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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urning Question
    [...]/[KLF] 2023. 3. 24. 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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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theguardian.com/theobserver/2000/feb/13/life1.lifemagazine4

    https://youtu.be/bWebqCRw7o4

    Burning Question

    어째서 Bill Drummond는 £1,000,000를 불태웠던 것인가? 어째서 자신의 손을 무대 위에서 잘라내고 싶어했었는가? 어째서, 차트 1위를 하던 KLF를 해체시켰는가? 논란의 중심이었던, 예술가로 전향한 팝 스타가 중년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기는 할까?
    /Andrew Smith

    이 사건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예술? 이상한 정치적 행보? 통제를 벗어나 끔찍할 정도로 날뛴 해프닝? 무엇이었든지, 이 사건은 20세기의 마지막 20년간 개인이 저지른 일들 중 가장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거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었다 - 대다수는 이 사건이 정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누군가가 그 정도로 멍청한/무책임한/자유로운 일을 행할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그 일을 했다. Bill Drummond를 짜증나게 만들고 싶다면, 한번 그를 '사기꾼'이라고 불러 보라.

    "진짜라고 생각했었지." KLF와 관련되었던 사람이자 오랜 시간 Bill Drummond와 친분을 유지한 한 제보자가 내게 말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있고 나서, Jimmy와 Bill은 걱정과 혼란으로 가득 차서 완전히 맛이 간 사람처럼 보였거든.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둘은 그 이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어."

    1994년 8월 23일, Drummond와 Jimmy Cauty는 Jura 섬으로 떠나, 이 일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관객 1명을 비밀스럽게 초대하여, 그 앞에서 자신들의 돈 £1,000,000의 지폐를 불태워 버렸다. 이 둘은 당시 30대 후반이었으며, 이 돈은 UK 역사상 가장 뜬금없이 성공한 팝 그룹 중 하나로써 활동한 결과였었다. 1991년 KLF(Kopyright Liberation Front)는 세계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번 UK 음악가였다. 클럽에서 발흥한 포스트 애시드 하우스 붐을 제대로 올라탄 이들은 결코 망할 수 없는 밴드였고, 이들이 만든 곡은 전부 대박을 쳤다. 하지만 다음해가 되었을 때, 이들은 Brit Awards 시상식 개막공연을 헤비 메탈 세션 밴드와 함께 혹독한 퍼포먼스로 후려쳤다. 공연이 끝날 때, 당황한 관객들은 혼란스러운 와중 "KLF는 음악 산업을 떠날 것이다"라는 성명을 듣게 되었다. 막 도축된 양의 시체가 시상식 애프터파티 장소 문 앞에 놓여 있었고, 시체에는 이런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I died for ewe - Bon appetit." 이들은 누구나 탐내는 화려한 밴드로 나타났으며 그 후 곧바로 스스로 해체해 사라졌다. 그리고, 1994년, 그들은 자신들이 그 동안 번 돈 거의 전부를 불에 태워버렸다. 어째서?

    Drummond는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억세보이지만 동시에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기도 한 47살의 이 남자는 북부 London의 싸구려 식당에서 치즈 오믈렛과 감자튀김을 오후 2시 30분에 오늘 처음으로 하는 식사로서 먹고 있었으며, 오늘의 인터뷰는 지난 6년 동안 그가 처음으로 하는 인터뷰였다. 그와 Cauty는 백만 파운드에 관해 외부에 언급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었고, 그는 이 약속에 대해 나에게 설명하려 했다. 우리는 교묘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는 그에게 당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당시의 우리에게 백만 파운드가 큰 돈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인지?" 그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돈을 태운다는 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한 누군가의 영혼을 정화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의 맥락에서는 백만 파운드가 2백만 파운드보다 더 많은 것이다. 백만 파운드라는 것은 일종의 상징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희망하는 것이었다. 백만 파운드에는 힘이 있는 것이다."

    한번이라도 후회했던 적이 있는가?

    "...아니다..."

    현재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황인가?

