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Non-Stop Erotic Cabaret
    [...]/[Soft Cell] 2023. 3. 21. 09:15



    https://youtu.be/CCTBuOheUpE
    "Tainted Love"

    *********************************************************************************************

    https://thequietus.com/articles/30878-soft-cell-non-stop-erotic-cabaret-oral-history-dave-ball-marc-almond-interview

    Non-Stop Erotic Cabaret: Soft Cell의 첫 앨범에 대하여
    Patrick Clarke
    [The Quietus]
    2021년 11월 26일


    Soft Cell의 첫 앨범 [Non-Stop Erotic Cabaret] 속에는 여러 갈래들이 이어져 연결되어 있다. 앨범에는 Dave Ball과 Marc Almond이 어린 시절을 보내던 바닷가 마을, 블랙풀(Blackpool)과 사우스포트(Southport) 특유의 음탕함이 스며들어 있으며, 이 음탕함은 듀오의 대담한 전자음향 실험을 통해 음악의 형태로 빚어져 있다 - 리즈(Leeds)의 예술학교에서 이 둘을 연결시켜 주었던 매개체인 그 '음악'으로. 또한 한편으로는 [Non-Stop Erotic Cabaret]은 1980년대 초반 뉴욕의 클럽 씬, 아직 엑스터시가 합법이던 시절의 희열을 녹아낸 앨범이기도 하고, 동시에 마가렛 대처 시기의 잉글랜드의 단칸방 생활의 따분함과 소호(SOHO)의 최전성기 시절 드러났던 추악함이 스며들어 있는 앨범이기도 했다.

    이 모든 특징들과 함께, [Non-Stop Erotic Cabaret]는 부드럽고, 충격적이며, 멍청한 앨범이었다. 4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구라도 [Non-Stop Erotic Cabaret]를 듣다 보면 앨범이 보여주는 멜로드라마의 매력에 곧잘 이끌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엄청난 히트 싱글 "Tainted Love"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Non-Stop Erotic Cabaret]는 모든 수록곡들을 통해 위험하기 짝이 없어보이는 어두운 뒷골목들을 하나하나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듯한, 그런 앨범이다.

    [Non-Stop Erotic Cabaret]가 발매 이후 지난 40년간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아무리 말해도 과장하기 힘들 정도일 것이다. [The Quietus]지와의 인터뷰에서 Dave Ball이 밝혔었듯이, 이전부터 미국에서는 종종 Sparks Suicide같은 듀오가 등장했었지만, 영국에서는 Soft Cell 이전까지는 그 어떤 식으로든 유명세를 얻는데 성공한 신스 듀오가 등장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Almond의 어두운 화려함과 Ball의 강철 같은 고요함이 보이는 선명한 대조는 오늘날 4인조 록 밴드 구성에 필적할 정도로 표준화되어 있는 양식은 '듀오 구성'의 기초가 되었다: Erasure, Pet Shop Boys, Eurythmics 같은 듀오들의 음악이 Soft Cell과는 조금 다른 스타일일 수는 있겠으나, 그들 또한 Soft Cell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온 것도 사실이었다.

    [The Quietus]지와의 인터뷰, Almond과 Ball 말고도 [Non-Stop Erotic Cabaret]에 기여했던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도 함께 실린 이 인터뷰에서 그려진 Soft Cell의 모습은, 언제나 '틀'을 깨 부숴버리려는 듀오의 모습이었다. 차트 1위와 어마어마한 인기가 이 둘을 곧바로 덮쳐 완전히 덮어버렸었지만, Soft Cell에게 있어 가장 빛나던 것은 바로 듀오의 미래지향적인 생각이었던 것이다.

    https://youtu.be/O1FG7ZwSioI
    "Frustration"

    파트 1: 블랙풀과 사우스포트에서 리즈와 런던으로
    두 명의 예술대학 학생, Marc Almond(사우스포트 출신)과 Dave Ball(블랙풀 출신)은 리즈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리즈 폴리테크닉(Leeds Polytechnic)에서 막 떠오르고 있던 실험 음악 씬, 그리고 둘 모두 공통으로 겪었던 바닷가 마을에서의 성장 경험은, Soft Cell이라는 밴드 특유의 음악의 밑거름이 되었다...

    Marc Almond> Soft Cell의 음악을 주의깊게 들어 보면 멤버 모두가 랭커셔(Lancashire) 지방의 해안 마을에서 자랐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Soft Cell 음악에는 해안가 관광지 마을에서 으레 파는 쓰레기 엽서들의 정취가 깃들어 있다. 온갖 잡다한 짓은 다 하는 끔찍한 엔터테이너들, 싸구려 Bontempi 오르간으로 클럽 음악을 연주하는 캬바레 듀오들, 거지같은 옷과 메이크업을 하고 너무 심할 정도로 음정을 못 맞추면서 노래하는 가수들. 불길하고 무시무시한 캠프들. 나는 10대 시절 Southport Theatre에서 무대 관리직으로 일했었는데, 싸구려 판토마임 극단 단원이나 해변가 공연단 단장 등등이 매일같이 성적 폭력을 일삼던 축제의 장이라는 광경이, 정말 이상한 광경이었다.

