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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urse with wound
    [...]/[Nurse With Wound] 2023. 3. 22.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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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brainwashed.com/nww/words/wire1997.html



    https://youtu.be/5WZWvQFfs00


    나는 Stapleton을 5월 4일, 12시 30분, Finsbury Park에서 만났다. The Rock 'N' Roll Station에서. 사실은 The Union Chapel 에서의 Current 93 공연이 있던 밤, 공연이 끝나고 난 후에 잠깐 만나서 형식적인 인사도 나누고, 몇 번 전화로 잡담도 한 이후이기는 했다. 원칙적으로는 인터뷰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는 매스컴의 관심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다녔었다. John Cage와 같이 작업한 사람들 중 하나였던 Morton Feldman을 인용하면서: 음악을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좋은 환경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환경이다. 우리는 둘 다 미친듯이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불현듯, 관으로 만든 문에 그가 쓰러질듯이 기대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시체가 살아난 듯한 모습으로, 표면이 벗겨지면서 말아올려지는 지경에 이른 자신만의 실크해트를 쓴 모습으로. 온통 검정색 옷을 입고, 시대를 잘못 맞춘 듯한 모습으로. 원형의 검은 모자는 영원히 눈물이 어려 있을 것 같은 그의 시선을 그림자로 가려 주고 있었고, 떨어져 내리는 금발 몇 가닥이 그 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는 독선적인 예술가에 딱 알맞게 자란 수염을 손가락으로 비틀어 꼬곤 했다. "최근에는 수염을 좀 더 짧게 깎아야 하나 싶다. 작업 장비에 수염이 끼곤 해서 말이지…"

    Highbury Corner를 지나면서 힐끗 보니, Stapleton은 런던으로 돌아온 것을 마뜩치 않아하는 눈치였다. 그는 1989년부터 남부 아일랜드의 County Clare에 있는 염소 농장에서 지내며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런던에는 아주 가끔씩에야 들리곤 했다. "런던을 떠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는 토로했다. "진심으로, 내 아이들을 이런 곳에서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런던은 많이 변했고, 더 이상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게다가 Finsbury Park에서 어떤 놈들이 나를 땅바닥에 처박고는, 목에 칼을 들이밀고 흰둥이 개자식이라며 강도질을 했고, 바로 그 다음날은 아내가 강도를 당했다. 이젠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담배를 말아 쥐면서 거리를 한번 쳐다 본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Morton Feldman이 아직 어렸던 시절, 그 누구도 그의 음악에 신경을 단 한 톨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님도, 친구들도, 형제 자매들까지도. 그리고 바로 그 이유에서 그 시절이야말로 음악적 삶에서 창조력으로 충만하던 황금시대였다고 했지. 그는 홀로 남겨져 그 어떠한 외부의 간섭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도 그런 기분이다. 최근 나는 더 이상 메일에 답변도 안 하고, 친구들과 음악에 대해 토론하는 것도 그만두었고, 아일랜드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나한테는 이런 고독이 최고의 창작 환경이었던 것이다."

    "작은 방에 처박혀서, 음악을 만들고, CD에 넣고, 세상에 보내고 그 이후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는다. 리뷰 같은 건 요청하지 않는다. 내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글을 써 주길 바라지 않는다. 10년간 메일에 답변을 해 왔고, 그 일을 이제는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런 리뷰도 없다. 조금은 이상한 기분이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 그냥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Steven의 친한 친구이자 Current 93의 멤버인 David Tibet과 H.N.A.S. 멤버이자 교정기를 낀 Christoph Heemann를 만나기로 약속한 펍에 도착했다. 맥주를 약간 마시고, 상당히 별로였던 망고 버거를 먹고, David가 실없이 내뱉는 시골 스타일 농담에 어울려주고. 이 둘은 Joe Meek의 음반을 찾아보러 떠나갔다. Steven은 떠나는 두 사람을 지긋이 바라보며 슬픈 듯이 우물거렸다. "내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 것은 맞다. 하지만 나에게는 또 다른 측면이 있어서, 뭐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고 술도 마시고 하는 것을 좋아하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창작에 관해서라면, 염소 집을 새로 짓는 것이든 조각품을 만드는 것이든 그림을 그리는 것이든 음악을 만드는 것이든, 다 같다. 어떤 창작이던지 간에 에너지가 필요하며,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있을 자리가 없다. 그래서 Nurse는 '밴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 딱히 타협해서 새로운 멤버를 끌어들일 생각도 없고."

