 냉전이라는 시대상에 의해 강제적으로 동독이라는 이웃과 함께 탱고를 추게 된 상황... 미 점령군과 그들의 AFN 라디오 네트워크를 통해 '로큰롤'이라는 문화가 서독과 동독 양쪽으로 스며들어오게 되자, 냉전 시대의 양측 정부들은 둘 다 로큰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 가끔은 재즈에 대한 나치의 인종차별적 발언이 떠오르기까지 할 정도의 표현들을 사용해가며, 로큰롤은 비독일적이며, 여성적이고, 원시적이며, 특정 지역의 음악들일 뿐인 것들이 혼합되어버린 결과물이라고 비난하며. 서독에서는 소비주의가 경제 부흥에 있어 필수적이라고 선언되면서 그리고 소비자의 선택이 자유로운 사회의 상징인 것으로 여겨지면서 록 음악 또한 마지못해 합법화되었다. 하지만 서독의 물질적 번영과 기적적인 경제발전은 아주 조금의 행복만을 가져다 주었으며, 이는 Neu!와 동시대의 영화감독들이 '뉴 저먼 시네마'를 통해 무미건조하고 즐거움 따위는 없는 삶을 자주 묘사하며 증명했던 측면이었다. "20년간의 정치적 기억상실증은 구멍 하나를 남겼다." Wim Wenders는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그 자신의 매료에 대해 말했었다. "우리는 껌과 폴라로이드로 그 구멍을 덮었다."1960년대의 독일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던 Michael Rother와 Klaus Dinger에게 있어 록 음악은 생명줄과도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그 둘은 록 음악에서 받은 영감을 발판으로 스스로 한번 록 음악을 시도해 보는 것에까지 발을 내딛었었다. 둘은 각각 뒤셀도르프의 비트족 밴드들에서 활동했었는데, 그 밴드들의 이름들은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기이할 정도로 둘의 미래를 보여주는 이름들이었다. Rother는 Spirits Of Sound라는 밴드에서 The Beatles, The Kinks, The Rolling Stones 등을 커버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밴드에는 미래에 Kraftwerk 멤버가 될 Wolfgang Flür도 있었다. 런던 공연의 무대 뒷편에서 나눴던 대화에서, Rother는 Spirits Of Sound가 '시대정신' - Jimi Hendrix, 사이키델리아, 반전 운동들, 공동체적 생활에 대한 실험들, 대규모 학생 시위들, 길거리에서 벌어졌던 투석전, 바더-마인호프, 여성 운동, 녹색당 로비 스캔들, 그리고 총리 Willy Brandt가 설계해 짧은 시간동안 유지되었던 동서 데탕트 등 - 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던 밴드였으며 자신들 스스로의 삶의 윤곽을 따라가며 나름의 독특한 록 음악을 창조하려 했었다고 회고했다. Dinger 또한 The Smash라는 밴드에서 The Beatles, The Kinks, The Rolling Stones 등의 영향을 받은 곡들의 드럼을 연주하다가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The No라는 이름의 밴드에서 커버곡들을 연주하며 독일 남부 투어를 돌기도 했다. 서서히 확산되어 가던 록 문화조차도 '독일인이 만든 음악'에 대한 열등감에 휩싸여 있던, 도시를 뒤덮어가는 혼란상을 받아들일 여유 같은 건 전혀 없이 당황에 휩싸이던 곳에서, 이상한 장발의 전자 음악으로 음악가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용감하거나, 혹은 무모한 일이었다."나는 독일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는다. 내 나라에 대한 내 관점은 굉장히 비판적이다." Dinger는 당시 독일 출신의 '아웃사이더' 음악가들이 겪었던 어려운 환경에 대해 말했다. "나는 3년간 건축을 공부하다가 포기하고는 '블랙홀'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ja, 말하자면 그 당시에는 '공식적'인 삶의 방식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지 나 자신을 표현해야만 했고, 혼자서 혹은 Michael과 함께 해야만 했었다. 나는 처음부터 Michael의 독창성을 믿었다. 아주 분명했다..."그러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을 뒤로 잡아당기고 있는 짐들을 벗어던져야 했다. Kraftwerk와의 조우는 Dinger와 Rother의 '0의 시간'이 되었다.냉전 시대의 대치가 독일 통일로 인해 종식되기 전까지, 독일의 하늘은 '폭우'의 위협으로 언제나 무거웠었다. 1970년, 뒤셀도르프에 기반을 둔 밴드 Kraftwerk는 첫 앨범을 발매하였으며, 이 앨범은 강력한 클라이맥스 "Vom Himmel Hoch"(하늘 위로부터)로 끝을 맺는 앨범이었다. 이 곡은 1945년 독일의 'Year Zero'에 대한 비망록이면서도 동시에 다가오는 핵전쟁 시대의 전조와도 같은 곡이었다. "Vom Himmel Hoch"는 Klaus Dinger의 드럼이 들어간 그리고Kraftwerk의 창립자 Ralf Hütter와 Florian Schneider가 함께 참여한 두 곡 중 하나인 곡이었다. 비록 앨범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Rother 또한 Hütter와 함께 영화 사운드트랙에서 잼 연주를 하게 되며 Kraftwerk와의 연이 생기게 되었다. Rother는 나중에 Dinger와 함께 6인조 구성에 참여해 [Kraftwerk] 홍보 공연 리허설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구성은 Hütter가 음악적 방향에 대한 확신을 잃으면서 잠시 밴드를 탈퇴하게 되어 와해되었으며, Kraftwerk는 Schneider, Dinger, Michael Rother의 이상한 3인조 구성으로 잠시 공연들을 하게 된다. 공연에서 그들은 "Ruckzuck" - 예상치 못하게 히트를 치게 되어 결국 TV 매거진 쇼 [Kennzeichen D]의 테마곡으로 선정되기까지 한 곡이며, 독일 언더그라운드를 벗어나 히트를 쳤던 또 다른 곡으로는 Can의 "Spoon"이 있었다 - 과 같은 익숙한 곡의 즉흥 연주로 분위기를 띄우고, "Vom Himmel Hoch"의 빅 뱅과 함께 독일을 'Year Zero'로 돌려놓곤 했었다. 