    Dave Ball> 나는 비성수기의 해안가를 언제나 좋아했었다. 비수기에 블랙풀 Pleasure Beach를 거닐어 보면, 모든 곳이 텅 비어있고 회색으로 가득할 뿐이다. 이러한 바닷가 특유의 우울함이 Marc와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것은 사실 '북쪽 지방'의 특징이고, 밴드 중에서는 Joy Division이 이런 특유의 우울함을 차고 넘치게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Kraftwerk를 듣게 되었는데, 듣자마자 곧바로 블랙풀 음악 장비 가게에 가서 중고 신디사이저를 구매했다. 나중에 리즈 폴리테크닉에 갔을 때, 캠퍼스에 음향 관련 작업이 가능한 녹음실 같은 것이 있었다 - Marc가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내가 혼자서 이런저런 이상한 소리를 내고 웃긴 곡들을 연주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Marc는 내가 대학에서 처음으로 대화를 해 본 사람이었다. 대학의 모든 사람들이 방금 구입한 새것같은 옷에 Wrangler 청자켓을 입고 다니던 시절, Marc는 유일하게 금박이 입혀진 바지와 검은 표범무늬의 쫙 달라붙는 상의를 입고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하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나는 Marc를 보자마자 '이 사람 틀림없이 예술대학 소속이겠군'이라는 생각을 했고,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예술대학에 등록하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Josephine Warden(Vicious Pink 멤버이자 Soft Cell의 보조 보컬을 맡기도 했던 사람)> 1970년대 후반 리즈는 온갖 것들이 일어나던 장소였다. 리즈 폴리테크닉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던 장소로, 적어도 1주일에 1번은 새로운 밴드를 데려와서 공연을 진행했었다. Johnny Thunder The Heartbreakers, The Sex Pistols, Talking Heads, Suicide - 나는 이 모든 공연을 빠지지 않고 전부 보러갔었다. Marc와 나는 관중 속의 두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보자마자 무언가를 느꼈다. 뭐랄까, Marc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다른 관중들과는 사뭇 다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곧바로 Marc에게 이끌렸고, 그의 화려함, 대단함, 평범함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개성,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간에 가서 똑바로 서 있는 그의 모습에 이끌렸다. Marc는 빛나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좋아했다.

    Marc Almond> 초기 Soft Cell의 음악은 사실상 우리가 리즈 폴리테크닉에서 하던 것들의 연장선이었다고 본다. 내가 선보였던, 사회 통념을 거스르는 공연과 퍼포먼스, David의 음향적 실험과 그림들은 뒤틀려 있는 현대사회에 대한 우리 나름의 성명서였다. Soft Cell은 사회의 가치기준을 거스르는 전자 음악 펑크 밴드로써 Suicide같은 뉴욕 밴드들과 맞닿아 있었고, 어떻게 보자면 '귀에 착착 감기는 음악을 하는 Throbbing Gristle'같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사회에 대한 주제를 많이 다루었으며, 때로는 풍자나 냉소를 보이곤 했었다.

    Dave Ball> 처음에 나는 Marc의 퍼포먼스의 배경 음악을 담당했었고, 우리가 하던 것은 뭔가 이상한 베를린 캬바레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Marc가 말하길, "배경음에 맞춰서 노래를 해 봐도 될까?" Marc는 완벽한 프론트맨이었다. 누구라도 Marc를 한번 보면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스타성'을. 그는 David Bowie같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Marc Almond> 리즈 폴리테크닉은 반항적이고 극단적인 정신을 가진 대학이었으며, 구성원들로 하여금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예술가가 되기를, 대중적인 정서에 맞서는 예술가가 되기를 장려하는 곳이었다. 나는 Jeff Nuttall의 지도를 받았는데, 그는 팝 음악 서브컬처에 대한 내용을 담은, 널리 알려진 책 [Bomb Culture]를 쓴 사람이었다. Jeff는 또한 스스로도 굉장히 강렬한 퍼포먼스 예술가였으며, 나는 그를 통해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반항적인 천성을 Soft Cell이라는 형식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 Soft Cell은 상당히 무서운 밴드였다. 리즈 폴리테크닉을 통해 거대 레이블 기업과 연결되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반항적이고 파괴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일 수 있게 해 준 무대는 대학으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었다.

    Dave Ball> 리즈에는 "The Fenton"이라는 이름의 펍이 있었는데, 여기서 모든 음악가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놀곤 했었다. 당시 리즈의 많은 기타 록 밴드들, The Mekons, Gang of Four, Delta 5 등은 Soft Cell 공연을 보고 웃으면서 "너네 기타는 어딨냐? 드럼은 어딨고?" 같은 말을 해댔었다. 그렇다고 우리를 향한 증오나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가 굉장히 독특한 밴드라고, 자신들과는 정 반대에 위치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질문이 들어오면 우리는 대답했다, "흠, 지금 보여주겠어, 기타나 드럼 같은 건 필요없다는 것을!"

    https://youtu.be/cY_N-TqiTtI
    "Memorabilia"

    파트 2: "Memorabilia", Mute, Some Bizzare, Phonogram
    Stevo Pearce의 Some Bizzare Records를 통해 Phonogram과 계약한 이후, Soft Cell은 첫 싱글 "Memorabilia"를 발매하였다. 이 곡은 차트 입성에는 실패하였지만 여러 클럽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 Phonogram으로 하여금 Soft Cell에게 한 번의 기회 정도는 더 줄 수 있을 정도의 인기를.

    Dave Ball> Mute의 Daniel Miller와 Some Bizzare의 Stevo Pearce 모두가, 우리 그리고 Depeche Mode를 동시에 다 붙잡고 싶어했던 것 같다. 결국 우리는 Some Bizzare에, Depeche Mode는 Mute에 가게 되었고.

    Daniel Miller> 그 때 나는 이미 Depeche Mode 만으로도 사실상 한계 상황이었다. 때가 좋지 않았고, 장소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했었던 것인지 우리는 Soft Cell과 곡 하나는 같이 할 수 있었고, 이 곡은 "The Girl With The Patent Leather Face"로 Some Bizzare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되었다. "The Girl With The Patent Leather Face"는 Depeche Mode의 첫 Mute 싱글보다도 먼저 완성되어 발매되었었다. 그 후, Soft Cell은 내게 연락해 Some Bizzare에서의 첫 싱글, "Memorabilia"의 프로듀싱을 나에게 부탁해 왔다.

    Dave Ball> "The Girl With The Patent Leather Face"는 Some Bizzare 컴필레이션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곡이었고, 이에 따라 Stevo가 Phonogram 측에 접촉해 졸라대어 싱글 하나를 만들 수 있을 예산을 타 내는 데에 성공했었다. Phonogram은 질질 끌다가 끝내 Stevo에게 설득당하고는 말했다, "싱글 하나 제작비는 지원해 주겠어, 그 싱글이 잘 팔려야 다음 제작비도 지원해 주는 조건이고." 이 때 우리는 이미 1년 전에 [Mutant Moments] EP를 만들었었던 경험이 있었지만, 그 EP는 진지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었다. "Memorabilia"는 Soft Cell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만들었던 싱글이었다.

