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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CCP FEDELI ALLA LINEA
    [...]/[CCCP Fedeli Alla Linea] 2023. 3. 27. 13:10

    CCCP Fedeli Alla Linea(이하 CCCP)는 80년대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펑크 밴드입니다... 이름에 들어가는 약어인 'CCCP'는 러시아 키릴 문자로 'SSSR'을 쓴 것인데, SSSR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즉 소련의 이니셜입니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많은 논란거리를 불러일으키고 다녔던 밴드입니다.

    이 분들은 영미권을 전혀 신경 안 쓰고 이탈리아 및 기타 유럽 위주의 활동만 벌였고, 그래서 영미권에는 알려진 정보가 그다지 많지는 않은데요, 그래도 Virgin 레이블과 계약했었던 밴드라 그런지 음반 자체는 구하기 쉬운 편입니다... EMI Italy를 통해서 음반을 계속 생산하는 것 같습니다.

    영미권을 신경쓰지 않고 자기 음악을 하려는 고집을 부려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이탈리아 멜로디가 묻어나오는 이들의 음악은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Punk Islam'같은 곡이나 첫 앨범 [Affinità-divergenze fra il compagno Togliatti e noi: Del conseguimento della maggiore età]가 유명한 편이긴 한데, 마지막 앨범 [Epica Etica Etnica Pathos]도 CCCP가 탐구해 온 여러가지 요소들이 펑크와 제대로 섞여 들어간 명반입니다. 'Aghia Sophia'나 'MACISTE contro TUTTI'는 CCCP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엄청난 곡입니다. 또한 이들의 공연은 단순한 록 공연을 넘어 행위예술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Annarella나 Danilo Fatur는 사실 음악보다는 의상과 무대를 담당한 멤버들이기도 했고, 유튜브 동영상 같은 걸 보면 기묘한 의상을 입고 이상한 무용을 하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원래 인터뷰 같은 건 잘 안하던 밴드라고 알고 있는데, 재작년에 무슨 행사를 하면서 기념으로 한 인터뷰가 올라와 있더군요. 

    CCCP Fedeli Alla Linea


    http://www.repubblica.it/spettacoli/musica/2014/05/04/news/giovanni_lindo_ferretti_coi_cccp-85044673/?refresh_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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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youtu.be/XArSVg3KOuk

    REGGIO EMILIA - "Giovanni,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겠어?"
    Giovanni Lindo Ferretti의 팔을 꼭 붙잡은 'Benemerita Soubrette'(Annarella Giudici)는 말했다. 아름다운 Annarella가 춤을 추고 있었다. 긴 머리는 우아하고 감각적인 몸의 율동에 맞추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그녀와 함께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그 드레스는, CCCP라는, 이탈리아인들의, 특히 80년대 이탈리아 청년 대부분의 음악, 사회, 패션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그 밴드의 공연을 위해 맞춤 제작된 수많은 옷들 중 하나였다.
    "저 옷은 말의 꼬리털로 만든 거였지." Annarella는 말했다.
    "운명의 표식." Giovanni는 그가 태어났었던 곳인, (해발 수천미터 고도의) Cerreto Alpi의 집에서 자신과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던 말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현재로 돌아오자: 우리는 지금 Reggio Emilia에 있으며, 'Spazio Gerra'의 한 방에서 비디오 상영을 보고 있고, 이 곳에서는 거의 CCCP를 위한 행사인 'Fotografia Europea'(European Photography)가 진행되는 중이며, 이 행사는 Annarella Giudici와 'People's Artist'로 알려진 Danilo Fatur(그 또한 CCCP의 멤버였었다)의 주최로 진행되고 있다. 이 행사에서 전시되고 있는 것들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것들, CCCP를 단순한 음악 밴드만이 아니게 해 주었던 것들, 이탈리아에선 볼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지금 나오는 저 비디오," Annarella가 말한다. 그녀가 가리킨 영상은 이 곳 Reggio Emilia에서 있었던 CCCP의 마지막 공연 영상이었다. 이 영상은 완전히 묻혀 있다가 우연히 발견되었으며, 이 행사에서 상영되었다. 지금 이 방 안에는 2개의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고, 우리는 여기에 개의치 않았다.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해서 우리는 카메라에 대해선 신경을 조금도 안 썼다. 영상 속 Annarella가 입은 드레스는 (Giovanni의 말에 따르자면) 의도적으로 "야만인" 스럽게 만들어 진 옷이었고, 그녀는 우아하게, 하지만 동시에 감각적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저 옷을 우리는 'Le qualità della danza'(Quality of dance) 라고 불렀었다." Giovanni는 회상한다. "그리고 우리는 '나를 위해서 춤을 춰 줘, 춤만을 추지 말고' 같은 말을 하고는 했었다." 그리고 다음 곡이 나오고 있었다. 젊은 Giovanni는 붉게 타오르는 펑크를 따라 "io sono l'Anarchia / ecco un altro Anticristo / ma eri solo carino / proprio carino / pigro di testa e ben vestito... (I'm Anarchy / here's another Antichrist / but you were just cute / pretty nice / lazy butt and well dressed ...)" 라는 노래를 불렀다. Annarella는 Nivea 크림 통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를 입고 다시 등장했다.


