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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lenn Branca] 2023. 3. 25. 11:35


    https://youtu.be/bhYHRvHfWv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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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thewire.co.uk/in-writing/interviews/glenn-branca-interview-with-marc-masters


    작곡가 그리고 기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성공을 거두기 전, Glenn Branca는 뉴욕 시 노 웨이브 씬의 상징 중 한명이었다. 2007년, [The Wire]지의 기고자 Marc Masters가 그의 책 [No Wave]를 위해 Glenn Branca를 인터뷰했었다. 아래의 글은 이 인터뷰의 일부분이며,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초반 뉴욕 시에서 Glenn Branca가 막 음악 활동을 시작했을 시기를 다루었다. Theoretical Girls, The Static, 그리고 기타를 위한 곡들, 이후의 교향곡들까지.

    Marc Masters> 1970년대 중반 보스턴에서 뉴욕 시로 거처를 옮겼는데, 어째서 그랬었는가?

    Glenn Branca> 연극을 하기 위해 뉴욕으로 향했던 것이었지만 나에게 있어 연극이란 음악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었다. 그 때에는 록 음악 같은 것은 직접 하지는 않고 있었다. 나는 온갖 종류의 아웃사이더 음악에 빠져 있었다. 현대음악, 재즈, Musica Elettronica Viva같은 음악들까지도. 하지만 동시에 록 음악도 정말 많이 듣고 있었고, 음반들을 열심히 사 모으기도 했다. 나는 15살에 기타 연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밴드들을 숭배했었다. 밴드들을 우상처럼 떠받드는 종류의 청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연극이었으며, 그래서 연극을 하기 위해 뉴욕으로 향했던 것이다.
    보스턴에서도 꾸준히 연극을 하고 있었지만 굉장히 힘들었었다. 내가 진행하던 연극은 특정한 플롯이나 캐릭터가 없었고, 통상적인 연극보다는 차라리 퍼포먼스 예술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작품을 일종의 실험적인 '연극'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연극의 배경 음악은 오늘날 '노이즈 음악'이라고 불리우는 음악에 가까웠었다. 보스턴에서 받았던 리뷰들 중 하나는 "Bastard Theatre의 음악에 비교하면 John Cage Victor Herbert정도이다"였었다. 뉴욕 시로 거주지를 옮긴 것은 뉴욕 시야말로 실험적 연극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뉴욕 시의 관객들은 나 같은 사람들이었다: 비주얼 아트, 음악, 연극, 퍼포먼스 아트, 온갖 종류의 예술가들. 뉴욕에 도착한 첫 날, 마침내 고향 집에 돌아온 것만 같았다. 꿈인가 싶을 정도였었다.
    그러다가 The N Dodo Band에서 활동하던 Jeff Lohn이라는 남자를 알게 되었는데, Jeff 또한 실험적 연극에 깊이 빠져 있었다. 우리는 SoHo에 있는 그의 골방에 모여서 연극 작업을 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는 기분이었고, 록 밴드라도 어쨌든 일단 시작을 해야만 했었다. Jeff에게 밴드를 시작하겠다는 말은 안 했었다. 어째서인지 Jeff는 내 밴드에 들어가지 않을 것 같다고 지레짐작했었던 것이다. 그렇게 직접 포스터를 만들고 거기에 내가 밴드를 시작 할 예정인데 관심있는 음악가는 연락을 달라고 적어두었다. 그리고 Jeff가 이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듣게 되었고, 나타나서는 내게 "씨발 뭔 짓을 하는거야? 밴드를 시작한다고? 나도 밴드에 참여하고 싶은게 당연하잖냐, 개자식아!"라고 말했다. Jeff는 Dan Graham이라는 퍼포먼스 아티스트와 아는 사이였는데, Dan Graham은 조만간 공연을 기획해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Dan Graham으로부터 "너희 밴드가 우리 공연에 참여해 보는 건 어때?"라는 제안이 왔고, 수락했다. 당장 3주 정도 뒤에 공연을 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악기도 하나 없었고, 드러머도 없었고, 그 어떤 곡도 아직 쓰지 않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리허설도 한 번도 안 했었다. 그렇게 3주간 모든 것을 해치웠다. 그리고 첫 공연은 환상적이었다.