    Stapleton을 규정하는, 그리고 그가 인생을 살면서 내려 온 거의 모든 결정들에 영향을 준 두 특징이 드러나고 있었다. 고독을 추구하는 성격과, 자신이나 자신의 예술에 있어서는 그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는 집념. 런던의 Finchley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의 Stapleton은 예술 학교에 진학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고, 마침내 Hornsey Art School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답답해 미칠 것 같은 분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무려 7일간의 대장정 끝에, 학교를 스스로 나서게 되었다. "그냥 나와버렸다. 정말 실망했었다. 엄청나게 멋진 곳일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으니까." Stapleton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트 스쿨은 나랑 맞지 않았다. 자퇴 후 1년을 쉬었던 것 같다. 16살이 되었고, 돌이켜 보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받게 될 한 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 해, 나는 내가 공부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바깥 세상에는 엄청나게 멋진 음악들이 넘쳐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별히, [Psychedelic Underground]와 [White Light/White Heat]는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다. 나는 그 1년을 방구석에 처박혀서 딸딸이나 쳤다, 기본적으로 정말로 자위를 하루에 20번씩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 무렵부터 '작업은 혼자 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는 처음으로 안경을 벗으며 묘하게 씨익 웃었다. "그 1년은 나에게는 정말로 즐거운 한 해였다. 당시의 나는 생물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집에 5개인지 6개인지 어항을 가져다가 여러 종류의 생물을 집어넣고 유심히 관찰했으며, Amon Düül The Velvet Underground를 들었고, 여성에 대한 몽상을 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크라우트록에 빠져들었으며, 방을 나와서, 17세의 나이로 독일로 향했다.

    68~72년의 독일은 Xhol  Kluster를 비롯한 일련의 밴드들이 일으킨 음악적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이 혼란은 젊은 Stapleton에게는 일종의 계시로 다가왔으며, 그는 곧 강박적으로 음반을 수집하며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음악의 전도를 일삼는 사람이 되었다.

    "13살이었나 14살이었나, Oxford Street에 있는 Virgin 레코드 가게에 들어갔었는데, 그 곳에서 엄청난 보물을 발견했었다." Steven은 회고한다. "Amon Düül의 [Psychedelic Underground]. 당시 이 음반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비싼 수입반이었는데, 도저히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금을 주고 구입해서 집으로 돌아와 들어보았을 때, 음반은 충격 자체였었다. 이전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건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그 무엇보다도 가장 아나키즘적인 음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내 인생은 그 음반을 발견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곧바로 Amon Düül의 다른 음반들을 찾아보았고, 주변 레코드 가게에서 다른 독일 밴드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Steven과 그의 친구 Herman Pathak은 짐을 챙겨들고 곧바로 독일로, 그 광기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러 떠났다. "한 1년정도 머물렀던 것 같다. 밴드들을 만나고, 한정반 앨범을 수집하고, 파티에 가고, 투어 운전수 역할도 해 보고. Guru Guru Kraan의 투어를 도왔고, Birth Control이나 Embryo같은 여러 밴드들의 일도 도왔었다. 아트워크를 만들어 주거나 앨범 슬리브 디자인을 해 주기도 했다. Cluster의 한 앨범 디자인도 했었는데, 레코드사가 바로 거절했었지. 독일의 음악은 영국이나 다른 유럽과는 차원이 달랐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당시 나는 사운드 엔지니어 Connie Plank와 같이 지냈는데, 그는 자기가 만든 음반 중 단 하나도 미국이나 영국에서 발매된 적이 없다고,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Steven은 주절거리는 것을 갑자기 멈추었다. 흘러나오고 있는 The Stone Roses 노래를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것 처럼, 그는 Becks 맥주병으로 탁자를 후려쳤다. "당시의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은 전례가 없던 새로운 무언가였다. 고작 4년밖에 유지되지 못했지만, 그 짧은 기간동안 나타난 것들은 정말 대단한 충격이었다. 지금 다시 들어보더라도 말이다. 언젠가는 다시 유행이 그 것들로 돌아갈 거라고, 사람들이 당시의 크라우트록을 이해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하다면, Stapleton은 현재의 크라우트록 리바이벌에 대해, Julian Cope의 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열광하고, 기뻐하고 있다. 좋은 일이다. 개인적으로도, 재발매되는 음반들을 구입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아주 훌륭한 일이다. Julian Cope의 책은 정말 훌륭한 책이고, 개인적으로도 정말 좋아하는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짜'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그 좆같은 Stereolab 같은 건 안 들어도 된다. 대신 Neu!를 들으면 된다. Stereolab이 어디서 아이디어를 훔쳐와서 음악을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Kraftwerk를 베껴대는 수많은 테크노 밴드놈들을 생각해 봐라 - 사람들은 Cluster가 혼자서 애시드 하우스라는 장르를 시작했다는 사실에는 관심도 없었고 전혀 알지도 못했었다. Moebius의 초기 앨범들을 들어보라, 얼마나 시대를 앞섰었는지. Kraftwerk의 첫 앨범을 들어보라, 얼마나 충격적이고 혁명적이며 진보적인지. 가장 최신으로 나온 음악들도, 그들에겐 비견될 수 조차 없다.