    "아니,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러면 어째서 그런 일을 한 것인지, 나는 물어보았고, 지폐가 펄럭거리고 움직이다가 마침내 돌이킬 수 없이 하늘로 가버리는 것을 볼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대략 2시간의 시간이 걸렸고, 그렇게 들은 대답 또한 내가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지난 몇 년간 Drummond는 상당히 조용하게 지냈으며, 아내 Sallie Fellowes와 두 명의 (곧 세 명이 될) 아이들과 함께 Aylesbury의 농장에서 살았다. 그의 경력에 얽혀 있는 복잡한 논리는 그의 사생활에도 반영되었는데, 그에게는 두 명의 다른 전 부인과 세 명의 다른 자녀가 있었다. 그는 앞의 두 명의 자녀와는 서로 잘 알고 지냈지만, 마지막 셋째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헤어질 무렵 아직 18개월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을 그는 "이상하다"라고 표현했으며 언급을 피하려고 했는데,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의 새로운 책 [45]에서, Drummond는 또 한번의 관계를 "버린"후 과연 자신이 "나중에 자식들 중 단 한 명이라도 같이 살게 될 수는 있을지"에 대해 궁금해졌다고 말했다. 그의 삶과 작품을 들여다 볼 수록, 창조와 파괴의 순환고리가 확고하게, 강박적으로 학창시절부터 계속되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보여지리라.

    그의 음악 경력 또한 이 순환에 완벽하게 들어맞으며, 이 점이 [45]를 팝 음악에 대한 좋은 책으로 만들어준다: UK에서 그 누구도 이 남자만큼 팝 음악을 돌아가게 하는 멍청하고 혼란스러운 긴장감을 제대로 탐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 창조와 파괴, 덧없음과 예측불허의 결과들, 신화와 잔혹한 진실. 그가 해 온 많은 일들이 단순한 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는 "너무나도, 터무늬없을 정도로 진지했었다." 그는 자신이 해 온 일들이 무언가 의미를 갖기를 바랬지만, 팝 문화라는 것이 보통 자기가 하는 일이 뭔지 전혀 모르고 있을 때 가장 잘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도 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항해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그가 탈출하고 싶었던 것을 이해하지만, 그는 탈출할 수 없었다.

    [45]는 Drummond가 45살이 됨에 따라 떠올리는 기억과 순간들을 무작위적으로 배치했다고 하는 책이지만, 사실은 교묘한 - 그는 우연이라 말하겠지만 - 논리로 전개되는 내용이다. 책의 초반부에는 그가 12살 Kate와 10살 James 두 명의 자녀와 함께 음반 몇 개를 운반할 겸, 또 Michael Jackson 공연을 볼 겸 차를 타고 Helsinki로 향하는 도중의 일화가 담겨 있다. James는 이제 막 기타를 배우는 걸 관두기로 선언하고 아버지를 졸라 베이스로 갈아타려고 하고 있었다. 책에는 이 당시의 대화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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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만 해, James. 악기 레슨에는 돈을 더 이상 안 쓸 거야. 베이스로 갈아타려는 이유는 단지 베이스가 더 쉬워 보여서잖아." 내 목소리가 높아졌고, 점점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평소에는 아이들한테 정말로 안 하는 행동이었다. 1년 전만 했어도 James는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시무룩해져서 입을 닫고 있었다. Kate는 아무런 말도 안 했다. 나는 라디오 채널을 돌렸다. Abba의 "Winner Takes It All"이 나왔다. 나는 점차 현실에서 빠져나와 팝 음악의 열반에 빠져들고 있었고, 가슴 아픈 고통이 굴복의 황홀경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내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방울을 눈치채지 못하기만을 바랬다.

    "아빠, 이해 안 돼? 학교에서 하루 종일 열심히 공부하고 집에 돌아와서 자유시간을 전부 기타 연습에 쓴다면 재미없는 사람이 되는 거라구."

    "뭐, 누워서 TV 보는 건 재밌는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는 거니?"

    "그냥 다른 아빠들하고 똑같은 말을 하고 있잖아. 아빠가 원하는 걸 하게 하려는 거."

    "아니야. 나는 사실 네가 밴드 같은 거 안 하기를 바래. 많은 사람들이 밴드에 들어가길 꿈꾸며 젊을 때 고생하다가 결국 불행하고 우울하고 불만족스러운 채로 끝나. 밴드에 들어가는 일 따위는 안 일어나니까."

    "아빠는 밴드에 들어갔었잖아."