    Marc Masters> 그 공연에서 Theoretical Girls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이었는지?

    Glenn Branca> 아니다, 그 시점에 우리는 밴드 이름이 없었다. 드러머 구인 공고를 냈을 때 임시로 사용한 이름은 "The Rhythm Butchers"였는데, Jeff가 이 이름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계속 괜찮은 이름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 때, 1976년 가을에는 '노 웨이브'같은 건 아예 없었다. 비슷한 밴드가 몇 있었지만, '노 웨이브'라는 개념을 생각하는 평론가는 아직 없었다.
    초반의 우리는 어딘가 꼬여 있는 펑크 밴드 정도였었다. Jeff와 나는 둘 다 노이즈 음악을 만들고 있었고, 둘 다 좋아하던 펑크에 이런 노이즈 요소를 융합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전환점이 되었던 사건이 왔었다: 밴드를 시작한 지 몇 주 지났을 무렵, 누군가가 굉장히 멋진 밴드 하나가 Max's Kansas City에서 공연을 할 거라고 얘기를 해 왔다. 이 공연이 그 굉장히 멋진 밴드의 첫 공연이었고, 이 밴드가 Diego Cortez라는 개념 예술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말도 있었다. 이 밴드가 바로 The Contortions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Jeff와 내가 공연을 다 보고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이들이 록 밴드 업계의 Sun Ra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 둘 다, 좋아, 더 이상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게 되었구만,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뭐가 되었든 행동을 해야만 했다. James Chance는 우리가 그를 베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가 우리를 일종의 경쟁자로 보고 있었고 또 우리가 그의 첫 공연을 보러 갔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James Chance The Contortions가 우리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보기 전에 이미 우리의 밴드를 시작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냥 "씨발, 그래, 우리의 길을 가겠어"라고 말했던 것에 불과했고,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우리는 Theoretical Girls가 우리의 '연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연극은 윌리엄 셰익스피어보다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연극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니까 연극이 아닌 연극을 하고 싶었다. 나는 록 밴드를 전통적인 연극으로부터, David Bowie라던가 Alice Cooper라던가 아니면 다른 모든 거대한 극적인 스타디움 록 공연에서 떨어뜨려, 음악가가 모든 측면에서 관객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 보여지는, 그런 밴드가 되길 바랬다. 나는 가끔 곡을 연주하기 전에 내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내리곤 했었다. 음악가의 굉장히 개인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서.

    Marc Masters> 다른 비슷한 록 밴드들이 등장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는가?