    "나는 크라우트록이야말로 현대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조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싶은 말은, The Beatles는 좆까라는 거다! The Beatles와 크라우트록은 아무 관계도 없다. 크라우트록은 클래식 음악계의 아방가르드 운동과 프리재즈에서 발생한 것이지, 팝 음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크라우트록은 독립적이었고, 야성적이고 강렬했으면서도 냉정했고, 그래서 더 좋은 음악이었다. Can The Beatles의 "I Am The Walrus"를 듣고 영감을 받아 밴드를 시작했다고 말했던 것은 그냥 주류 서양 음악가들과 팬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업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런 말을 만들어냈던 것 뿐이리라. Irmin Schmidt는 Karlheinz Stockhausen를 공부했었고, Jaki Liebezeit는 프리재즈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Nurse에 대한 구상은 독일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물론이다. 독일에서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나와 비슷한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 것이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별히, 크라우트록의 첫 두 앨범들, Kluster Amon Düül의 차디찬 냉혹함은 내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았다. 나중에 나는 내 레이블 United Dairies를 통해 잉글랜드에서 완전히 무관심이었던 크라우트록 음악을 수입하려고 애를 썼었다. Guru Guru의 음반을 발매하고, Neu! Faust에서 활동했었던 Uli Trepte와 뭔가를 만들어 보려고 녹음도 진행해 보고 ([Hot On Spot/Inbetween], UD024). Pole, Limpe Fuchs, Anima 등등과도 만나 그들의 음반을 United Dairies를 통해 발매했었다. 가능한 한 많은 크라우트록 음악가들과 뭔가를 해 보려고 했었지."

    Stapleton은 영국으로 돌아와, 온갖 종류의 저임금 노동을 하며 얻은 수입을 전부 음반 사 모으기에 탕진했다. "Nurse 활동을 하기 전까진 음악을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냥 듣는 것이 좋았다 - 친구들이 가끔 내가 듣는 걸 들어보곤 '시벌 이게 뭐여, 완전 좆같네, 이딴 쓰레기는 누구라도 만들 수 있겠다' 라고 말해도 나는 딱히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Nurse With Wound는 어쩌다가 시작하게 된 것인가? "흠, 언젠가 내가 한 스튜디오에서 간판도 그리고, 스튜디오 룸 문에 예약자 이름을 써 넣기도 하고, 의자를 정리하기도 하는 등 잡일을 하던 때였다. 거기서 일하는 사운드 엔지니어와 실험적인 음악들에 대해서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엔지니어가 실험적인 음악을 녹음하고 싶은데 스튜디오를 찾기 힘들어하는 밴드를 알고 있다면 나한테 연락을 해도 좋다고, 싼 값에 해 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 스튜디오는 소호의 Berwick Street에 있는, 아주 멋진 48트랙 스튜디오였다." Stapleton이 생각하기에 이 기회는 놓치기에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면서도 운명적인 기회였다. 그는 곧바로 이야기를 꾸며내 자신이 실험음악 밴드에 있다고 구라를 쳤다. 다음 토요일로 스튜디오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집으로 곧장 가서 가장 친한 친구 두 명, John Fothergill과 Heeman Pathak에게 연락해서 말했다. '…우리는 밴드에 있는 거라고, 아무 악기나 가져와, 소리를 낼 수 있는 거면 아무거나 말야, 토요일에 나와. 어떻게 되나 보자고.' 그렇게, 하룻동안, 우리는 [Chance Meeting on a Dissecting Table of a Sewing Machine and an Umbrella]를 만들게 되었다. 우리의 첫 세션이었다."