    Marc Almond> "Memorabilia"는 James Brown 스타일 리프에 내 랩을 거의 즉흥적으로 얹은 곡으로, 집착, 쓰레기 수집, "내가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당신의 조각들을 모으는 연쇄살인마 등에 대한 찬가였다.

    Daniel Miller> 런던 동부의 스튜디오 "Stage One"에서 녹음을 진행했고, Pete Maven이라는, 정말 훌륭한 음향 엔지니어와 함께했었다. 작업에 참여하는 그 누구도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던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모두가 함께였고 어떤 미학을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언더그라운드 출신이었고, 그 때만 해도 전문적인 스튜디오라면 어떤 곳이던지간에 우리에게는 최고급 스튜디오처럼 보였었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바람에 계속해서 시계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빠르게, 급하게 진행했던 것이 곡에는 더 좋게 작용했던 것 같다. 하루는 Stevo의 생일이었는데, Stevo는 낮 동안 생일을 열정적으로 즐기고는 한껏 고양된 상태로 스튜디오로 들어왔었다. 결국 구토를 시작했고, 작업에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은 상황이었으니 - 특히 전자 장비들에게 - 우리는 스튜디오에 딸린 작은 휴게실의 당구대에 Stevo를 눕혀놓고는 다시 돌아와 작업을 진행했었다.

    Dave Ball> Daniel은 멋진 ARP 2600 세미-모듈러 신디사이저를 갖고 있었는데, 여기에 온갖 우아한 효과들, 롤링 스페이스 에코, 시퀀서 등등도 갖춰져 있었다. 내가 사용하던 낡아빠진 중고 신디사이저에 비교하면 혁명, 일종의 계시에 가까웠었다. Daniel과의 세션에서 "Tainted Love"의 데모 버전도 만들었었다.

    Daniel Miller> "Tainted Love" 데모 버전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단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실제로 함께 만들었기는 했던 것 같다. 아마 최종 버전을 만들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냥 쉽게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Marc Almond> "Memorabilia"는 흔히들 첫 번째 애시드 하우스 곡이었다고들 한다. 뉴욕의 클럽, 심지어 길거리에서도 흑인 청년들이 내게 다가와서는 "Memorabilia"를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말해줄 때,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짜릿함을 느꼈다.

    Dave Ball> 리즈에 엄청나게 큰 클럽이 하나 있었는데, 한 층은 흑인들만, 다른 한 층은 백인들만 모여서 노는 그런 분위기였다. 하지만 "Memorabilia"만은 두 층에서 모두 듣고 있었다. [NME]지가 한번은 "뉴욕 클럽 차트"를 만들었었는데, 여기에도 "Memorabilia"가 있었다. 아마 Phonogram 측도 이 광경을 보고는 '흠, 리즈 출신 멍청이들이 뉴욕에서도 듣는 곡을 만들었다고? 기회 한 번 정도는 더 줘도 되겠는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기회에서 나왔던 것이 "Tainted Love"였다.

    https://youtu.be/hNCxp6OYMWI
    "Entertain Me"

    파트 3: "Tainted Love" 그리고 Top Of The Pops
    Soft Cell의 대히트곡 "Tainted Love"는 1981년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었고, 43주 연속으로 미국 빌보드 핫 100위에 오른다는, 당시에는 신기록이었던 성취를 이루어 내었다. Top Of The Pops에서 가진 두 번의 무대를 통해, 듀오는 슈퍼스타의 위치로 갑자기 내던져지게 되었다...

    Dave Ball> 싱글 하나를 더 제작할 수 있는 돈을 지원해주는 조건은, Phonogram이 지정한 프로듀서 Mike Thorne과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Daniel Miller> 당시에는 더 이상 Soft Cell과 작업할 수 없다는 것에 상당히 실망했었다. 나는 우리가 상당히 잘 맞는다고, 괜찮은 음악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Mike Thorne이 정말로 훌륭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 같다, "Tainted Love"의 프로덕션 또한 정말로 훌륭하게 완성되었고.

    Marc Almond> 사실 Phonogram은 우리에 대해서, 그리고 "Tainted Love"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지 않았었다. 우리는 좀 이상한 녀석들이었고, Phonogram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Stevo가 관리하던 다른 밴드, B-Movie와 함께 도매급으로 다뤄지곤 했었다. "Tainted Love"를 다음 싱글로 발매하겠다는 결정은 Phonogram의 결정이었다. 레이블이라면 커버 곡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어느 정도의 성공을 달성하기에 아주 쉬운 방식이니까.

    Mike Thorne> 나는 내 장비들과 함께 런던에 있었다 - 상당히 많은 양의 장비였고 그 중에는 Synclavier systems의 초기 장비도 있었다. 이 때 나는 영화 [Memoirs Of A Survivor]의 음악 작업을 한창 진행중이었다. 그런데 Phonogram 쪽에서 갑자기 연락을 해 와서는 "런던에 있는 김에 싱글 몇 개 작업도 해 보지 않겠어?"라는 제안을 해 왔다. 그 '싱글 몇 개'가 B-Movie의 "Remembrance Day", 그리고 Soft Cell의 "Tainted Love"였다.

    Marc Almond> "Tainted Love"는 하루만에 작업을 끝낸 싱글이었다. 보컬은 첫번째인가 두번째 녹음인가로 끝냈고, 내가 연주한 Syndrum 음향이 훅 부분이 되었다. 발매가 되고 차트 순위권으로 진입해가는 모습이, 처음에는 조금 충격이었다. 좋은 기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제는 선을 넘어버렸다는,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느낌도 들었다.

    Mike Thorne> 믹싱을 마무리하고 모두 제어실에 앉아 생각했다, "이거 컬트적인 인기를 누릴 게 분명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컬트적인 인기'보다는 더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17개 지역에서 차트 1위를 달성했던 것 같다.

    Dave Ball> Top Of The Pops에서의 첫 번째 공연 전, Phonogram 측에서 말하기를, "베이스 기타 플레이어 하나 구해 줄 거고, 드러머도 하나 구해 줄게"라더라. 우리는 대답으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는 신스 듀오라고!" 대중은 이 '신스 듀오'라는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극단적이어야만 하는 펑크 밴드들의 시대의 레이블 회사들은, '신스 듀오'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Marc에게 "뱅글(bangle) 끼면 안 되고, 아이라이너도 하면 안 돼"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Marc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짙게 아이라이너를 하고, 최대한 많은 뱅글을 끼고 무대에 올랐다.