    Glenn Branca> 완전히 우연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 보니 같은 시대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노 웨이브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전부 예술계에서 나왔거나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예술계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직접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시각 예술에 깊이 빠져 있었다. 뉴욕 시가 내 흥미를 깊이 끌었던 것은 이 도시가 단순히 시각 예술 뿐만이 아닌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던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노 웨이브에 대해 정말 많은 것들이 Patti Smith에게서 나온 것들이었다. Mars Patti Smith의 아이디어를 받아 더 멀리 끌고 나가보려고 결성된 밴드였었다. 그리고 Mars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첫 노 웨이브 밴드로 생각하는 밴드였다... Mars의 첫 싱글이 Patti Smith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곡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다른 밴드들도 모두 Patti Smith에게서 그 정도의 영향을 받았었다.
    나는 상업적 수단으로서 록 밴드를 시작할 생각 같은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아예 '성공적'인 밴드를 만들 생각 자체가 없었다. 1년정도 투어를 돈다거나, 매일 공연을 진행한다거나, 록 밴드로서 살아간다거나 하는 마음가짐 같은 것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냥 예술을 하고 싶었다. 사람들을 뒤흔들어보고 싶었다. 또 다른 좆같은 록 밴드가 된다는 생각은... 당시의 나는 이미 29살이었다.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록 클럽에서 예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이었는지, 보스턴에서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East Village 씬이 있었고, 여기에 Mars, DNA, Teenage Jesus, The Contortions 같은 밴드들이 있었다. 하지만 SoHo에도 씬이 있었고, 여기에는 훌륭한 노 웨이브 밴드였던 The Gynecologists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The Gynecologists는 아무런 앨범도 발매하지 못한 채로 끝나버렸었다. The Gynecologists 멤버 중 Rhys Chatham이 있었고, 해체 후 자신의 밴드 Tone Death를 만들었었다. Tone Death 또한 앞에서 거론한 다른 밴드들 만큼이나 흥미로운 밴드였었다. Theoretical Girls는 SoHo 씬에 가까웠었고, 갤러리에서 공연을 하거나 미술관에서 전시회의 오프닝 무대에 서거나 했었다. 우리는 East Village, Velvet Underground, 마약쟁이들 같은 것 보다는 예술계와 더 가까운 밴드였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약을 안 했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미학적으로 마약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East Village 씬과 SoHo 씬 사이에는 일종의 신경전이 언제나 있었다. Brian Eno가 [No New York]을 만들기 위해 뉴욕으로 왔을 때, 곧바로 그가 무엇때문에 뉴욕으로 왔는지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었다. Jeff Lohn이 저녁에 짧은 공연을 하게 되었고, 여기에 Brian Eno이 왔었다. 그러니 Brian Eno는 우리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Marc Masters> [No New York]의 초기 기획은 10개의 밴드의 곡을 모으는 것이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Glenn Branca> 맞다, 그게 그 시절 뉴욕에 퍼지던 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엔, Brian Eno가 East Village 밴드들을 먼저 만났고, 그들이 밴드 4개로 [No New York]를 구성하는 것이 훨씬 더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Brian Eno를 설득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곧바로 몇몇 평론가들이 [No New York]의 다섯 번째 밴드는 바로 Theoretical Girls가 될 것이라는 소문을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다들 [No New York]이라는 컴필레이션에 Theoretical Girls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Brian Eno Theoretical Girls의 멤버 그 누구와도 전혀 만나지 않았고, 그렇게 [No New York] 작업을 자기들끼리 진행해 버렸다. Brian Eno에게 SoHo 쪽의 이야기를 전달할 기회조차도 없었다.
    어쩌면 Brian Eno가 그냥 Theoretical Girls를 별로 안 좋아했었을 수도 있다고도 생각한다. Theoretical Girls가 싱글을 녹음하기 전 The Kitchen에서 했었던 공연에, Brian Eno가 방문했었다. 그러니, Brian Eno는 분명히 우리의 음악을 알고 있었고, [No New York]에 우리를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그냥 그가 우리를 별로 안 좋아해서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크다고 본다. 내가 가끔씩 머릿속 한켠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때 뉴욕의 다른 밴드들보다 Theoretical Girls야말로 Brian Eno에게 직접적인 '경쟁상대'로 다가가는 밴드였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가설이다.
    나는 Brian Eno가 뉴욕 밴드들을 다루는 방식이 상당히 별로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냥 갑자기 들이닥쳐서 다 쓸어버렸다. 당시 노 웨이브 밴드들은 전부 완전히 망해 있었던 밴드들이었고, 그 누구도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그리고 Brian Eno가 Virgin Records의 계약과 자신의 명성을 등에 업고 갑자기 나타나서는 우리를 무슨 사회 실험의 대상 정도로 다뤘다. 요컨대, Brian Eno가 뉴욕 한편에 조그맣게 묻혀 있는 불쌍한 밴드들을 발견해 구제한 후 세상에 선보였다는 것 마냥 말이다. 내가 장담하건데, Brian Eno따위가 뉴욕에 오지 않았더라도, 세상은 결국 노 웨이브라는 경향에 대해 찾아냈을 것이다. 노 웨이브 씬은 Brian Eno가 '발견'했을 때엔 제대로 된 씬이 시작한 지 이제 막 2개월밖에 안 지난, 정말 새로운 씬이었다. Brian Eno의 기여도는 너무 과장되어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또 열받는 부분이 있다. 내 말은, Roxy Music에 참여하기 전의 Brian Eno가 어땠었는가? 그냥 노 웨이브 뮤지션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처지였었다. 그냥 작고 더러운 실험 음악가에 불과한 사람이었고, 어쩌다가 아주 아주 운이 좋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Roxy Music은 정말 좋아한다. Roxy Music의 음악은 노 웨이브 씬에 있어 아주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개인적으로 Brian Eno가 The Kitchen에 와 우리의 공연을 보았던 것은, 우리가 Brian Eno에 대한 곡을 쓰고 있다는 소문을 내고 다녔었는데, 이 소문을 그가 직접 들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이제 와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그에 대한 곡을 정말로 쓰지는 않았었다. 그렇다 해도 The Kitchen에 방문해 "Fuck Yourself"를 들었을 때, Brian Eno라면 그 곡이 바로 자신에 대한 곡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사실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Brian Eno에게는 미안하다, 떠벌리고 다녔던 것과는 달리 그에 대한 곡을 정말로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소문 때문에 우리의 공연을 보러 직접 오지 않았나 싶다.