이들의 공연은 위험할 정도의 스릴이 넘치는 공연이었으며, Dinger의 드럼 연주는 종종 진짜 출혈을 동반하기도 했다. 이 세 음악가들 사이의 관계는, 그 공연에서 보여지는 것 만큼이나 격렬했었다. 3인 사이의 차이와 갈등은 이들이 Conny Plank, 1960년대 후반부터 1987년 사망하기까지 독일 음악계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던 엔지니어이자 프로듀서였던 그와 함께 다음 Kraftwerk 앨범을 제작하려 시도했을 때 극심하게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 녹음 세션은 20분 정도의 녹음만을 결과로 남긴 채 중단되었던 것이다."Kraftwerk 내부에서는 많은 말다툼과 심리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Rother는 회상했다. "우리는 서로 정말로,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이었다, Klaus와 나, Florian은 음악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는 물론이고 그 외적으로도 모든 것이 달랐다. 어쩌면 Florian이 우리가 그의 'Kraftwerk'라는 이름을 다른 방향으로, 그의 방향이 아닌 쪽으로 가져가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게 정말이었는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아마 그 무렵에 Ralf Hütter가 다시 Florian에게 연락을 했던 것 같고, 한번 둘이서 함께 다시 해 보는게 어떨까 생각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앨범 [Kraftwerk]는 새로운 형태의 '증폭된 음악', 동시대의 미국/영국 음악과는 상당히 다르면서도 비등할 정도로 폭발적인, 록 음악을 핵심 요소들 - 가장 기본적인 비트, 원초적이고 단조로운 전자 음향, 의도적으로 단조로운 스탑-스타트, 패스트-슬로우 리듬 - 로 축약시킨 음악을 향한 중요한 첫 발자국에 해당하는 앨범이었다. Hütter가 첫 번째 탈퇴를 끝내고 뒤셀도르프로 돌아와 Kraftwerk의 공동 창립자 Schneider와 재회했을 때, Dinger와 Rother는 그 둘이 개척한 또 다른 흥미로운 길을 계속해서 걸어나가 보기로 결정했다."2-3개월 정도의 시간동안 나는 몇 개의 아이디어를 모았으며, Klaus도 몇 개의 아이디어를 모았다." Rother가 회고했다. "그리고 우리는 함부르크에 있는 스튜디오를 예약했고, Neu!의 첫 번째 앨범을 Conny와 함께 만들었다. 바로 그게 Kraftwerk로부터 Neu!로 이어지는 직선 도로였다."1971년에 이미 Dinger와 Rother는 Neu!를 통해 새롭고 강렬한 '아우토반 음악'을 만들고 있었다. 적어도 그들의 이전 동료들이 만들게 될 [Autobahn]에 비하면 3년은 더 이른 시기였다. 모든 것이 '속도'와 '움직임'에 대한 것이었으며, 몇몇 광경들의 사진 촬영이나 우울한 사색의 시간을 위한 잠깐의 정차가 곳곳에 있을 뿐이었다."근원으로 돌아가자, 모든 전통적인 구조를 극복하자는 것이 아이디어였다." Rother의 설명이었다. "Kraftwerk 시기에는 음 하나, 현 하나, 모든 것이 최소한으로 환원되어 있었다. Neu!를 시작했을 때 나는 이미 한 발자국을 더 내딛은 상태였다. 첫 앨범 [Neu!]에서, 수록곡 중 하나 "Weissensee"에는 두 번째 화음이 들어가 있는데, 이는 나에게는 정말로 큰 진전이었다. 이런 생각에 정말로 몰두해서 치열하게 고민하던 게 분명하게 기억난다, '이걸 해도 될까? 화음을 바꿔야 할 필요가 정말로 있는 걸까?' 하지만 이 곡은 마치 호흡과 같다, 올라갔다가 내려간다. Johann Sebastian Bach와 정확히 같다고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아직 기본에 해당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정당한 결정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기까지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해야만 했었던 것이었다."딱 적절하게 충분한 느낌으로, [Neu!]는 "Hallogallo"와 함깨 회색빛 새벽 아래에서 그 문을 열어젖힌다 - 의식이 스스로를 휘저으며 꿈틀거려대는 듯한 느낌이 드는 무언가, 가청 영역의 지평선에서 떠돌아다니는 거의 감지가 불가능한 전자음향, 탁-탁-탁 거리는 기타 연주로 둘러쌓여있는 음악. 갑작스럽게, 뒷편에서 점점 더 낮아져가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속해나가며 감지 가능한 영역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한편, 돌진하는 드럼 비트는 Neu! 특유의 기타 리프만이 가지고 있는 음향을 빛나게 도금하며, 물밑에서는 서로 경쟁하듯 내달리는 속도들과 배경 음향들이 멀티트랙으로 격자무늬를 짜고 있다. "Hallogallo"의 매혹적인 단조로움은 시간과 지각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음악이 청자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음악이 오히려 멀어지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 어느 쪽이던지간에 "Hallogallo"의 끊임없는 '움직임'은 미래로 향하는 출구를 차단하면서 동시에 그 음악이 가로지르고 있는 해로운 정신적 지형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Neu!가 잠시 숨을 고르며 멈추는 곳, 예를 들자면 "Leiber Honig" 같은 곡에서, 이들은 단순하지만 청자의 무장을 단숨에 해제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앰비언트에, 감정들과 공명하는 몇 개의 음향적 유물들에 창을 열어젖히고 있다.수록곡 중 하나는 Dinger를 1971년의 여름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있었다. 그 여름, Dinger는 당시 여자친구였던 Anita와 함께 노르웨이에서 시간을 보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많은 곡에서 그녀를 찾을 수 있다, "Lieber Honig"가 그 중 하나다. 