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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eutsch Amerikanische Freundschaft
    [...]/[D.A.F.] 2023. 3. 27. 13:05




    https://youtu.be/I6FoXcV8WzI
    "Der Mussol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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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thequietus.com/articles/23350-daf-interview-strange-world


    Total Body Control: D.A.F.의... 기이한 세계
    David Stubbs
    2017년 10월 9일
    [The Quietus]


    Kraftwerk, Neu!, Der Plan 등등 수많은 밴드들이 탄생하고 활동하던 시기, D.A.F. - Deutsch Amerikanische Freundschaft - 는 독일의 작은 도시 뒤셀도르프에서 탄생하였고, 전 세계의 전자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1970년대 크라우트록 선구자들의 정신을 계승한 창조적인 예술가들이었으나, 근본적으로 완전히 별개의 씬이었던 펑크 음악에서도 여러 가치들을 수용한 음악을 선보였던 음악가들이기도 했다 - D.A.F.는 시작부터 정치적인 주제의 가사들을 대놓고 사용하여 정면으로 부딫혔던 것이다. 단적인 예시로, 이들의 곡 "Kebabträume"(1980년)는 분단된 도시였던 베를린의 상황과 터키 이민자 "Gastarbeiter"('손님 노동자') 문제를 신랄하게 다루었던 곡이었다.

    D.A.F.는 음악가 그리고 이들이 선보인 음악 장르에서 고정관념으로 여겨졌던 '물리적 형태'와 '육체'의 이미지들을 활용한 밴드였으나, 동시에 그 이미지들을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이용해 특별한 개성을 보유했던 밴드이기도 했다. 이들은 독일에서 터부시되었던 주제들을 일부러 다루었다 - '제3제국'에 관련된 주제들은 물론, 섹스, 성 지향성, 규율, 자유의지에 대한 주제들까지도.

    이들은 뒤셀도르프의 Ratinger Hof에서 Gabi Delgado-López(스타일로폰)와 Robert Görl(드럼)의 2인조 펑크 밴드로서 활동을 시작했었다. D.A.F.는 곧 전통적인 밴드 라인업 - 기타와 색소폰이 포함된 라인업으로 확장되었으며 여기에는 Chrislo Haas(나중에 Liaisons Dangereuses를 결성한다)와 Kurt Dalkhe(나중에 Der Plan에 합류한다)도 참여했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에는 처음의 2인조 구성으로 되돌아갔으며, 바로 그 시절에 밴드의 경력 상 가장 훌륭한 음악들을 만들게 된다. 이 모든 여정은 Gröneland 레이블의 5CD 박스셋 [Das Ist D.A.F.]에 담겨 발매 될 예정이며, 여기에 맞추어 디럭스 버전 LP들도 함께 발매 될 예정이다.


    D.A.F.는 가장 큰 명성을 얻게 되었을 때 해체하였으며, 음악계에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유산을 남겼다. 하지만 D.A.F.에 관련된 모든 것들은 일종의 '모순'을 가지고 있다: 지적인 것들과 피상적인 것들, 쾌락과 고통, 통제와 과잉, 변태적 욕구와 진지한 감각적 혼합. 이들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저 두 사람뿐인, 흔해빠진 밴드로서도 남아 있었다.

    나는 하노버의 한 호텔에서, 이제 막 페스티벌 공연을 훌륭히 끝내 수십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새로운 관객들에게 여전히 D.A.F.의 음악이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 참이었던 Gabi 및 Robert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펑크에서 일렉트로니카까지, 뒤셀도르프에서 런던까지, D.A.F.의 세계는 기이하고, 독특하며, 그들만이 선보일 수 있는 세계였다. 정말로.


    '펑크'로서의 신디사이저

    [Die Kleinen Und Die Bösen] 시기 잠시 5인조 밴드로 늘어났던 적은 있었지만, D.A.F.는 언제나 스스로를 2인조 밴드로 생각하고 있었다.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Gabi는 말했다. "사실 우리는 시작부터 Robert와 나 단 둘이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초기 시절의 우리는 신디사이저를 구입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 말도 안 되게 비쌌었으니까. 그래서 신디사이저 역할을 해 줄 다른 음악가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밴드의 핵심은 언제나 Robert와 나, 둘이었다. 그리고 신디사이저 가격이 내려가서 이제는 구매해 볼 만하다 싶었을 때, 우리는 '좋아, 이제 밴드 구성을 줄여서 핵심만 남길 수 있겠군, 원래 목표했던 대로 말이야'라고 생각했다."

