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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sco Inferno: 90년대 영국과 브릿팝에 대하여
    [...]/[Disco Inferno] 2023. 3. 26. 00:52


    Disco Inferno는 브릿팝으로 격동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90년대 영국의 또 다른 밴드입니다. 블러니 오아시스니 펄프니 하는 브릿팝 주류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음악을 했던 밴드였고, 또한 당대에는 완전히 묻혀있다가 매니아들을 통해 알음알음 전파되던 밴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샘플링을 엄청나게 많이 쓰고 부유하는 질감을 만들어 내는데, 좀 난잡한 느낌도 있긴 합니다만 전체적으로 꽤나 퀄리티가 좋고 몇몇 곡들은 아주 훌륭합니다.

    이 인터뷰는 Disco Inferno의 뒤늦은 인기에 더불어 절판된 EP들을 모아 2011년 발매된 [5 EPs] 컴필레이션에 맞춰서 나온 특집 기사입니다... 기자가 상당한 Disco Inferno 덕후인지 밴드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옵니다... 이들의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리고 Disco Inferno 음악의 호불호 여부를 떠나서 90년대 영국과 브릿팝 문화를 "다른 방향"에서 본 관점이라는 것에서도 심심풀이로 슬쩍 훑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특히 블러가 정말 오랜만에 풀 라인업으로 새 앨범을 내고 노엘 갤러거가 다시 한국에도 오고 하는 이 시점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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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New 90's: Disco Inferno Interview

    http://thequietus.com/articles/07144-disco-inferno-interview


    http://youtu.be/36ihXBTVv5E

    1995년이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복도에 전화 벨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Neil, 전화 받을 수 있나? 나 Ian Crause야."
    "아니 Ian, 이봐, 요새 대체 어떻게 지내는 거야?"
    "괜찮아. Disco Inferno가 끝났어. Floorshow 라는 이름의 새 밴드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프론트맨이 필요해. 너가 맡아 준다면 좋을 것 같은데."

    나중에, 정확히 말하자면 수 년이 흐른 이후에나, 나는 그때의 통화를 내가 살면서 놓쳤던 가장 큰 기회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스스로의 겁쟁이스러움을 비난하면서 만약 내가 그 제안을 수락했더라면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지를 궁금해했다. 96년 무렵에는 일이 단순했다. 나는 울 것만 같았다.
    Disco Inferno가 끝났다고?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16번의 여름이 지나간 지금에도, 여전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 밴드는 단순한 가능성, 기회, 기호 같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가 가진 유일한 "진짜" 밴드였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팝 밴드였다. 당시에 Disco Inferno는 유일하게 중요한 밴드였고, 비겁한 판토마임 짓거리에 점령당한 브릿팝에서 유일하게 진짜인 쇼였고, 유일하게 우리의 마음과 머리에서 직접 흘러나와 음을 갖춘 것처럼 들리는 노이즈였다. 유일하게 중요한 밴드였다. 유일한 밴드였다.

    "미안하지만 Ian, 나는 너무 낯을 가리는 성격이야. 나는 그런 걸 할 수가 없어, 나는 노래도 못 부르고, 그리고… 난 그런 거 잘 못하겠어."
    "그럴 수도 있지. 언제 한번 보자고."

    우리는 이후 16년동안, 단 한번도 다시 대화를 하지 못했다. 사실은 저번 주를 제외하고는.

    Disco Inferno의 독창적이고 유일무이한 음악이 이제서야 재발매되었다. [5 EPs]는 Disco Inferno가 1992~1995년에 발매했던 5장의 12인치 EP들을 모아 놓은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이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DI의 다른 놀라운 앨범들인 [D. I. Go Pop]이나 [Technicolor]와는 또 전혀 다른 음악들이다. DI는 91년부터 음악을 발매하기 시작했으며, Che Records에서 멋진 싱글들을 발매했지만, 이것들은 모두 불안정한 첫걸음이었으며 Durutti/Joy Division의 영향을 받은 포스트펑크 곡들이었다 - 이 시기의 음악들은 모두 숭고한 [In Debt] 컴필레이션에 담겨져 있다. 1992년에 들어 무언가가 변했으며, DI는 단순히 위대한 밴드를 넘어서 삶의 방식을 바꾸는, 청자를 새로운 방식의 청각과 시각으로 유도하는 밴드가 되었다. 샘플링 기술의 혁신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DI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특한 음악을, 이미 녹음된 사운드와 부서진 리듬의 놀라운 대혼란을, Crause의 액체같은 기타와 모호하고 무언가를 암시하는 가사로 일그러진 것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시대에 너무나도 적확하게 들어맞는 음악이었다. 3년(1992~1995)동안, 내 마음 속에는, 그들은 내가 들어 본 모든 영국 밴드들 중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밴드였었다.

    16번의 여름이 지난 후. 우리 모두가 희망을 버리고 그저 잊어버릴 수는 없었기에, 그 시간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 시간과 기억은 여전히, 특별히 브릿팝이 자신의 자리에 (아직까지도 하고 있는 짓거리인) 빨간색 하얀색 파란색의 가죽을 열심히 꿰메어 오던 20년의 세월을 축하하려는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16년이 지난 지금 말로는 도저히 표현을 못 할 느낌을 가지고 서로 소원한 사이인 프론트맨/기타리스트 Ian Crause와 베이시스트 Paul Wilmott를 각각 따로 만나 인터뷰를 했다. 그러나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궁금해졌다. Ian, 대체 왜 나한테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인가?

    "바로 네가 그런 것을 머릿속으로 그려오고 있었으니까. 나는 거기에 약간의 도움을 주려고 했었던 것일 뿐이다."