    Marc Masters> Mark Cunningham(Mars)의 말에 따르면, [No New York] 앨범이 결국 노 웨이브 씬을 죽였다고 한다. 동의하는지?

    Glenn Branca> 맞다. [No New York]이 씬을 죽였다. Mark Cunningham의 말이 전적으로 맞다. Brian Eno가 밴드 넷을 데리고 가더니 씨발 완전히 똑같은 소리를 내는 음악으로 만들어버렸다. 완전히 같은 프로덕션 과정을 거치게 한 것이다. 만약 [No New York]에 참여했던 밴드들이 녹음 과정에 전권을 받고 자유롭게 진행했더라면, 앨범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은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Mars The Contortions가 같은 느낌이 되게 프로듀싱을 할 수 있는 건지? 네 밴드 모두 정말 다른 음악을 보여주는 밴드였는데 말이다. 평론가들이야 '씬'이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 밴드들이 전부 같은 원점에서 출발했다고 말을 할 수야 있겠지만. 돌이켜서 들어 보면 노 웨이브 씬에 속한다는 밴드들이 얼마나 제각기 달랐는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론가들이란, 언제나 구별하고, 분류하고, 한 그룹에 묶어 넣기를 좋아하는 부류들이다. 그 때의 밴드들은 전부 저마다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Arto Lindsay를 보라. DNA가 끝난 후에도 그는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미친 짓거리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 그냥 순전히 우연이었다, 우연히 미친 짓을 하는 밴드들이 동시에 생겨나 같이 미친 짓을 했을 뿐이었다.
    1978년 봄 Artists’ Space 페스티벌이 노 웨이브 밴드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 공연한 때였다. 그 페스티벌에 참여한 거의 모든 밴드가 노 웨이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밴드였다. 하지만 페스티벌은 그냥 "BANDS at Artists' Space"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웃음). Red Transistor도 같이 공연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Red Transistor는 언제나 가장 소외된 쪽에 속하곤 했던 밴드였다. Max's Kansas City에서 자주 공연을 하던 밴드였는데, 진짜 멋진 밴드였다. 진짜 노 웨이브가 어땠는지를 알고 싶다면, 내 말을 믿어라, Rudolph Grey Von Lmo가 가장 사악한, 가장 추악한, 가장 시끄러운 노 웨이브 음악가들이었다. 특별히 Von Lmo은 정말로 추악했다.

    Marc Masters> Artists’ Space 페스티벌이 당시에도 상당히 큰 행사였었는지?

    Glenn Branca> 노 웨이브 어쩌구에 있어 유일한 행사였다.

    Marc Masters> 노 웨이브라는 단어가 당시에는 쓰이지 않았던 것인가?

    Glenn Branca> 쓰이고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페스티벌의 주최자이자 그 자신도 음악가였던 Michael Zwack은 어째서인지 '노 웨이브'라는 단어를 쓰고 싶어하지 않았었다. 당시에는 노 웨이브라는 말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었고 아마 그래서였던 것 같다. 노 웨이브라는 단어를 아예 들어본 사람이 많았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리고 그냥 "BANDS"라고 말하는 것이 뭐랄까, 예술적인, 개념적인 느낌이 있었다. 물론 페스티벌을 보러 온 사람들은 전부 참여 밴드들이 어떤 음악을 하는지 잘 알고 온 사람들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냥 '밴드'들이었다.