    "Korg 신디사이저는 거의 혁명적인 물건이었다. 거의 국민 신디사이저 정도의 취급이었다." 하지만, 펑크에서 출발해 자연스럽게 음향적 축소와 삭감을 거쳐 전자음악에 도달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Suicide는 1978년 The Clash의 오프닝 무대에 섰을 때 대단한 비난과 조롱을 당했었다. 펑크의 핵심에는 '러다이트 운동'스러운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D.A.F. 또한 독일 펑크 음악계로부터 사실상 퇴출을 당했다 - 이들의 곡 "Gewalt"(폭력)같은 곡을 보면 펑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강렬한 물질-육체성'을 다루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D.A.F.는 초창기 일렉트로-팝의 특징이었던 김 빠지는, 맥없는 느낌을 탈피하기로 마음먹었다.

    Gabi는 D.A.F.가 펑크의 윤리를 따랐던 밴드라고 인정했다. "펑크의 철학은, 적어도 우리의 눈에는 이렇게 보였다: '너가 원하는 것을 해라. 스튜디오 따위는 필요 없다. 너의 팬 잡지를 만들고, 너의 패션을 만들고, 너의 레이블을 만들어라. 스스로, 직접 해라.'"


    Conny Plank

    1960년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및 여러 음악가들의 음향 엔지니어로서 경력을 시작했던 Conny Plank는 1970년대 여러 크라우트록 밴드들의 원대한 목표, '서독만의 음악을 만들겠다'는 목표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Kraftwerk, Guru Guru, Cluster, Neu!, Harmonia 등 유수의 크라우트록 밴드들과 함께 작업하였으며, 밴드들로 하여금 당대 최신 기술을 최대한으로 활용해볼 수 있도록 도왔다. 그의 경험과 창의력은 크라우트록 밴드들의 미래주의적 목표, '무엇이 진정으로 새로운 음악(neue musik)인가'의 실질적 구현에 필수적이었다.

    Conny Plank D.A.F.에게서도 비슷한 정신을 보았다. 그는 Mute에서의 첫 작품 [Die Kleinen Und Die Bösen]에서부터 D.A.F.와의 작업을 시작하였다. Plank의 작업 방식은 Mute 레이블 사장 Daniel Miller를 제법 열받게 만들었는데, Miller가 생각한 예산은 앨범 제작을 몇 일 내로 끝낼 정도 수준이었지만 막상 Plank는 첫 2~3일 정도를 그냥 밴드 멤버들과 이야기하고, 같이 요리하고 식사하는 것 따위에 소비해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Plank에게 이런 작업은 게으른 변명 따위가 아닌 필수적인 준비 과정이었다. Plank는 함께 작업하려는 음악가들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완전히 이해한 다음에야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식사, 반주, 대화가 먼저였다. 일은 마지막이었고.

    Gabi는 말했다. "Conny는 물론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사람이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줄 수 있는 전문가. 그는 우리의 가사에는 어떤 관여도 하지 않았고, 오로지 음향적인 도움만을 주었다. 그 무렵의 신디사이저는 출력이 부족했고, Conny는 신디사이저를 앰프, 예를 들자면 록 음악용 Marshall 앰프 따위에 연결했다. Conny는 마이크에 대해서도 높은 기술적 이해를 갖고 있었다 - 그는 마이크를 맨 앞에 두었다. 그렇게 생생한 앰프 음향에 아주 적은 수준의 명료한 신디사이저 음향이 더해졌고, 이 것이 D.A.F.만의 음향이 되었다. 서로 다른 느낌을 갖는 음향들의 혼합. Conny의 아이디어였다. 단순하지만, 정말로 훌륭했다."

    Robert는 말했다. "Conny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하고만 작업을 했다. 그가 작업 제의를 거절한 사람들 중에는 정말 유명한 사람들도 몇 있었다. 물론 Bono도 있었고, 심지어 David Bowie의 제안도 거절했었다. 음악가의 어떤 측면이 맞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얼마나 유명하던지간에 상관 없이 바로 거절하는 사람이었다."