    뭐라고? 내가 과거에 그런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는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하지만, 내 기억에는, 정말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내가 기억하기에는 전화를 끊고 나서 손이 덜덜 떨렸었는데…

    "아니 장난이었다. 완전 나쁜 짓을 했군.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은 그 때 내가 좋아하고 나를 웃게 만들고 친구로써 지낼 수 있는, 내가 이번에는 다시 뮤지션이 되겠지만 노래는 부르지 않으려고 결정했기에 노래를 부르는 것에 소질이 있는 그런 사람과 같이 밴드를 하고 싶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같이 밴드를 했었어야 했다. 만약 그랬다면 모든 것이 진짜로 바뀌었을 것이다."

    제길, 망설임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어긋나게 만들어 버리는 건지.


    http://youtu.be/SLiq9PDdUJ8

    92년,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 사랑에 빠져 있었는가? 누군가를 품에 안고 있었는가? 자주 들락날락거릴만한 장소가 있었는가? 좋아하는 클럽이 있었는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나는 당신들 덕분에 너무나도 기쁘다. 나는, 그런 것들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오직 가짜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1992년에, 애송이들, 내 친구들, 내 동년배들, 브릿팝 세대와 나는 진심으로 어울릴 수 없었으며, 이는 우리가 제각기 전혀 다른 것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쿨하고, 섹시하고, 젊은 머리와 심장,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필터로 걸러져 잘 맞게 변형된 인생 같은 음악을 원했다. Bluetones. Shed 7. Blur. Oasis. 나는, 멍청하고, 외롭고, 19살밖에 안 된 하숙생이었던 나는, 불행하게도 필터로 걸러졌다던가 당대를 풍자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그런, 진짜 삶 같은 음악만을, 삶의 원천을 훔칠 수 없어 그것을 모방하려고 노력할 수만 있었던 그런 음악만을 들을 수 있었다.

    1992년에 내가 가졌던 것은 Essex 출신의 4인조 밴드인 Disco Inferno의 음반이었다. 그들은 샘플링 기술에 너무나도 열광한 나머지 그해 여름 이전까지 그들이 해 오던 포스트-펑크 사이키델릭 글룸-팝에 갑작스럽게 엄청난 짓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Public Enemy The Young Gods를 본보기로 삼고는 완전히 새로운 영국 팝 음악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The gulls are coming in off the coast
     The smell of corpses passed them in." [From "Summer's Last Sound"]


    Crause는 소리지르지 않았고, 비웃지도 않았다.

    "Mass graves uncovered, must be abroad - it can't be here
      I can sense your violence, but I still don't understand." [From "Summer's Last Sound"]


    나는 Disco Inferno를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내 방에서, 모든 곳에서 언제나 듣고 있었다.

    "How when the past seems dead and you've got the future/
     In the palm of your hand." [From "Summer's Last Sound"]


    Disco Inferno는 1992년 여름 그 싱글을 발매했으며, 나는 그 곡에서 댄스플로어의 냄새조차 맡을 수 없는 진정으로 장엄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영국 팝을 찾아낼 수 있었다.

    "Foreigners get hushed-up trials/
     And you're waiting for a knock at the door/
     Which would tell if you spent the next few years/
     Free from life attacked by petrol bombs/
     The price of bread went up five pence today/
     And an immigrant was kicked to death again." [From "Summer's Last Sound"]


    이 가사들은 예쁘장한 외모에 드라마 스쿨에 다닐법한 앞머리를 내리고 관객에게 손을 뻗는 그런 청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볼품없는 천재 Ian Crause의 웅얼거림, 움츠림, 간신히 흘러나오는 속삭임이었다. 친구들인 Paul, Daniel Gish(키보드), Rob Whatley(드럼)과 함께, Crause는 내가 1992년을 살면서 직접 겪고 있었던 바로 그 '공포'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음악은 우리가 다시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망상 같은 것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제자리'라는 개념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었다.

    "And I'm scared for my life for the first time in it/
     And we've known all along that a home can put your life at risk/
     So I guess we'll just disperse again." [From "Summer's Last Sound"]


    90년대 영국 팝에서 벌어진 진짜 전쟁은 결코 [Blur VS Oasis]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냥 똑같은 '회피', 똑같은 '도피'의 다른 버전들끼리의 날조된 홍보물 대립 따위에 불과했다. 진짜 전쟁은 불안하고, 두렵고, 흥분되고, 가능성 있는 '미래'와 확고하고, 칙칙하고, 영원한 '과거' 사이의 전쟁이었다. 진짜 전쟁은 [Disco Inferno VS 세상]이었다. Crause는 이제 좀 더 늙고 현명해졌지만, 아직도 밴드의 패배에 대해 쓴 감정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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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an Crause> 우리가 하던 것과 Blur가 하던 것 사이에는 아주 얇은 경계선만이 있었으며, 특히 샘플링 기술을 적극적으로 기용하기 전에는 더 그랬다. 60년대 음악, 포스트펑크에서 비슷하게 영향을 받았었다 -- 하지만 내 생각에 우리와 대다수 브릿팝 밴드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우리는 음악 문화가 아니라 음악 그 자체에 열광하고 있었다는 것 같다. 당시 널리 퍼져있던 '지혜의 말씀'은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진정한 예술가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였는데 이는 청중들이 너무나도 똑똑해진 나머지 음악을 직접 하는 대신 돈을 많이 벌기 위한 적절한 직업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발생한 밴드들은 밴드에 속한다는 것을 본질적으로 문화적인 커리어를 쌓아가는 활동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으며, 조잡하기 그지없는 문화적 요소들을 가지고 밴드를 만들어 나갔다. 물론, 그러한 밴드들은 스스로에게 아이러니와 거리감만을 부여할 수 있었으며, 우리는 그들이 하는 그런 짓들을 도저히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런 짓들에 대해 엄청나게 열받아 있었다. 내 말은, 우리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에 대해 곡을 쓴단 말인가? 브릿팝은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이와 같은 브릿팝의 전형들 중 한 두개가 최근 가짜-예술 문화광들에서 재조명을 받고 있는데, 그 문화광들 중 몇몇이 마치 그 당시로 돌아간 것처럼 젊게 열광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다. 원하는 대로 해석하라.