    "그건 그냥 운이었어. 봐봐, 실제로 밴드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잘못된 방향으로 갈 뿐이야. Prodigy의 Keith가 일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마다 행복할 것 같니?"

    "헛소리야 아빠. 내가 밴드에 들어가고 싶은 이유는 내가 밴드에서 활동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아빠랑은 아무 관련 없어. 그리고 아무튼, 나는 베이스 연주하기 싫어. 나는 보컬 하고 싶어."

    "James, 보컬이란 놈들은 전부 재수없는 놈들이야. 반에서 가장 안 좋아하는 놈을 떠올려 봐 - 그런 놈들이 보컬이 되는 거야. 모두가 보컬을 싫어해."

    "헛소리. 모두가 보컬을 가장 좋아해."

    "내 말은 밴드 멤버들이 보컬을 싫어한다는 말이었어. 보컬이야말로 언제나 게으르고 입만 산 주제에 허세만 가득하지. Liam Gallagher처럼 그냥 어슬렁거리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미련하게 있고 싶어?"

    "Oasis는 세계 최고의 밴드야. The Beatles보다 더. Oasis 보컬이 되는 건 멋진 일이야."

    나는 미끼를 물지 않았다. 침묵이 뒤따랐다.

    나는 내가 이 대화를 나의 10살짜리 아들과 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아이가 벌써부터 이런다면, 15살이 되어서 침실에서 마약류 식물을 키운다거나 할 때가 되면 어느 정도까지 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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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rummond가 15살이었을 때, 그는 East Midlands 지역 Corby시의 임대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출생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당시 아버지가 남아공에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선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처음 배운 단어들이 Bantu 민족의 언어 Xhosa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득세함에 따라, Drummond가 18개월이 되기도 전에 가족 전부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고, 그 후 Corby시의 임대주택에 머물게 되었다. Drummond는 학교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 (Drummond에 따르면) 공부시간에 몰래 [NME]를 읽다 걸린 후 식스폼 컬리지(sixth-form college)에 맞지 않는 학생이라는 결론이 나게 되었다. Drummond의 관심사에 음악과 '뭔가를 만드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상담사는 향후 직업으로 악기 제작자를 추천했고, 이를 위해서는 예술 업계의 자격증이 필요했다. Drummond의 예술을 향한 열정은 그의 안에 오랫동안 강하게 남아있었지만, 예술학교 생활은 자퇴와 함께 금세 끝나버렸다. "뭔가 잘 안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마무리지었다.

    음악은 미래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었고, Drummond는 첫 경력을 Liverpool 원히트 원더 밴드 Big in Japan (Lightning Seed의 Ian Broudie와 향후 Frankie Goes to Hollywood의 보컬이 될 Holly Johnson (베이스였다 - James에게는 말하지 마라) 이 멤버로 있는 밴드였다) 에서 시작하게 된다. 이 밴드가 해체한 후, Drummond는 Liverpool에서 잘 나가던 포스트펑크 밴드 The Teardrop Explodes Echo and the Bunnymen의 매니저로서 음악 산업에 계속 발을 담그게 된다. 그는 Echo and the Bunnymen이 유명세의 정점을 찍기 직전 그들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이런 행동은 향후 Drummond의 인생에서 일종의 패턴이 된다), WEA Records의 A&R 팀에 들어가 신인들을 발굴해 계약하는 업무를 맡는다. 이 업무에서 한 일들 중 유일하게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일은 Brilliant라는 그룹을 발견, 계약한 일이었는데, 이 그룹은 Killing Joke에서 베이스를 연주했었던 Youth와 기타리스트 Jimmy Cauty로 구성된 밴드였다. 3년 후, Drummond는 불명예스러운 일로 인해 WEA Records를 관두게 되지만, Cauty와의 관계는 이어나가게 된다. 이후 이들이 거둔 상업적 성공의 배경에는 "WEA 상무이사 Rob Dickens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고 Drummond는 말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증명했다. 그것도 엄청난 방식으로.