    Marc Masters> Theoretical Girls는 공연을 몇 번 안 했었던 밴드였는지?

    Glenn Branca> 통틀어서 대략 20번 정도만 했었다. 파리에 가서 3번의 공연을 하기도 했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1~2개월에 1번 꼴로밖에 공연을 안 한다고 많은 비난을 가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매 공연마다 새로운 음악을 선보였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밴드의 강점이기도 했다. 관객들이 공연에서 무엇을 들을 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 우리는 여러 노 웨이브 밴드들 중에서 가장 절충적인 밴드였었다. Theoretical Girls의 모든 곡들을 모아 노 웨이브 앨범 하나를 만드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Theoretical Girls]라는 이름으로 발매된 앨범은 전부 Jeff의 곡이다. 개인적으로 조금은 짜증나는 부분인 것이, 사람들은 흔히 [Theoretical Girls]가 Theoretical Girls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Theoretical Girls는 그 앨범의 수록곡들이 전부인 밴드는 아니였었다.
    내가 작곡한 곡들 중 일부는 음반으로 발매되긴 했지만, 많은 곡들이 정식 발매가 되지 못했다. 남아 있는 음원이라는 것들이 Max's Kansas City 관객들이 그냥 카세트 녹음기를 들이밀고 녹음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런 음원들로 제대로 된 음반을 만들 방법이 없다.

    Marc Masters> 노 웨이브 밴드들이 녹음보다는 공연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인가?

    Glenn Branca> 아니, 전혀 아니다. Theoretical Girls가 제대로 된 음반을 내지 않았던 것은 그저 돈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그 어떤 레이블도 우리의 곡을 녹음해 발매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The Contortions가 정말 괜찮은 음반 몇 개를 발매할 수 있었던 것도 단지 부자들이 넘쳐나는 예술계에서 관심을 보이고 돈을 지원해 줬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Theoretical Girls 또한 한 2년 정도만 더 밴드를 유지했더라면 결국 누군가는 앨범 제작 및 발매에 관심을 보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모든 노 웨이브 밴드들은 돈이 한 푼도 없었고, 그 때만 해도 지하실에서 대충 녹음한 음원으로 싱글을 발매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 당시 밴드들 사이에 퍼져 있던 생각은, 뭐라도 발매를 하고 싶다면, 최소한 보통 사람들이 듣는 수준의 프로듀싱 및 마스터링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의 청자들은 창고에서 녹음한 수준의 음원은 아예 듣지를 않았었다. The Static이나 Theoretical Girls가 제대로 된 앨범을 하나도 만들지 못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 안타깝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Marc Masters> 뉴욕이라는 환경이 음악이 미친 영향은 어느 정도였는지?

    Glenn Branca> 뉴욕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우리였었다. 나는 도시에서 살고 작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나는 펜실베이니아 주의 Harrisburg라는, 지구에서 가장 지루한 장소에서 태어나 자랐다. 또 말하고 싶은 것은, 1970년대의 뉴욕 시는 요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시끄럽다거나 과격한 장소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뭐 물론 70년대의 뉴욕이라도 멍청하게 새벽 4시의 어두운 골목길을 돌아다닌다면 거의 무조건 노상강도를 당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70년대의 뉴욕은 꽤나 괜찮은 장소였었다. 70년대의 보스턴에는 정말 미친 사람들이 있었고 굉장히 폭력적이면서도 위험한 인간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보다 뉴욕으로 옮겨 보니, 그 정도로 미친 사람들은 없었다. 깜짝 놀랄 정도였다. 미친 사람들이 보스턴에만 있는 줄은 몰랐다. 70년대의 보스턴에서 한 7번은 노상강도를 당했었는데, 뉴욕에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뉴욕으로 향했던 것이다. 뉴욕이 우리에게 다가왔다기 보다는. 뉴욕으로 왔던 이유는 바로 이거였다: 우리는 몇 가지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 나쁜 생각은 뉴욕 사람들이 아니면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을 종류의 생각이었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나는 관객들을 공격하고 싶었다. 우리의 음악은 관객들에게 싸움을 거는 음악이었다. 나 또한 공연을 보러 갈 때 밴드에게 공격당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누군가가 내 면상을 걷어 차 주기를 바랬다. 비유적으로 말이다.
    어째서 당신이 노 웨이브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지, 어째서 누군가가 그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사람들이 신경을 썼는지는, 그 씬이 록 음악을 들으며 자란 젊은 시각 예술가들이, 예술을 하러, 회화를 하러, 개념미술을 하러 뉴욕으로 모여들어 만들어 낸 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뉴욕으로 온 예술가들이,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공연을 하는 밴드들을 보자, 자신들도 무대에 올라 좆같이 멋진 예술 음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Marc Masters> 밴드에 속한다는 경험이 평범하게 예술을 만드는 것에서는 얻을 수 없는 다른 부분이 있었던 것인지?