첫 앨범 [Neu!]에서 들을 수 있는 쪽배 소리, 나와 함께 앉아 있었던 사람이 바로 그녀다. 이 관계는 그렇게 쉽지만은 관계였다,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노르웨이로 가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Neu! 활동을 하던 3년간 우리는 서로 거의 만나질 못했다. 어째서인지, 지금은 믿기 힘들 정도로 이상한 일이다...""1971년의 우리의 목표는 '고유한 음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Rother가 이어갔다, "음악을 통해 우리들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10대 시절에 도착했었던 지점으로부터 많이 뒤로 물러난 다음 한 발자국씩 움직여 가며 '음악적 구조'를 - '언어'라고 말하기에는 좀 너무 자만하는 것 같다 - 감정적 과정들에 대한 음악적 표현을 만들어 보려 했던, 여러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어렸던 시절의 나는 다른 음악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었다, Frédéric Chopin부터 The Beatles나 Jimi Hendrix까지. Klaus 이전에도 다른 드러머들이 있었다. Maureen Tucker나 Jaki Liebezeit같은 드러머들이 다른 방식으로 연주해 왔었다, 하지만 Klaus는 드럼 연주를 'Dinger의 방식'으로 정제했다. 나는 그 '흐름'을 좋아했다, 드라이빙의 음향 위에서 날아다니는 멜로디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다이내믹한 베이스와 변화하는 멜로디와 음향을 굉장히 직선적으로 달려가는 무언가 위에서 결합하고 싶었다. 물론 역동적인 방식으로 변화하며, 부드러워지고, 강력해지며, 또 정말 많은 감정을 담고 있는 무언가에서."물론 그 모든 것의 기초는 끊임없이 추진하는 Dinger의 드럼 연주일 것이다. Dinger는 음악의 질주하는 맥동을 싱코페이션 리듬 대신 파도처럼 밀려들었다가 빠져나가는 비트를 통해 만들어내었으며, 음악의 다이내믹한 변화를 알리는 심벌즈를 곳곳에 뿌려두었다. 이러한 드럼 연주 스타일은 Dingerbeat, Motorik, Hammerbeat, 그리고 Apache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Apache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Dinger는 단호히 말했다.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걸 듣거나 혹은 읽어 본 것들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이는 것 만큼 쉽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뭐, 어떻게 보자면 굉장히 쉽기는 하다, 커다란 '마스터 드러머'들과 비교해 본다면, 하지만 '에너지'라는 측면에서는 그런 '예술적 드럼 연주'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겉보기에는 단순한 이것을 실제로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이다, 얼마나 생생하게, 얼마나 신선하게, 뒤쪽으로 물러서는 것 보다는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더 아프리카적이거나 더 기계적인 방향보다는 또 다른, 어떤 다른 방향으로 갈 것인가의 문제. 나는 언제나 이런 것을 꿈꿔 왔고, 목표로 삼아 왔다: 빠르게,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그렇게. 그리고 나와 같은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수 있겠다.""Neu!의 앨범 3개 모두에는 우리의 '클리셰'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곡들이 들어가 있다." Dinger는 이어갔다. "그 곡들에는 바로 그 Apache 비트, 혹은 Neu! 비트가 들어가 있다. 적어도 곡 하나에는 그런 능력이 들어가 있다, "Hallogallo"나 "Für lmmer" 같은 곡들. 하지만, ja, 이런 음악들은 Michael의 기타, 혹은 예를 들어 "Negativland"의 베이스 같은 연주로 시작하며, 나는 드럼을 연주하고, 그러다가 뭔가를 더하게 된다... 이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최종 결과물은 어째서인지 곡을 재생하면서 발전되어 만들어지게 되었다. 두 사람, 두 악기로 시작해서, 우리가 원하는 방향에 따라 트랙을 하나씩 추가해 가는 식으로."첫 앨범을 마무리하며, Neu!는 멋진 방식으로 스스로의 이름에 담긴 주장을 입증했다.이 2인조는, 그들의 음향 '블록'을 만들었을 때와 마찬가지의 환원주의 정신을 따라 'Neu!'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Neu!'라는 단어는 독일의 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표현으로, 가게의 쇼윈도에서 신제품을 알리는 용도로 선명하게 붙여 놓는 단어이다. Neu! 또한 이 단어를 색으로만 구분되는 3개의 앨범 커버들에 휘갈겨 써 두었으며, '2'는 두 번째 앨범에, '75년'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앨범에 붙여 두었다. 밴드의 이름과 커버 아트는 Dinger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였으며, 그는 상업성을 포용한다는 팝아트적 제스처로써, 부분적으로는 마몬(Mammon)을 경건하게 거부하고 있는 언더그라운드 록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으로써도 고안했던 것이었다."당시 광고 업계에서 가장 강력한 단어는 'Neu!'였다, 개인적으로는 지금도 그렇다고 본다." Dinger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단어인데, 어째서 그전까지 그 누구도 이 단어를 밴드 이름으로 쓸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지, 솔직히 잘 이해가 안 갈 정도다. 