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도 잘 아는 사실이겠지만, 이시노 타큐의 DJ 및 솔로 예술가로서의 경력의 출발점은 피에르 타키와 함께 결성한 그룹 Denki Groove였다. 한편으로, Denki Groove는 이제 TV 및 라디오 버라이어티 쇼에도 출연하는 그룹이 되었으며, 피에르 타키는 연기를 통해 수상까지 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룹은 현재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Denki Groove는 2인조 밴드이다: 이시노 타큐는 노래를 부르고 음향을 만들어내며, 피에르 타키는 보컬과... 일종의 "파트"를 맡아 존재감에 기여하고 있다. (Happy Mondays의 Bez에 비교할 수도 있겠으나, 피에르 타키는 그 자체로도 일종의 연주자, 공연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밴드는 팝 음악의 여러 장르에 걸쳐 다양한 관객들에게 닿아 왔으며, 후지 록 페스티벌에서 해외 정상급 밴드들 여럿과 함께 헤드라이너를 맡기도 하고, J-Pop 페스티벌에서 공연하기도 했었다.
이시노 타큐와 Denki Groove의 현재 활동들을 정리해 종이에 적어보려고 시도한다 치면 굉장히 혼란스러운 결과가 나올 것이 자명하기에, 필자는 여기에서 멈추고자 한다. 흠, 일종의 배경으로써 설명을 추가하자면, 1980년대에 둘의 고향이었던 시즈오카 현 (도쿄와 나고야의 중간 지점에 있는 곳으로 후지산 기슭에 위치한다) 에서 피에르 타키와 이시노 타큐는 ZIN-SÄY!라는 밴드의 멤버였으며, 이 밴드는 뉴웨이브 이전 세대에 속하는 밴드였다. 밴드의 멤버들은 머리를 하얀색으로 칠하고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가사를 읊조리곤 했으며, 개그 만화의 등장인물이 그대로 현실에 구현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1990년대 초반, 테크노 씬이 형성되기도 전에, 이시노 타큐는 [All Night Nippon]이라는 이름의 심야 라디오 쇼를 진행하며 특유의 재치와 약간의 기괴함으로 청년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얻게 된다. 이 인기를 통해 이시노 타큐는 많은 청년들이 음악이라는 것에 눈을 뜨도록 이끌어 주기도 했었다. 물론 이 청년들이 이시노 타큐 없이도 어쨌든지간에 음악을 발견하기는 했을 것이지만, 그는 청년들에게 '테크노'의 매력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일본의 언더그라운드 밤문화의 매니아층을 넘어 테크노가 더 넓은 대중에게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들 중 하나가 된다. 그리고 또한, [WIRE] 같은 대규모 실내 파티 - 밴드가 아닌 DJ에게 집중된, 댄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다소 드문 기회로 여겨지는 파티 - 가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시노 타큐의 음악적 재능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개성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의 일본 테크노 씬은 굉장히 다른 모습이었을 거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지금 정도의 규모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거라는 건 거의 확실하다. 어느 여름날의 저녁, 나는 이 '아이콘' - 테크노 씬을 넘어 전체 서브컬쳐 씬의 아이콘일 것이다 - 과 만나 그의 다양한 경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와무라 유스케> '뿌리'부터 시작합시다. 당신은 1967년에 태어났으니, 10대 시절에 Yellow Magic Orchestra가 차트에 등장해 올라가는 모습을 직접 보았을 겁니다. Yellow Magic Orchestra의 영향, 그리고 뉴웨이브와 일렉트로팝의 영향을 받았을 텐데요.
이시노 타큐> Yellow Magic Orchestra는 일종의 방아쇠였고, 온갖 종류의 해외 일렉트로팝 밴드들이 한꺼번에 엄청나게 일본으로 소개되어 들어왔었죠. Telex, Kraftwerk 같은 밴드들. "이게 바다 건너에서 일어나는 일이야"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음악 잡지들이 있었죠 - 물론 이 때에는 인터넷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뉴웨이브를 다루는 잡지들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직접 음반 매장으로 가 보는 수 밖에 없었죠.
카와무라 유스케> 새로 입고된 물품들을 확인하러 말이죠.
이시노 타큐> 맞습니다, 하지만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잡지에 어떤 음반에 대한 리뷰가 실리면, 제가 직접 음반 가게로 가서 볼 무렵에는 그 음반은 이미 품절인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냥 리뷰를 읽고는 머릿속으로 어떤 음악일지 상상해 보는 수 밖에 없었죠 - 머릿속에서 며칠동안 가상의 음악을 생각하는 거죠.
카와무라 유스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 음반을 직접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나요? (웃음)
이시노 타큐> 물론이죠. 하지만 가끔은 제가 상상했던 음악이 더 좋은 경우가 있었어요! (웃음) "실제로 직접 들어보니까 좀 지루한데"같은 느낌으로.
카와무라 유스케> 하하, 그렇군요. 그렇다면 중학교 시절에 뉴웨이브를 많이 듣고, 그 다음에는 여러 일렉트로팝 밴드들을 들었을 텐데요. 그 후로 당신에게 전자음악은 항상 이어져 오는 줄기였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부분이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시노 타큐> 저에겐 독일의 뉴웨이브 밴드들이 정말로 중요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독일의 뉴웨이브 밴드들은 잉글랜드의 신스팝 밴드들과는 사고방식 자체가 분명하게 달랐으며, 장비를 사용하는 방식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록 밴드 형식에 신디사이저를 던져 놓고 "전자음악"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천지차이였죠. 장비 자체가 밴드에 깊숙하게 녹아 있는 밴드들이었으니까요.