    Marc Almond> 나한테 어떤 카메라를 봐야 하는지, 2번 카메라가 어디인지 등등에 대해 말했고, 내 평소 모습을 버리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그 지시를 전부 무시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 일이었다. Marc Bolan David Bowie가 내 인생을 밝혀주었던 것 처럼,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그런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싶었고 그럴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보고, 자기가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 나는 나의 그런 특징을 장점으로 살리는 법을 배웠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한 번 보고자 했다. 가장 커다란 가짜 속눈썹을 붙이고 최대한 '여자애처럼' 행동하고, 때로는 가장 그런 일이 없을 것 같은 곳에서, 동성애 혐오적인 반응을 이끌어내 눈 앞에 던져버리는 것.

    Dave Ball> Marc는 1972년 "Starman"을 통해 David Bowie가 자기에게 끼쳤던 영향에 대해 항상 말했고, 자기도 똑같은 영향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다고도 말했다. David Bowie 덕분에 많은 남자애들이 머리를 염색하고 화장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나는 Marc 또한 그러한 변화의 연장선 위에서 똑같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Peter Ashworth (Soft Cell 사진사)> Soft Cell은 굉장히 다른 성격의 두 명이었다. Marc는 감정의 변동이 많은 타입의, 미친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반면 Dave는 뭐랄까, 기계 같은 느낌이었다, 굉장히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었고 그냥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고 떠날 수 있기만을 바라는 것 같았다. Soft Cell의 사진을 촬영하면서 무엇이 훌륭한 밴드를 만드는지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 Eurythmics 또한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 모인 밴드였고, 그런 대조적인 구성을 다른 여러 성공적인 밴드들에서 계속해서 볼 수 있었으니까.

    Marc Almond> Top Of The Pops 무대 이후 우리 둘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명성'의 가장 안 좋은 측면이 우리를 덮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무리지어 있는 군중을 좋아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여러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굉장히 큰 불편함을 겪곤 했다. 나는 여러 측면에서 개인적인,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삶을 살고 싶었지만, 실제의 나는 바깥으로 완전히 노출되어 버렸고, 내 삶이 내 손을 떠나서는 무언가 내가 모르는 것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린 느낌이었다. 내 삶이 나의 것이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가 하룻밤새에 벌어졌었다. 내가 항상 말하는 것은, 관중들에게서 내가 이끌어내온 반응은 언제나 극단적인 반응들이었다는 것이다 - 나와 결혼하고 싶어하거나, 나를 보살피고 싶어하거나, 나를 죽여버리고 싶어하거나, 나를 따먹고 싶어하거나. 온갖 집착광들과 스토커들이 내게 따라붙기 시작했고, 나에 대한 온갖 말도 안 되는 거짓말들이 언론을 떠돌아다녔으며, 나는 미친놈들이 꼬이는 자석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Dave Ball>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당시의 영국에는 상당한 동성애자 혐오 정서가 퍼져 있었다. 하루는 Marc가 인터뷰를 하는데 언론사측에서 이런 지시를 내렸었다: "인터뷰 할 때 성 정체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십시오." [Jackie](역주: 영국에서 발행되었던 미성년 여성용 잡지) 같은 잡지에는 이딴 기사가 올라오곤 했고: "Soft Cell: 누구를 가지고 싶나요? 큰 키에 섹시한 Dave? 아니면 작고 삐쩍 마른 Marc?"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내용이지만, 그 때 우리는 일종의 '핀업 보이'였었다! 이제 와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다, Marc가 '귀여운 이성애자 소년'을 연기했던 것이. 게다가 [Jackie] 같은 소녀용 잡지에 "Sex Dwarf"의 가사를 인쇄하다니! 아니, 어린 애들 들으라고 만든 노래가 아니었단 말이다!

    Marc Almond> 인기를 얻고 나서 즐거웠던 부분이 아예 없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 Ray Davies가 말하길 "성공은 복수다"라고 했었는데, 나는 이 말이 100%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잘 어울리지 못하고 학습 능력도 뒤쳐지는 편이었다는 이유로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 나를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가하는 복수. 그리고, 심지어 내가 소속되었던 레이블에서조차도, 상당히 무서운 수준의 동성애자 혐오가 나에게 던져졌었다, 심지어 내가 게이인 것을 잘 아는 사람들도 그런 혐오를 보이곤 했다. 이 무렵 나는 분명하게 상처를 입었고, 나에게 주어진 명성을 굉장히 안좋은 방식으로 다루고 이용했었다. 나 뿐만 아니라 Dave도 상처를 입었었고 그런 실수를 했었던 것 같다. 상업 세계에 내던져진 예술대학 학생들. 나는 완전히 부서지고 무너졌었다.

    https://youtu.be/9reAQffvzWo
    "Seedy Films"

    파트 4: Non-Stop Erotic Cabaret
    Soft Cell은 뉴욕 시의 Mediasound 스튜디오에 계속 머무르면서 다음 싱글 "Bedsitter"와 첫 앨범 [Non-Stop Erotic Cabaret]를 만들게 된다. 당시 뉴욕 시에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던 클럽 문화와 당시에는 합법이었던 엑스터시의 범람은, 듀오에게 분명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Dave Ball> 앨범 계약을 체결하고 난 후, Mike Thorne이 우리에게 연락해 "뉴욕에 와서 작업하는 건 어때? '새로운 팝 돌풍' 따위의 말도 안 되는 짓거리들에서 벗어나서 지내보는 거?"라고 제안해 왔었다. [Non-Stop Erotic Cabaret] 녹음 과정은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다, 특히 레이블에서 중간중간마다 자꾸 연락해서 "Soft Cell이 아직도 독일 차트 1위야, 뒤셀도르프에서 TV 쇼에 출연해야 해, 아마 다음주도 어디어디에서 차트 1위를 할 거 같아, 어딘가에서 또 다시 25,000장이 더 팔릴 예정이라는 말이지."같은 말을 해 대며 방해를 했으니. 나는 "아니, 지금 다음 싱글인지 뭔지 만들려고 개고생 중이라고!"라는 생각이었고. 그러다가 Marc가 아이디어를 냈다. 리즈에 Marc의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는 키가 크고 머리색이 검은 남자였다. 어차피 다들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모두가 Marc만을 바라보는 때였으니, Marc와 그 리즈 출신 친구 둘이 뒤셀도르프로 가서 TV 쇼를 녹화했다. "Tainted Love"는 독일에서 계속 차트 1위였고, 나는 Marc의 친구를 나 대신 보내고 뉴욕에 남아서 "Bedsitter"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기막힌 아이디어였지!