    Paul Wilmott> 우리는 당시에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던 것들과는 살짝 어긋난 것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힘든 것들이었는지를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극단적인 것들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는 새로운 기술을 접목시키고, 이를 통해 '팝' 포맷 내에서 표현을 하는 것일 뿐이었다. 15년이라는 시간은 단순한 것에게는 정말로 긴 시간인 것 같다. 특별히 Ian이 다른 밴드가 우리와 똑같은 음악을 하고는 보상을 먼저 챙겨가지는 않을까 언제나 걱정하고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나만의 의견이지만, 만약 Ian의 목소리가 좀 더 전통적인 보컬에 가까웠다면 우리 음악이 더 넓은 시장에 잘 끼어들어갈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오늘날, 인터넷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음악들을 엄청나게 듣게 되어 모든 소리들과 전달 방식의 이상함을 포용할 수 있게 된 오늘날에 와서야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음악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만약 소문으로만 돌고 있는 Coldplay의 "A Night On The Tiles" 커버가 진짜 이루어지게 된다면, 내년 그들의 공연을 정말 기대하게 될 것만 같다.


    http://youtu.be/f92EoD8Iv0Y

    DI가 영국 팝 메인스트림에 단 한 번도 끼어들지 못했던 것이 순전히 출신 지역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가? Essex 말이다.

    Ian Crause> Essex는 마가렛 대처의 푼돈을 받고는 영국 사회를 무너뜨리기 시작한 백인 노동자들의 중심지 같은 곳이었다. British National Party(영국의 극우파 정당)가 주창한 '백인 이주'가 시작된 곳이다: 런던 중심부의 백인들이 흑인들과 아시아인들을 몰아내기 시작한 곳. 그 곳은 남동부 백인 노동자들의 진정한 심장부이다. 런던 중심부에서는 이제 자취를 감춘 사투리 억양을 Essex에서는 여전히 들을 수 있다. Essex의 인구 통계를 보면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지만, Blur는 내가 High Essex라고 부르는 Colchester 지방 출신이다. Colchester에는 토박이들과 어울리려는 얄팍한 의도에서 Essex 사투리를 Jamie Oliver 같이 대충 흉내내는 화려한 중산층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러면 브릿팝은 중산층들의 음악이었던 것인가?

    Ian Crause> 새롭게 등장하여 사회를 장악해가던 중산층들의 영향력은 모든 것에 스며들고 있었다. 브릿팝 또한 이것과 상통하게 시작부터 그렇게 발생했던 것이다. 많은 밴드들이 중/상류층 출신에 사립학교를 다닌 사람들이었다. Damon Albarn(Blur 보컬)은 누구라도 잘 알 수 있듯이 굉장히 똑똑한 녀석이었으며, 노동자들을 신비로우면서도 직접 대면하여 관찰할 가치가 있는 존재로 여기는 수많은 중산층 사람들과 비슷한 사람이었다. 그들에게는 보고 웃을 수 있는 광대 원숭이가 주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Shaun Ryder(Happy Mondays의 약쟁이 보컬) 같은 사람이 좋은 예로, 그들은 Ryder를 열심히 들었지만 동시에 "Ryder같은 놈 보다는 내가 낫지"라는 생각을 하며 미소짓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버스 막차시간이 지난 후의 대도시 밤거리 같은 것들을 너무나도 무서워한 나머지 90년대를 남성잡지와 가짜 풋볼 쓰레기들로 가득 채워버리고는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그것들을 열심히 붙잡고 있었다.
     나는 토니 블레어의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빛을 받은 모든 "Cool Brittania"들(역주: 대부분의 브릿팝을 일컫는 표현)이 아름다울 정도로 씁쓸하고 아주 적절한 사운드트랙이었다고 생각한다. Pulp는 그들의 가사 덕택에 확실한 예외라고 할 수 있겠지만. Geoff Travis(영국 인디레이블 [Rough Trade] 수장)가 "Common People"의 발매 전 버전을 들려주며 혹시 우리가 프로듀서 Chris Thomas와 같이 일을 해 볼 생각이 있는지를 물어보던 때가 떠오르는데,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나 또한 그 곡을 처음 들어봤을 때 곧바로 "이건 무조건 클래식이 되겠군"이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분명했다. 브릿팝은, 당시 신자유주의가 계층간의 격차를 엄청나게 늘리는 방식으로 영국 사회를 무너뜨리려는 마지막 일격을 가하면서 이를 가짜 자유주의 프로파간다로 대충 덮어버렸던 그런 시대에 제대로 어울리는 '사운드트랙'이었다.

    그건 시간이 흐른 후 뒤를 돌아보며 회고하는 시점인 것 같다, Ian -- 그 당시에는 당신들의 동년배들과 '동료들'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Ian Crause> 음, 당시 우리 세대는 2차대전 이후 영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세대가 되어야만 했었던 세대였다. 그래서 그들은 반짝거리는 구슬로 치장하고는 길거리에 나와 자신들이 얼마나 맛이 갔는지를 말하며 Jimi Hendrix The Doors를 빠는 '척' 하며 돌아다녀야만 하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광경이 역겨웠었다. 사실 나는 Kula Shaker의 그 애송이가 어째서 Ivor Novello 상을 아직도 받지 못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 그 애송이의 헛소리는 우리 세대의 '반항을 연기하며 노는 것'을 현실로 구현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영국 사회를 보는 시각을 듣고 있노라면 그가 Francisco Franco(스페인 독재자)의 내각에 앉아 있는 장면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그 애송이는 특별히 이상한 놈이 아니다 -- 그는 완벽한 '전형'이다.

    브릿팝이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은 것이 브릿팝에 대해 화가 나는 이유 중 하나인가?