첫 앨범을 만들 무렵까지도 우리는 밴드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다. 왜 Neu!인가? Michael이 그다지 열광하지는 않았지만 결국에는 동의했던 것이 기억난다.""처음에는 'Neu!'라는 이름이 상당히 차갑게 느껴져서, 받아들이기까지 좀 힘들었었다." Rother 또한 동의했다. "몇 가지 대안을 생각해내서 Klaus에게 제안하기도 했는데, 결국에는 'Neu!'라는 이름에 둘 다 동의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결정은 실수는 결코 아니었다 싶다."'Neu!'라는 이름이 팝아트와 Andy Warhol을 연상시킬 수 있겠으나, Dinger는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지리적으로도 후기 Joseph Beuys에, 독일의 샤머니즘적 예술 구루(Guru)이자 제도권의 문을 열어젖히고 예술은 만인에게 자유로워야만 한다고 주창했던 그에게 더 큰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Neu!의 고향 뒤셀도르프는 전후세대 예술의 두 거장의 사이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이다. 번화가로 빛나지만 또 동시에 특별한 매력은 없는 상업 도시인 이 곳은 쾰른으로부터 라인강을 따라 지나가면 나타나는 곳으로, 충분한 부의 축적을 통해 지난 40년간 예술과 음악의 가장 중요한 줄기들 중 하나를 지원해 왔다 - Der Plan 레이블과 Kraftwerk 및 Neu!, Atatak 레이블, Tarwater에 이르기까지."나는 뒤셀도르프 사람이다, 상당히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Dinger의 주장이었다. "뒤셀도르프는 꽤나 작은 도시지만, 엄청나게 많은 광고 회사, 프로 사진사, 패션업, 그리고 예를 들어 Joseph Beuys같은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나 또한 광고 대행사를 하나 운영했던 적이 있었다 -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회사였지만 말이다. 내 친구들 또한 광고업에서 일을 하거나 직장을 얻기 위해 바쁘게 노력하고 있었거나, 사진사였거나, 사진사가 되려고 하고 있었거나, 'kunst akademie'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거나, Beuys의 학생이었으며, 그런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이런 환경이 나에게는 굉장히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것으로 다가왔었다." [Neu!]는 Dinger와 Rother가 Brain Records, German Metronome 레이블의 자회사이자 당시 독일 전역에서 등장하고 있던 언더그라운드 록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레이블로 활동하고 있던 그 레이블과 계약해서 만들게 된 3장의 앨범들 중 첫번째였다. 둘은 앨범의 홍보를 위한 공연을 해 보려 했으나, 통상적이지 않은 기타-드럼 라인업에 멀티트랙 파트는 배경음으로 재생한다는 것에 대한 관객들의 반발만을 맞닥뜨리게 된다. 보다 더 전통적인 밴드 라인업으로 하는 공연도 시도해 보았으나, 결과는 아주 조금 더 만족스러운 정도일 뿐이었다. 당시의 독일은 그런 곳이었다."뭐,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Dinger가 회고했다. "지금 젊은 세대들하고는 같이 작업할 사람을 찾는게 정말 쉬워졌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어려웠었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하던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다른 앨범들과 Neu! 앨범을 비교해서 들어 보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나에게는, 말하자면 Kraftwerk의 Ralf und Florian이 유일하게 같이 음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나는 Can이나 Guru Guru 같은 밴드는 그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첫 앨범을 만들고 난 후, 우리는 함께 공연을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아다녔었다. 6번인가 7번인가 공연을 실제로 해 봤었는데, 결국에는 어쩐지 맞는 사람들이 아니었어서 관두게 되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연주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었다."[Neu! 2] 작업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Dinger는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슈냅스 아이디어"를 하나 떠올리게 된다: 바로 싱글을 만들어 보자는 것. 지금 관점에서 보자면 그다지 '혁명적'인 것 까지는 아닌 아이디어겠으나, 그 당시, 1970년대의 분위기는 '우리 아니면 저쪽'인, 회색지대란 것은 없는 분위기였으며, 록 밴드는 싱글을 만들지 않아야만 하는 시대였다 - 싱글이라는 것은 오로지 저열한, 상업적인 '슐라거 가수'들만이, 돈만 보고 만드는 것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Conny와 함께 뮌헨으로 향했다." Dinger는 아쉬움을 토로하며 말했다. "Conny가 좋은 신식 스튜디오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맞다, 우린 거기에서 그 싱글("Neuschnee" / "Super")을 만들었다. 하지만 회사쪽에서 원하질 않았다. 흠, 뭐, 우리가 미리 회사와 상의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우리끼리 만들었을 뿐이지. 그래서 어떻게 보자면 상당히 나쁜 투자가 된 셈이었다."