카와무라 유스케> 예전 인터뷰에서 Die Krupps, D.A.F. 같은 독일 밴드들과 Ata Tak, Der Plan 같은 독일 레이블들을 언급하기도 하셨는데요. 이 밴드들은 모두 '한 멤버가 키보드를 연주하는 록 밴드' 형식을 따르지 않는 밴드들입니다.
이시노 타큐> 독일 밴드들의 경우, 기타/베이스/드럼에 신디사이저를 더하면 굉장히 이상하고 기괴한 소리가 되었습니다. 사람에 따라 미국이나 영국 뉴웨이브/신스팝 밴드들이 더 세련되었다고, 더 남성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더 상업적인 밴드들이 많이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밴드들은 굉장히 독특한 음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밴드들이 음악의 상업화에 반대한다거나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명백히 무언가 다른, 새로운 표현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저에게는 그런 점이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그리고 곧, 중학생이 되자 당신은 테이프를 가지고 오버더빙을 하는 실험을 시작하셨는데요.
이시노 타큐> 맞는 말씀입니다만, 그 때 Prophet-5는 대략 $15,000 정도의 가격이었고, 제가 사는 곳에서 Prophet-5를 구매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저는 다른 방식의 오버더빙을 시도해야만 했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정말 어렸을 때 부터 오르간 레슨을 받고 있었고 그래서 집에 전자 오르간이 1대 있었습니다. 그 오르간과 카세트를 가지고 온갖 오버더빙을 마음대로 하곤 했죠. 친구 한 명이 카시오 키보드 (VL-1 시리즈) 를 갖고 있었는데, 물론 이 키보드로 화음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지만, 여러 음색을 낼 수는 있었습니다. Trio의 "Da Da Da"라는 노래에 사용된 것이기도 했죠. 어쨌든지간에, 저는 그 키보드도 써서 오버더빙을 하곤 했습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듣기로는 상당한 양의 오버더빙 작업물을 만들었다고 하던데요.
이시노 타큐> 스스로 이런 시도들을 하게 된 계기는 Yellow Magic Orchestra보다는 Hovlakin (저자주: 간사이 지방에서 1979년 ~ 1983년 활동했던 밴드로, 어이없는 가사와 공연으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였습니다. Hovlakin는 초등학생 같은 멤버들로 구성된 밴드였습니다: 악기를 거의 하나도 다룰 줄 몰랐고, 곡들도 1분이 채 안 되었으며, 곡과 곡 사이를 마음대로 뛰어다니는 모습. Hovlakin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 저는 "음악을 하기 위해 어떤 자격증이 필요한 게 아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큰 감동을 받았죠.
카와무라 유스케> 그래서 "나도 직접 해 보겠어"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나요?
이시노 타큐> 사실 Yellow Magic Orchestra 같은 음악은 하고 싶어도 못 했을 거에요.
카와무라 유스케> 그건 그렇고, 음악을 좋아하기 전 - 그러니까 아마 초등학교 시절이 될 것 같은데요 - 에는 무엇을 좋아하셨나요?
이시노 타큐> 건담이죠. (웃음) 저는 건담을 사랑했습니다. 아직 제가 어린애였던 시절, 신디사이저 음악은 이제 막 미래적인 무언가로 사람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하던 것이었습니다. Perry & Kingsley가 광고음악에 사용되거나 하던 시절이었죠. 저는 SF, [Star Wars]를 좋아했는데, 그 미래적인 이미지들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 웃기죠. (웃음)
카와무라 유스케> 그러다가 고등학생이 되고 친구들과 함께 잠시 밴드를 결성했다가 그 후에 ZIN-SÄY!를 시작하게 된 것이군요 - ZIN-SÄY!는 독일 뉴웨이브 밴드들의 음악적 요소도 가지고 있는 밴드였지만, 당신은 스스로를 하얗게 칠하고 다녔고, 피에르 타키는 봉건 영주나 도라에몽으로 등장하고, 다른 멤버들 중 일부는 악기도 없이 춤만 추며 돌아다니는 밴드였습니다. 가사도 포함해 ZIN-SÄY!는 존재 자체가 일종의 넌센스 개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밴드였죠.
이시노 타큐>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저는 꽤나 이상한 녀석이었습니다. 저는 그냥 평범한 방식이 싫었습니다. 무엇이라도 정상적인 건 만들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었죠. 무언가 이상한 것을 하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저 스스로에게 이상한 조건을 부여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ZIN-SÄY! 결성 당시에 피에르 타키를 만나게 되었고, 지금까지 30년 가량의 시간을 함께 활동하셨군요.
이시노 타큐> 이미 아시겠지만, 타키는 처음에는 관객이었습니다. 공연을 하는데 와서 아주 미쳐버리던 관객이었죠. 타키는 음악적 배경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고, 아마 그래서인지 타키가 하고 있는 일들을 계속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타키가 그렇게나 자유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반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는 '음악이 아닌 것'의 대가이며, '연주자가 아닌 것'의 달인입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예전 인터뷰에서 당신은 ZIN-SÄY!의 말기에 다다르며 멤버들이 악기를 사용하기 시작하고, 밴드 자체로도 좀 더 신중하게 편곡하기 시작하자 밴드 자체가 덜 흥미로워지게 되었다고 말했었습니다.
이시노 타큐> 결국 ZIN-SÄY!는 '밴드'가 되었습니다. 어느 시점부터 저는 이미 힙합을 듣고 있었고,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악기를 반드시 연주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같은 생각을 진지하게 하기 시작했었죠.
