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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nola Gay
    [...]/[OMD] 2023. 3. 22. 13:52


    https://youtu.be/d5XJ2GiR6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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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telegraph.co.uk/music/artists/enola-gay-omd-made-poignant-pop-ashes-hiroshima/

    Enola Gay: Orchestral Manoeuvres in the Dark는 어떻게 히로시마 폭격에 대한 비가를 만들게 되었는가
    Ed Power
    [The Telegraph]
    2020년 8월 7일

    Orchestral Manoeuvres in the Dark (이하 OMD) 의 Andy McCluskey와 Paul Humphreys가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을 신곡을 소속 레이블 앞에서 처음으로 연주했을 때, 관련자들은 즉시 이 곡이 엄청난 판매량을 올리고 상당한 수익을 벌어다 주게 될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OMD의 멤버들은 처음에는 의외로 굉장히 엇갈리는 반응을 보여주었었다.

    "Enola Gay"가 청자를 단번에 사로잡는, 하늘로 뻗어나가는 듯한 천상의 신디사이저 라인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곡은 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비가(悲歌)이기도 했던 것이다.

    McCluskey는 회고한다: "음반사는 바로 '이거다, 히트곡 후보 하나 나왔군'이라는 반응이었다. 곡에 대한 논쟁은 밴드 내에서, 그리고 매니저와의 사이에서 있었다. "Enola Gay"는 나와 Paul Humphreys가 공동으로 작곡하지 않은 첫 번째 노래였다. Paul에게는 좀 낯선 상황이었다 - 뭐랄까, 아이를 처음으로 입양하는 느낌이랄까. Paul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채로 만들어진 곡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우리의 매니저는 이 곡을 싸구려의 느끼한 쓰레기 팝송이라고 생각했었다."

    OMD의 매니저는 심지어 일을 그만두겠다는 협박도 했었다. 하지만 이 매니저는 1980년 가을 싱글 [Enola Gay]가 차트 상위권을 향해 폭발적으로 상승해나가는 것을 보며 마음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Enola Gay]는 영국에서 8위,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1위를 차지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McCluskey 본인은 "Enola Gay"에 대해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여왔었다. 이 곡은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을 투하한 보잉 B-29 Superfortress 폭격기의 이름에서 제목을 따 왔다. 이번 주, 히로시마 원자폭탄 폭격의 75주년을 맞는 이 시점에, McCluskey는 아직까지도 미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언제나, 지금까지도, 원자폭탄 폭격에 대해 엇갈리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위럴(Wirral)에서 살던 청소년 시절부터 역사 및 제2차 세계 대전에 집착했던 McCluskey였다. "나는 전쟁에서 일어나는 도덕적 딜레마의 문제에 대해 언제나 깊은 인상을 받아 왔다. 흑백논리가 아니라 - 뭐랄까... 평화의 시대에 했다면 바로 감옥에 갈 만한 일인데, 전쟁의 시대에는 적극적으로 장려된다는 느낌. '도덕적인 미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5백만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14만명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는 일 만큼 거대한 도덕적 딜레마는 없을 것이다. Enola Gay의 조종사 Paul Tibbets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McCluskey는 오랫동안 원자폭탄 시대의 도래에 관한 곡을 쓰고 싶어했었다. 그는 자신이 떠올렸던 가사 아이디어들을 전부 모아 둔 서류철을 항상 가지고 다녔고, 리버풀의 거대한 중앙도서관에서 원자폭탄에 관련된 여러 자료를 찾아 읽곤 했었다.

    "정말 다양한 관점의 자료들이 있었고, 각자의 관점에 대한 모순과 반박 또한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일본은 애초에 러시아의 참전 가능성 때문에 원자폭탄이 없었더라도 항복했을 거라는 주장이라던가... 원자폭탄 투하가 러시아에게 미국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는 주장이라던가. 원자폭탄 투하를 둘러싸고 정말 많은 질문들이 있었다. 하지만 단 한가지, 모든 주장을 통틀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원자폭탄 투하는 정말로 잔혹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Enola Gay"는 원자폭탄 투하를 '기념'하는 곡이 아니다. 그 주제를 둘러 싼 논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원자폭탄 폭격이 있었다는 사실, 그 폭격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를 둘러싼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Enola Gay"라는 곡 자체는 상당히 빠르게 완성되었던 곡이었다. 당시 20살이었던, 눈을 가릴 정도로 헝클어진 머리에 흐느적거리며 돌아다니던 McCluskey는 Meols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Humphreys의 집에서 지내면서 같이 여러 곡들을 만들고 있었다.

