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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RAZHDANSKAYA OBORONA
    [...]/[Grazhdanskaya Oborona] 2023. 3. 24. 04:47

    Grazhdanskaya Oborona(Гражданская оборона)는 소련 말기에 시작되었던 러시아 록 밴드로, 옛 공산세력권 펑크 운동의 아이콘이자 전설이라고 할 수 있는 밴드입니다. 당연하게도 다사다난한 세월을 거치며 간신히 활동하고 음반도 냈지만, 억압에 저항하기라도 하는 듯이 80년대 후반에 낸 음반들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굉장합니다. 비록 소련 해체 이후에는 논란이 될 만한 정치적 행보로 평가가 엇갈리기도 하지만, 소련 해체 전 음반들은 나름의 매력도 뛰어나고 훌륭합니다. 특히 89년의 [Здорово и вечно]와 [Русское поле экспериментов]는 굉장한 수작이지요...
     이 인터뷰는 90년 인터뷰의 일부를 누군가가 번역해 둔 것인데, 거의 유일한 영어로 된 인터뷰 자료입니다. 밴드에 대해 괜찮은 introduction 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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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grob-hroniki.org/article/1991/art_1991-05-xxa.html



    이 것은 Grazhdanskaya Oborona ("Civil Defense", 이하 GrOb)와 밴드의 리더 Egor Letov, 그리고 Jana Dyagileva (called "Janka")와 [Outlying Nervous System 2]지와의 1990년 인터뷰의 일부이다. GrOb와 그들의 음악에 대한 진짜 인상을 얻고자 한다면, 이 번역된 부분을 읽어 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GrOb에 대해서 들려 달라.