카와무라 유스케> 1980년대 후반이었던 것 같은데, 그 무렵 이미 뉴웨이브에서 힙합과 댄스 음악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던 것인가요?
이시노 타큐> 당시 저에게 엄청난 영향을 줬던 것은 Afrika Bambaataa와 John Lydon의 "World Destruction" 이었어요. 뉴웨이브와 힙합을 연결한다는 것에 있어, 그 곡이야말로 저에게 '접점'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뉴웨이브 쪽에서 출발했던 사람이니까, 이 곡을 통해서 Afrika Bambaataa라는 음악가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죠.
카와무라 유스케> 그렇다면, 뉴웨이브 댄스 음악이 아닌 DJ 문화로서의 댄스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 또한 "World Destruction"에서 시작했던 것일까요?
이시노 타큐> 흠, 이 때에는 Run-DMC 또한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의 저는 아직 Run-DMC에 그렇게까지 빠져있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힙합에 관해서라면, Public Enemy를 처음 들었을 때 "이건 완전히 새로운 음악인데"같은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제가 팝 음악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을 뒤집어 엎는 음악이었죠. 그들의 2번째 앨범 말입니다. (저자주: 1988년의 [It Takes A Nation Of Millions To Hold Us Back])
카와무라 유스케> 그 앨범의 어떤 부분이 와닿았던 것인가요?
이시노 타큐> 아프리카계 미국 음악에 대한 저의 인식 자체를 송두리째 바꿔버린 앨범이었죠. 감각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저는 이 앨범을 통해 '실험적인 음향'이 댄스 음악에도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Jeff Mills나 UR같은 음악가들에게서도 받았던 느낌이었죠. 음악적으로 보자면 저의 '근본'은 바로 그런 감각의 경험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전에는 EBM 같은 음악을 주로 들었었는데, 이런 경험들 이후로는 EBM은 좀 웃긴 음악으로 들리게 되더군요.
카와무라 유스케> 음악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서 ZIN-SÄY!도 (1989년에) 해체하고 Denki Groove를 결성하게 되었던 것이군요. 샘플링과 댄스 음악에 대한 당신의 선호를 그대로 반영하는 변화였던 것 같습니다.
이시노 타큐> Public Enemy를 정말로 좋아했고, 그들의 음악에서 엄청난 영향을 받았지만, 우리는 흑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걸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죠. Denki Groove 결성 및 활동에 있어 진정한 원동력이었던 밴드는 Pop Will Eat Itself 였습니다. 그들 또한 흔한 훵크 샘플링이 아닌 그들이 정말로 듣던 음악들, 예를 들어 Adam & The Ants 같은 음악을 샘플링하고 있었죠. 우리는 그런 음악을 들으며 "아, 그래 그렇게 할 수 있구나"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힙합이라는 장르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흠, 배경이 되는 이야기가 없고, 아프리카계 미국 음악의 관습들을 따르지 않는다면, 성공하기는 쉽지 않겠는데"같은 생각을 했었죠. 그러나 Pop Will Eat Itself는 굉장히 다른 밴드였습니다. 그리고는 Bomb The Bass같은 밴드들이 있었죠 - 미국 힙합의 영향을 받은 잉글랜드 밴드들이야말로 저희에게는 가장 중요한 밴드들이었습니다. 록 음악의 요소를 여전히 갖고 있기에 청자가 받아들이기에도 훨씬 쉬웠죠. EBM 특유의 쉰 목소리와 마초 느낌도 없었고요.
카와무라 유스케> 그 당시 세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사보다는 샘플링, 밴드의 음향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같은 것이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이시노 타큐> 그 무렵 잉글랜드 밴드들을 듣다가 애시드 하우스와 시카고 하우스도 듣기 시작했었죠. 시카고 하우스가 잉글랜드로 건너가 좀 더 시끄러워져서 애시드 하우스가 되었고, 저는 애시드 하우스를 통해 시카고 하우스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 샘플러가 좀 더 널리 보급되면서 사람들이 점점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었죠: "봐봐, 그냥 뭔가를 두들기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러운 음향을 만들 수 있잖아". 하지만 애시드 하우스의 음향은 완전히 다른 무언가였습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 애시드 하우스 음악가들은 학생때에나 쓰던 싸구려 아날로그 신디사이저를 그대로 가지고서는 과거의 영광을 복원하려는 듯이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런 부분이, 제가 애시드 하우스 음악에 쉽게 빠져들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애시드 하우스 음악가들 또한 독일 뉴웨이브 음악가들이 신디사이저를 사용했던 방식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시노 타큐> 직접적인 연관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하지만 실제 음향은 완전히 새로웠죠.
이시노 타큐> 완전히 그랬죠. 애시드 하우스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말 그대로 "들어서는 안 되는 음악을 들어버렸구나"같은 느낌이었습니다. The Residents를 처음으로 들었을 때 생각했던 것, "정글에서 길을 잃었는데 어떤 이상한 부족이 벌이는 의식을 우연히 목격한 것 같은" 생각이 똑같이 들었던 것입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Denki Groove 초기에는 랩도 하셨는데 - 사실 랩 가사가 ZIN-SÄY! 시절처럼 말도 안 되는 내용들 뿐이었습니다. 먼저 어쩌다가 랩을 하시게 되었는지가 궁금합니다.