    첫 번째 실험으로써, 그리고 우연히 진행했던 녹음 세션으로써, [Chance Meeting on a Dissecting Table of a Sewing Machine and an Umbrella]의 혼란스러운 전자음들은 일종의 계시와도 같은 위치에 있을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크라우트록의 자유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 앨범은 그 어떠한 음악적 레퍼런스와도 판이하게 다른 음악이었다. 물론, "Two Mock Projections" 같은 곡에는 Ax Genrich 느낌의 공간감 가득한 기타 연주가 들어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구상음악에서나 들을 수 있는 조각난 음향들, Derek Bailey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갑자기 습격하는 다이나믹, 고딕 양식의 성당에서 들릴 법한 으스스한 오르간, 원초적인 울부짖음이 무언가에 홀린 인간의 미학으로 뒤섞여 있다.

    "완전히 즉흥연주였다. 6시간동안 녹음을 마치고, 다음날 2시간동안 믹싱을 했었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연주해 본 적이 없었는데." Stapleton은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했다. "그 녹음을 하기 전까지 나는 악기라는걸 단 한 번도 다루어 본 적이 없었다. 정말로 '순수한' 음악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리라 - 그 정도까지 순수해질 수 있다면 말이다, 어떻게 되는 지 아는가? 그 둘, 나머지 멤버 둘은 정말로 아무런 생각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나마 아이디어라고 부를 만한 것을 갖고는 있었다. 음악적인 배경이 있다고 말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우리는 무언가 전자음스러운 것을 만들고 싶었다. 우리 셋이 가진 공통의 목표라고는 그것 뿐이었다. 우리는 즉흥연주를, 그것도 전자음의 즉흥연주를 했고, John Fothergill이 가져 온 기타와 Heeman Pathak이 가져 온 Bontempi 오르간, 내가 일터에서 가져 온 여러가지 종류의 금속 퍼커션을 가지고 이것저것 해 보았다. 이 세션이 음반으로 이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번 해 보자는 생각 뿐이었지. 그렇게 첫번째 날이 지나자 우리 모두는 너무 들떠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믿겨지지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서, 받아온 원판 테이프를 엄청나게 큰 볼륨으로 틀어놓고는, 생각했다. '이거 대박인데! 우리가 할 수 있었어!' 그렇게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인터뷰를 잠시 중단하고 쉬면서 맥주를 몇 잔 더 마셨다. Steven은 다시 등을 뒤로 기대며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이런…" 그는 한숨을 내 쉬고 있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 지금 너무 심하게 긴장되서 말을 아예 못 하겠다. 왜 이러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데."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떠돌아다녔다. 말문이 막힐 정도라고? 이제까지는 숨도 거의 안 쉬고 말을 했었는데.

    다시 자리로 돌아오면서, 그는 담배 하나를 말아쥐고는 깊숙히 들이마시며, 스스로를 다잡는 것 처럼 보였다. "좋아, 어디까지 했었나?"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맞아, 우리는 첫 앨범이 너무 이상한 음악이어서 그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 당시는 펑크가 막 시작해서 사람들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하나하나 해 보던 시대였고, 해서 우리도 우리의 앨범을 스스로 발매해 보자는 의견을 가졌다. 500장이 전부 팔릴 거라는 생각 자체를 아예 해 본적이 없었는데, 발매해 보니 1주일만에 500장을 다 팔아치워 버렸다. 전부 말이다. Rough Trade가 100장 정도 가져갔고, Virgin도 상당히 많이 가져갔다. 그들은 앨범 커버만 보고도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다 - 앨범 수록곡들이 완전 미쳤을거라고 예상했었던 것 같다."