    Conny Plank D.A.F.의 명반들, Virgin에서의 3연작에도 전부 참여하였다. D.A.F.의 훌륭한, 시간이 지나도 퇴색하지 않을 음악적 성취의 일부는 Plank가 만들어 낸 명료하면서도 훌륭한 검은 빛깔의 크롬 도금같은 음향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lectronic Body Music

    "Absolute Körperkontrolle"(육체에 대한 완전한 통제)같은 곡에서도 볼 수 있듯이, D.A.F.는 그들의 음악에서 '육체'에 대해 의도적으로 자주 언급하는 밴드였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했듯이, D.A.F.에게는 어떤 모순점이 있었다 - 공연에서의 Gabi는 너드 흉내를 내는 것 마냥 여러가지 방종을 떨어댔고 Robert는 퍼커션 세트 뒤에 앉아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앨범 커버에서의 그들은 짧게 자른 머리에 민소매 가죽 재킷을 입거나 아니면 아예 벗은 채로 대단한 포즈를 취하곤 했었다. 이들은 당시 언더그라운드에서 자라나고 있던 게이 클럽 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 씬에 넘쳐나는 힘을 일부라도 끌어내어 활용하고자 했다. 이들은 또한 나치즘과 파시즘에 감도는 기이한, 동성애적인 욕망의 아우라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었다. 제복들, 포즈들, 거만함, 나르시시즘, 육체적인 완벽함에 대한 집착. D.A.F.는 그 모든 것들을 자유롭게 가지고 놀았다. 초창기 D.A.F. 공연에는 때때로 이들의 아이러니와 풍자를 이해하지 못한 진짜 네오나치들이 찾아오기도 했었다. 한 번은, Gabi가 그 네오나치들에게 직접 다가가 한명에게 키스함으로써 그들의 네오나치즘을 무력화시키기도 했었다.

    단순히 앨범 아트워크 뿐만은 아니었다 - D.A.F.는 온갖 것들이 격렬히 충돌하는 격전지로서의 '육체'에 대한 팽팽한 긴장감, 최소한도의 절제, 규율과 징벌, 성적 감각을 본능적인 질감의 음악으로서 달성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Suicide에 대해 알고 있었고, 우리와 상당한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Gabi는 말했다. "하지만 Suicide는 드럼 머신을 사용하고 있었다. 반면 우리는 전자음악과 생생한, 살아있는 실제 드럼의 질감을 혼합하는 것을 좋아했다."

    "컴퓨터 드럼 소리를 사용하면 굉장히 얇은 질감의 소리만을 얻을 수 있다." Robert는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근육'을 원했다. 우리는 전자음향을 활용해 '펑크'를 했다 - 에너지로 가득한, '육체'에 집중하는 음악을."


    독일식 전통

    "나는 아직까지도 '막 태어난' 운동이었던 펑크가 어째서 '아버지들'의 악기였던 기타를 주로 사용했었는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Gabi는 말했다. "우리는 전통이라고는 하나도 따르지 않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 특히 잉글랜드-아메리카 록 전통은 무조건 피하고 싶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D.A.F.에게는 크라우트록 세대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Kraftwerk, Tangerine Dream, Neu! 등등 크라우트록의 선구자들은 하나같이 록 음악의 새로운 형태, 새로운 모양, 새로운 전략을 창조하려 했으며, 블루스 기반의 버스-코러스 형식이나 보컬 중심주의 등의 '전통'을 의식적으로 피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자 했었다.

    "Can으로부터 음악적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들의 음악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 당연히 Emerson, Lake & Palmer같은 밴드들보다는 훨씬 좋은 밴드라고 생각했다!" Gabi는 말했다. "Neu!도 빼놓을 수 없고. 하지만 음악적으로 그들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전통을 배제하는 새로운 음악을 한다는 것은 크라우트록의 전통도 피하겠다는 의미였다, Kraftwerk Tangerine Dream까지도 말이다."