    Marc Almond> 나는 또 다른 히트곡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감 따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블은 명백히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Bedsitter"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Torch" 및 "Say Hello Wave Goodbye"와 함께 Soft Cell 최고의 트랙이었으니. 완벽했다.

    Dave Ball> 우리는 항공편으로 "Bedsitter" 테이프를 뉴욕에서 런던으로 보냈고, 몇일 후 전화가 왔다: "이건 충분히 좋은 곡이 아닌데." 말하자면 "Tainted Love"는 통상적인 구조의 팝 송이었으니, 레이블은 다음 싱글도 그런 전형적인 팝 송이기를 바랬던 것이다. 나와 Marc는 우리 둘의 눈 바로 앞에서 우리의 밝은 미래가 사라져버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Marc는 말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엄청난 우울증세를 겪었고, 나는 진심으로 화가 치밀었다. 몇일 후 Marc는 Cindy Ecstasy라는 이름의 여자를 만난 후 다시 나타났으며,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다행히 Mike가 직접 나서서 레이블 측과 얘기를 하고 협상을 진행했다. "Bedsitter"는 우리의 다음 싱글로 발매되었으며, 차트 4위까지 순조롭게 올라갔다.

    Peter Ashworth> "Bedsitter" 커버 사진을 찍었을 때 Marc가 처음으로 나에게 화를 냈다. 뒷편에 붙여 준 식기들 중 프라이팬 하나가 자꾸 벽에서 떨어져 촬영을 망쳤던 것이다. 나는, 방금 역학관계가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점 전까지만 해도 커버 사진을 찍을 때 전체적인 방향성은 내가 정하고 있었지만, 이 이후로는 아니었다.

    Tim Pope (Soft Cell 뮤직비디오 감독)> "Bedsitter"는 훌륭한 주제를 갖고 있는 곡이다, [Room At The Top] 같은 영화들과 비슷한 주제. Marc가 좁아터진 단칸방에 영원히 갇혀 지내는 그런 느낌을 주고자, Marc에게 벽지와 같은 무늬를 한 상의를 입혀 그가 단칸방의 벽과 동화되도록, 방과 하나가 되도록 했다. 내가 어쩌다가 레이블 회사 건물에 들어가게 되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지간에 나는 레이블 사무실에 들어가서는 내 경력에 대한 온갖 거짓말들을 늘어놓고는 (왜냐하면 당시의 나는 경력이 아예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Soft Cell 뮤직비디오 아이디어를 열심히 팔았다. Marc와 나는 언더그라운드 출신이라는 공통점으로 금세 친해지게 되었다. Marc는 리즈(Leeds) 시절 무대 위에서 반쯤 벗은 채로 핫도그를 먹어대던 시간들에 대해서 얘기해 주었다. 아마 뮤직비디오에 Stevo가 쓰레기를 버리는 소리도 섞여서 들어갔던 것 같다. 그 때에도 이미 나는, Marc를 보면서 생각했다, "히트 제조기나 다름 없군, 레이블이 Marc를 잘 데리고 있어야 하겠어..."

    Peter Ashworth> 가끔씩은 Stevo가 나에게 연락을 해 와서 사진 촬영이 가능하겠냐고 제안하곤 했고, 그러면 나는 필요한 비용을 적은 명세서를 들고 레이블로 찾아갔다, 그럴 때마다 레이블의 반응이, "뭔 개소리야? 촬영 허가 같은 거 내준 적 없는데! 아니 씨발, 촬영을 했다니, 대체 무슨 소리냐고?" Stevo 덕분에 곤란한 상황이 정말 많이 있었지만, 지금 분명히 말하자면 나는 Stevo를 정말로 존경했다. 그는 Soft Cell의 탄생과 성장에 있어 정말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Stevo는 항상 좆같이 화를 내면서 Dave와 Marc가 하는 건 자기가 하는 수고에 비하면 새발의 피나 다름없다고 짖어댔지만, 그 덕분에 Soft Cell 멤버들이 정말 많은 문제와 스트레스를 Stevo 탓으로 넘겨버릴 수 있었다, 항상 "좆같은 매니저"를 비난하면서!

    Brian Moss (Vicious Pink 멤버이자 Soft Cell 보조 보컬)> 새 앨범 [Non-Stop Erotic Cabaret]에 보조 보컬 역할로 참여하러 뉴욕에 2주 정도 머무를 수 있겠냐는 제안이 왔을 때, 우리는 말 그대로 달에 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행기에서 Marc는 뉴욕에서 한창 인기를 끌던 합법 마약 엑스터시에 대해 이야기했고, 엑스터시를 복용하면 얼마나 좋은 기분인지, 그리고 효과가 끝나더라도 반작용으로 축 가라앉는 것도 전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솔직히 약간 불안했었다, 영국에는 아직 엑스터시 같은 것이 없었고, 당시 뉴욕 시는 폭력이 들끓는 도시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들이 엄청나게 걱정하기도 했었다. 우리는 아주 바쁘게 돌아가는 뉴욕의 거리로 나왔고, 주변은 온통 어두웠으며, 여행가방을 각자 하나씩 끌고 다니는 우리의 모습은 여행객 그 자체였었다. 숙소로 가려고 택시를 잡는 중, 우리 근처에 있던 두 명의 남자가 지나가던 택시의 창문을 주먹으로 마구 때렸지만 택시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그냥 가 버리고 있었고.

    Dave Ball> 우리는 모두 뉴욕 시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 위치한 Mediasound 소유의 아파트에서 함께 지냈다. 아침 10시경 택시를 타고 스튜디오로 향했고, 아침을 먹었으며, 작업은 11시에 시작하곤 했다. 하루의 작업은 저녁 6시경에 끝났으며, 매일 저녁과 주말은 우리 마음대로 보내는 자유시간이었다. 그렇게 뉴욕에서 온갖 재미있는 일들이 시작되었다.