    KLF는 Kopyright Liberation Front의 줄임말이다. 이들의 1987년 첫 앨범인 [What the Fuck is Going On?]은 당시 막 사용되어지고 있었던 샘플링 기술을 활용, 다른 곡들의 여러 부분을 빌려와 새 곡을 만든 방식의 앨범이었다. 지금은 거의 일상적인 작곡 방식이 되었지만 - 그냥 Fatboy Slim 한 번 들어 보라 - 당시에는 논란의 중심에 선 방식이었고, 이들은 [Dancing Queen]의 한 부분을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명목으로 Abba와의 소송에 휩쓸리게 되었으며, 결국 그 때 까지 팔리지 않은 재고를 전량 폐기해야 한다는 판결을 받게 된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예견하기라도 하는 듯이, Drummond와 Cauty는 Stockholm으로 날아가 Abba의 보컬 Agnetha Faltskog에게 자신들이 받았던 골드디스크 상패를 기념품으로 선물해 주려 했었다. 다시 한 번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예견하기라도 하는 듯이, 이 둘은 Agnetha를 만날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냥 지나가던 길에 만난 한 창녀에게 기념품 상패를 선물로 주고는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1988년, KLF는 차트 1위 앨범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이들은 밴드 이름을 The Timelords로 바꾸고 [Doctor Who]시리즈 테마를 사용한 싸구려 댄스곡 [Doctorin' the Tardis]를 발매한다. 예상대로 이 곡은 UK 싱글 차트 1위를 달성했으며, 둘은 이 사건에 영감을 받아 [1위 곡을 쉽게 만드는 방법 (How To Have A Number One The Easy Way)]라는 일종의 가이드북을 출판하기까지 한다.

    오스트리아 듀오 Edelweiss는 책의 지시를 충실히 따라 [Give Me Edelweiss]라는 곡으로 2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히트를 친다. 1년 후, 다시 KLF로 돌아와 활동을 한 Drummond와 Cauty는 요동치는 레이브 찬가 [What Time is Love?]와 [3 A.M. Eternal] 두 곡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90년 KLF는 최초의 "앰비언트 하우스" 앨범 [Chill Out]을 발매하고, 1991년에는 이들의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자 히트 싱글 모음집인 [The White Room]을 발매한다. 이 앨범에서 아마도 가장 이상하다고 할 수 있을 곡은 [Justified and Ancient]일 것이다. 이 곡에서는 컨트리 스타 Tammy Wynette가 보컬을 맡았으며, Freddie Mercury의 죽음과 이후 재발매 된 [Bohemian Rhapsody]를 제외하고는 그 해 크리스마스에 차트 1위를 독차지하고 있었던 곡이었다. 당시의 성공세는 이들이 스스로를 실패할 수가 없다고 여길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단했으며, 원하는 것은 아무 것이나 마음대로 다 할 수 있었다. 1992년 Brit Awards 시상식장에서, 이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Drummond는 청바지에 작업화를 신고 뒷면에 "K2 Plant Hire"라고 쓰여진 오렌지색 형광빛의 동키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는 부드럽지만 강하게 말하는 사람이었고, 감정이나 내면보다는 아이디어나 추상적인 주제에 대해 더 편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두 번째 아내는 그가 갑자기 신을 영접하고는 교회로 떠나버릴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하곤 했었다. 아직까지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Drummond를 보는 누구라도, 그라면 그런 일을 충분히 할 법 하다고 생각하리라.