그런 반응에 눈썹조차도 흔들리지 않았던 Rother와 Dinger는 다시 Plank와 함께 스튜디오로 돌아가 두 번째 앨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녹음은 주로 밤중에 했다, 그게 조금이나마 더 저렴했으니까." Rother의 말이었다. "거의 곧바로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내 마음 속에 뭔가 정체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마 Klaus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앨범의 A면에 너무 오래 시간을 소비하며 더듬거렸다. 결국 예산이 바닥났고 B면은 하룻밤만에 녹음을 끝내야만 하게 되어버렸다. 앨범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절망적이었다."때마침 Dinger는 또 다른 "슈냅스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 첫 번째 아이디어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었는데, 앨범의 B면을 "Neuschnee" 싱글에 다양한 조작과 후처리를 가해서 채워보자는 것이었다. 덥, 힙합, 랩, 턴테이블리즘 이후 다양한 '버전'이라는 건 더 이상 논란을 일으키는 개념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이 때, [Neu! 2]가 발매된 직후에 B면은 많은 리뷰어들의 분노를 샀고, 사람들은 Neu!가 청자들을 경멸하고 있다고 비난했다."물론 지금은 B면의 음향적 실험들 중 일부에 대해서는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 Rother가 답했다. "당시에도 그랬다, B면을 이렇게 채우자는 결정을 내렸을 때에도. 하지만 앨범이 다 만들어지고 난 후, 많은 청자들과 레이블 회사가 우리가 장난을 하고 있다고, 그들을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식으로 음악을 만드는 건 적절치 못한 행동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놀리고 있다고, 음반 하나를 다른 속도로 재생하면서 플레이어를 두들기고 있다고, 망가진 카세트 플레이어로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도 그 비슷한 것들을 하고 있다, 벌써 오랫동안 그래 왔다. 이제는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한다, '네, 괜찮군요.' 하지만 그 때에는 다들 그런 반응이었다, '어, 당신들 미쳤어?'"B면의 실험에 대해선 역사가 지나면 보다 더 좋게 봐주게 될 때가 올지도 모르겠으나, [Neu! 2]는 [Neu!]에 비하면 아직도 약간 얇고 엉성하게 들리는 앨범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앨범의 A면은 반드시 들어봐야만 하는 음악이다. "Spitzenqualitat"에서 Dinger는 환상적일 정도로 멍청한, 에코가 잔뜩 들어간 드럼 리프를 연주하며, Rother는 그 위에서 기타를 강판에 갈아대면서 제멋대로 질주한다. "Gedenkminute"는 저 멀리에서 울려퍼지는 종소리가 잔뜩 안개가 낀 스튜디오 안으로 침잠하며 유령처럼 배회하는 추모곡이다. "Lila Engel"은 모토릭이 디트로이트의 '모터 시티 록'을 아르 브뤼(art brut) 스타일로 재현하는 것 같은 곡이며, 여기서 Dinger는 마치 성대가 없는 화성인처럼, Rob Tyner를 흉내내는 소리를 낸다. 11분짜리 "Für immer"는 앨범의 문을 여는 첫 곡이며 "Hallogallo"와 멋진 한 쌍을 이루는 곡이다. 하지만, 다시 좀 더 자세히 들어보면 "Für immer"는 보다 더 좋은 옷장과 옷들을 가지고 있는 쪽의 쌍둥이라고도 여겨질 수 있을 곡이기도 하다."[Neu! 2]에도 멋진 순간들이 있지만, 이 앨범에서부터 이미 어떤 좌절감, 절망감을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Rother는 인정했다. "심지어 A면도 그렇다. 나에게 이 앨범은 다시 한 번 강하게 질주하며 그 위에 구름 몇 개를 더한 것 같은 앨범이지만, 그 구름들은 생각했던 것 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 [Neu! 2]를 완성한 후, 나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어떻게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만 한다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첫 앨범 투어 시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Rother와 Dinger는 여전히 Neu!의 공연에 대한 가능성을 저버리진 않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의 영국 레이블이었던 Liberty가 [Neu!] 발매로 인해 떠돌기 시작한 소문들을 기반으로 상승세를 타 보자고, 영국으로 방문해 공연을 해 달라고 계속해서 압박을 해 오기도 했었던 것이다. 보다 더 전자음악에 가까웠던 Cluster의 "Im Süden"을 듣고 난 후, Rother는 그의 기타를 집어들고는 Cluster의 Hans-Joachim Roedelius와 Dieter Moebius를 만나 Neu!의 공연 멤버에 영입할 목적으로 베저베르크란트의 Forst에 직접 찾아갔다. Forst에 도착한 Rother는 강과 나무들이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집과 스튜디오에 매료되어, 그 곳에 머물기로 결정해버린다."[Neu! 2]를 마무리하며, 내 인생의 어떤 단계, 몇 가지 개인적인 일들 및 충돌을 겪었고, 관계가 최선은 아닌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Rother는 회고했다. "기타를 가져가서 Roedelius와 함께 잼 연주를 했는데, '바로 이거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진정으로 영감을 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Neu!를 그만두었다 - 그 시점에서 나는 Neu!를 더 이상 끌고 갈 수 없었다, 4주의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아예 Roedelius와 Moebius의 집으로 이사를 갔고, 거기에서 Harmonia가 시작되었다. 