    D.A.F.는 서독 음악계의 선구자들의 사상과 결을 같이 하였으나, 펑크라는 이단의 사상도 흡수하여 보다 더 강렬한, 보다 더 직접적인, 보다 더 노골적인 노선을 걸었다 - 크라우트록 밴드들의 푸르스름하면서도 몽환적인, 드넓게 평화로우면서도 암시적이고 악기 중심적인 음악과는 다른 노선을. 또한 D.A.F.는 독일어로 노래한다는 선택지를 택하였으며, 독일어라는 언어 자체에 깃들어 있는 거친 느낌을 자유자재로 다루었고, 아직까지 그 언어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생각하며 모종의 불안감을 느꼈던 1980년대 관중들을 상대로 온갖 여흥을 부리며 즐겨댔었다.

    "청자들은 우리 가사가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보컬의 거친 느낌은 정말로 좋아했다." Robert는 말했다. "무대에 오른 다음에는 영어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냥 'Guten Abend Mädchen'(좋은 저녁이군요, 여성분들)이라고 말하고 공연을 시작했다." Gabi가 더했다. "우리는 영어가 독식하고 있는 팝 음악 업계의 현 상황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싶었고 이 생각을 음악으로도 표현하고 싶었다 - 따라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것, 우리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가장 잘,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

    이 생각이 맞다 - 예를 들어 "Verschwende Deine Jugend"(너의 젊음을 낭비해라) 같은 곡은 영어로 불렀다면 완전 별로였을 것이다.

    "나는 스페인 혈통이고, 독일어가 가지고 있는 다음절 성향을 정말 좋아한다." Gabi는 말했다. "그리고 많은 독일어 단어들이 너무 많은 자음과 긴 음절을 가지고 있어 리듬에 맞추기가 상당히 어려운 편이다. 거기에, 독일어에서 가장 짧은 표현들은 거의 대부분이 명령조의 단어들이다! 그래서 D.A.F. 가사에 명령조의 표현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이다. '이걸 해라, 저걸 해라'같은 말이 대부분이다."


    D.A.F.와 런던

    다른 많은 음악가들과는 다르게, D.A.F.는 밴드의 활동에 있어 음악 언론이 담당하는 역할에 대해 무시하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들은 펑크 이후 포스트펑크 시대의 런던이 앞으로 최소한 10년간은 '음악의 중심'이 될 장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계 음악계에 있어 신경 중추의 역할을 담당할, 새로운 음악의 '머리'가 될 곳. [NME]의 저자들이었던 Paul Morley Chris Bohn 같은 사람들은 D.A.F.이 가진 '강철'과 '아이러니'를 바로 이해했고 높게 평가했다. Morley의 경우는 너무나도 좋게 평가하고 열변을 토하며 D.A.F.의 "거의 정치적인 운동에 준하는, 쾌락의 추구"를 찬양해버린 바람에 퇴고 과정에서 편집장에게 질책을 당하기까지 했었다. 런던에는 D.A.F.를 이해하고 이들의 음악을 널리 퍼뜨릴 만한 평론 집단이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 독일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집단이. 평범한, 둔감한 사람들이 흔히 "피상적이다"라고 가볍게 넘기던 새로운 팝 음악이 사실은 굉장히 지적인 기표들의 집합체임을 일찍이 이해하고 있던, 새로운 세대의 록 음악 비평가들에게는, D.A.F.는 굉장히 매력적인 밴드였던 것이다. D.A.F.는 그들의 기대에 정확하게 들어맞고 있었다.

    "우리는 잉글랜드 청중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정말로." Robert는 말했다. "런던에서 유명세를 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Mute 레이블, 나중에는 Virgin 레이블을 통해서."

    "서독에는 D.A.F. 음악 같은 것을 공연할 수 있는 공연장이 단 3개밖에 없었다 - 그리고 그 어떤 레이블도 D.A.F.같은 밴드에게는 좁쌀만큼의 관심조차 아예 없었다." Gabi는 말했다. "런던이야말로 새로운 것들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였다. 1979, 1980년에 '세상의 중심'이 어디였나고 묻는다면, 나는 무조건 런던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면 즉시 할리우드로 향해야 할 것이다, 베를린에서 쓸데없이 시간낭비하지 말고. 패션에 관심이 있다면 하노버에서 뭘 하느니 곧바로 밀라노에 가는 것이 낫다. 이 무렵 영국에서는 주간으로 발행되는 큰 규모의 음악 잡지가 3개는 있었다 - 독일에는 단 1개, [Sounds]만이 있었으며 그나마도 월간 발행이었다. 음악은 독일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에 영국에는 [The Face]와 [i-D]도 있었다."