    http://youtu.be/RbI5CQ6X5rQ

    모든 것은 Massimo Zamboni와 Giovanni Lindo Ferretti이 베를린에서 만나게 된 일에서 비롯되었다.
    Giovanni와 Annarella와의 인터뷰 이후, Massimo와 진행한 또 다른 인터뷰에서, Massimo는 이렇게 말했다: "1981년이었다. 나는 [Frigidaire]지에서 기사 하나를 읽고는 베를린까지 히치하이킹을 해서라도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베를린에 도달하는데에는 5일이 걸렸는데, Cologne를 거쳐서 가게 되었던 그 때의 여행은 정말 미친 경험이었다. 베를린에 도착해 나는 다락방을 하나 구했고, 이탈리아 피자 가게의 점원으로 돈을 벌면서 살았다. 하루는 디스코텍에 갔는데, 런웨이에서 춤을 추는 게 나 혼자뿐이었다. 그 때 디스코텍에서 나오던 음악이 The Doors의 'Alabama Song'이었는데, 81년에 그 곡은 이미 끔찍할 정도로 유행에 뒤쳐진 곡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춤을 추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니 그는 Reggio에서 알게 되었던 내 친구였고, "내일은 Tunisia로 갈 거야"라는 말과 함께 헤어졌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한 손에 여행가방을 들고 있었고,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Giovanni Lindo Ferretti였다. 나는 마치 첫눈에 그에게 완전히 빠져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말했다. "내 집으로 가지. 더 이상 떠돌아다니지 말고."

    Giovanni / Annarella와의 인터뷰는 Annarella가 운영하고 있는 허브 가게에서 이루어졌으며, Annarella의 말과 함께 시작되었다: "나는 인터뷰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우리의 뒷편에서는 화물 트럭에서 천연 제품들이 배달되고 있었다. 거리에는 "April 25"라고 크게 쓰여진 광고판이 있었다. 비록, 레지스탕스의 희생을 증언하기에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이긴 했지만. "아마도 이 곳에서나 우리같은 이름을 가진 밴드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Giovanni가 말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젊은 사람들까지도, CCCP를 좋아하며 이들의 음반과 기념품을 구매한다. 또한, 최근에는 Giovanni와 Massimo도 각자의 밴드에서 CCCP의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바이닐 한정판과, Luigi Ghirri를 비롯한 사진작가들이 찍었지만 출판되지는 못했던 밴드의 멋진 사진들을 담은 책이 발매되려 한다.
    "이 책, 거의 3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우리는 최대한 설명을 안 하기로 하였다. 불필요한 말들을 구구절절이 적어두면 무언가 중요한 것이 깨질 것 같았다. 우리는 필요없는 것들을 최대한 많이 제거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Annarella가 기록 보관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이런 책은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나만 해도, 나 자신을 담은 기록조차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Giovanni가 말했다.