    나는 1992년 Brit Awards 시상식장에서 무슨 일을 할 지에 대한 이들의 첫 계획이 '살아있는 양을 무대 위에서 실시간으로 도축하여 그 시체 조각들을 관객석으로 던져버리는 것'이었다고 알고 있다. 안타깝게도 KLF가 고용한 헤비 메탈 세션 밴드 Extreme Noise Terror는 채식주의자들이었기에 이런 종류의 퍼포먼스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이런. 또한, Drummond는 그는 당시 시상식장 무대 위에서 자신의 손을 잘라내 관객에게 던지는 퍼포먼스를 그 무엇보다도 가장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는 무대 위에서 내 자신의 손을 직접 잘라서 관객에게 던지는 행위야말로 최후의 행위, 한계를 넘어서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Ulster 지방의 깃발을 보면 나오는 'Ulster의 붉은 손' 일화에 영감을 받았던 것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사람들이 배를 타고 처음으로 Ulster 지방에 도착했을 때, 배 안에 타고 있던 한 젊은 남자가 맨 처음으로 Ulster 땅을 밟은 사람이 되어 왕 또는 지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손을 잘라 배 위에서 해변으로 던졌다고 한다. 해서 나는 내 손을 잘라, 음악산업의 수없이 많은 인간들 위로 던짐으로써, 내 것임을 주장하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맞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길거리를 걸어내려가며 스스로를 진심으로 부추길 지경까지 갔었다. 필요한 도구까지 구매했었다... 그리고... Jimmy가 나를 말렸다. 그런 일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설득했었다. 양의 시체가 필요한 상징이 될 거라고. 손의 역할도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놀라웠다. 내 눈은 Bill Drummond를 보고 있었지만, 내 귀는 Hannibal Lecter나 Spinal Tap의 David St. Hubbins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듯 했다. 어쩌면 내가 환청을 듣고 있는 것 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1992년 이후 실제로 일어났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Drummond가 진심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KLF를 해체시킨 둘은 자신들의 백 카탈로그를 전부 말소함으로써 앞으로 발생할 모든 판매 수익과 로열티를, 말 그대로, 없애버렸다. The K Foundation으로 재탄생한 이들이 처음으로 한 일은, 1993년 최악의 예술가를 선정하여 상금을 수여하는 상을 기획, 진행하는 일이었다. 놀랍게도,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이, 수상자 후보 목록은 1993년 Turner Prize 후보 목록과 정확히 일치했다. 조각가 Rachel Whiteread가 두 상을 모두 수상하였으며,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녀가 the K Foundation의 상금 £40,000를 거절한다면 이 상금은 불에 타 사라질 예정이었다. Turner Prize의 상금은 £20,000였다. 1993년 Rachel Whiteread는 꽤나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곧, 판돈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나는 두 가지를 명확하게 알고 싶었다. 첫 번째는 무엇이 Drummond와 Cauty로 하여금 1백만 파운드를 불태우게 한 것인지이며, 두 번째는 1백만 파운드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가이다. Drummond는 내게 그 당시 자신이 한 행동은 자신이 평소에 하던 행동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말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볼 때 나는 언제나 같은 일을 해 왔다. 그냥 밖에서 봤을 때 달라 보이는 것 뿐이다." 그는 주장했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신빙성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때는 내 내면에서 일어나는 똑같은 감정을 다루고 그 감정과 같이 뭔가를 해 나가는 것이었다."

    무슨 감정을 말하는 것인가?

    "뭔가 엄청난 것, 그래서 반드시 바깥으로 표출해야만 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포장지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 말이 되는 설명을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무엇인가?

    "나도 잘 모른다."

    내게는, 당신들이 KLF를 끝내버렸던 방식도 포함하여, 혐오의 감정을 공격적으로 표출하는 행위였던 것 같아 보인다. Manic Street Preachers의 Richie Edwards가 작은 칼을 가지고 자신의 팔에 '4 REAL'이라는 문구를 적었던 것이나, Nirvana의 Kurt Cobain이 자신의 머리를 총으로 날려버렸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45]를 읽으면서 내가 궁금했던 부분은, 당신이 팝 음악으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한 복수를 노렸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당신도 잘 알겠지만, 신화와 도상학(iconography)은 댓가와 함께 오는 것이니까. 또 나는 당신들이 돈을 자선단체에 기부하지 않고 불태워버린 것에 대해 몇몇 사람들이 분개하는 것을 보면서, 돈을 불태우는 행위가 인간과 돈 사이의 관계에 대해 꽤나 심오한 무엇인가를 짚어 주는 행위였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시간관계상 다음번에 이야기해야 할 듯 싶다.

    "아니, 나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부분에서는 통하기도 하지만. Jimmy와 나는 일정 기간동안 이 주제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었다. 우리가 입을 놀릴 수록 돈을 불태웠던 것의 충격이 점점 더 사라져 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돈을 불태웠던 것을 파괴적인 행위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돈을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저 돈이 불타는 것을 보는 것이었을 뿐이다."

    단 한번이라도 후회한 적이 있는가?

    "뭐, 물론, 아이들 중 하나가 암에 걸려 죽어간다거나, California의 비싼 병원에서만 치료를 받을 수 있다거나 한다면 그렇겠지만... 아니라면, 후회하지 않는다."