    Ian Crause> 그렇다기 보다는 우리 세대에 대해 열받는 이유가 될 것이다. 1990년 폭동과 데모를 일으켰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80년대부터 마가렛 대처에게 반기를 들어 오던, 우리보단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우리 세대는 그들이 가져오는 해답들은 이미 옛날에 발견되었던 것들이나 알아야 할 가치조차 없는 것들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세대였다. 나는 당시 [Melody Maker]지를 읽으며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오리지널리티라는 것이 얼마나 허상이며, 절대로 달성할 수 없는지를 가르치려고 하는 내용을 투고한 글들을 보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내 이름은 Joshua다. 나는 Leicester Polytechnic에서 비평론을 전공하고 있다. 나는 예술가 같은 것이 되려고 했었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너무 어려웠고 그래서 당신들을 위해서 예술가 같은 것이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것을 알려 주려고 결정했으며 우와, 여기 내가 수업 때 들었던 책 속에 실증적인 증거가 나와 있다. 나는 태국으로 휴가를 가서 아시아인들을 돕는 척 하면서 사실은 게으르게 돌아다니며 약을 빨고 술을 잔뜩 처먹을 것이다. 내가 세계여행에서 돌아오면 -- 이런, 실수, '문화 체험 여정'에서 돌아오면 -- 나는 BAE / Credit Suisse / Deutsche Bank 같은 기업에서 인턴을 할 거고 해서 어쨌든 나는 이길 것이고 어쨌든 너는 계속 가난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했고, 실제로 나 또한 그렇게 되었고, 여전히 그렇다.

    David Stubbs가 DI에게 '[Melody Maker] 이번 주의 싱글' 자리를 준 다음주에 우연히 당신을 마주쳤는데 ([Melody Maker]와 [Lime Lizard]만이 유일하게 DI를 고평가해주던 매체였다) 그 자리에서 당신이 "나는 지금 완전 거지꼴이고 Tescos(영국의 슈퍼마켓 체인)에서 일한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전해 들었던 기억이 난다.

    Ian Crause> 흠 당시 우리 세대는 가난한 계층에 대한 계급전쟁이 문화와 예술의 본질인것마냥 깊이 뿌리내린 세대였다. 브릿팝은 내게 그렇게, 그들이 푹 빠져 있던 보헤미안 판타지에, 불안정해진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도미노 효과들 중 하나인 것으로, 가난한 사람처럼 위장하고는 그들을 흉내내다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정리하고 아빠, 엄마, 그리고 금융자본을 얻으러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것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런 현실 안주와 거만함이 우리 세대만의 것이었기를 바라며, 우리 세대의 시간이 끝났다는 것이 정말로 기쁜데, 왜냐면 이제 나타나기 시작하는 애송이들은 우리 세대가 남긴 난장판을 정리하는 청소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우리 세대가 남긴 난장판은 정말 좆같지, 안 그런가? '그들'이 최하층 서민처럼 위장하고 잠입했던 생활은 실제의 노동자층의 삶이 어떠한지를 그들에게 맛보여 주었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그들은 그 현실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지 않은가? 그 많던 오가닉 카페들은 다 박살났고 라떼는 이제 아무데서나 다 마실 수 있다.
     '그들'은 이제 나와서는 좆같은 빗자루를 처들고 발그레한 뺨으로 '쓰레기'들을 치워버리고 있다. [The Guardian]에서 그들이 빗자루를 높이 처 든 사진을 보았는가(역주: 아마 http://www.theguardian.com/uk/2011/aug/09/london-riots-cleanup-appeal 인 듯)? 충혈된 눈을 가리기 위해 뺨이라도 발그레하게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의 눈에 비추어진 무식한 "쓰레기"들 중 하나로써, 나는 그게 좀 재미있다고 여겨졌다. '파아아아아아아아크 라이프'에 어서 오세요! 나는 그 모든 브릿팝 시절을 필요했었던 환상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중산층들이 집에서 나와 진심으로 모든 것들을 착취하고 모두를 경제적으로 겁탈하기 전에 노동자로 잠시 위장했었던 그런 환상으로 본다. 그들은 지금 실제로 착취를 하고 있다.

    시대가 지난 것에 감사한다. 화를 내는 것을 보건대 당신은 체념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저항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소위 말하는 "성장했다"는 것이겠지. Disco Inferno는 내가 들어 본 음악들 중 가장 "성장한" 꼬맹이들을 위한 음악이었다.


    http://youtu.be/ImudRvSb2WA

    "I may need dreams from time to time,
     But dreams aren't keeping me alive.
     My dreams have torn my life in two--
     Now I just need a rock to cling to" [From "Rock To Cling To"]


    [Summers Last Sound] EP, 그리고 곧이어 발매된 놀라운 다른 EP들, 그리고 앨범 [D. I. Go Pop] (90년대의 영국에서 발매된 2번째로 위대한 앨범으로 DI의 팝 센스와 음향적 도박을 새로운 경지로 눈부시게 올린 작품) 을 통해 나타난 것은, 놀랍게도 DI는 시대를 앞서는 밴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성공에 가장 치명적이었던 점인데) 그들의 시대에, DI를 제외한 모두가 너무나도 두려워하는 나머지 과거를 돌아보며 흉내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그런 시대의 '현실'에 완전히 충실한, 솔직한 밴드였다.

    인간의 종류가 달라 메인스트림에 융화될 수 없었던 나같은 사람에게 DI는 정말 깊게 다가왔는데, DI도 친구들 없이, 혼자서 고독하게 생각들을 좇아다니는, 유행과는 전혀 맞지 않지만 예술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불타오르고 있으면서도 브릿팝이 의존하는 고정관념들과는 전혀 동떨어진 음악을 하는 밴드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미래주의는 컨셉이나 이론이 아니라 당시 현재의 좆같음과 경이로움에 대해 반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태도였다.