나에게 Harmonia는 '음향'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입구였으며, 최면적으로 반복되는 멜로디라는 측면 말고는 내가 그 전까지 전혀 해 본 적이 없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완전히 매료되었으며, 1973년의 나는 바로 그런 음악을 하고 싶었다."1973~75년의 기간동안, Rother, Roedelius, 그리고 Moebius는 함께 살면서 Neu!의 모토릭한 측면과 Cluster의 전자적 음조 및 음색 조작을 결합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첫 앨범 [Musik Von Harmonia]에서 이들은 원시적인, 구린 드럼 머신을 마법처럼 활용하였다 - 그리고 이를 Guru Guru의 드러머 Mani Neumeier의 실제 드럼 연주로 대체하여 1975년의 [Deluxe]를 만들게 된다."드럼 머신의 매력은 드럼을 두 배로 늘린다던가, 리듬을 잘게 쪼개는 이펙트를 넣는다거나 하는 작업을 사용자의 임의대로 할 수 있다는 부분이다." Rother가 설명했다. "쪼개는 속도가 비트의 속도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여러 노브들을 미세 조정하고, 속도를 조절하고, 뭔가 새롭고 특별한 것을 찾아내려 노력했었다. 두 개의 필름이 서로 다른 속도로 상영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끔씩은 선명한 그림이 보이지만, 또 가끔씩은 그림의 절반만이 보이는 것 같은. 물론 실제 드러머가 있다면 더 강한 힘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무렵 나는 실제 드럼 소리를 지루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게 큰 문제였다. 좀 더 긍정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당시의 나는 모든 음향을 전자적으로 처리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우리가 드럼 머신들을 사용했던 가장 주된 이유는 - 음향들을 전자적으로 처리하고, 모든 것을 씹어버리고, 주변의 모든 것들을 돌려서 아래로 뒤집기 위해서였다. 그런 작업이 나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음향의 세계로 뛰어들지만, 또 동시에 리듬의 세계 속으로도 뛰어드는 것."한편, 뒤셀도르프에 남아 있던 Dinger는 Rother의 전원적인 삶과는 완전히 다른 정 반대의 삶에 빠져 있었다. "Ja,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는 게 좀 슬펐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Dinger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어째서인지 Michael은 시골 생활을 더 좋아했고 그 시골에서 만난 사람들도 좋아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더 좋은 기분을 느꼈던 것이리라. 그리고, ja, 그는 당시의 뒤셀도르프에서 내가 속해 있었던 씬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보자면 나는 그때에도, 지금도 LSD에는 그렇게 반대하진 않는 편이다, 하지만 Michael은 그런 종류의 것들에는 전혀 손도 안 대는, 정 반대의 사람이었다. Neu!는 처음부터 우리 둘이 음악만을 같이 만들고 나머지는 완전히 다른 그런 느낌이었다. 음악 말고는 그 어떤 것도 같이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분리는 그가 베저베르크란트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하고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던 것이리라."Rother의 부재와 함께, Dinger는 처음으로 '독립 선언'을 하게 된다. 그는 Dingerland라는 레이블 회사를 하나 세웠으며 Lilac Angels라는 밴드의 LP를 녹음하고, 프로듀싱하고, 5000장을 제작했다. 하지만 Dinger가 독일 메이저 레이블 회사와 적절한 유통 계약을 맺지 못하자 Dingerland는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으며, 5000장의 LP는 그의 아파트에 놓인 채로 음반 가게의 진열대로는 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음악적인 측면으로는, Dinger는 Neu!의 휴식기를 활용해 그의 동생 Thomas Dinger에게 드럼을 맡기고는 자신은 기타와 키보드 연주 등을 자유롭게 탐험하였으며, 동생을 두 번째 드러머 Hans Lampe(Conny Plank의 녹음 보조) 옆에 앉혀 La Düsseldorf의 프로토타입과도 같은 임시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이후 Dinger는 본격적으로 La Düsseldorf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76년의 데뷔 앨범 [La Düsseldorf]는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그 전에 Dingerland의 파산으로, Dinger는 50,000 마르크의 빚을 지게 된다.그 와중, Neu!는 여전히 Brain 레이블에 3번째 앨범을 빚지고 있는 상태였다. 1975년이 되어 Harmonia의 두 번째 앨범([Deluxe])이 발매된 후, Rother는 그와 Cluster 사이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한계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받았다(사실 Harmonia는 앨범 하나를 더 만들었는데, 이는 1976년에 Brian Eno와 협업으로 만든 [Harmonia 76: Tracks And Traces]라는 앨범으로 1990년대 후반에 발매되게 된다). Rother는 다시 한 번 Dinger와 함께 작업을 할 준비가 되었다. 