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Michael Gira를 찾아서: 수감생활과 Madonna의 목격에서부터 Swans의 재림까지
Zachary Lipez [Self-Titled Magazine] 2014년, ST022
어리고 거칠었던 시절 - 즉, 정기적으로 빡센 마약을 복용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격적일 정도로 불친절하게 굴던 시절 - 나는 한 친구와 "Bill Bronson"이라는 이름의 게임을 하곤 했다. 이 게임의 이름은 1995 ~ 1997년 Swans의 베이시스트였던 사람의 이름을 따 온 것으로, 특정한 날의 밤에 Swans의 이전 멤버 중 누구라도 눈으로 보게 될 때 마다 1점씩 받는 식의 게임이었다. 그리고 Bill Bronson을 목격하게 되면 바로 이기는 것이다. 대신 Swans의 궤도 바깥에 있는 음악가, 예를 들어 Jon Spencer라던가 아니면 어디서 굴러먹다 나온 Railroad Jerk 같은 사람들을 보게 되면, 바로 지는 것이고.
당신은 작디작은 핀 머리에 Swans 전 멤버를 얼마나 집어넣을 수 있는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있을까, 아니면...
"Michael Gira가 변했어."
"나는 변했다."
"Michael의 매니저가 전화해서 말하길 'Michael은 변했어'라고 하더라."
"당신도 잘 알겠지만, 나는 진짜 개자식인 걸로 유명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Swans의 황홀한 2014년 앨범 [To Be Kind]에 관련된 인터뷰를 할 때 마다 항상 똑같은 '초창기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이를 풀어나갔었던 것 같다: Michael Gira는 더 이상 10년전의 그가, 굉장히 '어려운' 사람이었던 그가 아니었다, 1980년대 초반 실존적 절망에 빠져 있던, 야성의 눈을 가진, 비쩍 마른 공작 (duke) 같은 사람, 포스트펑크의 아이콘 또한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그 시기의 Gira를 직접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언제나 초기 Swans의 앨범들을 굉장히 '즐거운' 경험, 우주의 진리 중 특정한 진리에 대한 즐거운 탐험이라고 생각했다. 하, 심지어 냉소로 가득 찬 록 음악 비평가 Robert Christigau 조차도 1983년의 앨범 [Filth]의 인간혐오적인 블루스 멜로디를 보고 "재밌다"라고 표현할 정도였으니.
언더그라운드 록 음악의 넓은 스펙트럼에서 Gira의 유산이 어느 곳에 위치하는지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하여, 나는 뉴욕 시의 어딘가에 위치한 Gira의 집 현관에 앉아 몇 시간 동안 맥주를 마시며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내가 한창 Gira의 과거를 찔러보는 동안, 그의 약혼자이자 동료 음악가인 Jennifer Church (둘은 이후 결혼했다) 가 치즈와 크래커를 가져다 주기도 했었다. 익숙하다 못해 닳아버릴 정도로 똑같은 이야기를 한번 더 꺼낸 것에 대해 사과하자, Gira는 "괜찮다, 이게 내 일이니"라고 대답했다. 물론 나중에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지만: "나는 내 좆같은 인생이 진심으로 싫다, 그러니 뭐든지 물어봐도 된다."