    Glenn Branca> 그냥 음악이었다. 예술이란 벽에 좆같이 걸려서 그냥 그대로 죽은 듯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음악은 굉장히 재미있었다. 그냥 어디서 좆나 멋진 아트 록을 들어 보면, 록 음악이 보여 주는, 원초적인 본능에 대한 호소에, 평범한 상업적 음악에는 없는 무언가가 더해져 있는 것이...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했었는지 지금은 잘 모를 것이다.

    Marc Masters> 언젠가 Max's Kansas City에서 Theoretical Girls가 공연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었는데, 대신 당신과 Jeff가 각각 솔로곡을 연주하게 되었고, 당신은 "(Instrumental) For Six Guitars"라는 이름의 곡을 작곡해 연주했었다. 그게 처음으로 작곡한, 여러 대의 기타를 위한 곡이었는지?

    Glenn Branca> 맞다. "(Instrumental) For Six Guitars"는 단 한 번도 정식으로 발매된 적은 없었지만, 내가 처음으로 만든 여러 대의 기타를 위한 곡이었다. 솔로 공연은 계속 생각만 해 오고 밴드 공연으로 구현은 못 하던 아이디어를 구현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었다. 6대의, 전부 변칙 튜닝이 된 기타가 필요한 아이디어였다. 나는 그 전에도 여러 실험적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 때에는 그 전까지는 듣지 못했던 새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로 여러 해를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며 지냈고, 결국 나에게 맞는 음향을 찾아내 안착하게 되었다. 언젠가 리허설 도중 멈춰서 주저 앉아 하염없이 울 수 밖에 없는 때가 있었다. 내가 이 음향을 찾아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니, 내 마음 속에는 그 어떤 질문도 없었다. 내 곡을 듣게 되었던 순간, 나는 내가 추구하게 될, 추구해야 할 길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곧 Theoretical Girls는 해체하게 되었다.

    Marc Masters> Theoretical Girls 해체 후 The Static을 결성해 여러 대의 기타를 위한 곡들을 연주했고, 그 곡들이 1981년의 [The Ascension]으로 이어졌다고 아는데, 맞는가?

    Glenn Branca> 그렇다. The Static은 두 명의 안무가에게 무용을 위한 곡 커미션을 받았었고, 해서 보컬이 없는 연주곡(역주: 나중에 "The Spectacular Commodity"이 된 곡이다)을 만들게 되었었다. 처음에는 The Static의 두 명의 기타리스트가 연주하는 식으로 만들어진 곡이었다. 그러다가 여러 악기를 더하게 되었고, [The Ascension]으로 이어졌다. 원곡을 4대의 기타, 베이스, 드럼을 위한 곡으로 편곡했다. 그러니 악기 구성 말고는 사실상 같은 곡이었다.
    처음으로 연주곡을 만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록 음악의 갈래에 있는 곡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작곡을 했었다. 나는 여전히 록 음악을 사랑했고, 록 음악에 많은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어떤 딜레이, 리버브, 이펙터 없이 단순히 일렉트릭 기타만으로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1958년에 기타를 사용하던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교향곡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록 음악에 대한 집착이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 교향곡 1번을 '록 교향곡'이라고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을 그다지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전까지 록 음악의 테두리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했고, 교향곡 1번은 흔히들 말하는 '현대 음악'을 해 보려고 했던 시도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현대 음악 작곡가가 일렉트릭 기타를 활용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전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Marc Masters> 흔히들 노 웨이브 밴드들은 애초부터 오래 지속할 생각 없이 만든 밴드들이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지?