    "가사를 완성하는 일은 상당히 고된, 오래 걸리는 지루한 작업이었다. 나는 완전 덕후였고 특정한 주제에 관심이 생기면 알 수 있는 건 전부 알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OMD의 곡들을 들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작사를 할 때 'I love you baby'같은 구절을 직설적으로 쓰지는 않는 편이다. 가사를 쓰기 전 '연구'같은 걸 하는 편에 가깝다. 뭐랄까, 학위논문이라던가 그런 비슷한 걸 쓰는 것 처럼."

    언젠가 Humphreys가 '직업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보여지는 일들'의 연장선상으로써 Hoylake 근처의 공공 수영장을 고치러 집에서 나갔을 때였다 (이 때 Humphreys는 실업수당으로 먹고 살았으며 OMD 활동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Humphreys의 어머니도 직장에 출근하러 나가 없었다. 집에는 McCluskey, 히로시마와 폭격기에 관련된 온갖 자료들로 빵빵한 McCluskey의 서류철, 그리고 싸구려 키보드 뿐이었다.

    McCluskey는 이 시절을 기억한다. "밴드가 막 시작했을 무렵, Paul Humphreys는 한 1년 정도를 실업수당만으로 먹고 살고 있었다. 직업 제의가 들어오는 족족 거절하고 있었는데, 어떻게든 어머니 집에 눌러 앉아 매일 나와 함께 곡을 쓰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러다보니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일이 생겨버리게 되었고, 결국에는 '직업을 구하는 일' 중 하나에 반 강제로 끌려가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어느 날 Paul이 집에 없게 되었다. 집에 나 혼자 뿐이었다. 그 때, "Enola Gay"를 만들었다. 바로 그 때였다 - '지금이군, 나밖에 없으니 Enola Gay 폭격기에 대한 노래를 불러봐도 괜찮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바로 내 서류철을 가져 와 자료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음악을 완성하기 전 가사를 완성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 편인데, 가사를 먼저 만들어버리면 음악이 먼저 완성된 가사의 구색을 맞추기 위한 반주 정도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였다."

    이 해는 OMD에게 있어 격동의 한 해였다 - 밴드는 특유의 '허세 섞인 농담'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이전 그룹 Hitlerz Underpantz가 불타버리고 남은 재에서 다시 출발한 McCluskey와 Humphreys는 원래는 단 한 번의 공연을 위해 임시로 OMD를 결성했었다. 애초에 장난 그 자체였던 프로젝트였고, 그래서 좀 얼척없는 밴드명 또한 McCluskey가 침실의 벽에 붙여두었던 여러 가사 아이디어들에서 이런저런 단어들을 짜집기해 단숨에 만들어버렸던 이름이었다 ('Orchestral Manoeuvres in the Dark'와 'Margaret Thatcher’s Afterbirth'가 최종 후보였었다).

    하지만, OMD는 출발 이후 곧바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리버풀의 Eric's에서 진행되었던 스탠드업 코미디 쇼의 오프닝 공연으로 진행했던 첫 공연이 끝난 몇 주 후, 맨체스터 Factory Records 레이블의 Tony Wilson이 그들을 찾아와 OMD야말로 '팝 음악의 미래'라고 지껄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Tony Wilson은 당시 그의 아내였던 Lindsay Reade에게 OMD의 데모 테이프를 한번만이라도 들어보라고 설득하였고, Lindsay는 Tony의 차 서랍에서 온갖 잡동사니 더미에 깔린 그 테이프를 찾아 들어볼 수 있었다. Lindsay는 OMD Kraftwerk의 "Radioaktivität"에 헌정하는 의미로 만들었던 곡, "Electricity"의 데모 버전을 듣게 되었고, Tony가 신경쓰기에는 '너무 팝 음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시간이 흐른 후, OMD Joy Division 등의 앨범 커버 디자이너로 잘 알려진 Peter Saville이 "Enola Gay"를 들어 보게 되었을 때, Peter는 Tony와 Lindsay에게 '너무 팝 음악이 아닌가'같은 같잖은 걱정 따위는 집어치우고 OMD를 바로 붙잡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재미있는데, 바로 어제 Peter Saville과 연락했었다." McCluskey는 말한다. ""Enola Gay"의 발매 기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Peter가 말하길, '갑자기 연락해서 곡 하나를 만들었는데 음악 자체는 너무 '팝'스럽게 나왔지만 가사는 상당히 암울한 것 같아 고민된다는 말을 했을 때가 기억난다'고 하더라. 여기에 더해서 또, '처음 "Enola Gay"를 들어봤을 때 바로 이 곡은 무조건 히트를 칠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곡이 다루는 주제가 뭐가 되었든지간에 무조건 발매를 해야하는 곡이라는 생각도'라는 말도 하더군."