    "United Diaries라는 레이블을 직접 만들어서 앨범도 직접 제작해 보고 나자, 우리는 뭐랄까 스스로 할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 모두가 정말 좋아했었던, Ohr라는 이름의 독일 레이블이 있었는데, 여기서 나오는 앨범은 하나같이 흥미롭고 뭔가 색다른 음악에 커버 디자인까지 좋았었다. 우리는 그 독일 레이블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러다가 The Lemon Kittens의 [Spoonfed and Writhing]이라는 EP를 듣게 되었고, 곧바로 연락을 취해 그들의 첫 번째 LP를 발매했다. The Bombay Ducks라는 밴드와도 만나서 그들의 앨범도 발매했다. 그 무렵 우리의 두 번째 앨범 [To The Quiet Men From A Tiny Girl]도 완성되어 이것 역시 발매했다 - 일이 점점 더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To The Quiet Men From A Tiny Girl]과 그 다음 [Merzbild Schwer](이 때는 Heeman Pathak이 탈퇴하여 밴드가 듀오로 축소되었다)를 거치며, Nurse의 음악은 보다 더 추상적인, 왜곡된 목소리와 스튜디오 장난질 뒤에 가려진 모호한 음악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그 다음 LP인 [Homotopy To Mary]에서야, 진정한 Stapleton만의 음악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내가 John과 결별하게 된 것은 The Lemon Kittens 때문이었다. John은 Danielle Dax에게 사실상 완전히 빠져버렸고 이 사실이 나와 John을 완전히 갈라서게 만들었다. 한 1년동안을, John은 John 자신의 United Diaries를 운영하고, 나 또한 나만의 United Diaries를 운영하는 식으로 일이 흘러갔던 것 같다. 그와 나는 오직 새 앨범을 발매할 때, 카탈로그 넘버가 꼬이지 않게 하려고 서로에게 통보할 때에만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The Bombay Ducks의 앨범을 발매했고 The Lemon Kittens의 [Cake Beast] 앨범도 발매했다 - [Cake Beast]를 발매하자는 결정은 오로지 John의 생각이었다. 나는 그 앨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The Bombay Ducks의 앨범 같은 건 결코 발매할 생각이 없었다.

    마침내, 피할 수 없는 충돌이 발생했고, 결국 Steven은 United Diaries를 운영하고, John은 Commercial Records라는 산하 레이블을 따로 만들어 운영하는 방식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Commercial Records는 곧 2개의 LP를 발매하게 되었고, 이 2개의 LP는, Stapleton의 의견을 빌리자면, "좆쓰레기"였다.

    몇 번의 공동작업 시도 (Jim Thirwell aka Foetus와 함께 한 [Insect And Individual Silenced], 그리고 Whitehouse의 William Bennett과 함께 한 [The 150 Murderous Passions]) 이후, [Homotopy To Marie]는 멤버간 결별 이후 첫 Nurse의 앨범이었고, Steven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첫 '진짜' Nurse With Wound 앨범이었다. "그 무렵 나는 마침내 스튜디오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녹음 장비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특정한 소리를 만들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 감을 잡아가게 되었다. 작곡에 대해서도 약간 배웠으며, 곡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다이내믹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이전까지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지식들을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믹싱 데스크에 앉았을 때 뭘 해야할지를 알게 되었다. [Homotopy To Marie]를 만들고 나자 만족스럽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 한 1년정도 작업했던 앨범이었다. 돌이켜 보자면 그 앨범을 통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영감을 받았던 것 같다." [Homotopy To Marie]는 으스스한 앨범으로, 이전까지의 Nurse 앨범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일종의 '따뜻함'이 깃들어 있으며, 억눌린 열정과 다이내믹이 섬뜩하게 배회하는 음악이다.