    Glenn Branca> 그럴싸하다고 본다. 노 웨이브에 참여했던 음악가들은 돈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 돈은 전혀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고 중요한 부분이 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부분은, 1979년에는 모든 노 웨이브 밴드들이 (큰 레이블과 계약하기 전의) Richard Hell, Blondie, Patti Smith, Television같은 밴드들보다 관객을 더 많이 동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레이블도 노 웨이브 밴드들 따위에 한 톨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아예 알아보려는 의지도 없었던 것이다. 8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상업계에서 관심이라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 나는 투어를 돌고 있었다. 투어를 도는 것을 정말 싫어했지만 현실에서는 돌고 있었다. 몇몇 클럽 주인들이 우리의 공연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시카고에서 월요일 밤에 공연을 하나 했었는데, 예술계에 발가락이라도 걸치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우리 공연을 보러 왔었다. 지난 토요일 밤 시카고의 병신같은 록 밴드가 진행했던 공연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의 관객들이었다.

    Marc Masters> Lee Ranaldo도 들어가 있던 [The Ascension] 밴드 공연이었는지?

    Glenn Branca> 맞다. 보컬 없는 기타 밴드였으며, 대충 1980년 12월이었던 것 같다. 바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는데 John Lennon이 죽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이제 5분 뒤면 공연을 시작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우리는 투어를 위해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 항공사에서 무제한 정기권 같은 상품을 팔고 있었고, 이 상품을 이용해 그렇게 계속해서 돌아다닌 것이었다. 3주의 기간동안 18개의 도시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완전히 독립적인, 아무하고도 계약하지 않은 밴드로서는 처음으로 이런 짓을 하지 않았나 싶다. 1인당 $350만 지불하면 국내선은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었고, 우리는 최대한으로로 뽕을 뽑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번 공연하고, 다음날 바로 시카고로 향해 공연한 후, 그 다음 날은 애틀란타에서 공연하는 식으로.
    우리의 미국 전역 투어가 여러가지를 바꾸는 것에 도움을 주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아트스러운 밴드'가 공연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을 것 같은 공연장에서의 공연을 많이 진행했다. 보러 온 관객들도 뉴욕 씬의 밴드들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느낌이었다: 씨발 지금 덴버의 좆같은 클럽에서 뉴욕 노 웨이브 밴드가 와서 공연을 한다고? 무슨, 텍사스 포트워스에? 그런데 진짜 왔네? 뭐, 사실을 말하자면 포트워스에서는 관객들이 그다지 안 왔지만 말이다 (웃음). 하지만 포트워스에서도 관객이 몇 명은 있었다. 그리고 짐작컨대 그 관객들은 우리 공연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Marc Masters> 어떻게 [The Ascension]을 10,000장이나 팔았던 것인지?

    Glenn Branca> 열풍이었다, 완전히 (웃음). [Interview]지의 Glenn O’Brien인가가 [The Ascension]을 리뷰했었는데, "[The Ascension]은 혜성처럼 등장한, 형이상학계의 탑 10이다"라는 식으로 표현했었다. 물론 '형이상학계'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곳에서도 탑 10에는 못 올랐다. [The Ascension]이 West Village의 작은 지하 매장(99 Records)에서 10,000장이나 팔려나갔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만약 메이저 레이블에서 발매되었었다면 Patti Smith의 [Horses]나 New York Dolls의 [New York Dolls], 뉴욕에서 나온 기타 다른 명반들과 같은 수준의 반향을 불러일으켰을 것이 분명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박이었지만, 그 어떤 레이블에서도 내게 연락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말 그대로 전 세계의 모든 메이저 레이블의 사무실이 모여 있는 동네에서 한 20블록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는데 말이다. 내 이름이 뉴욕 시 전화번호부에 올라 가 있기도 했었다. 언제든지 내가 사는 곳으로 찾아 와 문을 두드렸다면 나는 문을 바로 열고 그들과 대화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화 한 통도 오지 않았다. [The Ascension]의 녹음은 The Power Station이라는 스튜디오에서 진행했었는데, 이 곳은 뉴욕 시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장 상업적인 곳이었다. 우리가 녹음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밴드의 베이시스트가 스튜디오에서 접수 담당자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사실상 무료에 가까운 비용으로 스튜디오를 사용할 수 있었고, 우리가 녹음을 진행하던 당일, 스튜디오에는 미친, Barbra Streisand가 있었다. 심지어 화장실에 잠시 가는 길에 David Bowie와 마주치기까지 했었다. 바로 그런 장소에서 [The Ascension]을 녹음했었고, 그 어떤 누구도 관심을 좆도 안 줬다. 1981년은 그렇게 힘든 시절이었다.