    Ian Crause> 내 생각에, 이는 '예언적'이라는 단어의 정의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그 단어는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는 하지만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사물들의 핵심을 봄으로써 시간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Ted Hughes의 [Agamemnon] 번역본에는 이 개념에 대한 가장 훌륭한 예시가 나와 있는데, 죽음으로 향하는 눈이 어떻게 모든 사물들의 핵심을 꿰뚫는지에 대해 나와 있다. 이 분열된 해석이 모든 형태의 예술들에게 적용되는 방식은 명백하다: 기술의 혁신이란 자신 스스로를 예언하는 것으로써 20세기의 고급 예술들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모든 것의 정체를 여실히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실을 드러내었다. 따라서 몇몇이 우리를 아주 냉정하고 엘리트적인 실험음악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이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소리들은 사람의 말과 감정, 그리고 그들의 모든 결점들에 대한 것들이었다.
     92년 나는 Public Enemy Young Gods같은 음악에 매료되어 '혁신'에 엄청나게 몰두하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적 혁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관점과 연결되지 않는 이상은 예술적인 힘 없이 그냥 기술 연습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하게 된다. 대다수의 포스트 록 밴드들이 하는 일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내가 부분적으로는 당신같은 사람들이나 David Stubbs 같은 오랜 동료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의식적으로 혁신을 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동안, 내 본능은 사물들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도록 나를 이끌었고, 바로 그 점이 밴드의 매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양쪽 면을 다 가지고 있었다.
     나는 우리 밴드의 앨범들 중 최고로 꼽는 것이 사람들마다 다 다르다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는 [D. I. Go Pop]이 가장 좋다고 말하며, 다른 사람들은 EP들이나 [Technicolour]가 가장 좋다고 말한다. 그들은 제각각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런 점을 좋아하며 어떤 앨범도 더 특별히 좋다고 여기지 않는다.

    Paul Wilmott> 우리는 [Science] EP(Che 레이블에서 한 마지막 EP)를 녹음했고, 좀 더 괜찮은 평가를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가 공연할 수 있는 공연장은 거의 대부분 작은 술집들 뿐이었다. 우리는 절망했고,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 우리가 좋아했던 밴드들은 샘플러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경제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는 우리도 샘플러를 쓰지 말아야만 하는 이유 따윈 없어 보였다. 우리는 Massive Attack의 [Blue Lines], My Bloody Valentine의 [Loveless], The Orb의 [Adventures Beyond The Ultraworld]를 들었고, 미래를 향한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았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복제품같은 인디 애송이들을 인지하고 있었고, 그 무엇보다도 그들의 또 다른 일원이 되고 싶었다. 당시 우리는 모여서 활동한 지 3년이 넘었었고 그 때까지 아무것도 달성한 것이 없었었다: 좆같거나 해체할 순간만이 남은 상태였다. 최소한 우리는 사라질 각오로 노력할 수 있었다. 나는 언제나, [In Dept] 컴필레이션 이후의 DI를 그토록 독특하게 만들어 준 것은 우리의 방식에 있어 가식이라는 것은 한 톨도 없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동시대의 수많은 다른 밴드들보다 훨씬 더 순진했었다. Can, Captain Beefheart, Neu!등을 알기까지도 몇 년이 걸렸다. 전문대학/대학 교육 같은 것은 받지 못했다 -- 우리가 알았던 것들은 고등학교에서 배운 것 그대로였으며 공연을 하러 돌아다니는 음악가들과 어려우면서도 단순한 방식으로 교류했었다. 대체로 술집 공연만 뛰는 밴드들 옆에서 리허설을 하면서. 우리는 런던에 가깝지만 결코 런던은 아니었던 A12에 처박혀 있었다. Rob Whatley와 나는 Gants Hill 로터리 옆의 술집에서 마시곤 했으며 그 곳이 우리가 '사회적인 만남'을 갖는 주요 장소였다. 우리가 타고 다녔던 차는 (주로 Rob이 골랐는데, 밴드 멤버 중 운전면허를 갖고 있는 사람이 그 뿐이기 때문이었다) 박살난 Ford Capri였다. 우리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은 교육을 받았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때때로 나에게는 공연이 끝나고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 보다 차라리 풋볼 게임을 하는 게 더 안전하게 느껴지곤 했다.

    DI는 내게 언제나 팝 밴드였다 -- '포스트 록'이라는 단어는 거부하는가?

    Paul Wilmott> 우리는 스스로를 포스트 록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 단어가 만들어지기도 전부터, Ian Crause와 나는 Essex주 Redbridge에 있는 그의 자취방에 앉아서 베이스와 기타를 들고 어댑터에 꽂고는 리허설을 하곤 했었다. Rob Whatley와 나는 노동자 계층에서 자랐으며, 집에 살면서 아버지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Ian Crause는 좀 더 중산층에 가까운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밴드 활동을 위해 더 많이 반항을 해야 했고, 반항은 결국 언제나 베이컨과 Kosher 스타일 아보카도 샌드위치로 끝나고는 했다 -- 상당히 '격렬'했었지.