'가장 높은 다리에서 내던져진 평범한 녀석들'에 대한 지루한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Gira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따뜻한 어조로 대화했으며, 철학적 의견의 충돌이라던가 자신의 삶과 인생에 대한 장황한 여담에도 쉽게 웃어넘기곤 했다. Gira가 "좋은 질문이다"라고 말할 때 마다 인터뷰어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모습이 전혀 어렵거나 상상 불가능한 장면이 아닌, 그런 느낌이었던 것이다. 한 발짝 떨어져서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바로 그 인터뷰어 중 하나였으니까. Swans의 멤버들 여럿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Michael Gira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Nick Cave에게 헤어스타일에 대한 칭찬을 듣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경험이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야 Gira가 나에게 또 똑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 건축, 감옥, 방 정리, 더 많은 건축 - 1986년부터 계속해서 똑같이 해 오던 이야기들. 그래서, 그러면 이제 어째야 하는 거란 말인지? 이 이야기들은 Gira라는 남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가 자신의 삶 말고 무슨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한번 주변인들에게 물어보는 것 또한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DREAM BABY DREAM
Michael Gira는 1954년, 로스 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끔찍한 시절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여러 인터뷰에 따르면 Gira는 혼자서 어린 동생을 돌봐야만 하는 경우를 많이 겪었다. Neil Diamond와 Swans 사이의 '끝없이 이어지는 크레센도'라는 평행선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부모님께서 음악을 많이 들었었냐는 질문을 한번 했었다. Gira는 짧게 대답했다, "아니다... 부모님은 애초에 내 옆에 거의 없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여러 경범죄로 체포되어 소년원에 수감될 위기에 처한 Gira는 아버지에 의해 서독으로 끌려가 공구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 아버지가 공장에서 일하는 대신 학교에 가라고 주장하자 그는 가출해 히치하이킹으로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터키, 이스라엘 등등을 전전한다. 15세, 이미 가출 경험이 있는 청년이었던 Gira는 Woodstock과 비슷한 페스티벌이었던 Actuel 페스티벌을 보러 다시 벨기에로 떠났다. 그 곳에서 Gira는 Frank Zappa가 Pink Floyd의 무대에 등장해 함께 연주했던 그 유명한 무대를 직접 보게 된다 (이 무대 말고도 Yes의 공연도 직접 보았는데, Gira에 따르면 "사실 상당히 멋지고 괜찮은 공연이었다").
Gira는 이 때의 경험을 설명했다. "Zappa는 "Careful With That Axe Eugene"에서 아주 끔찍한 블루스 솔로를 연주했었다. 그리고 Chicago Art Ensemble도 기억나는데, 다른 히피들하고 함께 흙바닥에 앉아 그들이 온갖 불협화음을 내는 것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점점 더 큰 노이즈가 들려왔는데, 알고 보니 페스티벌에 찾아 온 2만여명의 관객들이 내는 야유소리였다. 진짜 최악이었다! 정말 좋은 경험이었지."
Gira가 집에서 나와 홀로 떠돈 것은 이 때가 2번째였다. 결국 그는 이스라엘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돈 한푼 없이도 갈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로. 그 이후는... 감옥이었다. 성인용 감옥. 해시시 (hashish) 덩어리들을 팔았다는 이유였다. 예루살렘에 있는 영국 교도소에서 몇 개월간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후 어째서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다시 수감되었다.
"한번은 정말로 거의 강간당할 뻔 했었다." Gira의 말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감옥에 함께 있던 늙은 히피들이 나를 보살펴 주었다... 감옥에서 주로 한 일은, 손에 잡히는 책을 정말 좆나게 많이 읽어대는 거였다."
그는 고문당한 팔레스타인인들이 ("한 사람은 의사였는데,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감옥으로 들어왔다가 나가는 모습들을 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수감자 동료 중 한명이 변호사와 연락을 하게 되었고, 그 변호사의 도움으로 Gira 또한 풀려나게 되었으며, 이후 Gira는 구리 광산에 취직하여 흙을 삽으로 퍼 내는 일을 하게 되었다.
"하루는 해변가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한 멋진 페르시아계 유대인 여성분이 나를 받아주었다." Gira가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녀는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어머니'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 여성분이 내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 주었고, 아버지는 나를 캘리포니아로 다시 데려와서는 '이제는 너 혼자서, 스스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지금, 나 또한 부모가 되고 난 다음 돌이켜 보니 내 부모님이 얼마나 좆같은 고생을 하면서 살았을지, 상상도 안 된다."