    http://youtu.be/zVxUalafFEw

    그렇다면 CCCP는 어떻게 만들어지게 된 것인가?
    "베를린에서의 만남 이후, Massimo와 나에게는 같이 밴드를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 드럼을 칠 줄 알았던 Annarella의 형제 Zeo와 함께 정말로 밴드를 만들었었다."
    "그 밴드는 CCCP는 아니었지. Mitropa(n)k라고 불렸던 것 같다. 그러다 Zeo가 군대에 가게 되었고, 우리는 자주 만나서 사진을 찍게 되었다: 가능한 한 모든 방식으로 우리를 표현하기 위해서." Annarrella가 끼어들었다.
    "맞다, 그러고 다녔던 것은 사실 굉장히 독창적인 경험이었다: 여기서의 아이디어들이 점점 구체화 되면서 단순한 밴드를 넘어선 무언가에 대한 계획으로 발전했고, 결국 CCCP가 되었다."
    "우리는 Edmondo Berselli를 만나러 로마도 갔었다. 우리는 우리들의 능력에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고, 서류가방에 사진을 꽉 채워서 가지고 갔었지만 한 번도 출판되지는 않았었지."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혹시 지금 녹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당연히 녹음 중이지, 지금 우리는 인터뷰를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너무 신경쓰지는 마, Annarrella..." Giovanni가 끼어들어 나를 도와주었다. 그리고는 더했다: "그 때 우리는 정말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그들이 당연히 관심을 보일 거라고 생각해서 그를 찾아갔었다. 결국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우리가 가진 사진들은 멋졌지만 한 번도 출판될 수 없었고, 지금 출판될 책에서나 처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Berselli가 뭐라고 말했었나?
    "우리는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질문을 받았었는데, 나는 대답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사진들에는 어떤 미학이, 나중에 CCCP의 일부가 될 미학이 깃들어 있었다."
    "우리는 Bologna로 춤추러 가고는 했었다. 내 머리는 뾰족하게 높이 서 있었고, Annarella는 폭탄을 달고 다니는 것 같았고, Zeo는 염색하고 있었다."
    "그래, 우리는 서로의 머리를 빗겨주고는 했었지, 정말 좋은 일이었다."
    "나는 언제나 기억하고 있다: 문을 지나, 우리를 바라보는 기계장치를, 뒷편에도, 3번째 벽에도, 줄지어 서서, 탕! 탕! 탕!"

    "아, 너는 이상한 존재였었지. 우리는 힘이 넘쳐났었고, 자신감으로 가득했지. 우리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었지." Annarella는 말했다.
    "하루는, Castelnuovo Monti의 한 술집에서, 내가 정신병원에서 일할 때 알고 있었던 미친 사람들 중 한명을 우연히 만나기도 했었다." Giovanni가 회고했다. "갑자기 내 눈 앞에는 화려한 색의 옷을 입은 상반신이 나타났고, 그것은 나를 껴안았다 (나는 손도 안 댔다): 'Giovanni도 이제 우리같은 사람이 되었군'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부모들이 뭐라고 하지는 않았었나?
    "나와 Annarella는 부모님들과 함께 살지는 않고 있었다. 하지만 Cerreto로, 내 고향으로,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돌아갔을 때, 별다른 것은 없었다. 내 부모님들은 안좋은 것들을 많이 봐 온 사람들이었다: 나치들, 파시스트들과 파르티잔들... 아마 차라리 아들이 옷이나 열심히 입고 다니는게 더 좋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우리에게 '정상적인' 일은 어떤 특정한 기준을 추구하는 게 아닌,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었다."
    "산에 사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잘 대접받았고, 진실한 채로, 평온하게 있을 수 있었다." Annarella가 말했다.


    http://youtu.be/v-JVYaSakKo

    '우리는 Reggio Emilia의 유일한 펑크였었다': "Capri 지방에는 펑크 밴드들이 좀 있는 편이었고 그 중에는 Tuwatt, 후에 그 지역 펑크 씬의 랜드마크가 될 오래된 학교 건물을 점거한 자들이 있었다. 그 곳에서 우리는 Danilo Fatur를, 나중에 CCCP의 'People's Artist'가 될 그를 만났다. 그는 'José Lopez Macho Frasquelo'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거기에는 바텐더도 있었고 스트리퍼도 있었다. 그는 우리를 어떤 방으로 초대했고, 그 곳에 우리가 앉을 수 있게 테이블 하나를 관객석 맨 앞줄에 마련해 주었다. 수없이 많은 다른 관객들은 뒷쪽의 어둡고 칙칙한, 비좁은 곳에 서 있어야 할 동안에. 우리를 앉히고, 우리에게 장미꽃을 준 다음, 그는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곧바로." Giovanni가 말했다.
    "그가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균형부터 먼저 잡아야만 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가능성은 단 하나였다: Danilo Fatur를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Annarella 뿐이었다. CCCP의 무대는 굉장히 어렵고 복잡했기에, 우리는 그를 최대한 가라앉히면서 모든 공연을 진행해야만 했었다."