    Ian Crause> 이제는 포스트 록 그룹들로 불리는 대부분의 밴드들, 내 생각에 그들은 우리의 팝송과 샘플링을 듣고는 우릴 그냥 '장난감 가지고 노는 밴드' 정도로 여긴 것 같으며, 따라서 그들에겐 우리가 사용하던 샘플링 기술을, 너무 '흑인 음악'이었던 Public Enemy나 프랑스어로 노래하던 The Young Gods에게서 우리가 차용해 온 샘플링 기술을 사용할 이유 같은 것은, 좆도 없었다! 그리고 샘플링은 충분히 '심각하지' 않았으며, 그 말은 상업적으로 성공할 가망이 없어 보인다는 뜻이었다… 누가 알겠는가. 어쨌든, 나는 아이디어가 있었기 때문에 샘플링 기술을 사용했었다. 당신이 가졌던 아이디어들을 기억하는가? 좋지 않은가? 나는 Public Enemy The Young Gods같이 되고 싶었으며 Roland S-750 샘플러를 사서는 (직업으로 할 일이 없던 기간이었던) 6개월동안 자취방에 앉아서 프로그래밍을 시작했다.
     내가 보았을 때 대다수의 포스트 록커들은 (브릿팝 밴드들처럼) 정식 음악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팝송을 넘어 클래식 음악스러운 아이디어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노래의 대부분은 3-4분짜리 팝송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밴드들은 마치 좌파 실험예술을 하는 것 마냥 차려입거나 Top Of The Pop 무대에 나가서 노동자층인것 마냥 위선을 떨었다. Paul Wilmott와 나는 기본적으로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꾀죄죄한 병신들이었으며 따라서 그런 위선행위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고, 또한 샘플링을 하면서부터는 단순히 곡을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을 침묵시키거나, 움찔하게 하거나, 격분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무대에 뭘 차려입고 나가거나 할 필요도 없었다.
     또한 우리들이 좀 살이 쪄 있었던 것이 우리를 똑똑하다기보다는 일종의 '실수'로 그런 음악을 만들어내게 된 것처럼 보이게 했던 것 같다. 어떤 중산층 사람들은 나를 idiot savant(역주: 지적 장애인이지만 특정 영역에서는 놀라운 능력을 보이는 사람) 정도로 여겼고, 배경에 신경 쓰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내가 18살 무렵부터 서구에서 가장 널리 퍼진 예술 형식에 해 오던 일들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게 싫었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차별때문에 점점 더 괴로워졌다. 계급 의식이 출현하고 있던 때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http://youtu.be/WYcj3iv8n_c

    DI의 라이브는 그저 엄청났고, 기술적인 측면에서 정말로 독특했으며, 무엇보다도 음악에 대한 시도에서 묻어나오는 그들만의 자의식이 뚜렷했다. 1993년 Sheffield Leadmill에서 한 공연은 90년대 내가 본 공연들 중 가장 좋았던 공연이었다. 당시, 대다수의 브릿팝 밴드들은 잘 알려진 옛 테크닉을 주로 사용함으로써 청자들이 보호받고 있고 안정된 땅 위에 서 있다고 느끼게 하였다. DI는 정 반대로, 롤러코스터, 홍수, 지진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 그들의 소리는 젊은 정신이 향하는 곳의 소리였으며, 과거나 어떤 종류의 위협적인 열등함에도 숙이지 않는 꼿꼿한 태도의 소리였다. DI는 영향력 같은 것은 가지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혼돈을 가졌었다.

    Ian Crause> 나에겐 그 동안 시금석으로 삼아왔던 위대한 밴드들의 전당 같은 것이 있다: Joy Division New Order, Gang of Four, The Only Ones, Wire, REM, Public Enemy, My Bloody Valentine, The Young Gods, Velvet Underground, Talking Heads -- 솔직히 말해서 클래식 음악도 듣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그것들로부터도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다 적기에는 너무 많다. 그들은 우리 머릿속의 소리들 중 일부일 뿐이다.

    Talking Heads 또한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었다.

    Ian Crause> 우리들 각각의 가정은 진짜 난장판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긴 하지만 나는 당시 내가 우리 셋 중 가장 안정되고 중산층에 가까운 가정에서 살고 있다고 여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순진하기 그지없었던 것이, 30대에 들어서고 나서 차분하게 뒤를 돌아보며 어렸던 시절을 생각해 보니 "지져스 크라이스트, 내가 저렇게 살았었다니 믿을 수가 없군"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는 학교에서 뚱뚱보에 이상한 놈이라고 여겨져 언제나 괴롭힘을 당했으며 -- 기본적으로 나는 지능이 있었기 때문에 멍청한 놈들과 덜떨어지는 놈들과 평범한 놈들 (가장 위험한 종류의 사람들) 하고 같이 지내게 되었다 -- 지난 인터뷰들을 돌아보니 그 시절의 나는 그런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것에 힘들어했고 도움이 필요했었던 것 같다.
     20대가 끝날 무렵, 나는 마침내 모든 것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면서 스스로에 대한 정신분석을 하기 시작했지만, DI 활동을 하던 때는 그런 분석을 하기 전이었다. 나는 정말로 비참했으며, 내 생각에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랬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내게 재능이 없다며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고, 그 중에는 내 가족들도 있었으며, 따라서 밴드를 하고 있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죄책감은 엄청났으며, 우리가 실제로 실패하기 시작하면서 그 죄책감은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해 주고 싶은 조언은 괴롭히는 놈들을 당장 무시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동안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시간이 지난 이후에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써 오던 것들이 4행 연구(聯句)와 2행 연구 -- 가장 기본적이고 서투른 운문 -- 였으며 그것들을 태풍 속의 안전 밧줄처럼 잡고 있었다는, 특별히 가사를 둘러싼 소리들이 점점 미쳐가는 와중에, 가사를 더욱 더 꼭 붙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주제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는 내 자신을 나만의 세계에 세우고는, 무엇이든지 말이 되도록 만들려고 했었다. 어떤 뼈대도 없이. 그저 직관만으로.

    "All the joy in my life had rotted away,
     I saw a vision in blue and my blues flew away.
     And just for a second I truly believed,
     Though I don't know what in.
     We tried to talk to each other,
     But the words that came out of our mouths.
     Were carried away on the wind,
     Which turned them inside out.
     In desperation I tried
     To communicate with my eyes
     When all you've seen is people's pain,
     It's hard to feign surprise." [From "Second Language"]