이시노 타큐> Pop Will Eat Itself의 영향도 있었고, 그 다음에는 힙-하우스도 있었죠? 그런 음악들이 저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무렵에는 Denki Groove의 음악이 '클럽 느낌'이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공연을 클럽이 아닌 무대에서 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사람으로써 뭐라도 해야 했는데, 가사를 그냥 노래로 부르는 건 맞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노래 가사 자체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언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 그러니까, 정말 좋은 가사를 썼다면, 그냥 종이 한 장에 적어서 전달하는 편이 훨씬 더 빠른 것이죠!
카와무라 유스케> 소리가 좋게 나는 걸 그냥 즐기는 것도 좋다는 말이군요.
이시노 타큐> 맞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스타일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음악에 랩 스타일의 보컬을 얹는다면 어떤 문제도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 어색하고 이상한 설교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결국에는 문제를 일으키긴 했었지만요. (웃음) 하지만, 그 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1990년대 초반에는 아직 DJ 활동을 시작하기 전이었고, 댄스 음악에 대한 경험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 무렵의 당신은 아직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따라가며 듣는 청자로써만 댄스 음악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 때만 해도 DJ 문화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는 않았던 것이 맞는가요? 반대로 말해보자면, DJ 문화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해 준 것은 무엇이었나요?
이시노 타큐> 아, 맨체스터에서였어요. Denki Groove 앨범 (DG에서 발매했던 1989년의 [662 BPM]) 을 인디 레이블에서 발매한 후에 저희는 Sony와 계약을 하게 되었고, Sony에서의 첫 앨범 (1991년의 [Flash Papa]) 을 맨체스터에서 만들게 되었었죠. 그 때 엔화가 굉장한 강세를 보이고 있었어서 해외에서 앨범을 녹음하는 것이 꽤나 흔한 일이었어요, Sony 사람들이 이렇게 물어왔었죠: "뉴욕 아니면 맨체스터, 어디를 선호하시죠?"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았죠 - 맨체스터로 가야만 하는 거였으니까요. 808 State의 Graham Massey와 일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808 State 앨범이 갑자기 엄청나게 잘 팔리기 시작하면서 시기가 맞지 않게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저희 앨범의 녹음 일정을 조율하던 사람이 808 State가 [Newbuild] 앨범을 녹음했던 스튜디오, Spirit Studio에 연줄이 있는 사람이었던 거에요. 그래서 그 스튜디오를 예약하고, 808 State와 친분이 있던 프로듀서 Tony Martin (Hypnotone) 을 섭외했던 것입니다. The Stone Roses의 투어 매니저였던 Steve라는 남자도 있었죠. 그 Steve라는 남자는 The Stone Roses가 일본 투어를 왔을 때 정말 멋진 시간을 보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매일 밤마다 우리를 온갖 곳에 데려다 줬어요 - "일본에서 누가 온다면 내가 가이드를 해 주고 싶어"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뜻밖이지만 또 이상적인, 멋진 가이드처럼 들리는데요.
이시노 타큐> 물론 하시엔다 (The Haçienda) 라던가 그런 유명한 장소들을 전부 가 봤었어요. Happy Mondays가 투어중이었고, 투어의 마지막 공연이 일본에서라면 도쿄 돔에 해당하는 곳인 G-MEX에서 성황리에 진행되었는데, 저희도 그들을 바로 눈 앞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또, 온갖 클럽 음악들이 해적판 라디오에서 울려퍼지고 있었죠. 그 전까지 저희는 Pop Will Eat Itself같은 밴드들, 실제 공연 중심의 밴드라고 할 수 있는 밴드들을 주로 듣고 있었는데, 이 무렵부터 클럽 음악으로 점점 옮겨가기 시작했어요. 정말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1990년대 초반의 밴드들은 최신 유행곡, 라디오, 심야 TV 프로그램 등에서 가사를 따 와서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샘플링하고 활용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음향 자체보다는 이러한 샘플링이야말로 그 밴드들이 하는 작업의 최전선에 위치했던 요소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까요?
이시노 타큐> 이름을 알리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었다고 봤기에 저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그런 방식이 완벽하게 괜찮은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사람들이 원하는 게 그런 샘플링 뿐이라는 사실에 굉장히 화가 났었어요. 그 때에는 현재의 도구들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활용인 것 처럼 보였습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표면적인 수준의 뭔가가 먼저 포착되기 마련이죠.
이시노 타큐> 맞습니다, 맞아요.
카와무라 유스케> 그렇게 개인적으로 댄스 음악 - 특히 유럽 테크노, 하우스 댄스 문화에 눈을 돌리게 되셨던 것이군요. Denki Groove가 일본에서 상당히 유명해지고 있을 때, 1993년 당신은 DJ로서도 개인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어쩌다가 그런 결정을 내렸었나요?
이시노 타큐> 어디 한 번 봅시다. 1992년에 저는 런던에 자주 갔었어요, 그냥 놀러 갔었죠. 그 때 런던에는 Knowledge라는 이름의 클럽이 있었는데, Colin Faver라는 사람이 DJ를 하는 곳이었죠. 맨체스터 다음으로 제가 'DJ 문화'라는 걸 경험하게 되는 엄청나게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저에게 정말로 엄청난 영향이 되었죠. 솔직히 말해서 이 전까지만 해도 저는 DJ가 실제로 정확히 뭘 하는지에 대해 아예 하나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Colin Faver가 직접 하는 행동들은 제가 이전에 DJ라는 것에 대해 막연히 가지고 있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행동들이었습니다 - 심지어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 봐도 Colin Faver의 BPM은 정말로 빨랐었습니다. 충격 그 자체였죠. 저는 허, 나도 이거 해 보고 싶은데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선곡만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이상인데"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맨체스터에서의 경험이 어떻게 보자면 '록의 연장선상'이었다고 하면, 1992년 런던에서의 경험은 'DJ 문화'에 보다 더 가까운 체험이었던 것이군요.