Gira는 그 이후 대략 15년가량 아버지와는 말 한마디 섞지 않은 채로 살았다.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검정고시를 치른 후 전문대학에 진학했으며, Otis Art 장학금을 받고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학기가 지난 후 Gira는 중퇴했다. 그 후, 펑크 운동이 폭발했다: The Screamers, Germs, X, Cars의 L.A. 공연의 오프닝을 섰던 Suicide의 무대. 혐오로 가득 찬 관객들이 내뱉던 침.
Gira는 펑크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는 당장 뉴욕 시로 가야만 했다.
THE BLANK GENERATION
모두가 일상적으로 '1980년대의 뉴욕 시'를 낭만화시키고 있지만, Swans의 멤버들은 그 누구도 그렇게까지 그 시절을 그리워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모든 멤버들이 전부 그 시절 어떤 술집에서 시간을 보냈었는지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St. Marks의 Holiday Lounge (주인장도 술에 취해 잔돈을 안 거슬러 주곤 했던 술집), International Bar (이제는 주인이 바뀌었다, 그러니 무슨 의미가 있는지?), TR3, Blue Ribbon, Mudd Club, Lucy's, Pyramid... 뉴욕 시는 미친 곳이었다. 약쟁이들이 벽을 타고 올라가는 동안 시장 Ed Koch는 "자. 내가. 어떻게. 하고. 있지?"라고 소리지르던 곳.
"하루는 Jarboe와 같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Swans의 멤버 중 하나, Gira의 말이었다. "에어컨 위쪽에 작은 구멍이 있어서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듣는 용으로 쓰고 있었는데, 새벽 2시쯤 밖에서 톱질하는 소리가 들려서 '씨발 대체 뭐야?'라는 생각을 하며 창문을 열고 밖을 봤는데, 꼬마아이 하나가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혼자서. 길바닥에 깨진 유리조각이 가득했는데!"
하지만, 지금 우리는 너무 앞서 나가고 있다. '지금' Gira는 1980년대 초반, "해내기"위해서 이제 막 L.A.에서 뉴욕 시로 왔을 무렵이다.
"우리는 사이키델릭 고스 뉴웨이브로 대성공을 거둘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뉴욕 시로 왔었다." Gira의 말이었다. "지금 생각하자면 엄청나게 부끄럽다. 하지만 당시에도 가사는 꽤 괜찮았었다! 이제는 그 때의 내가 만들던 음악을 몇 초 정도 들어도 견딜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Dan Braun - 그의 형제인 Josh, 그리고 Gira 및 Rick Oller와 함께 Circus Mort라는 밴드를 만들었던 사람 - 은 조금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Circus Mort의 첫 리허설은 이러했다: "Gira와 Oller는 정말로 각별한 사이였다... 둘이서 자기들이 만들어 온 곡을 연주해 보였는데, 우리 둘 다 그 곡들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당시 뉴욕 시에서 들려오던 노래들과는 완전히 다른 음악이었다 - Kurt Weil의 요소들, The Screamers와 다른 L.A. 밴드들의 영향들."
Braun은 Gira의 미래 '넥킹'(역주: necking, 목과 목 위쪽의 애무 행위) 파트너가 될 Madonna가 자신들의 거처의 문을 두드렸던 때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Madonna가 와서는 혹시 담배 있냐고 물어보더라.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그녀에게 처음으로 담배를 건네주기 위해 서둘러 이곳저곳을 뒤졌다. Madonna가 말하길 복도 저 쪽 끝에서 리허설 중이니 아무때나 찾아오고 싶으면 오라고 했다. 그녀가 떠나고 난 후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만지며 온갖 음란한 제스처를 흉내냈었다. 그 때가 Madonna와 Michael Gira가 처음으로 만나게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무렵은 Circus Mort라는 밴드가 끝을 맞이하던 때이기도 했다 - 1981년 첫 EP 앨범을 발매하던 해, 밴드는 해체하고 말았다.