    http://youtu.be/MzzYOqwl-v4

    그리고 우리는 미소지었다. Disco Inferno가 세상에 가져온 아름다움은 내게 씁쓸하고 찝찔한 뒷맛을 남겨 주었다. 그것은 팝 저술가로써 처음으로 스스로의 무기력함을 완전히 파악하고, 팝 음악에 대해 우리가 만들 수 있는 환상이 저기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넓은 문화적인 힘과는 절대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나는 WH Smiths (출판사) 에서 일을 시작했고, 일을 위해 음악 잡지들을 읽기 시작했으며, [Melody Maker]지의 커버에 Public Enemy가 실린 것을 알아챘다. 몇 년 후, 나는 이제는 흑인 음악을 커버에서 없애고 DI를 새로이 커버에 올렸을만한, 1988년의 두려움을 몰랐던 파이오니어 정신이 담겨 있었던 잡지에서, Audit Bureau of Circulations에 집착하고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며 우리에게 Zoe Ball에 대한 3페이지 기사와 좆같은 개소리들과 테마파크와 스티커들과 섹스 이슈들과 절망에 대한 기사를 쓰라고 종용하는 자들로 대체되어 버린 [Melody Maker]지를 위한 기사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가장 먼저 쓴 기사들 중 하나는 놀라운 싱글 [Second Language]를 '이번주의 싱글'로 선정해서 리뷰하는 글이었다. 나는 물론 DI가 다음주에 TOTP 무대에 나올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몇몇 존재하지도 않는 DI 리스너들, DI가 얼마나 위대한지 이해하는 사람들을 찾기가 너무 힘들다는 사실 때문에 낙담하기 시작했고, 이는 당연히, David Stubbs, Talyor Parkes, Lucy Cage, Jon Selzer, Simon Price 및 DI에 대한 글을 썼던 모든 팬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리뷰어들에 대해 유감이 든다. 완전히 "마이너스"의 손 같군.

    Ian Crause> 안타깝지만, 너 이자식, 나는 그 리뷰들 때문에 성공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고 안심하게 되었었다. 우리 매니저가 DI가 좋은 리뷰들을 벽지로 써도 될 정도로 많이 받았지만 어쨌든 청구서들을 전부 결제하기는 해야한다는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밴드가 끝나기 몇 년 전부터 그 리뷰들, 특히 [Melody Maker]지의 리뷰들이 사실은 음반 판매에 미치는 영향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고, 사실 밴드로써 생존하려면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음반 판매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가 멋진 소리의 음악을 만들고 우리 나름의 가치를 담은 음반을 만들면 생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누가 그걸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법칙 같은 것은 없지 않는가? 아니었다면 Glenn Medeiros는 여전히 Wembley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정말로, 완전히 소진되어 버렸고, Paul Wilmott와 나 사이의 일은 내 안에서 무언가를 완전히 끝장내버렸다. 독서만이 내게 있어서 성역과도 같은, 미래로 확장하며 나아갈 수 있는 수단이었으며, 따라서 2000년이 되었을 무렵 나는 음악에 대해서는 완전히 발을 끊게 되었다. 누군가가 우리가 해 왔던 것들을 듣고는 나를 다시금 불러낸다면, 뭐, 한 번 쯤은 쳐다볼 수 있을까? 아니라면 나를 평화 속에 내버려두라. 나는 몇 년 동안 책 속에 파묻혀 지냈다. 그 시간들은 내가 살면서 해 온 것들 중 또 다른 최고의 것이었으며 죽을 때에도 후회하지 않을 만한 시간이었다.

    Paul Wilmott> 우리는 6년동안 개발하고, 발전하고, 창조하기 위해 죽어라고 노력했고 보상은 매우 적었다. Ian Crause는 창조적인 측면에서 지쳐버렸고 기력이 완전히 빠져있었다. 우리는 현재 상황을 검토할 시간과 다음 앨범 작업을 위한 12개월 가량의 시간이 필요했다. Ian Crause는 더 이상 나와 같은 방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으며 자신이 가진 고민들의 원인이 나라고 스스로 믿었다. 그는 자기 혼자서만 새 앨범을 작곡하고 녹음한 다음에 나와 Rob Whatley 둘이서만 앨범을 만드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상하고 말이 안 되며 순전히 그에게 탈출구를 만들어 주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우리는 음악 언론, 당시에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던 음악 언론에 완전히 질려 있었다.
     [NME]는 우리를 항상 완벽하게 무시했었다. [Melody Maker]에는 우리에 대한 좋은 글이 몇 편 실렸었지만, 단 한 번도 장편 기사의 주제가 될 수는 없었고 어떤 원동력도 얻을 수 없었다. 몇몇 지역방송 라디오 DJ들을 제외하고는 라디오에서도 완전히 무시당했었다. 몇 번 보조나 오프닝 역할로 다른 밴드들의 투어에 참여해 보려고도 했었지만 받아주는 밴드는 없었다 -- 마침내 Steve Severin의 부탁으로 Siouxsie and the Banshees와 투어를 돌게 되기 전까지는. 더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사실은 우리가 해체하고 나서야 조금씩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마지막 공연이 우리가 해 왔던 공연들 중 가장 큰 공연이었고, 그 공연은 The Purcell Room에서 헤드라이너로써 참여했던 공연이었으며 Radio 3의 Mixing It 세션도 했었다. 나는 최근에 제3자를 통해서 Ian Crause와 접촉해 새로운 음반 가능성에 대해 토론해 보려고 했었다. 내가 들은 대답은 그는 나와의 대화에는 어떤 흥미도 없다는 것이었다. Rob Whatley는 연락두절로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 것 같게만 느껴질 정도였다. DI의 재결성은 완전히 틀려먹은 일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100만달러짜리 Coachella 공연 제안을 그냥 가지고 있기만 하는 것이다. 젠장.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영국의 음악사에서 그렇게나 중요한 밴드였건만, DI는 미국에서 한동안 수수께끼의 밴드로 여겨져 왔었다. [Melody Maker]와 [Metal Hammer]에서 일했던 내 오랜 친구 Jon Selzer는 워싱턴DC에서 오렌지색 DI 티셔츠를 입고 걸어다니다 5분마다 한번씩 누군가가 그를 잡아 세우고는 자신이 얼마나 DI의 팬인지, DI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를 주장했었다는 독특한 경험을 말해주었다. 최근, Deerhunter, Animal Collective, MGMT 같은 밴드들이 DI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고, 특별히 MGMT의 Ben Goldwasser는 DI에 대해 "여전히 미래의 음악처럼 들린다"라고 평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짜증나는 부분은, DI의 음악은 반복할 수 없는 종류의 음악이라는 것, 정확히 그 당시의 사람, 환경, 기술이 아니었다면 다시는 올 수 없을 음악이라는 것이다. DI의 팬으로써 나는 그들이 존재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정도이다. 바로 그 시간대에, 희미한 희망이나마 제시해 주었던, 참석했었다는 사실마저 자랑스러운 공연들에 대해서. 내가 쫓아다녔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워지는 예술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아무리 흩어지고 찢어지더라도, 그 개소리와 애국자 타령으로 가득 차 아무데서나 울리던 '쿨 브리타니아' 따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진정한 영국의 반체제 팝을 제공했던 커뮤니티에 대해서. 이봐들, 솔직히 말해서 말이지. 낙원으로 향해 달려갈 수 있을, 재결성이라는 이름의 열차를 왜 안 타는 거야?