    Letov> 모든 것은 1982년에 시작했다. 우리는 잘 알려진 책의 이름을 따 POSEV ("Crop")라는 밴드를 결성했으며, 펑크, 사이키델릭, 60년대 음악을 결합한 것 같은 곡들을 연주했었다. 나는 모스크바에 있는 형제의 다락방에서 살고 있었으며, 그는 노보시비르스크 Academgorodok에서 CD를 자주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The Who나 다른 밴드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에게 빠져 들어갔다. 그 때의 나는 10대였으니 그런 종류의 음악에 완전히 빠져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예술적인 것'에 연관된 모든 사람들은 유리로 된 병, 넘쳐 흐를 정도로 가득 찬 그릇과 같다고 간혹 생각하곤 한다... 정말로 많은 양의 창조적 에너지가 그 그릇에 쌓여가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버린 사람 치고 자신만의 무언가를 창조하지 않는 사람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16살 때, 나는 내 밴드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곡도 쓰기 시작했다. 레닌그라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사 왔고, 옴스크에서 POSEV를 결성했다. POSEV에는 기타리스트 Babanko (지금 그는 CRIZISHOE OTDELENIE("Crisis Department")의 멤버이다)와 Kuzja (지금 그는 GrOb에서 베이스를 연주한다)가 있었다. 우리는 라인업을 몇 번 바꾸며 1984년까지 종종 연주를 하고는 했으며, 그 이후 밴드의 이름을 Grazhdanskaya Oborona로 바꾸게 되었다. 당시의 우리는 옴스크의 몇몇 집이나 지하실에서만 공연을 했었다. 그 시절 생활은 정말 어려웠었다. 그리고, Babenko의 어머니에 의해서 일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우리가 녹음한 것을 듣고는 곧바로 KGB에게로 가버렸다(그녀는 소련공산당의 당원이었다). 그녀는 KGB에게, "동지들, 내 아들이 반(反)소비에트 조직에 가담하고 있소."라고 말했다. 당시 우리에게는 우리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씬이 있었고 Aksenov나 Strugatsky가 쓴 팬 잡지마저도 볼 수 있을 정도였었다... 하지만 그렇게, 1985년 3월, KGB는 우리에 대한 범죄 기록 파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 기록은 그 해 11월에 완성되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찾아와 정보를 수집해 갔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수사했으며 각자에게 가장 두려운 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협박했다.
     언젠가는 디스코텍에서 일하는 내 친구가 내게 몇 가지 오디오 장비를 빌려 준 일이 있었다. 그러자 KGB는 내 친구에게 다가가 이제 막 태어난 친구의 딸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말을 했다. 그는 엄청나게 창백해진 인상으로 내 방으로 돌아와 자기가 놓고 갔었던 장비들을 전부 다시 가져갔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졌던 압박도 다 비슷한 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단지 추측만 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한 공장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고, KGB의 "First Department"는 내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1월, 우리는 KGB에게 체포당했다. 그들은 세계적인 비난을 반(反)소비에트 조직들에게, 테러리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던지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정유공장을 폭파시키려 했다는 혐의를 덮어씌우려고 했다. 그들은 우리를 협박했다. 우리의 "범죄 기록"은 마침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Kostja는 심장 장애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징병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더 심한 것은 그가 Bajkonur 우주 기지로, 완전히 폐쇄된 지역으로 징발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자백제"를 강제로 투여당하면서 협박을 당했다. 나는 어디서 팬 잡지를 구했는지를 털어놓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자발적으로 동료들을 배신했다고 말했다고 했다. 이와 같은 협박은 1달간이나 이어졌다. 나는 그 전까지 어떤 약물도 사용해 본 적이 없었고, 그러니 '자백제'를 투여받았을 때의 기분은 정말로, 정말로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무엇이라도 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나는 소령 Vladimir Vladimirovvich Meshkov의 압박에 못 이겨 자살한다..."같은 내용의 유서를 끄적였다. 지금까지도 대체 어떻게 이걸 발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내가 이런 유서를 썼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나는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었고 내 "범죄 기록"은 임시로 중단되었다. KGB는 내 친구들에게 나와의 모든 관계를 자발적으로 끊겠다는 내용의 동의서를 보냈다. 내 친구들은 검찰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그리하여, 나는 3개월동안의 감금 이후 풀려나게 되었지만, 나를 만나 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누구를 만나는 대신 혼자서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한 해 동안 나는 완전히 혼자였고, 이 때 "Мы лед под ногами майора (We are the ice under Major’s feet)"나 "Тоталитаризм (Totalitarianism)"같은 곡들을 썼다. 우리는 파시스트라고 불렸으며 옴스크 신문들은 우리를 진흙탕에 처박았다. 1987년, 나는 내 곡들을 전부 스스로 녹음했다. [Красный альбом (Red Album)]과 [Оптимизм (Optimism)]은 이 무렵 만들어졌다. 첫 앨범은 [Поганая молодёжь (Nasty Youth)]였으며, 동시에 [Некрофилия (Necrophilia)]도 녹음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노보시비르스크 페스티벌로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리는 연주할 수 없게 되어있었지만,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던 Звуки Му가 나타나지 않는 바람에 우리가 대신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공연을 시작하고 20분 가량이 지나자 정전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KGB의 Omsk 지부에 연락을 한 것이었다. 우리는 "파시즘의 주창자"로 기록되었다. 옴스크로 돌아온 후, 그들은 나를 다시 한 번 "정신병원"에 처넣으려고, 이번에는 아주 긴 시간동안 감금하려고 했다. 나는 그 무렵 Janka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재킷과 짐을 챙겨서 "sistemnik"(소비에트 언더그라운드 히피 집단의 일원)으로써 도망을 갔다. 이 일은 1987년에 일어났으며 나는 한 해를 내내 도망다녔다. 나를 잡기 위한 민병대까지 있는 상황이었고, 나는 소련의 절반 가까이 되는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노래를 부를 수 밖에 없었다. 1987년 12월, 나는 나에 대한 수색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옴스크로 돌아왔으며, 그 이후 1달동안은 정말 평화롭게 지냈다. 그리고 나서 나는 "Все идет по плану (Everything Goes According to a Plan)"과 "Так закалялась сталь (The Steel Was Tempering In Such a Way)"같은 신곡을 녹음했다. 나는 굉장히 서둘렀었는데, KGB가 다시 어떤 짓을 할 지 몰라 두려웠었기 때문이었다. 그 것이 1988년이었다. 우리는 노보시비르스크 페스티벌의 무대에 서게 되었고, Selivanov와 같이 연주도 하게 되었다. Selivanov는 내가 아는 한 시베리아 최고의 기타리스트이다. 그는 작년에 자살했다.
     노보시비르스크 페스티벌 이후 우리는 투어를 돌게 되었다. 보통 우리는 지하실에서 공연을 했다. 우리는 발트 3국에서의 펑크 페스티벌에 방문했었고,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공연을 했다. 1989년 우리는 제대로 된 스튜디오에서 음반을 만들어 보자는 결정을 내렸다. 레닌그라드에 가서 АукцЫон의 스튜디오를 사용해 보게 되었는데, 나는 이 고품질 녹음 장비가 우리의 컨셉에 있어 뭔가 매우 중요한 것을 없애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녹음을 멈추고, 짐을 싸서, 옴스크로 곧장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음반 4개를 그냥 내 다락방에서 녹음했다. 나는 그렇게 했던 것이 '맞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GrOb가 지금까지 낸 음반은 얼마나 되는가?