"그 후 나는 Rhys Chatham을 만나게 되었다." Gira는 설명했다. "그가 나에게 베이스를 줬었다... 베이스를 어떻게 연주하는지에 대해선 아예 몰랐지만, '진짜 음악가'가 될 생각이 없기만 하다면 대충 흉내는 낼 수 있을 정도로 베이스라는 것은 간단한 악기였다. Rhys는 조율하는 법도 가르쳐 주었었다."
기타리스트 Norman Westberg - 랩 스틸 (lap steel) 기타리스트 Christoph Hahn과 함께 Gira와 가장 오랜 시간동안 같이 활동한 음악가 - 는 최초의 Swans 라인업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는 St. Marks의 한 집에서 벌어진 파티에서 베이시스트 Harry Crosby를 만난 후 밴드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오디션은 6th Street과 Avenue B에 있던 Gira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새로운 음악이었다." Westberg의 말이었다. "노이즈를 만드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말이 되는 음악이기도 했다. 블루스 느낌의 드론.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로큰롤 뮤지션 Michael Gira': 일반적인 견해는 아닐 것이다. Gira는 어떤 종류의 맥주를 마시고 있느냐에 따라 여러가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초기 Swans의 '안티-록'적인 충동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다가도 - "나는 Swans의 음악이 록 보다 더 폭력적이길 바랬다" - Swans의 음악에서는 어떤 '종교성'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는 지적에 귀찮음을 느끼기 시작하면 금세 아주 합리적인 모습으로 변모하여 이렇게 대답하기도 했다, "소위 말하는 '영적'인 측면에 그렇게 집중하고 싶진 않다. 진부해 빠진 이야기다. 아니, 제발, 그냥 록 음악이잖나!"
그러면 그 시절의 Swans는 단순히 당시 뉴욕 시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던 밴드였는지? "주변 환경이 어떤 영향을 준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Gira는 말했다. "하지만, 정말로, 당시 Swans 음악에 가장 큰 동기를 부여했던 것은 우리가 '전통적인 음악가의 기술들'을 거의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부분이었다. 나는 내가 베이스로 이런 (폭탄의 폭발 같은 소리를 냈다) 소리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결정'했었다... 그리고 밴드에는 베이시스트가 2명 있었으니, 일종의 절충안, 음향 덩어리로 리듬을 만들어낸다는 방안을 채택했었다. 완전 초보적인 수준 그 자체였지."
"초기 Swans가 당시 뉴욕 시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밴드였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Westberg의 말이었다. "우리는 마약중독자 밴드가 아니었다. 뉴욕 시는 약쟁이들의 도시였고. 나는 그냥 Swans 음악을 '음악'으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Swans에 대한 일화들은 그들 자신들의 의견을 훨씬 앞서나가고 있었다. '공연장을 가득 채운 관중'이 단 한 사람으로 줄어들었던 때. Gira가 스스로를 모니터 위로 내던져버리고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욕을 퍼부었던 일화. Maxwell's 에서 단 2명의 관객에게 공연했던 일. Danceteria. CBGB. Pyramid. Sin Club. 전부 완전히 텅 비게 만들어 버렸던 일들. 심지어 Westberg는 바텐더들이 일부러 Swans에게 공연 기회를 줘서 퇴근시간 전에 관객들을 전부 내쫒아버리는데 이용했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나 또한 바텐더 일을 했던 사람으로써, 이런 방법이 아주 잘 먹히는 방법이라는 의견을 언급하겠다.)