    Marc Masters> Neutral 레이블은 어째서 만들었는지?

    Glenn Branca> 언제나 항상 나만의 레이블을 운영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거의 언제나 경제적으로 파산에 가까운 상태였고, 해서 꿈은 꿈에 불과했었다. 그러다가 Josh Baer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사람은 SoHo 서쪽에 갤러리를 하나 소유하고 있었고, 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가 이런 질문을 해 왔었다: "Glenn,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을 단 한가지만 뽑으라면 뭐가 있겠어?" 나는 대답했다. "레코드 레이블을 운영하는 거." 그는 이어서 질문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첫 밴드로는 누굴 뽑고 싶어?" 나는 대답했다. "Sonic Youth." 그는 대답했다. "좋아, 시작해 보자고!" - Josh 또한 Sonic Youth를 좋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나는 이미 한동안 99 Records의 Ed Bahlman에게 Sonic Youth의 음반을 발매하라고 반 강제로 떠밀고 있던 참이었다. Ed를 만날 때마다 항상 "Sonic Youth 음반 발매는 언제 진행될 예정이야? 어쩌구저쩌구..." 라는 식이었고, 참다 못한 Ed가 "99 Records에서 Sonic Youth 음반이 발매될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절대로 안 할거라고. 제발 나 좀 내버려 둬!"라고 한 소리를 했을 정도였었지. 사실 Ed는 99 Records를 록 디스코 레이블로 만들려는 계획이었고, Sonic Youth는 록 디스코와는 한참 떨어진 밴드였으니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레이블이라도 만들어서 Sonic Youth를 첫 밴드로 삼겠어" 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Ed가 지금은 조금이라도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Marc Masters> Lee Ranaldo Thurston Moore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던 것인가?

    Glenn Branca> 사실 내가 정말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사람은 Kim Gordon이었다. 그 때 Kim은 Dan Graham과 절친한 사이였고, Cal Arts에서 그의 수업을 듣기도 했던 학생이었으며, 뉴욕에서 머무를 때 그의 아파트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당시 Kim Gordon은 개념미술 쪽으로 진출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여러가지 괜찮은 작품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몇 아트 밴드에 참여했었는데, 하나는 Red Milk였고, 다른 하나는 City of Men인가 그랬다. 그렇게 지내다가 결국에는 Thurston Moore를 알게 되고 여기에 Anne DeMarinis라는 키보디스트까지 포함해 3인조로 Sonic Youth를 시작했던 것이었다. Anne DeMarinis는 당시 Vito Acconci의 여자친구로, 예술계에 어느 정도 인맥이 있었다.
    나는 아직 드러머가 없었던, 3인조 Sonic Youth가 진행했던 첫 번째 공연을 봤었다. 그리고 좆나게 훌륭한 신인 밴드라고 생각했었다. 바로 이거였다! 음악을 새로운 레벨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밴드라는 느낌이 들었다. Kim Gordon이 베이스를 배우기 시작한 지 이제 막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었다. 물론 Anne DeMarinis는 이미 키보드를 잘 연주하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Thurston Moore야 다들 잘 알듯이 모든 측면에서 정말 훌륭한 음악가였다 (웃음). 그렇게, Sonic Youth는 시작부터 훌륭한 밴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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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lenn Branca
    1948. 10. 6. ~ 2018. 5. 13.

     


    2021/08/02 0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