    "Chris Bohn같은 사람들은 우리가 잉글랜드-아메리카의 전형에 따르지 않고 맞서 싸우는 것을 굉장히 좋게 봤다. Electric Ballroom에서 Wire의 오프닝 무대에 선 적도 있었다 - 그 때에는 Wire가 엄청난 인기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런 공연까지 하고 나서야 독일인들이 '와, 쟤네들 런던에서 엄청 잘 나가는데, 가서 인터뷰 좀 해야겠어'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 전까지 우리는 독일에서 거의 안 알려진 밴드였는데. 펑크 씬 사람들만이 겨우 알 정도였다. 펑크 씬을 제외한 독일 매체들은 우리를 안 좋아했다 - 그런데 영국에서 성공을 거두자 갑자기 우리를 엄청나게 자랑스러워하더군, '이거 봐 우리 독일 밴드가 런던에서 잘 나간다고!'라면서. 보리스 베커가 윔블던에서 우승했을 때 처럼 말이다, 아는가?"


    3부작 - [Alles Ist Gut], [Gold Und Liebe], [Für Immer]

    1981 ~ 1982년의 기간 동안 D.A.F.는 Virgin에서 3장의 앨범을 발매한다 - 그리고 이 3부작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빛나는 명반들이며 이들의 의도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앨범들로 남아 있다. 정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Alles Ist Gut], [Gold Und Liebe], [Für Immer]는 D.A.F. 특유의 독특한 '육체'의 느낌, 날것의 느낌과 정제된 느낌 둘 다로 뒤덮여 있는 앨범들이다. 이 3부작은 다분히 성적인 뉘앙스를 가진 음악들을 담고 있다 - 이리저리 뒤틀리고 꼬인 전자음향 사이로 Gabi가 초조한, 급박한 목소리로 "Mein Herz Macht Bum"(심장이 쿵쿵거린다)이나 "Sex Under Wasser"(수중 섹스)의 가사를 내뱉는 것을 들어보면 그 의도를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으리라. "Goldenes Spielzeug"(황금 장난감)이나 "Der Räuber Und Der Prinz"(도둑과 왕자)같은 곡은 불길하면서도 잔혹동화같은 분위기를 내뿜으며, 그 속에서 의미심장하게 터부들 그리고 유년시절의 공포들에 대해 속삭이는 곡이다. 반면 "Ein Bisschen Krieg"(작은 전쟁)은 1982년 유로비전 콘테스트에서 서독 대표로 우승한 Nicole의 "A Little Peace"에 대한 D.A.F.의 대답으로 볼 수 있는 곡이다. D.A.F.의 변태성과 아이러니는 숨막히는 체조 묘기와도 같게 풀어지지만, 이는 Robert의 강렬한 퍼커션과 거대하면서도 검은 3차원의 신디사이저 리프, Gabi의 자유로운 '명령'들과 격렬한 목소리로 짜여진 비좁은 공간의 제약 속에서 진행되는 음악이기도 하다. "턴테이블에 LP를 올리고 몇 초만 지나면 D.A.F.의 음악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Robert는 말했다.

    그리고, 이들은 해체했다.

    "그냥 완벽한 그림을 완성했다는 기분이었다 - 여기에 뭘 더하겠는가?" Gabi는 말했다. 둘은 솔로로서 각자의 길을 걸었고 재결합을 하기도 했지만, 순수한 프로토-테크노 기념비인 3부작에는, 다시는 접근하지 않았다.