이시노 타큐> 맞습니다. 당시 맨체스터는 록과 댄스가 결합된 음악이 유행하고 있었죠, 발레아릭 (Balearic) 같은 음악이요. 하지만 런던에 방문하던 무렵, 런던에서는 이미 록의 느낌이 거의 없어지고 있었습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그러면 그 경험 이후로 12인치 싱글 음반들에 더 진심으로 매달리게 되었을 것 같은데요.
이시노 타큐> 아, 물론이죠.
카와무라 유스케> 예전 인터뷰에서 당신이 DJ를 시작할 때 Fumiya Tanaka의 제안을 받아 시작했던 거라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시노 타큐> 맞습니다, "한 번 해보는 게 뭐 어때서?"같은 제안이었죠. 이미 Yellow 클럽의 K.U.D.O.같은 DJ들이 있었고, 트랜스 씬에 연관되어 있는 파티들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점점 더 다양한 곳에 가기 시작했었죠.
카와무라 유스케> 제가 그 모든 것들을 실시간으로 직접 경험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당신이 말하는 '다양한 곳'은 Twilight 같은 이벤트들을 말하는 것인가요?
이시노 타큐> 맞습니다, Geoid 같은 곳들.
카와무라 유스케> 시간 순서를 생각해 보자면 그 시기는 도쿄에서 독일 트랜스가 유행하기 직전이었던 것 같네요.
이시노 타큐> 그렇죠.
카와무라 유스케> 그 후, 당신은 테크노와 독일 트랜스에 대한 압도적인 관심을 가지고 Denki Groove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1993년의 앨범 [Vitamin]에 대해 말해보자면, 이 앨범은 애시드 하우스를 팝이라는 형태로 발전시켜 부활시킨 앨범이라 할 수 있을 텐데요. 하지만 제 개인적인 인상으로는 당신은 애시드 하우스를 대중적으로 더 널리 알리려는 목적보다는 그저 애시드 하우스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이런 앨범을 만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시노 타큐> 맞습니다, 더 널리 알려보려는 목적은 없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어떻게 보자면, 제가 여러가지 것들을 즐기는 저만의 방식을 숨겨보려 노력하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런 측면에서는 어떠한 책임감이나 의무감도 느끼지 않습니다. 다르게 말해보자면, 저는 그러한 기분이나 감정만으로는 작업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뭐랄까 Denki Groove가 "내가 지금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음향이 바로 이거다"라고 말을 할 수 있는 일종의 수단이었던 것 같네요.
이시노 타큐> 맞습니다, 맞습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1990년대 초반의 테크노 클럽은 알 만한 사람들만 가는 장소였을 것 같은데요, 어느 순간부터 여러가지 것들이 하나로 모여 하나의 씬을 만들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시노 타큐> 신주쿠에 Liquidroom이 문을 열었을 때였겠죠 (1994년). 그 전까지는 '클럽'이라고 부를 만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Liquidroom이 록 음악 팬들도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지간에 Liquidroom은 엄청난 존재감을 자랑하는 장소였어요. 정말 '넓은' 장소였습니다, 공연을 하는 음악가들의 다양함도 그랬고, 공간 자체의 수용 가능 인원도 대단했었죠 (대략 1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Underworld와 Drum Club 공연을 유치하기도 했는데, 그 전까지 Liquidroom 정도로 넓은 클럽이 없었기에 이런 공연은 사실 상상도 할 수 없는 공연이었죠. 그런 이유로 인해 Liquidroom의 개장이 엄청나게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씬은 알 만한 사람들을 넘어 일반 대중에게까지 뻗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이렇게나 큰 규모의 무언가가 아예 없었으니까요.
카와무라 유스케> 그렇게 1994년이 되어 Denki Groove가 앨범 [DRAGON]을 발매하게 되었고, 이 앨범은 당신의 DJ적 감성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Vitamin]과 비슷한 앨범이었습니다. 그 다음 앨범들은 좀 달라졌지만요.
이시노 타큐>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언제나 항상 명확한 구분이 있었어요. Denki Groove가 '팝 싱글'로 발매한 곡은 단 한 번도 재생한 적이 없었죠.
카와무라 유스케> 청자들이 전자음악에 담긴 유머러스한 요소들에 얼마나 열광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기 전에, 제 나름대로 생각해 보자면 당신은 동시에 "하, 나중에 이걸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르겠는데"라는 생각도 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시노 타큐> 글쎄요, 저희는 어렸던 것 같아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어느 쪽이든지간에 괜찮지 않았을까 싶네요.
카와무라 유스케> 1995년에 Sony에서 솔로 앨범 [Dove Loves Dub]을 발매하셨죠. DJ 활동을 이어나가며 솔로 활동도 점점 더 동력을 얻게 되었구요. 또한 [Mix-Up] 시리즈도 시작하시게 되셨었는데, 여기에서는 본인의 믹스를 발매하는 것으로 시작해 Jeff Mills, Ken Ishii, Fumiya Tanaka, Derrick May 등의 믹스도 발매하게 되었으며, 물론 시리즈는 굉장한 호평을 받았었습니다.