물론, Swans 또한 역사 바깥에 존재하는 밴드는 아니였다. Gira 스스로는 이런 개념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예술 학교'라는 것은 존재하고 있으며 [Speed Trials] 컴필레이션만 봐도 분명하게 보이는 '씬'이 있었다 - The Fall, 초기 Swans, 초기 Sonic Youth, 초기 Beastie Boys까지 -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이미 초창기부터 이러한 씬을 알아보고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Gira의 오랜 동료이자 친구인 JG Thirlwell (Foetus) 이 이러한 씬의 태동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들을 처음 봤을 때, 바로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공연에는 분명히 나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Westberg 조차도 때로는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동질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고 인정했다 - Sin Club에서 The Hood (John Prossa의 디스코 스타일 프로젝트로, Prossa는 Swans에서 잠시 퍼커션을 맡은 적이 있었다) 와 함께 공연했을 때 등등 -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나도 '와, 이거 뭐라도 되겠는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HAPPINESS IN SLAVERY
잠시 Susan Martin, Labor Records에서 Circus Mort의 EP와 Swans의 첫 EP를 발매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이어져 전해오는 '전설'처럼 Swans가 그렇게 심한 경멸을 받는 밴드였던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모두가 Martin의 노고를 열렬히 치하해 주어야만 할 것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 누가 이런, 공연장 관객들을 전부 치워버리는 청소기 같은 밴드의 앨범을 발매해 주겠는가? 하지만 구글에 "Susan Martin Michael Gira"를 검색해 보면... 거의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당시 East 10th Street과 Avenue A 및 B에 위치한, 월세 $500 짜리 방에서 같이 사는 사이였지만 ("'데이트하는 사이'같은 말은 쓰지 말아주길 바란다." Martin의 말이었다. "우리는 섹스하는 사이였다."), Martin은 Swans의 역사에서 거의 사실상 완전히 잊혀진 사람이었다. Gira가 직접 나서서 그런 작업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Gira가 나서서 그녀의 존재를 다시 한 번 부각하려고 시도했던 것 또한 아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있었던 Hermann Nitsch의 공연에서 피를 닦는 역할을 했었다는 말을 하면서도, Gira는 그 공연이 Martin이 기획했던 공연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지는 않았었다. 사실, 그 공연이 Gira와 Martin이 처음으로 만났던 곳이었다: Gira가 옷에 묻은 피를 닦아내기 위해 나체로 있던 모습을 Martin이 보았던 것이다.
이게 Gira를 비난한다거나 하려는 의도로 말한 것은 아니다. Gira는 자신의 '씬'에서 엄청난 초-남성성을 강조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여러 여성 음악가들하고 오랜 협업을 해 온 사람이기도 했다 - '1기' Swans의 대부분 (1984 ~ 1997년) 을 Jarboe와 함께 작업하며 보냈으며, '2기' Swans는 St. Vincent, Karen O, Cold Specks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 음악가들을 게스트로 초청하여 Swans 앨범에 참여하게 했던 것이다, Gira의 음악에 넘쳐흐르는 야성적인 힘을 조율하는데 필수적인 균형을 제공할 수 있도록.
"몇 년 전인가 내가 "Reeling The Liars In"을 커버했었는데, Michael (Gira) 이 그걸 듣고 좋게 평가했었다." Cold Specks의 보컬 Al Spx의 말이었다. "내 두 번째 앨범 [Neuroplasticity]를 만들던 도중, 나는 수록곡 중 2곡에서 따뜻하지만 동시에 위협적인 느낌을 가진 남자 보컬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Michael은 내 부탁을 선뜻 들어주며 내 앨범에 참여해 주었다. 그 후, Michael 쪽에서 내게 연락을 해 와서 "Bring The Sun / Toussaint L'Ouverture"에 추가 보컬을 담당해 줄 수 있겠냐고 부탁해 왔던 것이다. 나는 그의 작곡 방식으로부터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감히 단언하건데 Michael은 '예술가들의 예술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The Seer]의 메마른 발라드 "Song For A Warrior"의 보컬을 담당했던 Karen O의 말이었다. "그는 '미지의 존재', 자신만의 영역을 가진 미지의 존재이며, 그의 예술은 좋든 싫든 청자의 영혼 깊은 곳에 숨겨진 무언가를 느끼게 만들어버리는 예술이다. 나에게는, 그런 예술이야말로 언젠가 반드시 얻고 싶은 '성배'같은 예술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Song For A Warrior"는 Michael의 어린 딸을 위해 만들어진 곡인 것 같다." Karen O는 이어갔다. "정말 놀라운 곡이다. "Song For A Warrior" 세션에 들어서며 나는 시키는 대로 무조건 따르겠다는, 봉사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들어갔었다. 처음에는 정말 긴장했었다, 누구든 안 그러겠는가? 하지만, Michael은 진심으로 내 작업을 지지해주고 내 방향을 믿어 주었다, 그와 함께 작업했던 것은 정말로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실제로 Michael은 완벽한 '신사'였다.