    Letov> 전부 말인가? 대충 15개 정도 된다. 1985년의 [Поганая молодёжь (Nasty Youth)]와 [Оптимизм (Optimism)], 1987년의 [Красный альбом (Red Album)], [Хорошо!! (It’s Good)], [Тоталитаризм (Totalitarianism)], [Некрофилия (Necrophilia)], 1988년의 [Так закалялась сталь (The Steel Was Tempered In Such a Way)], [Боевой стимул (Fighting Stimulus)]와 30분 정도 길이의 라이브 음반 [Песни радости и счастья (Songs of Joy and Happiness)], 그리고 [Война (War)], [Здорово и вечно (Fine and Forever)], [Армагеддон-Попс (Armageddon-Pops)], [Русское поле экспериментов (Russian Field of Experiments)], 거기에 컴필레이션인 [Красный Марш (Red March)] 정도 까지다. 이 컴필레이션은 이전까지 한 번도 녹음되지 않았던 곡들을 담은 음반이다. 그리고 더해서 몇 가지 솔로 음반들이 있다. 음, 여기에 더할 만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우리는 Barnaul을 기리며 한번인가 두 번 더 공연을 할 것이고 그거면 충분하다. 나는 Janka와 연주할 것이다.

    Janka와 같이 낸 음반은 얼마나 되는가?

    Letov> 음... 이럴 것이다: 1987년의 [Не положено (No Permission)]. 1989년의 [Домой! (Go Home)]. 1989년의 [Ангедония (Angedonia)] 그리고 "Tumenian Album"이라고 불리는 음반이 하나 더 있는데, 이 음반에서 녹음의 일부를 담당한 Instrukcija Po Vyzivaniju (Instruction For Survival)의 드러머가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고 그래서 Janka가 이 음반의 발매를 포기했었다. 그 음반은 정말로 이상한 음반이지만, 가장 잘 알려진 것이기도 하다. 협력으로 만든 또 다른 녹음으로는 [April], [Melodia's Department]가 있다.

    솔로 앨범은 계획이 있는가?

    Letov> 나는 아무 앨범도 낼 생각이 없다. 제안을 받은 적도 있지만 거절했다. 나는 그 어떤 공식적인 집단과도 연관이 없다. 이건 내 원칙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Аквариум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GrOb의 구성원은 안정적인 편인가?

    Letov> 우리는 한 1년 반 정도 같이 공연해 왔다. 중간중간 단지 휴식을 위해서 잠깐씩 멈추었던 시기가 있기는 하다.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마치 공동체 같은 것이다. 하지만 Barnaul 이후로는 밴드를 그만 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요새 우리 나라의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록 음악을 한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다. 사람들은 마치 디스코텍에 가는 기분으로, 그냥 단순히 뛰고 소리지르기 위해서 공연장에 간다. 아니면 웬 선수들이 와서 특정한 아르페지오나 음을 듣고 싶어한다. 나는 록을 음악이나 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록은 오히려 종교적인 행동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우리가 노보시비르스크의 지하실에서 연주하곤 했던 그런 음악을 하고 싶다. 차라리 공연장에 관객이 10명만 있는 상황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더 좋은데, 왜냐면 그 10명의 관객은 나의 음악을 진정으로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은 규모의 공연을 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 같다.