    신성모독과 기념비들

    "실제 역사와 코미디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Gabi는 말했다. "독일 역사에 파시즘이 있는 것은 분명하며, 나치의 '오페라', '선전도구'들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그 것들을 이용하고 싶었다, 명백히 독일스러운 것들이었으니까. 심지어 지금까지도 모로코에 가서 독일에서 왔다고 말하면 다들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아돌프 히틀러하고 프란츠 베켄바워." 1980년대에는 많은 미국인 관광객들이 독일에 여행을 와서 히틀러 기념비는 어디에 있는지 찾아다니곤 했었다. 할리우드 영화, TV 시리즈 등에는 독일 나치 클리셰들이 넘쳐났었고, 이 클리셰 캐릭터들은 아주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옷을 입으며, 행동했었다. 물론 실제 독일에는 그런 식으로 돌아다니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내 스페인 친구들이 나한테 독일어 좀 해 보라고 해서 내가 뭐라고 말을 해 보면 친구들이 그런다, "아니, 독일어가 뭐 그래, 아니잖아!" 친구들이 가진 '독일'의 이미지는 클리셰 그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그 클리셰를 이용하고자 했고, 그 클리셰에 어울리는 옷을 입었으며, 나치와 베니토 무솔리니의 육체적 표현들을 사용했다 - 하지만 동시에 교황이라던가 플라멩코 같은 이미지들도 함께 사용하려 했다. 여러가지 다양한 것들에서 조금씩 떼어 와서 뒤섞어 새로운 것을 만드는 건 언제나 좋은 방향이지 않는가."

    "물론 아이러니를 충분히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다." Robert는 급히 더했다. "아이러니. 또 다른 큰 영향은 러시아였다. 거대하고 위압적인 건축물, 프로파간다들."

    "우리는 터부시되는 것들을 사용하는데에 어떠한 거리낌도 없었다." Gabi는 말했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터부였다. 나는 1970년대 중반에 학창시절을 보냈었는데, 수업시간에 로마와 그리스와 온갖 역사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배웠지만 나치 시대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다들 '흠, 다들 잘 알겠지만, 정말 혹독한 일들이 일어났었고, 여기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고 싶진 않습니다'같은 태도로 돌변했다. '전쟁이라는 말은 하지 마'(역주: 'Don't mention the war', "The Germans" 에피소드의 대사, [폴티 타워즈])같은 거였다, 실제 생활에서 말이다!"

    "우리에게는 긍정적인 것이던지 부정적인 것이던지간에 '기념비'라면 뭐든지 그에 맞서 싸우고 싶었다. 우리 부모님은 파시스트 정권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스페인을 떠나 독일로 이민을 와야만 했던 사람들이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하나의 '기념비'였다, 물론 부정적인 느낌에서의 기념비이겠지만. 그러니 우리에게는 기념비를 무너뜨리고 박살내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Der Mussolini"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름만을 사용하지 않고 아돌프 히틀러에 교황, 예수 그리스도, '공산주의'까지 언급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교황은 아돌프 히틀러고, 예수는 이오시프 스탈린이다. "Der Mussolini"는 독일, 특히 바바리아 지방에서는 금지곡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단지 히틀러의 이름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히틀러의 이름을 예수와 같이 언급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둘을 같은 곡에서 말했다는 것이 '공격'이었던 것이다."


    "가장 잘 나갈때 해체했다!" 그리고 새로운 독일 음악(Neue Deutsche Welle)

    D.A.F.는 1982년 [Für Immer]를 만드는 도중 해체를 결심했다. 그들은 이제 막 독일의 새로운 음악들이 "Neue Deutsche Welle"(NDW, New German Wave)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할 때 밴드를 그만두었던 것이다. 펑크 이후에 등장했던 잉글랜드의 뉴웨이브가 그러했듯이, NDW 음악들 또한 변덕스럽고 통통 튀며 좀 더 팝 음암 지향적인 버전의 음악들이었고, 보다 더 어두운 야심과 신랄한 아이러니를 지닌 포스트펑크 밴드들 - Einstürzende Neubauten, Die Tödliche Doris, Der Plan, D.A.F.같은 밴드들과는 좀 다른 양상을 띄는 경향이었다. Der Plan같은 밴드들은 NDW의 등장에 맞추어 조금 다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지만, D.A.F.는 그런 방향전환을 혐오하는 쪽이었다.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일적으로도 우리는 지난 5년간의 D.A.F. 생활을 끝내고 다른 것을 해야만 했었다." Gabi는 말했다. "해체 결정의 또 다른 원인은 NDW라는 '새로운' 경향이 엄청나게 유행을 타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이었다. 정말 멍청하고 싸구려인 유행이었는데 사람들은 우리를 그런 유행에 포함시키고, 연결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멈춰야만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D.A.F.는 이제 끝이었다. 우리는 그 것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 결정이 D.A.F.의 역사에서 가장 현명했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해체 직후 곧바로 컬트적인 명성을 얻었다. D.A.F.의 철학이었다 - 'Macht was du wilt', 원하는 것을 해라. 뭘 하려는지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고."