이시노 타큐> 처음에 Sony에 히로이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 찾아가서 "해외 테크노 레이블들하고 라이센스 계약을 해 보는 건 어때요?"라고 제안했었죠. 히로이시는 직접 출장을 나가 몇몇 레이블들과 계약을 맺었고, 테크노 쪽에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었습니다 - Sony 내부에 테크노 관련 부서를 직접 만들었었죠. [Mix-Up]은 이 방향의 결과물들 중 하나였습니다. 히로이시가 계약했던 레이블은 Warp, R&S, Rising High 등등이었는데 - 지금 돌이켜보면 굉장하죠. 비슷한 시기에 Denki Groove의 싱글 [Diji]가 독일의 MFS 레이블에서 발매되었었는데 (1994년),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베를린에서 DJ를 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경험 또한 제 인생에 있어 엄청난 전환점이 되었었죠.
카와무라 유스케> '성지'에서 인정을 받은 것이었으니까요.
이시노 타큐> '인정'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그러니까, 저는 프로모션의 일환으로 갔던 것이기 때문에, 좀 다르긴 한 것 같아요. 하지만 베를린에는 순전히 즐기기 위해서 간다는 생각을 갖고 방문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긴 했었습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스스로의 원동력과, 베를린에서 맺게 된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인가요?
이시노 타큐> 맞습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그 후 해외 공연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고, 1998년에는 [Love Parade] 페스티벌에서 공연하게 되기도 하셨죠. 당신은 베를린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거주하셨었고, 2번째 솔로 앨범인 [Berlin Trax] 또한 베를린에서 만드셨습니다.
이시노 타큐> 저는 그냥, "내가 바라는 건 베를린에 있는 것 뿐이다"라는 생각이었어요. (웃음) 하지만 DJ 공연은 주말에만 진행되는 편이었고, 해서 주중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고민하다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흠, 앨범 하나 만드는 건 어떨까". 지금이야 컴퓨터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시절만 해도 앨범을 만들어 보려면 스튜디오로 가야만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에 제가 그렇게나 많이 해외여행을 다녔던 것이었어요, 1년에 3-4달씩 해외에 있기도 했었죠. 가을하고 봄. 아니, 어쩌면 그 보다 더 많이 나갔던 것 같아요, 봄에 2개월, 가을에 3개월 이런 식으로 말이죠.
카와무라 유스케> 당시 베를린에서 반년 가량의 시간을 보내셨었죠. 그 시기의 기억들 중 하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추억이 있으신가요? 물론 베를린에서 맺으신 인간관계가 있겠습니다만.
이시노 타큐> 아, 꽤 많은 것 같아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하지만, 우선, DJ가 되는 방법 자체가, 요즘하고 그 시절하고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클럽에서의 DJ의 중요성이 이제는 정말 많이 커졌어요. 그 시절에는 전업 DJ라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베를린에서 지내던 시기가 이제 막 여러가지 상황들이 천천히 바뀌기 시작하던 순간이었죠.
카와무라 유스케> 이 무렵에는 Denki Groove가 당신의 활동 중 가장 주된 프로젝트였고, DJ나 솔로 앨범은 어떻게 보자면 부업에 가까운 프로젝트였던 것 같습니다.
이시노 타큐> 상대적인 중요도가 바뀌기 시작하던 때도 그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카와무라 유스케> 2000년에 Denki Groove는 [Voxxx] 앨범을 발매하고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휴식기가 그 '중요도의 변화'와도 관계가 있는 일이었나요?
이시노 타큐> 흠, 네, 그런 측면도 있긴 했지만, [Voxxx]는 만드는 것 자체가 아주 어려웠던 앨범이었어요 - 멤버들이 그만두곤 했었으니까요. 정말로, Denki Groove라는 밴드의 위기였습니다. 또한 제 개인 활동들이 막 펼쳐지던 시기이기도 했으니,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게 너무나도 어려웠습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조금 뜬금없는 질문이긴 합니다만, 1999년에 당신은 (매년 진행되었던 레이브 파티 행사) [WIRE]를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계기로 기획하게 되었던 것이었나요?
이시노 타큐> 저는 일종의 구조 요청을, 메이데이를 보내고 싶었어요, 그 당시 독일과 일본의 테크노 씬의 규모 차이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었죠. 1990년대 후반, 테크노는 일본에서 점점 받아들여지고 있던 장르였지만, 여전히 CD에서나 들어볼 수 있는 음악이었습니다. 클럽들이 있기는 했으나 대규모 실내 레이브 파티를 할 만한 곳은 하나도 없었죠. 야외에서 진행되는 행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뭐랄까, 트랜스에 가까운 것이었죠. 일본의 테크노 씬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었지만, 저는 레이브 파티를 열기에 충분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일본에도 레이브 파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요. 베를린에 친분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뭐라도 함께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게 계기였어요.
카와무라 유스케> 2000년대 중반이 되며 [WIRE]도 잘 자리를 잡게 되었고, 테크노 씬 자체도 상당히 다양해지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 테크노 씬을 이끌겠다는 것이 당신의 생각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지간에 테크노 씬이 자라나면서 당신과 씬이 아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게 된 것만은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시노 타큐> 제가요?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네요. 시간이 흐르면서 저는 뭐랄까, 세세한 것 전부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 것 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스스로 감당하는 일을 줄이게 되었죠. [WIRE] 행사를 시작하면서 저는 행사 참여자들을 보며 나 또한 "저들 중 하나"가 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된 것이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2004년까지 당신은 솔로 작품들을 발매하셨고, 이 음악들은 팝 음악도 아니었지만 또 동시에 "순수한 댄스 음악"도 아니었습니다. 당신만의 독특한 균형을 잡은 음악들을 만들어내게 되셨죠. 음향적으로는 완전히 테크노였지만, 뭐랄까 잡아내기 어려운 독특한 거리감을 발견하시기도 하셨습니다. Denki Groove 음악하고도 달랐구요.