    UK 팝 음악의 대단한 점은 쓰레기와 대단한 물건이 같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끔은 같은 매개체 안에서 공존하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리라. [45]에서, 잊혀진 KLF노래 하나가 세르비아의 반 Milosevic 시위의 노래로 쓰여지게 된 일화를 소개하며, Drummond는 희미한 자부심의 흔적을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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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사람들은 라디오에서나 틀어질 자신의 수많은 3분 30초짜리 곡들 중 단 하나라도 단순한 팝 음악의 지위를 벗어나 [Give Peace a Chance], [Anarchy in the UK], [Three Lions] 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국가의 사회적인 구조에 들어가는 순간만을 기다리며 팝 음악의 인생을 보내게 된다. 오늘 아침, 나는 우리가 단 하루동안 녹음을 전부 끝마쳤던 노래 하나가, 싱글로 발매조차 되지 않았던 그 곡이, 쓰레기라고 생각해서 어딘가에 처박아두고는 완전히 잊어버렸던 한 곡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투쟁에서 중요하게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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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45] 전부를 통틀어 가장 가슴이 저미는 순간은 'Now That's What I Call Disillusionment 1,2'라는 이름을 가진 마지막 두 장일 것이다. 이 마지막의 첫 장에서, Drummond는 단지 San Francisco 아방가르드의 전설 Residents의 드문 공연을 보기 위해 Echo and the Bunnymen의 기타리스트 Will Sergeant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서 집으로 돌아가 Birmingham Town Hall로 향했던 일화를 말하고 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들이 공연에서 발견한 것은 그들이 상상해 왔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 다음 장에서 Drummond는 KLF의 스스로를 조롱하는 듯했던 마지막 공연, 1997년 Barbican에서 했었던, 두 명 모두 노인으로 분장해 전동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었던 그 공연에 대해 말한다. 이 공연은 당연하게도 언론의 멸시를 불러일으켰는데, KLF가 복귀한다는 것 자체의 모순, 그리고 그 공연의 어이없는 행태에 관련된 멸시였었다. 시작으로서는 좀 절망적이지만, Drummond는 공연의 리뷰 몇 개를 인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평안함과 수용으로 나아간다. 마침내, 그는 신화로써 살아가야 한다는,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그리고 시대정신과 연결된 예술가로 활동해야 한다는 모든 의무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는 그저 펜을 집어들고는 남은 평생을 뭔가를 쓰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유로움이 그 날 밤에 일어났었던 일들 중 최고의 것은 아니었다. 그 날 밤 일어났었던 최고의 것은, 그 동안 KLF의 가장 열렬한 팬 중 하나였었던, [Time Out]지의 한 저널리스트와 관련된 일이었다.

    1988년, 당시 12살이었던 그 남자는 우리의 싱글 [Doctorin' the Tardis]를 구매했다. 그는 곧 우리에게 푹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가 행해 온 모든 일들을 전부 신실하게 따라오며 10대의 전부를 보냈다. 우리는 그가 가지지 못했던, 이상적인 아이돌 또는 큰 형과 같은 위치였다. 1992년 우리가 음악 산업에서 은퇴했을 때, 그는 우리의 위업에 대한 책까지 스스로 쓸 정도였었다. 그리고 1997년, 그 날의 밤이 왔다. 회색 콘크리트에 우리의 메시지를 되는 대로 대충 휘갈기고는 퇴근해서 다른 일을 하러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 나는 지난 시절 우리의 최고 팬이었던 사람의 손을 잡고 악수했으며 그의 무운을 빌었다. 바로 그 순간, 그와 나의 손이 악수를 하고 있을 때, 나는 그의 눈에서 무엇인가가 반짝이는 것을 알아챘다. 바로 환멸이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진정한, 그리고 순수한 환멸. 내가 Residents의 눈알 마스크 뒷편에 튀어나온 어두운 빛깔의 곱슬머리 가닥을 발견하고 말았을 때 느꼈던 감정만큼이나 강렬한 환멸이었다. Jimmy와 나의 짧은 팝 여정에서, 바로 이 때의 환멸의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그 동안 창조해 온 것들 중 최고의 피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마지막 순간의 환멸이 없다면, 팝의 힘과 영광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일어난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면 반드시 곧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 순간을 음미하라. 그 환멸은 곧 무관심으로 변해버리고, 삶이 계속됨에 따라 곧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일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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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22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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