    1983년은 Stapleton에게 대단한 전환점이었다. 그는 마침내, 처음으로, 밴드 멤버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으며, 동시에 평생의 친구이자 동업자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Tibet을 한 인더스트리얼 음악 페스티벌에서 만났다 (Tibet에 따르면 이 페스티벌은 The Equinox Event at the L.M.C. 였다고 한다)." Stapleton은 그 때를 회상하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도 그 페스티벌에서 음악을 연주하게 되어 있었는데, 대신 Rolf Harris라도 된 것 마냥 뒷편에 엄청나게 커다란 천을 드리워 놓고, 그림을 그리면서, 만들어 온 카세트 테이프를 그냥 틀었다. 캔버스를 세우고 뭘 좀 그려보려고 하니까 웬 놈이 빡쳐서는 나한테 지랄을 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인더스트리얼 공연이라는 건 관심도 없는 병신새끼들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알잖나, 다 좆까라는, 이것도 좆까고 저것도 좆까라는 놈들이 많았고, 나찌 밴드들도 넘쳐났으며, 순수하고 멍청한 병신 인간쓰레기들이 곳곳에 있었다. 아무튼 나는 무대 앞에서 William Bennet(Whitehouse 멤버)하고 앉아 있었는데, 어떤 미친놈이 지 좆을 꺼내더니 무대 위에 오줌을 흩뿌리면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내 바지에도 그 놈의 오줌이 묻었다. 정말 미칠듯이 화가 나서 그 미친놈이랑 싸우기 시작했는데, 미친놈한테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꺼져, 개 좆같은 새끼야, 안 꺼지면 대갈통을 부숴버릴거다 씨발놈아.' 그런데 그 미친놈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좆까 씨발 Nurse With Wound가 공연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안 내려갈거다 개새끼야!' '내가 그 Nurse With Wound다 씨발놈아, 그리고 좆같은 연주 안 할거니까 좆대로 하던지,' 그러고 나는 그냥 다 때려치고 길 건너 술집으로 가서 정말 심하게 화가 난 채로 앉아있었다. 그 개새끼가 아직도 거기 있던지, 아니면 사라졌던지, 상관없었다. 공연은 물 건너갔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는데, David Tibet이 다가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봤다고 말을 걸어왔다. '진정하고, 난 David Tibet이라고 하는데, Psychic TV 멤버야. 네 공연 멋졌는데 말이지, 술 한잔 사도 될까?' 그렇게 한잔 하면서 대화하다 보니 우리는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내 가장 친한 친구이다."

    Tibet은 곧 Psychic TV를 탈퇴했고(적어도 Tibet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다, 사실 Stapleton은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The Equinox 페스티벌에서 Dog's Blood Order라는 이름으로 공연했다. Tibet은 한동안 밴드를 만들어서 그 자신이 집착하고 있었던 두 개의 개념, Tibet의 표현에 따르자면 "종교가 그려내는 묵시록적이며 종말적인 이미지들, 그리고 아이들이 부르는 전래동요들"을 탐구해 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막 Lashtal, 23 Skidoo 드러머 Fritz, Psychic TV 멤버 Jhonn Balance와 함께 세션을 해 본 상황에서, Tibet은 Stapleton에게 Current 93에 참여해서 [Nature Unveiled] 앨범을 만드는 작업을 해 보는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Stapleton은 그 제안에 대한 화답으로써 [Nurse called Gyllenskold, Geijerstam and I at Rydbergs]라는 12인치 EP를 만들어 주었다. Tibet은 최근 Fritz를 해고하고 Psychic TV 탈퇴를 거부한 Balance와 갈라졌다(Balance는 나중에 Coil을 결성하게 된다). 이 모든 일들은 조각난 기억들로 복잡하게 얽혀있어, 불분명한 구석들이 많은 미심쩍은 연대기가 되었다.

    "나는 이 밴드(Current 93)에서 내가 해야할 일은 Tibet의 목소리를 돋보이게 해 줄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이라고 본다." Stapleton은 말하던 도중, 어깨를 으쓱했다. "Tibet은 Nurse With Wound 음악들을 좋아했으며, 거의 모든 Nurse With Wound 앨범에 게스트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나와 동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를 정말 좋아한다. 그는 대단한 재능을 가진 친구이며, 같이 작업할 때의 그 에너지가 좋다. 그는 굉장히 솔직한 사람이며 일이 바로잡힐 때까지 정말 최선을 다 한다. 제대로 된 보컬 트랙을 위해 20번 넘게 녹음을 하는 건 일상이다. 이러이러한 분위기를 원한다며 솔직하게 말 해주는 사람과, 그리고 그 바램을 내가 이루어 줄 수 있는 사람과 같이 일을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요새는 거의 Current 93에서의 작업을 내 솔로 작업보다 더 좋아하기까지 한다. Nurse With Wound 작업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하지만 Current 93과 같이 작업할 때는 부담감이 훨씬 덜한데, 이 작업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David Tibet과 그의 시, 그의 전달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 중심을 받쳐주는 일은 정말로 간단한 일이다. 이제 나는 사실상 Current 93의 전담 믹서/프로듀서가 되어가고 있다. David는 좀 더 포크스러운 음악에 빠져들고 있으며, 나는 그 음악에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더하는 역할이다. 최근 발매된 Current 93 앨범들은 거의 포크라고 할 수 있는 음악이지만 그와 동시에 아주 이상하고 기괴하게 비틀려 있으며, 나는 그 음악에 피드백과, 아마도 '아이들' 같다고 할 수 있는 느낌을 더한다."