    어째서인가?
    "어째서 Fatur가 미친 사람이라는 것인가: 하루는 우리가 공연 무대에 그가 만든 움직이는 조형물을 가지고 올라가게 되었다. 그 조형물은, 말하자면, 돌아가는 바퀴에 묶인 낫이었다. 나와 Massimo, 우리는 그 조형물을 바라보았고, 바퀴에 묶인 낫은 지금 당장이라도 떨어져서 우리의 목을 절단해버릴 것만 같았다. 다른 날에는 Fatur가 늑대를 잡기 위한 용으로 사용되곤 하는 진짜 덫을 들고와서는 무대에 전시해두었었다. 거기에 누가 손이라도 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하나도 모른다는 듯이.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어떤 허구의 것을 보러 오는 것이었지만, CCCP에 한해서는 그런 것이 잘 되지 않았다. 게다가 CCCP는 대중에게 협조적이지도 않았다: 하루는 로마의 Espero 공연장에서 굉장히 긴장되는 일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 관객들 중에는 좌익도 있었고 우익도 있었고,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좌익 쪽에 위치하는 밴드로 여겨지고는 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더해서 양측 모두 우리에게도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가 'Punk Islam'을 노래할 때 쯤, 나는 즉흥적으로 가사를 바꾸어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 왜냐면 관객들을 살펴보니 좌익 쪽이나 우익 쪽이나 좋은 가정에서 자라난 녀석들, 집에서 하인을 부리며 살아 온 것 같은 녀석들만 있는 것 같아서였다. 따라서 나는 '좋은 가정'과 새로운 노예제도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관객들은 정신이 나갔다. 그들은 공연장을 박살내 놓았고, 무대 뒷편의 드레싱 룸까지 쳐들어 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게 활력의 과잉(過剩)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비슷한 일이 Arezzo에서의 공연에서도 있었다: 우리는 이 공연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들은 Arezzo에서의 공연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래서 우린 저녁에 있을 공연을 위해 'Arezzo, 나는 너의 경멸을 위한 도구이다' 라는 표어를 만들었었다. 그들은 이게 농담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악기도 들지 않을 채로, 작은 의자 4개만을 가지고 무대 위로 올라갔고, 마침내 우리가 아무것도 안 부를 것임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우리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나와 Annarella는 군인용 헬멧에다가 라이터와 돈을 받기 시작했고, Annarella가 리포터에게 말했었다: '그래, 잘 하고 있어.'"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Fatur가 짐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그를 길들여야만 했다." Annarella가 말했다.
    "그리하여 나는 70년 전의 철모와 부츠, 코스튬을 입고 채찍을 손에 든 채로 이 짐승을 다양한 방법으로 조련해야만 했다."
    "우리는 단순한 밴드가 아니었다. 헐벗은 남자의 육체, 드레스를 입은 여인, Emilia의 멜로디와 섞인 모던 뮤직, 어떤 일이 있어도 (영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만, 아니면 러시아어나 다른 언어로만 불려지는 노래. 우리는 Amanda Lear와 함께 했을 때만, 'Tomorrow'를 위해, 영어로 노래를 불렀었다."
    CCCP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니체적인 밴드였으며 사실 CCCP가 직접 작성했었던 성명서에서 보여지는 펑크의 기본 컨셉이었다: "우리는 소비에트의 가능성으로 펑크 애호가들의 면전을 강타하며, '펑크의 가능성'이라는 팻말 아래 묻혀있었던 미이라들을 던져버린다. Emilia의 멜로디가 반드시 부드러워야만 할 필요가 없듯이, 펑크 또한 반드시 거칠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
    극단주의자들, '선(線)에 충실한(Faithful to the line; Fedeli alla linea)' 자들은, CCCP를 증오했다: 이들은 대안적인(alternative) 음악의 최전선으로 여겨지고는 했었다가, Amanda Lear와 작업을 같이 하게 되자, '상업적인' 음악으로 갈아타고 있는 거라는 비난을 들었다. 사실 Amanda Lear와의 작업은 Salvador Dali의 뮤즈였던 그녀와의 작업이라는 배경과, '모호함'에 대한 매혹에서 나온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http://youtu.be/pWGsWXXUVjY