    프랑스에서 GrOb 음악이 음반으로 발매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Letov> 그 음반은 세계의 펑크 곡들을 담은 것으로 BRD에서 발매되었다. 그 음반에는 미국 밴드들, 영국 밴드들, 태국 밴드들 그리고 페루 밴드들의 곡도 들어가 있다. 거기에 더해서, 우리의 곡이 2곡 들어가 있다. 이제 BRD는 우리의 EP를 발매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몇몇 프랑스인은 우리를 유명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그들은 드럼 머신과 신디사이저를 가지고 고품질의 음반을 만들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거절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녹음들을 다른 유럽 펑크 회사들에게 보내서 카세트나 음반을 만들고 있고, 이게 내가 아는 마지막 정보이다. 나는 우리 음반이 어디서 발매되었는지 같은 건 알고 싶지 않다. 음... 덴마크에서도 우리 음반이 발매되었지만, 별로 관심이 가는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서방세계엔 단 한 명도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많은 밴드들이 서방세계에서 음반을 발매하고 싶어한다. 나는 그들이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서방세계에서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이성적이고,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 모든 것들이, 심지어 문화마저도, 정리되어 있다. 그들은 내가 프랑스에 한번 와 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나는 그냥 내 집에 가만히 있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정신은 우리의 정신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것들이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으며, 모든 것들이 좆같아지고 있지만, 그들은 이런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마치 전위대 같은 것들이다... 실제로, 이는 애처로운 전위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너무나도 진지하고, 우리의 영혼에서 나온 모든 것들은 미학으로, 일종의 개소리로 여겨진다. 그들이 이를 정말로 이해할 수 있다면,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Aleksandr Bashlachev의 음악들이 당신에게 영향을 주었나? 그리고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Letov> 나는 그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록커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의 음악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부터 그의 음악은 내게 큰 영향력을 불러일으켰다. 흠, 정확히 말하자면 '영향력'은 아니었는데, 음악이나 텍스트에 있어 나는 그와 다른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60년대의 "garage" 록과 80년대의 펑크에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들과는 연관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러시아적인 뿌리를 갖고 있었고 러시아의 언어로부터 나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것은 '쓰레기' 원리에 입각해 한 곡으로 믹싱되었지만, 결과물은 '메탈' 음악 같지는 않았다. 그저 하나의 리프와 그 위에 쌓아 올려지는 단조로운 언어였다. 그의 음악은 일종의 부두 같은 것으로, 스스로 성장하다가 몰락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음악을 자신의 영혼 속에서 발견했다. 그의 "Егоркина былина (Ballad of Egorka)"는 너무나도 세계적인 음악이다. 그 곡은 그가 끼친 영향의 정수(精髓)이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는 그가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노래할 수 있는지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짧고, 멜로딕하지만, 잔인하고 강렬한 곡들을 동시에 작곡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6분에 달하는 광범위한 작품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정신의 끔찍한 흐름이었다. 그것은 지독했고, 밝았고, 공격적이었다. 그리고 미학과는 어떠한 연관도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의 작품과 내 음악 사이에 더 많은 공통점을 발견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당신 속의 자기 자신을, 그가 그랬던 것처럼 발견할 수 있다면, 그제서야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최근에 그의 "Посошок (Crookie)"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존재했던 사람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1987년,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너무나도 비참한 모습이었다. 완전하게 부서지고 파괴된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기력은 남김없이 소진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에너지가 가득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무언가가 바뀔 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그는 그런 것을 전혀 믿고 있지 않았다. 그 후, 나 또한 부서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를 이해한다.

    Aleksandr Bashlachev의 자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Letov> 나는 자살이야말로 오늘날의 러시아같은 상황에서 타당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자연스러운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전진하며, 자기 자신을 인격으로써 발전시키고, 바깥 세계와의 연결고리를 전부 잃게 되는데, 왜냐면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난 후엔 아무도 당신을 이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며, 결국에는 진공상태에 던져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이 어떤 힘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면, 당신은 앞으로 나아가고 성인(聖人)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런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면, 그리고 당신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면 - 이는 현실이 당신을 죽이리라는 의미이다.

    세계의 종말이 어떨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Letov>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세계의 종말이라고 생각한다. 살아있는, 창조적인 에너지가 파괴되는 순간 종말은 시작된다. 나는 인간 창조에 대해서는 모른다. 아마도 그저 하나의 실험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 지구에 그냥 나타났다고 믿지는 않는다. 이 세계에는 언제나 몇몇 예언자들과 선생들이 있어 우리의 문명을 초(超)인간의 층계로 끌어내고자 해 왔을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USSR)에 대한 말인가?

    Letov> 오, 아니다. 이는 세계적인 스케일로 일어나는 일이다. 이는 서방세계에서는 막 일어났던 일이고, 우리나라에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문화의 죽음은 지금 진행되고 있다 - 종교, 예술, 철학의 죽음도. 문명화의 물결 아래 문화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창조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우주와의 연결점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 것이 세계의 종말이다. 나는 이 종말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겠다. 수 백만 년에 걸쳐서 일어날 수도 있지만, 여하튼 이것은 진정한 종말이다. 인간성은 창조적인 개인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만약 창조적인 개인들이 없어지게 된다면 모두가 서로를 파괴할 것이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자면, "Pamyat" ("Memory"라는 의미. 소비에트 민족주의자 집단)이 있을 것이다. Pink Floyd와 그들의 음반 [The Wall]은 분노를 방해하기 위해 타겟이 된 창조적인 개인에 대해서 들려 준다. 최근 작가 Bondarev는 흥미로운 말을 했다. "다른 국적이라는 위장 밑에 숨은 유대인들이 엄청나게 많다." 이 말은, 유대인이 국가적인 적이 아니라,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적, 그러니까 어떤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도 해당될 수 있는 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나나 당신이나 유대인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종말이다.






    2015/12/29 1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