이시노 타큐> 그 이유들 중 하나는 제가 더 이상 메이저 레이블에서 활동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메이저 레이블에선 여러가지를 추진할 수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메이저 레이블에서의 앨범 발매와 그에 따라오는 프로모션은 충분히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며, 그 수준의 지원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를 들어서, 보통 클럽 음악은 메이저 레이블에서 발매해야만 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메이저 레이블이 아닌 곳에서 발매해야 더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방금 지하실로 버려버린 곡 하나를 밀어붙여서 앨범에 어거지로 넣어야 하는 건 좀 짜증나는 일이죠. 이건 현재에도 똑같습니다, 음악에 있어서의 균형 같은 것이 실제로 눈에 보입니다. 역할의 분담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카와무라 유스케> [Berlin Trax]는 제가 느끼기에는 당신의 앨범들 중 유일하게 '순수한 DJ 음악'을 담고 있는 앨범입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 자체에 대한 당신의 대답, 그리고 당신이 활동 중 DJ가 주가 되어가고 있다는 변화를 반영하는 앨범이었나요?
이시노 타큐> 확실히 그런 느낌이 있었고, 당시의 저는 DJ 활동을 계속할 거라면, 반드시 메이저 레이블에서 해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또 저는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하구요. 그런 감성을 오로지 이전까지 해 오던 메이저 레이블 방식으로만 하는 건, 저로써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당신의 지금까지의 활동들 모두에 어떤 '유머'가 깃들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 당신이 발매해 온 앨범들의 제목을 보거나, 커버를 보거나 한다면 말이죠. 당신의 모든 작품에 전부 그런 유머적 요소가 있지 않은가요?
이시노 타큐> '유머'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단순히 보여주기 위해 덧붙인 유머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실제로도 그러했구요. 그런 유머는 가끔은 불쾌한 파울이기까지 할 수도 있겠죠. 제 개인적인 작업들과, 정말로 열심히 노력해 넣은 유머 사이에는 그 어떤 관계도 없겠습니다만 - 그래도, 흠, Denki Groove에서는 그런 유머가 좀 더 많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니까, 최대한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뭔가 그냥 스며나와 버리는 것이죠. 저는 본질적으로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웃음)
카와무라 유스케> 하하, 그렇군요. 작년에 잡지 [Idea]가 한 호 전부를 Denki Groove, 특히 Denki Groove의 앨범 커버 디자인에 할애했었는데요. 수록된 당신의 인터뷰를 읽다 보니 앨범 커버의 컨셉 대부분을 당신이 생각해내신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앨범이라는 '제품'을 제작하는 때가 되었을 때에는 무엇에 가장 큰 주의를 기울이셨었나요?
이시노 타큐> 저는 앨범이나 CD를 구매할 때, 어떤 '페티시'적인 부분이 없다면 구매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저 또한 앨범을 사 모으는 사람으로써, 앨범을 구매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만족감을 선사해 줄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앨범을 만드는 사람으로써 작업해야 할 때, 저는 구매자로써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 관점에서 앨범 커버를 제작하려고 해 왔습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일종의 '상품 디자인'에 해당하는 거라고도 볼 수 있을 텐데, 앨범 커버 디자인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이시노 타큐> 아트워크 측면을 말씀하시는 거죠? 아, 정말 많죠... 우선, 저희의 첫 번째, 나무 박스셋을 생각해 보세요. 재정적인 이유로 실제로 만들지는 못했습니다만 손에 그런 박스셋을 들고 있다면 정말 행복한 기분일 것입니다. 컷어웨이 재킷이라거나 그런 것들, 정말 멋집니다. 뭔가 물리적인, 실제 물질을 만들어야 한다면, 저는 제대로 만들고 싶어요.
카와무라 유스케> 그래서, 당신은 모든 종류의 음악을 다 듣는 사람이지만, 직접 만드는 것은 전부 전자 음악이었습니다. 어째서인가요? 전자 음악에 특별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시노 타큐> 흠, 어쩌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일지도... 아니면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정의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건 이래"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전자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측면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자 음악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자유'가 있고, 이러한 자유는 음악가의 측면에까지 확장되어 있습니다. 음악가가 자신의 음악을 어떤 한 가지 방식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따라가리라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 하지만, 다시 한 번, 이 부분이야말로 전자 음악의 매력 중 하나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음악가가 무언가를 한 가지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실제로는 그와 완전히 반대되는 방식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웃음) 하지만, 뭐 제가 완전히 틀린 것이라고 해도, 음악을 여전히 즐기고 있다는 한에서는 여전히 "맞다"고 생각해요. 제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여전히 재미있으니까, 실수는 아닌 것이죠.
카와무라 유스케> 뉴웨이브, 테크노, 레프트필드 등등, 전자 음악에는 언제라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항상 있는 것 같습니다.
이시노 타큐> 물론 세대가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본질적으로는 언제나 항상 같은 것일지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애시드 하우스 음악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 제 느낌은 말 그대로 이랬었어요: "나 방금 기가 막힌 걸 하나 봤어". 분명하게 정해진 형식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록 밴드를 떠올려 본다 치면 밴드가 음악을 하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나요? 하지만 전자 음악에 있어서는 그런 상상이 불가능하며, 저는 바로 그런 점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시카고 하우스를 보자면 그 음악가들이 정말로 진지한 건지 아니면 그냥 장난을 치는 건지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죠.