    이들은 우상을 파괴하고 인습을 타파하는 존재들이었으며, 아직도 그러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라.
    "CCCP의 초창기 공연들 중 하나에서 우리는 지폐를 불태운 적도 있었다. 그게 불법이라는 걸 몰라서 했었던 일이었지."
    하지만 당신들, 당신들은 정말로 공산주의자인가?
    "우리가 그 쪽에서 나오기는 했다: 그 쪽에는 모순과 비웃음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동시에 좋은 것들도 아주 많았다. 우리는 베를린에서 Reggio Emilia로 돌아왔고, 우리의 이름을 CCCP라고 정했다. 왜냐면, 'CCCP(역주: 러시아 키릴문자로 썼을 때의 SSSR. 즉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약자)'가 이 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Palmiro Togliatti의 혁명적인 PCI(역주: Italian Communist Party,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정당)가 일종의 실험으로써 만들어지게 된 이후부터, 그리고 이 곳의 많은 중산층들이 PCI의 당원으로써 개혁을 원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하지만 "펑크-소비에트"라는 묘사는 그 자체로 모순인 것 처럼 보인다...
    "물론, 실제로 그러했다. 하지만 우리는 '모순'이라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우리만이 모순을 좋아하는 모순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동베를린과 서베를린 출신의 그런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들을 Festa dell'Unità(역주: '단결의 축제', PCI 및 후속 단체들의 연례 행사)에 데려가곤 했다."
    정치인들이 CCCP와의 협력을 시도한 적은 없는가?
    "그들은 우리가 아주 복잡한 녀석들이라는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들은 우리를 Torino에서 열리는 노동절 행사에 초청했었고, 그 곳에서 우리는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추도사를 읊었었다. 그리고, 또 기억할 만한 것은, 우리가 책을 하나 출판했을 때 책의 서문을 상원의원 Bonazzi가, 한동안 Reggio Emilia의 시장이었던 그가 써 주었다는 것이다."
    그가 뭐라고 썼었는가?
    "이 도시는 잠에 빠져들고 있고, 그에게는 우리가 필요하다고 썼었다."
    그들은 당신들이 아무데서나 공연하지는 못하게 했어야 했다...
    "그들은 이 모든 모순덩어리 속에서, 우리가 그들과 함께할 수 있다고 느꼈었다."

    당신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도 공연했었고, 연주했던 곡들 중에는 그들의 국가(國歌)도 있었다. 관객들이 국가에 어떻게 반응했었나?
    "관객들은 전부 기립했었다. 펑크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들에게 국가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어디서 소비에트 국가를 연주했었나?
    "그 곳은 '붉은 군대'를 위한 건물이었으며, 마피아의 관리 하에 있었다. 당시의 소비에트는 바닥부터 흔들리고 있었으며, 관료들과 마피아들이라는 두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두 세력 간에는 매우 잦은 충돌이 있었다."

    그렇다면, 대신 지식인들은? CCCP에 대해 처음으로 말했던 사람들 중에는 Pier Vittorio Tondelli(역주: 이탈리아 작가)도 있었다. 우리는 Massimo에게 그와의 만남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 일은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했던 일이었다. 그 인터뷰는 [L'Espresso]지에 실릴 예정이었고 Tondelli는 이미 아주 유명하고 존경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 방까지 걸어서 올라왔었고, 헉헉댔었다. 그 때의 나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5층에 살았었거든."

    당신은 공산주의자였나?
    "나는 여전히 PCI(Italian Communist Party)를 위해 계속해서 글을 써 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 당시의 소비에트는 Brezhnev의 통치기였다. 우리는 언제나 반대파였고, 여전히 우리를 매혹시키는 세계에 속해 있다. 아직까지도 그렇다: 나는 이번 휴가를 불가리아(역주: 불가리아도 공산주의 국가였었다)에서 보낼 계획이다."