    Ian Crause> 다시 시작해 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미래를 누가 정확히 알겠느냐만은, 나는 세상에 존재했었던 모든 것을 재활용해서 미스터리를 전부 샅샅이 밝혀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DI는 끝난 일이다. 나는 내가 지난 몇 년 간 해 오던 새로운 음악들에 더 큰 관심이 있다. DI 시절처럼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에 대해 만드는 음악들이다. 신만이 아실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음악을 만들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는. 무언가 거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위치에 서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 아주 좋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진지한 관심을 표현하지 않았던 앨범들만을 발매했던 경험 덕분에, 사람들의 관심에 신경을 거의 안 쓰고 있기까지 하다.

    지금 다시 [5 EPs]를 들어보면, 기분이 어떤가?

    Paul Wilmott> 그 음악을 다시 들어보면 기분이 이상하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거리감마저 느껴 질 정도이다. 너무 깊이 관여되어 있었던 프로젝트였기에 객관적인 시선으로 듣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 음악들이 좋은지, 나쁜지, 그저 그런지 판단을 할 수가 없다. 'Summer's Last Sound'를 비롯한 몇몇 곡들은 처음 구상했던 아이디어의 순수성이 잘 나타나 있는 반면, 나머지는 상대적으로 덜 그렇다. 많은 곡들이 좀 느슨한 느낌이 있는데, 별로 마음에 들진 않지만 당시 우리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 당시 레코딩 장비가 좀 더 완벽하기만 했다면 곡들의 인상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직 실현되기 전의 잠재력이 많이 담겨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앞으로 달려나가야만 한다는 압박과 강박관념이 우리를 너무 빠른 속도로 달리게 만들었고, 우리가 만들어 낸 음향의 영역을 충분히 즐길 수 없게 만들었었다. 특별히 Ian에게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고. Ian은 밴드에 큰 압박을 부여했고 스스로에게도 작곡에 있어 큰 부담감을 짊어지고 있었다. 만약 당시의 우리가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고 우리에게 좀 더 자유를 부여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우리의 음악은 좀 더 균형잡힌 음악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만들었던 거의 모든 곡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앨범으로 발매되었었다. 거의 작곡을 하자마자 바로 녹음을 시작했었고,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고 급하게 작업했었다. [D.I. Go Pop] 앨범이 그나마 스튜디오에서 좀 시간을 보내며 여러 곡들을 돌아볼 수 있었던 앨범이었다. 그 무렵 Ian의 이야기들을 듣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Ian의 이야기들은, 그 자신의 행동이 아무리 좋게 봐 줘야 너무 심하게 변덕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동에는 관심 없이 끔찍하게 기억된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DI음악을 듣다 보면 억울한 감성이 미친듯이 솟아 올라 화가 나곤 한다. 우리는 계속 활동을 할 수도 있었지만 Ian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단 한번도 이 문제에 대해 서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Ian은 자신의 소통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에 엄청나게 화가 나 있었는데. 나는 Ian과 관계를 끊은 적이 없다 - Ian이 나와의 관계를 끊은 것이며, 나랑 어떤 논의도 하지 않고 싶어했다.

    Ian Crause> 솔직히 말하자면, 그 당시보다 지금 이 음악들을 듣는 것이 그나마 덜 힘든 편이다. 당시의 나는 DI에 너무 깊이 들어가 있었으며, 어렸고, 가사에는 개인적인 감정을 많이 담았기에 결과물이 그다지 잘 쓴 곡이 아닐 때도 많았다. 그런 환경에 둘러싸여 있을 때에는 자신이 만든 곡을 직접 듣는 것이 좀 당황스러운 경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40을 바라보고 있고,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강렬한 기억들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만약 내가 이 밴드를 안 했었더라면, 그리고 살다가 DI의 음악을 접하게 되었더라면, 이 음악에 깜짝 놀라서 대다수의 록 음악이 얼마나 따분하고 타협적인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최소한, 아무리 못해도 깜짝 놀라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니, Peter Cook의 말을 인용하자면, 무엇보다도 자랑스럽다. 공허하고 멍청하며 허영심 가득한 자랑이지만. 내가 가장 후회하는 점은 이 밴드를 가지고 전업 음악가로서의 삶을 꾸려가지 못한 채 저임금 노동을 하며, 좋을 때에는 Cockney 사투리를 하면서 책을 읽을 줄 아는 원숭이 취급을 받았고 나쁠 때에는 야만인 취급을 받았던, 그런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이 런던의 도시에는 아직도 계급이 명백히 나누어져 있다. 그러니, DI의 음악에 대해 생각하자면, 과거를 돌이켜 보았을 때 몇 안 되는 '가치있었던 일'이라고 느껴진다. 물론 내 가족과 아이들도 또 다른 '가치있었던 일'이다. 이상하게도, 지난 15년간 일하면서 변호사들을 위해 복사해 주었던 그 어떤 서류에서도 같은 자긍심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DI의 멤버였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나 또한 그렇다. 16번의 여름이 지나왔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2015/05/23 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