카와무라 유스케> 그래서 가장 무서운 것이죠.
이시노 타큐> 맞습니다, 맞아요.
카와무라 유스케> 최근 몇 년간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당신은 일본 최고의 테크노 DJ라는 입지를 굳히면서도 동시에 2008년에 Denki Groove 공백기도 깨고 앨범 [J-POP]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드디어, 솔로 활동과 Denki Groove 활동을 함께 병행할 수 있는 균형을 찾으신 것 같은데요.
이시노 타큐> 네, 그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유럽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가 잠깐 일본으로 돌아와 Denki Groove 작업을 하곤 했었어요. 좀 어렵기도 했지만, Denki Groove 작업이 잘 진행되면 그 작업에 완전히 빠져들어가야 한다는 그런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시간이 있기도 하구요.
카와무라 유스케> 당신이 DJ 활동으로 바쁜 동안, 피에르 타키 또한 배우이자 엔터테이너로써의 본인만의 경력을 쌓아 나갔습니다 - TV 드라마에 출연하기도 하고, 배우 활동으로 상을 수상하기도 했죠. 그러니 피에르 타키는 이제 다른 영역에 있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는 여전히 Denki Groove에서 말도 안 되는 가사를 계속해서 부르고 있으며, 당신과 함께 둘이서, 어쩌면 지나치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한 유닛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이시노 타큐> 제가 생각했던 그대로, 타키는 음악가가 아닙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예전부터 말이죠.
이시노 타큐> 단순히 예전만이 아니라 - 지금도 그렇죠! (웃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키는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가 아예 불가능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게 - 비교 대상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 - 타키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가 맡고 있는 다양한 역할들을 이해하고 있어요. 누군가가 "이건 음악 그룹이 아니잖아"라고 말하면, 그런 말이 어떤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타키의 경우는 전혀 아니죠.
카와무라 유스케> 그런 식의 정의가 아니라는 말씀이시죠.
이시노 타큐> 그가 밴드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떠나서도, 그리고 그가 하고 있는 온갖 다른 작업들을 제외하고서라도, 타키가 Denki Groove에 가져다 주고 있는 것들은 완전히 체계적이기 때문에, 타키와 함께 작업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J-POP] 부터 당신은 팝 음악으로부터 멀어진 것 같아 보입니다.
이시노 타큐> 예전에는 제 DJ 활동이 Denki Groove에도 반영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느끼는 것들, 경험하는 것들, 생각하는 것들이 무의식적으로 녹아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편이 더 간단하죠.
카와무라 유스케> 그나저나, 당신이 Denki Groove에서 단어들을 사용하는 방식은 바뀌었지만, 유머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유머에 영향을 준 것은 무엇인가요?
이시노 타큐> 아카츠카 (아카츠카 후지오, 1935-2008,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굉장한 유명세를 떨친 개그 만화를 연재했던 만화가. 특유의 초현실적이고 말도 안 되는 개그로 잘 알려져 있다) 의 만화겠지요. 아카츠카의 작품들은 번역은 되었지만 해외의 그 누구도 아직 그를 모릅니다. (웃음) Holger Hiller가 했던 말이 있는데: "클리셰를 충분히 쌓아 올리면 단어들 밑에 숨어 있던 슈퍼-클리셰가 나타나게 된다". 저는 그 말을 정말 좋아합니다 -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는 측면이 아니라, 제가 초반에 말했던 것, 전자 음향으로 여러가지를 표현한다는 아이디어에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카츠카는 개그 만화를 그렸지만, 그의 작품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굉장히 무섭게 느껴질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저런 사람이 실제로 내 옆에 있으면 어떡하지!"같은 생각이 드는 것처럼 말이에요. 저 또한 초등학교 때 만화가가 되고 싶어했었고, 그래서 그런 관계가 있다고, 명백히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솔로 활동을 위해서 계속해서 작곡을 하고 있습니까?
이시노 타큐> 아, 최근에는 전혀 안 합니다. (웃음) 이제 막 스튜디오를 리모델링 했거든요.
카와무라 유스케> DJ 활동이 여전히 재미있나요?
이시노 타큐> 물론이죠. 하지만 근본적으로 지루해지게 된다면, 바로 그만둘 것 같습니다.
카와무라 유스케> 언젠가는 지치게 될 꺼라고 생각하시는지?
이시노 타큐> 흠, 잘 모르겠네요, 저 스스로도 잘 모르겠어요.
카와무라 유스케> DJ 및 솔로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요약해 보자면, 1990년대 초반에는 댄스 음악을 접하셨고, 1990년대 중반에는 DJ 문화에 빠져들어 가셨으며, 최근에는 씬에 대한 보다 더 폭넓은 참여로 방향을 바꾸셨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시노 타큐> 네, 하지만 최근에 "방향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제 활동이 갑자기 변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는 그저 한동안 계속 살아왔을 뿐입니다. 이런 게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중년의 남자가 갑자기 변하는 것"은 정말 흔한 일이죠. 진지하게 살아 온 샐러리맨이 갑자기 홍등가를 떠올리는 그런 것 처럼 말입니다. (웃음) 제 경우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하지만, 처음에 말했던 두 가지는 정말로, 정말로 중요한 지점들이 맞습니다. 제 현재의 활동은 그 경험들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