    하지만, 위럴의 작은 동네에서 음악 차트 상위권으로 진입하는 여정이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Tony Wilson이 밴드를 신경쓰던 잠깐의 기간동안 OMD는 일종의 'Factory 레이블 패키지'로 Joy Division  A Certain Ratio와 함께 합동 공연을 다녔었다. 서로 특별히 친해지지는 않았었지만, McCluskey는 매클스필드(Macclesfield) 출신의 청년들이 굉장히 정중한 사람들이었다고 기억한다 (Joy Division은 매 공연 마다 OMD에게 헤드라이너를 해 보고 싶냐고 정중하게 물어보았다).

    McCluskey가 "Enola Gay"를 만들 무렵, OMD는 Virgin 산하의 DinDisc 레이블로 적을 옮기게 되었다. DinDisc는 Carol Wilson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레이블이었고, Carol이 Sting The Police를 발굴해낸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Richard Branson (역주: Virgin 그룹의 창업자) 이 '선물'해 준 레이블이었다. OMD는 Carol이 처음으로 계약한 밴드였다. 이들의 계약은 7개의 앨범에 25만 파운드 (한화 4억원 상당) 의 보수였고, 당시의 OMD에게는 말 그대로 헤아릴 수 없는 금액으로 보이는 계약이었다. Carol은 Humphreys와 McCluskey야말로 '팝'과 '허세'의 완벽한 조합이라고 여겼다. OMD야말로 DinDisc 레이블에 명성을 가져다주면서도 앨범 판매량도 보증해 줄 수 있는, 레이블 입장에서 아주 훌륭한 밴드였던 것이다.

    Carol Wilson은 말한다: "OMD는 DinDisc를 위한 안성맞춤 밴드 그 자체였다 - 진지하면서도 예술적이었고, 깊이도 있었지만, 동시에 상업적인 가능성이 충만한 팝 음악을 만들기도 하는 밴드. 이러한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는 밴드들이 DinDisc 초창기의 목표였다. Martha and the Muffins라던가, The Monochrome Set 같은."

    하지만, 1980년 5월, Ian Curtis가 자살로 생을 마무리했다. 북부 잉글랜드의 인디 씬 전체가 슬픔으로 젖어들었다. OMD가 1980년 여름 서부 서섹스의 Ridge Farm 스튜디오로 가 [Organisation]을, 그리고 "Enola Gay"를 만들 때 까지도, 이 '슬픔'의 분위기가 그들의 마음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Organisation]은 Kraftwerk의 전신이었던 뒤셀도르프 음악가 집단의 이름에서 따 온 이름이었다).

    "Ian이 죽기 전에 이미 써 둔 곡이기는 했다. 하지만 녹음은 자살 사건이 있은 지 몇 개월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상당한 충격이었다. 개인적으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OMD 멤버 모두가 Joy Division의 음악을 좋아했었다. OMD의 첫 두 앨범을 비교해 보면... 첫 앨범 [Orchestral Manoeuvres in the Dark]은 굉장히 단순한 개러지 전자 팝 음악이다. 하지만 두 번째 앨범 [Organisation]은 훨씬 어둡고 슬픈 음악을 담고 있다. 명백히 Joy Division의 영향이었다. OMD의 음악에도 그 영향이 깃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Gong  Strontium 90의 멤버이기도 했던, [Organisation]의 프로듀서 Mike Howlett 또한 이 앨범 작업을 기억한다: "스튜디오에서, "Enola Gay"의 가사가 가지는 아이러니에 대해 얘기했던 기억이 있다. 정말로 어두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막상 곡 자체는 얼핏 듣기에는 단순한 팝 구조에 그냥 '멍청한' 사랑 노래같이 들린다는 것에 대해." Howlett은 나중에 "Enola Gay"및 OMD의 다른 곡들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게 된다.