    Josephine Warden> 우리는 Stevo도 포함하여 다 같은 아파트에서 지냈다. 정말 많이 웃었고, 파티도 정말 많이 했었다. 우리 사이에 딱히 긴장감 같은 건 없었고, 엑스터시도 나는 솔직히 잘 모르는 채로 지냈었다...

    Brian Moss> 좋은 아파트였다. 26개의 채널이 나오는 TV도 있었다, 와우! 영국 집에서는 BBC1, BBC2, Yorkshire TV 3개밖에 안 나왔던 데다가 그마저도 밤 12시에 종료되는 것들이었는데. 매일 저녁이 되면 엑스터시를 복용하고 다들 클럽에 가서 새벽까지 놀았다. 우리는 언제나 '게스트'로 대접받았고, 방문하는 클럽들마다 우리를 잘 챙겨주었다. 2주간 Interferon, Berlin, Danceteria 등등 여러 클럽들을 돌아다녔다. 하루는 Billy Idol과 같이 놀기도 했다. 그 날 나는 한숨도 안 자고 내내 깨어있었고, 함께 아침을 먹으러 간 자리에서 Billy Idol이 내게 말해주길 지금 비자에 명시된 기간보다 더 오래 체류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쨌든지간에 Billy Idol은 미국에서 지내며 결국 성공을 거두었고 차트에도 입성하게 되었다. 분명한 성공이었다, 그러니 어쨌든 잘 된 일 아닌가!

    Josephine Warden> 매일 녹음 세션은 언제나 지난밤 먹었던 엑스터시의 잔여 효과로 살짝 떨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시작되곤 했었다. 그러다가 금세 스튜디오에서도, 스튜디오 밖에서도 엑스터시를 마구 사용하기 시작했다. 녹음 세션은 사실상 그 날 아침 6시에 나왔던 클럽에서의 시간들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 끝나지 않는 파티. 아직까지도, [Non-Stop Erotic Cabaret]를 들으면 그 시절의 분위기가 되살아나곤 한다.

    Marc Almond> 뉴욕의 클럽 씬과 예술은 우리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 나의 '영웅'들 중 하나인 앤디 워홀을 만나보기도 했으며, 살면서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던 종류의 클럽들에도 계속해서 드나들게 되었다. 뉴욕에서의 첫날 밤을 무려 그 Studio 54에서 (비록 그 무렵 Studio 54는 끝에 다다르고 있었기는 했지만) 보내기도 했다. 마약은 당연했고, 정말 놀라울 정도로 창조적인 사람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종류의 댄스 음악들, 강렬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쳤던 시간들.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집에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당연하게도, 이 경험들과 에너지는 그대로 스튜디오 작업, Soft Cell의 첫 두 앨범으로 고스란히 녹아들어가게 되었다.

    Dave Ball> Stevo가 퍼뜨린 소문인데, [Non-Stop Erotic Cabaret] 녹음 세션 전체가 엑스터시에 취한 채로 진행되었다는 썰이 있는데, 완전히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리믹스 EP의 경우는 거의 그랬었지만, [Non-Stop Erotic Cabaret] 같은 경우는 마약 같은 건 전혀 없이, 완전히 멀쩡한 정신으로 작업했던 앨범이었다. 스튜디오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맑은 정신으로 굉장히 집중했으며, 이 기회가 다시는 없을 정말로 좋은 기회라는 것을 분명하게 생각하면서 절대로 망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금요일 밤 및 토요일 밤에는 정신줄을 놓고 맛이 가 버리곤 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일요일에는 충분한 휴식을 취했으며 월요일부터는 다시 진지하게 작업에 임했었다.

    Mike Thorne> 내 경우, 나는 스튜디오 안에서는 술이나 마약 같은 건 절대로 입에 대지 않았다. 사람들이 감정을 어떻게 녹여내고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최대한의 집중력을 기울여야 했으니까. 물론 주말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Brian Moss> 보조 보컬 부분을 녹음하기 위해 스튜디오에 갔을 때, 정말 재미있게 작업했었다! "Sex Dwarf"에서는 내가 보조 보컬을 맡았고, 다른 곡들에서는 나와 Josephine이 함께 보조 보컬을 담당했다. "Seedy Films"에서는 Josephine이 정말로 멋진, 비단처럼 부드러운 솔로 보컬을 맡기도 했었다. 끊임없는 '재미'들이 - 클럽, 엑스터시, 사람들, 놀라운 도시, 이전에 들어 온 선입견들하고는 전혀 다르게, 하나도 무섭지 않은 곳이었다 - [Non-Stop Erotic Cabaret]이라는, 이제는 고전 명반의 반열에 든 그 앨범의 분위기에 녹아들어갔다.

    Harvey Goldberg (Mediasound 스튜디오 믹싱 엔지니어)> Soft Cell은 자신들이 만들고 있는 음악에 완전히 헌신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성에 대해서도 아주 뚜렷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지금 일렉트로닉 팝 음악, 댄스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스튜디오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재미있었다. 이들은 좀 뒤틀린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규칙을 부수겠다'는 그들의 목표에 그 유머 감각을 녹여내고 있었다.

    Mike Thorne> 내 눈에는, Soft Cell은 명백히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Torch"같은 경우는 서로 대화를 거의 하지 않으면서 만든 곡이었다고 기억한다.

    https://youtu.be/PTkcNVfFqIk
    "Sex Dwarf"

    파트 5: Non-Stop Exotic Video Show
    Soft Cell의 신비는 사진 작가 Peter Ashworth가 만들어낸 새로운 이미지들, "Bedsitter" 뮤직비디오의 감독 Tim Pope가 촬영한 수상쩍은 영상들, '비디오 앨범'을 통해 더 깊어져 갔다. "Sex Dwarf" 뮤직비디오 무삭제판은 아직까지도 영국 TV에서는 방영이 금지되어 있다...