    다시 Giovanni에게 가 보자: 인습을 타파하는 것에 대하여. 올해 당신은 Atreju, 우파의 청년 대회, 파시즘과 관련이 있다고들 하는 대회에 참석함으로써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언제나, 아주 작은 부분은 우파였었다."

    어째서인가?
    "아직 Massimo와 함께이던 시절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었고, 모두가 동의했었다: 아마 우파들은 우리를 일종의 원초적인 힘으로, 그들에게 어울리는 힘으로 여겼던 것 같고, 우리는 이런 인식에 대해서 꽤나 놀랐었지만, 결국 그들이 생각하는 게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http://youtu.be/jwU1qtQc2q0

    당신은 한때 Lotta Continua(역주: 이탈리아의 극좌파 단체)에 몸담고 있었고, Alceste Campanile와 절친한 사이였었다. Campanile는 전투적인 사람이었고, 나중에 살해당했었다. 70년대 수없이 많이 일어났었던 비참하고 추악한 일들 중 하나였다...
    "정치적인 갈등은 심각하고, 진지하고, 무서운 일이 되어 왔다. 그래서 내가 정치계를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이것저것에 대해 논의해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리고 우리 음악은 언제나 정치 이전의, 사람 자체를 다루었었다."

    'Madre'(Mother)는 성녀 마리아에게 바치는, CCCP시절 이미 당신의 영혼의 일부였었던 주제를 다룬 곡이었다.
    "Virgin 레코드는 이 곡을 음반으로 발매하길 원하지 않았었다. 그들은 이 곡을 발매하면 우리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떠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당시 논쟁은 Annarella가 이런 말을 하게 되면서 힘들어지게 되었다: '결국은 그렇게 될 거다: Massimo는 기타를 강타할 것이고, Giovanni는 '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노래할 것이고, 모든 펑크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꽉 움켜진 주먹을 쳐들어 올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우리 모두가 내면에 품고 있는, 그 영적인 무언가." Annarella가 말했다.
    그 후,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당신은, 당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Joseph Aloisius Ratzinger(역주: 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서 큰 감명을 받았다: 당시 나는 어떠한 기대도 갖지 않은채로 이틀간을 우울한 상태로 공상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로운 교황이 취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베네딕토 16세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재능을 깨닫게 되었다: 몇몇 가톨릭 전통주의자들과는 다르게, 그는 "Buonasera!(Good evening)"라고, "buona cena(good dinner)"라는 뜻이기도 한 그 인사말을 건네며 군중들에게 축복을 요청했으며, 나는 이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을 빌리자면 옛 비잔틴 교회의 전통이기도 했다. 나는 미래에 대해 밝은 전망을 갖게 되었다."

    언젠가 당신은 Lega Nord(역주: 이탈리아의 지방 분권주의 정당)를 지지한다고 선언함으로써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지금은 어떤가?
    "아마 다음번에는 PD(역주: Partito Democratico, 이탈리아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표를 던질 것 같다."
    어쩌다가 Lega Nord에서 PD로 가게 된 것인가?
    "왜냐하면, 나는 '정당'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사람'에 관심을 두고 있다."
    Matteo Renzi(역주: PD의 리더)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Graziano Delrio(역주: PD의 유명한 당원)를 알고 있었다: 비록 그의 모든 생각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가 아주 올바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Giovanni, 당신들은 어째서 해체한 것인가?
    "이유가 있었다. 그건 끝난 일이다."
    당신은 여전히 선(線)에 충실하는가(Faithful to the line; Fedeli alla linea)?
    "당연히 그렇다: 선은 실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 단 한번이라도, CCCP 전체가 한 자리에 모여 지난날을 회고해 보는 시간을 가질 기회는 없을 것인가?
    Giovanni: "일어나게 될 일은 결국 일어날 것이다."
    Annarella: "우리는 이런 전시회를 정말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지금은 실제로 하고 있다. 우리는 미리 프로그램을 계획하거나 하진 않는다."
    Massimo: "그 때 CCCP는 그저 3초정도나 지속될 만한 조합이었다. 그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http://youtu.be/TzzMwkGEhwg



    2016/02/13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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