    Howlett은 이어서 말한다. "듣자마자 바로 히트곡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DinDisc의 Carol Wilson과 가깝게 지내며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Carol이나 나나 "Enola Gay"에 엄청난 잠재력이 숨어 있다는 것에 완전히 동의했었다. 곡을 관통하는 3개의 음으로 된 신디사이저 멜로디도 그랬고, 고전적인 화성 구조도 그랬다. 음악적으로만 보자면 1950년대 무수한 히트곡들 중에 비슷한 특징을 보이는 곡들이 여럿 있을 것이다. 당장 생각나는 곡으로는 Ben E. King의 "Stand By Me"가 있겠다. 여기에 더해, 'Enola Gay'라는 곡 제목을 매 구절마다 반복하며 시작하는 부분 또한 훌륭했고.
    [Organisation] 무렵의 OMD의 작곡 및 편곡 능력은 물이 올라 밴드 스스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듀서였던 나에게 편곡에 대한 의견을 구할 생각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저 멋진 음향으로 마무리해 곡을 완성하기만 하면 되었다."

    Ian Curtis의 죽음이 드리운 그림자, 그리고 "Enola Gay"에 대한 레이블의 엄청난 기대의 압박 속에서도, OMD Mike Howlett은 앨범 작업을 완수해냈다. Howlett은 말한다: "전체적으로 굉장히 좋게 진행되었던 작업이었다. 스튜디오는 멋진 전원풍의 장소였고 수영장도 있었으며 날씨 또한 완벽했었다.
    유일한 문제는 스튜디오에서 Andy McCluskey의 보컬을 완벽한 상태로 녹음하지 못했다는 것이었고, 런던의 Advision 스튜디오에서 믹싱 작업을 할 때 다시 보컬을 재녹음하게 되었었다. Andy는 Advision 스튜디오에서 좀 더 편하게 노래에 집중할 수 있었고, 또 그 스튜디오에 Andy의 목소리에 최적이었던 구형 Neumann 마이크 M49가 있기도 했다."

    [Organisation]은 전반적으로 괜찮은 정도의 리뷰를 받았다. 반면, "Enola Gay"는 처음부터 대단한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한때 청중들이 가사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기도 했었는데, "Enola Gay"라는 곡 제목에서 이 곡이 동성애자 찬가가 아닌가 하는 오해가 발생했었던 것이다. 1987년 출판되었던 OMD의 전기 [Messages]에 따르면, 80년대의 분위기 속에서 "Enola Gay"는 BBC의 [Swap Shop] 프로그램 방영이 금지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런 바보같은 오해는 금세 사라지게 되었고, "Enola Gay"는 오늘날까지 세상에서 가장 먹먹한 팝송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런던의 신스팝 듀오 Ooberfuse는 일본의 음악가 Hibari와 함께 히로시마 원자폭탄 폭격 75주년을 맞아 "Enola Gay"를 커버하게 되었고, Ooberfuse 멤버 Hal St. John은 원곡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남겼다: "언뜻 보기에는 그냥 신나는 신스팝 멜로디에 빈티지 느낌의 드럼 머신이 들어가 있는 곡인 것 같다. 하지만, 'Enola Gay'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되는 순간, 핵폭탄과 종말의 악몽으로 들어가게 된다."

    OMD의 첫 일본 공연, 1984년 오사카 공연에서 "Enola Gay"를 연주했던 것에 대한, 살짝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는 후기가 돌아다니곤 한다. OMD의 최고의 히트곡 중 하나인 "Enola Gay"를 첫 일본 공연에서 연주했어야 했었던 것인지, 아니면 안 하는게 더 나았었을지?

    McCluskey는 회고한다. "사람들이 이 곡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공연 전에 약간의 의구심 같은 것을 가지고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아무튼 실제 공연에서는 연주를 해 버렸다. 그리고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McCluskey는 "Enola Gay"를 당당하게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짧디 짧은 팝송 하나에 전쟁의 시대에 드리웠던 도덕적 모호함을 담아냈던 것, 예술 및 팝 음악이라는 두 가치 측면에서 어떤 타협도 하지 않은 것은 음악가로서 분명히 훌륭한 성취일 것이다. "Enola Gay"라는 곡의 성취는 Danny Boyle이 주최했던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Enola Gay"가 울려퍼졌다는 사실에서도 잘 보여지고 있다. McCluskey에 따르면, 곡 전체의 가사를 통틀어, 'Enola Gay, is mother proud of little boy today?'라는 대목이야말로 이 곡이 가지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잘 표현하는 부분이다.

    "'Enola Gay'의 조종사였던 Paul Tibbets은 비행기 이름을 자기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 왔었다. 어머니를 추억하며 기리기에 얼마나 좋은 방식인지. 그리고, 'Enola Gay'가 운반했던 폭탄의 코드네임은 'Little Boy'였다. 'Is Mother Proud of Little Boy Today?'. 이 부분은 적어도 3가지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며 만든 구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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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dy McCluskey / Paul Humpreys

     

     

    2021/11/03 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