    Peter Ashworth> 나는 매 달마다, 아니면 2개월마다 한 번은 Soft Cell 사진을 촬영했었다. 사진의 대부분은 킹스 크로스에서 조금 떨어진 지하실 스튜디오에서 진행했었다. 그 시절 대부분의 사진사들은 스튜디오 촬영을 딱히 많이 하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나는 Soft Cell 앨범 커버 사진들, 그 사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앨범을 듣는 내내 커버를 보면서 그게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단서 하나라도 건져보려고 응시하게 되는 것. 나는 언제나 음악가를 위한 일종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고 싶었다.

    Tim Pope> 소호에 있는 Marc의 아파트에 가서 창 밖을 내다보던 기억이 있다. 창 밖의 풍경은 [Non-Stop Erotic Cabaret] 커버 사진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하루는 Marc와 함께 스트립 클럽으로 간 적도 있었다. 정문에 있는 직원에게 돈을 보여주면 그 직원이 윗편의 다른 직원에게 플래시를 비추는 식이었고, 돈을 보여주지 않으면 바 뒷편에 걸린 망치로 한대 얻어맞을 수도 있는 그런 방식이었다.

    Peter Ashworth> 나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항상 사진을 찍어댔고 Marc는 매번 사진 촬영 작업에 깊이 관여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지를 알고 싶어했고, 그걸 통해서 앞으로는 어떻게 꾸미고 행동해야 할 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Marc는 사진 촬영에 관여하는 것을 즐기고 있었고, 나 또한 그에게 어느 정도의 통제권을 주었다. 이 과정을 통해 Soft Cell의 이미지를 갈고 닦을 수 있었다. [Non-Stop Erotic Cabaret]의 커버는 이런저런 사족을 최대한 절제한, 간소화시킨 아이디어로, 몇 개의 색, PVC 비닐, 자켓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Marc의 모습 등이 전부였다. 하지만 결과물로써 나온 앨범의 커버는 지금 보더라도 여전히 강렬하고 선명하다. 이들이 [NME]의 흑백 사진기사와 니콘 카메라로 촬영을 했었더라면 아마 Soft Cell 자체가 전혀 다른 밴드가 되었을 것이다. [Non-Stop Erotic Cabaret]이 발매된지도 벌써 40년이 지났지만, 이미지는 여전히 엄청날 정도로 강렬하게 남아 있다, 정말로 멋진 일이다!

    Tim Pope> "Bedsitter" 뮤직비디오 촬영이 끝나고 3개월인가 시간이 흐른 후, Soft Cell은 다시 내게 연락해 와서 "Say Hello Wave Goodbye"의 뮤직비디오도 촬영해 보자는 제안을 해 왔었다. 그 비디오도 촬영한 후, Soft Cell은 아예 전곡의 비디오를 담은 '비디오 앨범', [Non-Stop Erotic Video Show]를 만들어보자는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소호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영상을 찍었고, 소호 특유의 생활상과 여러 문제들에 직접 한번 빠져들어가 보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이렇게 보자면 나는 Soft Cell과 같은 '공범'이었던 것 같다. "Tainted Love"로 엄청난, 거대한 성공을 거둔 밴드, 그 다음 "Bedsitter"도 차트 4위에 올렸던 밴드가, "Sex Dwarf"같은 것을 만들다니!

    Marc Almond> "Sex Dwarf"는 싸구려 타블로이드 헤드라인과 언더그라운드의 섹스-팝 문화에 대한 일종의 헌정시였다. 나는 그 곡을 고전적인 포스트-펑크 곡이라고 생각한다. 체제 전복적인 성격을 가진 곡이며, 오늘날에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예전보다 지금 오히려 그 곡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Tim Pope> "Sex Dwarf"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완전 웃긴 반응들이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유명해지거나 악명을 떨쳤던 것은 아니었는데,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Sex Dwarf" 뮤직비디오의 풀 버전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심지어 지금 원본의 마스터 카피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요약하자면 뮤직비디오의 내용은 여러가지 가식적인 장면들로, 고기들에 파묻혀 굴러다니는 사람들, 손에 가득 구더기를 들고 여기저기 던져대는 내 모습과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 본디지용 마스크를 쓰고 커다란 상자 속에서 튀어나오는 난쟁이 등등, 모든 사람들이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비디오의 마지막 장면도 환상적이었다, Marc가 카메라를 응시하며 음흉하게 웃는 모습. 나는 해당 장면에 슬로우 모션 효과를 넣었고, Marc의 입술에 매달려 몸부림치는 구더기가 한 마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었다. 우리가 뮤직비디오를 만들던 St. John's Wood에는 두 개의 스튜디오가 있었는데, 하나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었고 바로 옆에는 나이가 많은 여성들이 모여서 파란색 레오타드를 입고 에어로빅 비디오를 만들고 있었다. "Sex Dwarf" 뮤직비디오의 난쟁이가 본디지용 장비들을 장착했을 때, 나는 그 난쟁이에게 목줄을 채우고 에어로빅 비디오가 만들어지는 옆 스튜디오에 쳐들어가 뒷쪽에서 서성거렸다. 잘 찾아보면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그 여성분들이 Madonna 혹은 그런 노래에 맞춰서 에어로빅을 하고 있는데 뒷편에서는 목줄이 채워진 난쟁이가 나와 함께 돌아다니는 모습이 찍힌 에어로빅 비디오가. 다들 정말로 재미있게 즐겼다!

    https://youtu.be/JoWq4UvDZVI
    "Bedsitter"

    파트 6: 40년 후
    오늘날의 [Non-Stop Erotic Cabaret]에 대한 평가는 다소 뒤섞인 반응이지만, 앨범이 발매된 지 40년이 지난 이 시점에, [Non-Stop Erotic Cabaret]의 영향력은 널리 퍼져 온갖 곳에서 떠돌고 있다...

    Marc Almond> [Non-Stop Erotic Cabaret]에 대한 비평은 대체로 '무시'였었다. 물론 그런 반응을 받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Paul Morley가 리즈로 찾아 와 Soft Cell가 거대 언론과 처음으로 진행했던 인터뷰를 하고 돌아가서는 정말 잔혹한 방식으로 우리를 부숴버렸을 때 부터. 나는 진심으로 충격을 받고 상처를 입었었다.