Swans의 '신화'에서 Susan Martin이 눈에 띄일 정도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질문하자, Gira는 완고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인터뷰에서 개인적인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굉장히 불쾌한 일이다."
Martin 쪽도 딱히 원한을 갖고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남자친구로써의 Michael은 정말 엄청날 정도로 다정했었다. 그 외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내가 말할 것이라고는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 악마가 깃들어 있다는 것 뿐이다. 모든 인간이 고통을 받고 있다. 나는 '고통'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신뢰하지 않는다."
초기작으로 다시 돌아가서, 나는 Gira에게 '도발'에 대해, 그리고 Lydia Lunch 및 Nick Zedd (집세를 내야만 하는 때가 오기 전까지 Gira의 집 바닥에서 머물렀던 사람) 와 함께 결성했던 느슨한 단체 "Theater Of Transgression"에 대해 물어보았다.
Gira는 질문 중간에 끼어들었다: "먼저, '죄' (transgression) 라고? 죄가 있다는 것은 당신이 노예라는 뜻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힘을 가지고 휘두르는 존재에 거슬러서 죄를 저지르는 것이기에. 애초에 죄라는 것을 저질러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측면에선 나는 최대한으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사람들의 삶은 자신들에게 달려 있다... 나는 누군가에게 충격을 가져다 준다거나, 죄를 저지른다거나, 누군가를 가르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저 훌륭한 오브제나 훌륭한 음향 덩어리를 만들고 싶을 뿐이다."
BURDEN OF DREAMS
인터뷰를 해 본 모두가 동의하는 한 가지 진실은 Michael Gira라는 사람의 '의지'였다. 현재 베이시스트 Christopher Pravdica나, Gira의 Young God 레이블 출신 음악가들 - Flux Information Science의 Tristan Bechet나 Calla의 Aurelio Valle - 이나 모두가 Gira의 인내심과 끈기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Bechet는 영화 [Fitzcarraldo] 및 Gira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감독에 빗대어 이렇게 말했다: "Michael은 Werner Herzog같은 사람이다. 커다란 배를 들고 산을 넘어 가야 하는 사람."
Gira에 있어 예술이란 '일'이며, 참여자 모두의 무한정한 헌신이 필요한 것이었다. Pravdica는 Gira가 Jarboe와 함께 애틀란타에서 거주하고 있을 때 Gira를 처음으로 만났으며, 이 때는 당시 Pravdica의 밴드 Gunga Din가 Jonathan Fire*Eater의 공연의 오프닝 무대에 섰을 때였다. "(애틀란타의 악명 높은 스트립 클럽) Clermont Lounge에서 Michael과 함께 찍은 사진을 아직 가지고 있다." Pravdica의 말이었다. "여기 내가 있는데, 난생 처음으로 코카인에 취해서 Michael에게 구금 (Jew’s harp) 을 연주하는 법을 가르치려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다."
Swans에 속해서 활동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보았을 때, Pravdica는 "훌륭하고, 진실하며, 열심히 일해야 하는 밴드다"라고 말했다. 일반적인 Swans 리허설이 6시간 가량이며 공연은 종종 3시간을 넘어간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가는 설명이었다. 잘 알려진 사실로, Gira는 결코 청력 보호용 귀마개를 착용하지 않았다. 밴드는 드럼이나 베이스 사운드를 들을 수 없으며 따라서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보고 그에 맞춰서 자신들의 느낌만으로 연주를 진행해야 한다. Pravdica는 Swans가 스스로에게 갖는 기대 수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팬터마임 (pantomime) 같은 건 없다...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한, 자기가 무슨 종류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지가 무슨 변화를 가져다 주겠는지?"