그들은 프로듀서 Conny Plank와 다시 만났으며, 이번에는 Plank 소유의 스튜디오에서 [Neu! 75]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Dinger가 더 이상 드럼을 연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정신적으로 나는 내가 [Neu! 2]에서 했던 것 이상으로 더 좋은 드럼 연주를 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지점 이후로 나는 드럼에서 멀어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어째서인지, 그 시기, 그 단계가 내 안에서 완전히 끝나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더 큰 기계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두 명의 드러머가 한 명 처럼 연주한다는 아이디어를 좋아했다." Dinger의 설명이었다.Rother가 이어갔다, "우리는 3번째 앨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계약에 묶여 있었고, 해서 Klaus와 내가 이 3번째 앨범을 2인조로 만들자는 내 아이디어를 A면에 활용하고, 두 명의 드러머를 사용하자는 Klaus의 바람을 B면에 활용하기로 합의를 봤다. Klaus는 더 이상 드럼 세트 뒤에 있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무대 앞으로 나와서 노래를 부르고 또 리듬 기타를 연주하고 싶어했으며, 실제로 리듬 기타를 배우고 있기도 했다. [Neu! 75] 작업에는 이런 맥락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Neu! 75]는 A면과 B면이 아주 다른 앨범이 되었다. 하지만 이 앨범을 각각의 기여가 각 면에 국한되는 그런 식으로 분리하는 건 좋은 해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명의 아이디어는 언제나 다른 한 명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스튜디오 안에서는 언제나 항상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Neu! 75]는 좋은 결과였다고 본다."Michael은 너무 겸손한 사람이다. [Neu! 75]는 이들의 최고 걸작인 앨범이다. 'Rother의 A면'은 Neu!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을 음악들로 채워져 있으며, 보다 더 부드럽고 우아해진 모토릭 "Isi"가 전자음향적인 바다의 풍경 "Seeland"로 물 흐르듯이 이어지며, 기이할 정도로 매혹적이면서도 심오하게 청자를 사로잡는 "Leb' Wohl"로 넘어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Dinger의 B면'은 그의 '두 명의 드러머'라는 아이디어를 완벽하게 입증해내는 음악이다 - 향후 La Düsseldorf의 멤버로 이어지게 될, Thomas Dinger와 Hans Lampe라는 두 명의 드러머로. 두 사람이 서로 약간씩 다른 위상으로 전형적인 Dingerbeat를 두드려대며 모토릭 질주를 제대로 살려주는 곡 "Hero"는 Neu!의 전체 여정에서 거의 유일하게 '노래'라 부를 수 있을 곡이며, 여기에서 Dinger는 지난 몇 년간의 실패들에 대한 좌절감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이 곡은 서서히 잦아들며 "E-Musik"이라는 기나긴 인스트루멘탈로 전환되는데, 그 끝에서 "After Eight"이라는 이름으로 "Hero"가 다시 재탄생된다. 엄청난 해방감을 자랑하는 첫 포효, 나에게는 여전히 "BACK TO NOWHERE"라고 들리는 그 포효를 시작으로 포문을 여는 "Hero"를 나는 항상 일종의 '무법자 아우토반 찬가'로 잘못 듣곤 한다, 도시의 밤을 질주하는 폭주족 Dinger가 자치주의자(autonomist)적인 슬로건들, "The only crime is money"라던가 "Fuck the harmony"같은 슬로건들을 내지르는 곡으로. Dinger와 Rother 둘 모두 내 잘못된 가사 청해에 대해 상당히 당황하면서도 흥미로워했다. Dinger가 정정하길, 첫 가사는 "Back to Norway"였으며, 이는 그의 여자친구 Anita의 사업가 아버지 때문에 그녀를 떠나게 되었던 Dinger의 고통을 표현한 가사였던 것이다.Rother가 이어갔다, "Conny와 함께 Klaus의 "Hero" 노래를 듣던 것이 기억난다, 첫 테이크였는데 곧바로 최고의 보컬이 나왔다. '정말로, 진짜 좋은데.' 하지만 그는 "Fuck the harmony"라는 가사는 부르지 않았다. 그 때 Klaus는 본인의 레이블 Dingerland에 관련된 문제를 겪고 있었다. 돈도 정말 많이 잃었으며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굉장히 화가 나 있던 상태였다. "Fuck the company", "fuck the programme"이 그가 실제로 불렀던 가사였다. 하지만 당신 나름의 해석을 내가 스포일러로 망치면 안 될 것 같기도 하다. 음악을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마음 속으로 음악을 듣는 것이고,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음악가의 생각은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다.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려퍼지며 "fuck the harmony"라는 가사를 들었다는 생각을 했다면, 뭐...""내가 정말로 fuck하고 싶었던 것이 뭐였는지 말해주겠다: "Fuck the company", Dinger는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Fuck the programme", "fuck the press". "Hero"에는 fuck이 세 번 나오는데, harmony는 확실히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지간에, 내가 보기에 Michael은 상당히 충격을 받았었었다. Ja, 지금 돌이켜 보면 다 조금은 다르게 보이긴 한다. 그 때에는 Michael만이 충격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와 '비즈니스 월드' 사이의 관계도 더 좋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Neu!