    Dave Ball> Paul Morley가 우리를 찾아왔었고, 오후 내내 위스키를 마시며 즐겁게 지내다 돌아갔었다. 하지만 그 후 우리가 보게 된 인터뷰 기사에서 그는 우리 이름에 말 그대로 소변을 휘갈겨댔다. 그 후로 상당한 시간 동안 그는 우리를 완전히 무시했었다. 결국에는 나중에 우리에 대한 사과 기사 같은 걸 쓰기는 했었던 것 같긴 하다...

    Marc Almond>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이전까지의 나는 순진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가급적이면 빠른 시일 내에 좀 더 시니컬해지고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나는 언제나 음악 잡지들이 '남자들'을 위한 잡지들이라고, 전자 음악을 비웃고 깔보는 잡지들이라고 느껴 왔었다. 기타가 없는 밴드는 전부 게이용 밴드라는 식이었다. 음악 잡지들에는 (항상 명백하게 보이지만은 않는) 동성애자 혐오 정서와 비웃음이 있었다. '그들'은 나, 그리고 우리를 보고 비웃었다. 우리는 '북쪽 촌동네'에서 온 멍청한 놈들이었으며 '제대로 된 옷차림'도 할줄 모르는 병신들이었다. 런던에 방문해 공연을 했을 때, 다른 밴드들이 무대 위의 우리에게 동전을 던져댔었다.

    Dave Ball> Marc가 좀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본다, [Radio 1]의 Steve Wright같은 사람들이 Marc의 목소리를 가지고 온갖 비난과 조롱을 일삼았었으니 말이다. Marc는 불안정한 측면이 있는 사람이었고, 개인적으로는 바로 그런 성격이 매력을 더했다고 본다, Marc에게는 무언가 날것의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Tainted Love" 훅 부분의 단순한 '던 던' 음향도 비웃었고, Soft Cell의 음악은 너무 아무것도 없는, 정제되지 않은 하찮은 데모 테잎 수준이라고 격하했었다. 나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그냥 '던, 던. 짤랑, 짤랑!'같은 생각을 자주 했을 뿐이다. 그렇게 간단한 연주만 하고 돈을 받을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하지 않겠는지, 아닌가? 우리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을 뿐.

    Marc Almond> 물론 몇몇 평론가들이 당시에는 [Non-Stop Erotic Cabaret]를 철저히 부숴버리고는 이제 와서 이 앨범이 '중대한' 앨범이었다고 말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관점이란 시간이 흐르며 바뀌는 법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몇년 전만 해도 좋아하지 않았던 앨범들을 이제는 좋아하는 경우도 많고. [Non-Stop Erotic Cabaret]은 뭐랄까, 마가렛 대처의 영국이라는 동전의 뒷면에 대한 앨범이었다: 나는 당시에는 앨범이 정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었지만, 이제와서 돌이켜 보면 정치적인 내용이 있는 앨범이 맞았던 것 같다. [Non-Stop Erotic Cabaret]은 보수당 치하의 영국이라는 가면 뒤에 비밀스럽게 숨어있었던, 지저분하고 더러운 삶에 대한 앨범이었다. 지루함으로 가득 찬,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견딜 수 없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붉은 네온사인이 가득한 소호의 거리에서 모험과 흥분을 찾아 떠돌아 다니며 캬바레, 창녀, 섹스 드워프들 사이를 헤메이다 문득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고는 그 때와 지금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궁금해하는, 그런 모습을.

    Tim Pope> 최근 Soft Cell은 트위터에서 [Non-Stop Erotic Cabaret] 리스닝 파티를 진행했었다. 나는 한동안 [Non-Stop Erotic Cabaret]를 잊고 살았고, 리스닝 파티를 기회로 삼아 오랜만에 다시 들어보았다. 앨범은 아직도 너무나도 신선한 느낌이었고, 결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앨범에 관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정말로 너무나도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위대한 밴드와의 작업으로 내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나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Harvey Goldberg> 라디오나 여러 영화에서 [Non-Stop Erotic Cabaret]의 수록곡들을 듣게 될 때 마다 항상 감탄하게 된다, 아직까지도 모든 수록곡들이 뒤쳐지는 느낌 없이 세련되고 멋지게 들린다는 것에. 내 커리어에서 가장 훌륭했던 순간이었다고 확신하며, 아직까지도 [Non-Stop Erotic Cabaret] 작업에 참여했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Brian Moss> 이 앨범은 세월의 시련을 견뎌 낸 앨범이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정말 멋지게 들리는 앨범인 것이다. 나는 그 시절 받았던 Mediasound 티셔츠를 아직도 가지도 있다 - 이제는 구멍이 곳곳에 나 있지만. 엑스터시에 대해 말하자면, [Non-Stop Erotic Cabaret] 작업이 끝나고 나서는 한동안 잊고 살았다가, 1990년대 초반 언더그라운드 댄스 파티 관련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다시 복용해 보게 되었었다. 그 때는 이제 영국에서 엑스터시가 한창 유행을 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알약 반 개 분량을 먹어 보았고, 정말 안 좋은 기분이 들었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는 다시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

    Dave Ball> [Non-Stop Erotic Cabaret]는 Soft Cell의 '1기'였다. 우리의 '팝 음악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었고, 1982년이 되자 우리는 '팝 음악'에서는 볼 장을 다 봤다고 판단했고 전부 털어버렸다. 그 다음 앨범, [The Art Of Falling Apart]는 훨씬 어두운 앨범이었고 히트 싱글을 하나도 배출하지 못했다. 그 시절의 우리는 좀 멍청했었다, "Torch"를 [The Art Of Falling Apart]에 넣었더라면 훨씬 더 괜찮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1984년 [Last Night In Sodom]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이제는 충분히 다 했다고 생각했으며 레이블과도 거의 관계가 끊어지기 직전이었고 Stevo하고도 이견이 갈리고 잦은 충돌을 겪고 있어서 제대로 된 매니지먼트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쉴 시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좋아, 잠깐, 몇 년 정도 쉬고 다시 하자고"라고 결정을 내렸었다. 그 몇 년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이야!

    https://youtu.be/w0Z6gA8k6L0
    "Say Hello Wave Goodbye"

    *********************************************************************************************




    Marc Almond / Dave Ball

     

    2022/07/21 1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