    현대에까지 미치는 영향

    최근 힐데스하임의 M'Era Luna 페스티벌에서 진행했던 D.A.F. 공연을 보았더라면, 관객석의 앞줄만 힐끗 봐도 오늘날의 젊은 청자들에게도 이들의 음악이 먹히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보였을 것이다. 독일을 돌아다니며 둘러보았을 때 현재의 독일 청년들이 1970년대의 선구자들에게서 전해진 그들만의 독특한 음악적 유산에 대해 얼마나 모르고들 있는지, 다소 충격적일 정도이기까지 했다. 만약 크라우트록의 목표가 독일의 대중문화계를 잠식한 잉글랜드-아메리카 문화의 영향을 걷어내는 것이었다면, 지금 시점에서 그 목표는 사실상 실패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Bon Jovi The Red Hot Chili Peppers Amon Düül이나 Faust '따위'는 가볍게 압도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하지만 포스트펑크에까지 미쳤던 밴드들, 펑크의 잔해 속에서 '독일의 음악'을 자각하며 스스로 발전해나갔던 Der Plan Einstürzende Neubauten같은 밴드들은 크라우트록 밴드들보다는 좀 더 유명세를 길게 유지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게다가 최근 D.A.F.의 공연들이 보여주는 직접적은 매력은, 특별히 테크노 음악의 유행 이후의 맥락 속에서, 이들이 옛 청자들과 팬들 이상의 영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D.A.F.가 시작했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정말로 젊은 관객들이 우리 공연을 보러 오는 것에는 굉장한 의미가 있다." Gabi가 말했다. "정말로 재미있고 새로운 느낌이다. 관객들이 전부 우리와 같은 세대의 다소 늙은 사람들이었다면 공연이 이렇게까지 재미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D.A.F.는 공연의 관객들을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밴드다. 우리는 공연을 끝낼 때 언제나 이렇게 말해 왔다, 'Du bist D.A.F.'(당신들이 D.A.F.다.). 어째서인가 하면, 우리 모두가 D.A.F.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연자'와 '관객'의 개념 같은 건 믿지 않는다. 우리에게 D.A.F.란 우리 둘과 관객들 모두가 함께 기념하고 축하하는 무언가이다. 상호간의 대화에 가까운 것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에너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유산

    잘 알려진 이야기로, John Peel은 언젠가 D.A.F.를 '테크노의 대부'라고 평했었다. 하지만 실제 D.A.F.는 보다 더 큰 여러가지 무언가들의 대부일 것이다 - 80년대 중반의 인더스트리얼, EBM, 뉴 비트, 고스, 그 모든 것들은 D.A.F.의 검은 빛의 다채로운 마법으로부터 다양한 것들을 빌려 간 음악들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Kraftwerk Liaisons Dangereuses같은 밴드들과 함께, D.A.F.는 시카고 하우스 및 테크노의 선구자인 Derrick May같은 사람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유의 치밀함과 모호함으로 D.A.F.는 온갖 것들이 숨어 있는 선물상자와도 같은 음악을 우리에게 선사했던 밴드였다. 하지만, Nitzer Ebb 등 무수한 밴드들이 이들의 스타일을 오마주하여 수많은 음악을 양산했음에도 불구하고, D.A.F.는 자신들만의 개성을 유지해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 팝의 사각형 구멍에 꽂아넣은, 팔각형 모양의 말뚝.

    Derrick May와 디트로이트 테크노의 선구자들에 대하여 Gabi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멋진 일이다, 자랑스럽다. 시카고 하우스 선구자 Adonis 또한 D.A.F.의 팬이라는 걸 알고 있다."

    "1980년대 음악계 기자들이 우리에게 시대를 많이 앞서나간 밴드라고들 했었다." Robert는 말했다. "당신들 음악은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널리 인정받게 될 거라고. 그리고 지금, 그렇게 된 것이다."


    https://youtu.be/jDQPVXUegPs
    "Der Räuber Und Der Pri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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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abi Delgado-López / Robert Görl

    Rest in peace, Gabi Delgado-López (1958. 4. 18. ~ 2020. 3. 22.)

     

     

    2022/04/05 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