가 묶여 있던 계약이 완료된 후 Michael Rother는 솔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음울하면서도 명상적인 음악들을 담은 10장의 인스트루멘탈 앨범들을 지금까지 발매해 오고 있다. Dinger는 La Düsseldorf를 결성했으며, 완전히 부서져 흩어지기 전까지 3장의 앨범을 발매했고 이 세 장 모두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Klaus와 그의 동생 Thomas는 최근에서야 화해했으며, Lampe는 아직도 둘과 소원한 사이이다). 1980년 이후로 Dinger는 10년 가량을 눈에 띄지 않는 채로 보냈으며, 1994년이 되어서야 도쿄의 Captain Trip 레이블과 계약을 맺게 된다. 그 이후 Dinger는 놀라운 속도로 앨범을 발매하였으며, 여기에는 La Düsseldorf 세트를 담고 있는 두 장의 앨범과 La! Neu?라는 이름 하에 발매한, 혼란스러운 숫자의 앨범들이 있었다.1986년에 Dinger와 Rother는 재결합하여 네 번째 Neu! 앨범을 만들어 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Neu!의 활동 시기 내내 겪었던 성격 차이의 문제를 다시 한 번 맞닥뜨리게 되었으며, 이 때에는 Conny Plank가 둘 사이를 중재하며 음악적 촉매 역할을 해 주지도 못했다. 둘이 결국 완성해 낸 '평범한 앨범'을 발매해 줄 레이블을 찾지 못하게 되자, 이들은 테이프를 봉인하고 각자 한 세트씩 가져가는 것으로 짧은 재결성을 끝냈다. 이야기의 끝. 적어도 Rother는 그렇게 생각했다.Rother는 회고했다, "1995년에 Klaus로부터 팩스 하나를 받았는데, 여기에 '축하한다, 내일 [Neu! 4]가 일본에서 발매 될 예정이다'라고 써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이 사람 드디어 완전히 미쳤구나'라고 생각했다. Klaus는 나에게 [Neu! 4]의 사본을 하나 보내주었고 나는 더 화가 치밀었다. Klaus는 아주 약간의 음악적 요소들만을 더했고, 아주 조금의 편집을 했으며, 굉장히 이상한 라이너 노트를 썼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 모두 내 심정을 이해해 주었다, Klaus에게 연락하기 위해 Michael Rother에게 연락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 따위의 내용들이 적힌 CD에 내 음악이 실려있다는 건, 나로써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더, Klaus는 나에게 전혀 알리지 않은 채로 [Neu! Live 72](사실 굉장히 형편없는 리허설 테이프에 불과한 앨범이다)를 발매하기도 했다. 끔찍한 실패의 기록이었다."Dinger는 맞받아쳤다, "흑백논리로만 본다면 합법적인 행위는 단연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나에게 도덕적 권리가 있다고 느꼈다. 특히 Michael이 1987년의 제안, 그가 솔로 활동을 하던 Sky Records 레이블로부터 내가 받아 낸 앨범 발매 계약 제의를 Michael이 거절했을 때 그렇게 느꼈다. 나와 가까운 사이였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어째서 Michael이 그 때 그 앨범 발매 제안을 거절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1987년이었다. 이 앨범은 그렇게 바닥에 놓인 채로 몇 년간을 더 방치되어 있었으며, 그러다가 1994년에 Captain Trip 레이블이 나에게 연락을 해 왔다. 7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였다, 우리는 곧바로 Neu!에서 어떤 앨범이 더 발매될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Michael에게 물어보지 않고 나 혼자서 진행하기도 결정했다, 만약 Michael에게 물어봤다면 다시 한 번 앨범 발매가 무산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Dinger의 이유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그의 행동은 이미 긴장으로 팽팽했던 관계를 더 악화시켰고, 결국 Neu! 3부작의 CD 재발매 프로젝트는 불가능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리게 되었다. 적어도 Herbert Gronemeyer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Gronemeyer는 그 자신도 음악가였고, 그래서 Rother와 Dinger 사이의 문제들에 대해 이해했고, 실행 가능한 해결책도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어제 작업은 상당히 팽팽한 신경전이었다." Dinger는 CD 리마스터링 작업에 대해 말했다. "완성이 불가능할 것 같다는 느낌만을 받았다. 그러다가 Herbert가 도착했다, 실제로 베를린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비행기를 타고 와 주었던 것이었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그 날 작업 전체가 조금 부드러워졌다는, 더 원활해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진심으로 해적판 수준인 Neu! 앨범들을 이 세상에 다시 내놓겠다는 다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는 나도 이 리마스터링 작업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완전히 불가능했지만 말이다." □[Neu!], [Neu! 2], [Neu! 75]는 지금 Grönland 레이블을 통해 발매되어 있다https://youtu.be/fhiNtanvImg "Negativland"*********************************************************************************************
Michael Rother / Klaus Dinger (1946년 3월 24일 - 2008년 3월 21일)rest in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