    Klaus Shultz가 생각나는 우주 유영의 느낌을 보여 준 1986년의 [Spiral Insana]와, 명상적인, 만트라가 부유하는 듯한 [Soliloquy For Lilith]를 발매한 후, Stapleton은 아일랜드의 염소농장으로 돌아갔다. 파멸적인 힘으로 가득하던 초기 Nurse With Wound 앨범들에 비해, [Spiral Insana]는 훨씬 더 '열려 있는' 음악이었고, 훨씬 확장된 음악이었다. Stapleton 또한 이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다. "[Spiral Insana]는 아일랜드로 돌아가기 전에 만든 앨범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아일랜드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점점 나이가 들고 있었고, 아이도 생겼으며, 점점 더 무던해지고 있었다… 정말로, 아일랜드로 돌아가 달라진 음악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변화같이 느껴졌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그런 세월과 변화에 반대하고 싶고, 어떤 점에서는 그러고 있다. 음악 작업을 할 때 그 속에 스패너부터 던져넣어 다 부숴버리고 시작하는 느낌이니 말이다. 특히 [Rock'n'Roll Station] 앨범을 만들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앨범은 아무도 생각치 못했던, 심지어 나조차도 예상치 못했던 앨범이었다. 내가 그런 앨범을 만들다니. 내가 구상음악이나 실험음악을 갈수록 점점 덜 듣고 있고, 사실은 프리 재즈나 즉흥음악을 훨씬 많이 듣고 있다는 사실이 반영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Steven은 요새 리듬이라는 것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관심사는 최근 Nurse With Wound 앨범 2개, [Rock'n'Roll Station]과 [Who Can I Turn To Stereo?]에 잘 드러나 있었다. 두 앨범은 맘보 뮤지션 Perez Prado에 대한 열광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나는 Perez Prado를 4년 전쯤에 태어나 처음으로 들었다. 나는 곧바로 빠져들었다. 완전히 집착하면서 Perez Prado의 앨범이면 어떤 것이든 전부 수집했다. 그의 음악은 아주 강렬한 리듬이며, 지난 3년간 엄청나게 들었다. 아마 이 경험이 내 음악에 반영되었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하고싶은 말은, 그러니까 나는 댄스 음악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난 춤 같은건 안 춘다 - 춤을 추다간 모자가 떨어질 것이다. [Who Can I Turn To Stereo?]와 [Rock'n'Roll Station] 같은 앨범에는 뭐랄까, 댄스 음악같은 느낌이, 리듬이 있고 나 또한 그 음악을 들으며 리듬에 맞춰 신발로 바닥을 쳐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춤을 추진 않을 거다. 그 앨범들은 집중해서 듣기 위한 음악이고, 청자의 귀를 위한 영화이며, 청자를 놀라게 하길 바라면서 만든 모험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난 이제 리듬이 있는 음악은 더 이상 안 한다는 것이다.

    Stapleton은 Current 93의 앨범 [In Menstrual Night]를 언급하며, 그 앨범이야말로 David Tibet의 미학이 처음으로 실현되기 시작한 상징적인 순간이라고 말했다. 나는 Tibet이 언젠가 자신의 시에 대해 말해주던 기억을 떠올렸다. "나는 사람들의 꿈이, 마음과 영혼에서 죽어 없어졌을 때, 어디로 향하는지가 궁금했다." Tibet은 그렇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어떤, 이상한 공동묘지에 대해서 - 나는 파티에서 술에 좀 취했을 때, 점점 잠에 빠져들고 있을 때의 감정을 재현하고 싶었다. 잠에 빠져드는 당신은 어렸을 때의 목소리들을 떠올리기 시작하며, 그 목소리들은 멀어져가는 파티의 소음과 뒤섞이고, 옛 자장가들이 떠다니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기이한 콜라쥬가 된다. 그렇게 드럼이 들어오고, 꿈은 달의 영혼을 먹이기 위해 떠오른다." Steve는 미소를 지으며, [In Menstrual Night]에서, 특별히 앞부분인 "Sucking Up Souls"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설명했다.