"Michael이 '보스'다." Westberg는 사실을 말할 뿐이라는 듯이 말했다. "어릴 때에는 누구나 자기가 '보스'가 되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실제로 당신은 그렇게까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가 보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화가 나서 떠나는 것, 두 가지 선택 뿐이다."
TALES OF ORDINARY MADNESS
"Pyramid에서 Swans 공연을 처음으로 봤었다." JG Thirlwell, Swans 멤버가 아니었던 사람들 중에서 Gira와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음악가일 가능성이 높은 그는 회고했다. "뇌가 녹아내리는 듯한 경험이었다 - 너무 강렬했고, 완벽하게 형태가 완성된 공연. 엄청난 양의 점액과 콧물이 흘렀었다. Susan Martin과 같이 거주하던 Gira의 아파트에는 그림들로 가득 찬 벽이 있었다. 그 그림들을 단 한 번도 출판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림들은 [Filth]의 가사들을 반영하는 그림들이었다 -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 그리고 타인을 위해 일한다는 것에 대한 수모와 비하... 그림들에는 계속해서 반복되어 등장하는 이미지가 하나 있었는데 - 그리고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트롤처럼 생긴 외모를 갖고 있었다 - 항문에서 튜브가 나와 자기 입으로 다시 들어가는 이미지였다. 정말 강렬한 그림들이었다. 자기혐오와 고역... 그리고 거기에 대한 일종의 유머 같은 것이 있었다. 정말 웃겨서 '하-하'라고 웃는 느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비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느낌의 유머가."
"Michael은 너그러운 사람이지만, 동시에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이기도 하다." Thirlwell은 이어갔다. "그는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영감으로 번뜩이는 사람이다. 그리고 여타 다른 사람들도 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Gira는 '구원의 서사'같은 것 너머의 다른 서사들도 보여 줄 만한 사람이었다. 우선, 인생이란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길이 아니며, 사람이 그 길을 똑바로 따라가기를 기대하는 것은 솔직히 어리석고 우스운 생각일 뿐이다. 더 중요한 부분은, Gira는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채로 존재하고 있으며 딱히 구원이라는 것을 찾아 헤매이지도 않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이제 60세가 된 Gira는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숭고한 예술을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며, 예상치 못했던 인기의 르네상스를 즐기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은 (Gira를 완전히 믿는다면, 그는 이러한 인기가 딱히 필요치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다시 얻게 된 인기가 그렇게까지 멋진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척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Swans라는 밴드의 2막에 있어서 '구원'이라는 주제 같은 건 완전히 요점을 벗어난 곁다리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Gira에게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Gira의 팬들, 추종자들 그리고 적들이 해석하거나 소비하는 썰 사이의 경계가 어디쯤에 위치하는지에 대해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예의'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돌아가신 내 부모님에 대한 존중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하게 말해서 내가 만든 곡들은 자전적인 곡들이 아니다. 내 경험들을 하나로 합쳐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빚어내려는 노력의 결과물이긴 하지만, 완성된 곡은 나에 관한 것 뿐만은 아닌 것이다. 온전히 본인에 관련되기만 한 음악을 만든다는 건, 나에게는 뭐랄까 이기적이고 진부한 표현으로 보인다. 나는 음악의 Charles Bukowski가 아니다. 내 가사는 나 한 사람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나는 나보다 더 큰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
Zachary Lipez는 [Please Take Me Off the Guest List]의 저자로, 이 책은 Yeah Yeah Yeahs의 기타리스트 Nick Zinner와의 협업 책이다. Lipez는 Freshkills의 프론트맨이었으며, 최근 Revocation, Goes Cube, Municipal Waste의 멤버들과 함께 Publicist UK라는 밴드를 새로 결성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