    "'Sucking Up Souls'는 병실에 누워있을 때의 경험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곡이었다. 그 때 나는 청력에 이명을 비롯해서 많은 문제가 있어서 병실에 입원했었다. 한밤중에 침대에 누워 병원의 소리들에 귀기울이곤 했었다. 병실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사람들의 발소리, 가끔씩 울려퍼지는, 철로 된 사물들이 부딫히는 소리들. David와 나는 그 소리들을 재현하는 것이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움직일 수 없는 침대에 누워 그냥 소리를 듣기만 해야할 때의 느낌. 그 느낌은 환상적이었다. 나는 몇날 며칠이고 누워서 온종일 그 소리들만 듣고 있을 수 있었다. 병원이라는 장소에는 진정으로 무거우면서도 독특한 어떤 분위기가 있다. 나는 그 병원만의 분위기에는 일종의 따스함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 보호받고 있는, 안전한, 차례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곳 - 그 무시무시한 약들을 주입받고 나서 누워 있으면, 거의 식물처럼 되는 것이다.

    페티시즘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된 장면은, 멍하니 바라보았을 때에는 매력적으로 비추어진다. 하지만, 곧 당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사실상 죽어가고 있는 중이며, 생명유지장치와 인공호흡장비에 의지해서 겨우 버티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부분까지 고려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런 부분은 내가 생각했던 특유의 분위기를 더해줄 뿐이다. 간호사들은 그런 장면을 매일 볼 것이다. 그냥, 한번 상상해 보라. 밤에 침대에 누워 어둡게 불이 꺼진 복도를 바라보면, 그 끝에 수간호사가 불을 켜고 앉아 있으며, 그녀의 펜이 종이에 무언가를 적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침대에서 들리는 끼익거리는 소음들, 환자들이 돌아누우면서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 잠깐 흔들리는 침대의 소리, 저 너머 병실에서 누군가가 물건을 떨어뜨리면서 나는 둔탁한 소리. 그 소리들의 반향. 아무것도 없는 벽에서 울리는 소리들."

    그 정도의 정적을 경험하려면 아주 엄격한 규칙이, 아주 제한된 환경이 필요하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 정적이다. 침대에 일찍 누워있으면 저 멀리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심야방송의 소음, 문이 닫히는 소리,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한껏 낮춘 목소리. 어째선지 무력감이 드는, 음향에 수동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퇴보적인 판타지.

    Stapleton이 앨범들을 수집하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수많은 음향을 듣고 그 감각을 키워가던 경험이 밑거름이 되어 불가피한 아일랜드 생활로 이어진 것만 같았다. "나는 하루에 4~5시간을, 대략 2천장의 앨범에 둘러싸인 채로, 끊김없이 음악만을 들으며 지내고 있다. 그 시간동안 나는 나 자신에게 어떻게 하면 '들을 수 있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지난 20년간 흥미롭다고 생각되는 음악을 찾아다녔으며, 이제는 거의 만족할 만큼 채워서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을 찾아다닐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느낀다." '스스로 어떻게 잘 들을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는 구절이야말로 핵심일 것이며, 여기에서 John Cage Nurse With Wound사이의 연관성이 명확해진다. 수 년간의 듣는 경험, 혹은 귀를 열어두는 경험은, 마치 병실에서의 깨달음의 순간과도 같이, Steven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음향을 진정으로 듣게 해 주었으리라. 그렇게 그는 아일랜드의 황량한 자연으로 사라졌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가득 채운 소리를 듣고, 우주의 핵심에서 울려퍼지는 화음을 듣는 것에 만족하면서. 때때로 답장과 감사라는 형태의 서한을 밖으로 보내주면서.

    "대충 22년정도 이 일을 해 온 것 같지만, 그 어떤 과찬도 음악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나는 그런 종류의 걱정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염소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도 있고, 누구라도 원할 것들을 이미 가지고 있으며 내 음악까지 갖고 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내가 듣고 싶으면서 아무도 만들지 않는, 이전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음악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Steven을 생각할 때, 언덕과 County Clare의 오솔길들을 바라보며, 죽음과도 같이 조용한 밤에, 염소들과 함께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별로 가득 찬 밤하늘 아래에서. 그저 듣고 있는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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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ndcamp :: https://nursewithwound1.bandcamp.com/


    2018/10/05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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