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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utthole Surfers
    [...]/[Butthole Surfers] 2023. 3. 27. 13:10




    https://youtu.be/MJzoztqU5OU
    "Bar-B-Q P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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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sacurrent.com/sanantonio/before-pepper-and-mtv-an-oral-history-of-the-butthole-surfers-san-antonio-years/Content?oid=28070897


    "Pepper"와 MTV가 있기 전, Butthole Surfers의 샌 안토니오 시절에 대해
    [San Antonio Current]
    Bill Baird
    2022년 1월 25일


    Butthole Surfers는 1970년대 후반, 외부로부터 단절되어 있던 샌 안토니오 펑크 록 씬에서 태어났고, 시간이 흐르며 80-90년대 언더그라운도 음악계의 가장 유명한 밴드들 중 하나의 입지를 차지하게 되었다. 포스트 펑크, 퍼포먼스 아트, 텍사스 사이키델릭과 부조리극을 적절히 배합한 이들의 예술은 Butthole Surfers를 당대의 밴드들 중 가장 기이하면서도 매력적인 밴드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2018년, 밴드의 기타리스트 Paul Leary는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는 우리가 "록 밴드는 이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모습들을 직접 갖춘 밴드가 되어갔었다. 우리는 그 어떤 메시지도 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허무주의'적인 측면이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Butthole Surfers의 허무주의는 멤버들이 느꼈던 감정, 대부분의 문화가 멈춰있다는 그 정적인 느낌에서 기인했었다 - 밴드의 초창기 시절, "알라모 시티" 샌 안토니오에서 느꼈던 그 감정에서. 1960년대 청년 문화의 폭발이 끝난 후, 수없이 많은 '베이비 부머'들은 그 전까지 줄기차게 입어 오던 타이다이 태피스트리를 구석에 처박아두고는 쫙 빠진 줄무늬 셔츠를 빼 입고 다들 완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정렬해 줄을 섰던 것이다.

    Butthole Surfers는 그런 아무런 특징도 없는 맥 빠진 문화를 무너뜨리고, 비웃고, 전복시키고 싶었던 밴드였다 -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과격하고 거친 꿈을 결국 이루어내었다.

    Butthole Surfers의 음악은 정신을 녹여낸 사이키델리아와 포스트펑크 노이즈를 반씩 섞은 Leary의 혼미한 기타 연주에 프론트맨 Gibby Haynes의 혼란스러운, 때때로 확성기 사이로 갈라져 쏟아진다거나 딜레이가 잔뜩 걸린 진흙탕 아래에 묻혀 있는 목소리가 조화되어 있는 음악이다. 여기에, 2대의 드럼이 이 두 가지 요소를 원초적인 광기로 장식한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 언더그라운드의 입소문으로만 정보가 퍼지던 시대에, Butthole Surfers는 점점 발달해나가던 '위어드 록'(weird rock) 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이들이 선보였던 정신나간 공연들은 관객들에게 공포와 충격을 선사했던 것이다.

    Butthole Surfers의 영향은 거대했고, 충격적이었으며, 오랜 시간동안 지속되었다. Nirvana의 Kurt Cobain은 Butthole Surfers의 첫 EP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음반 10선" 목록에 포함시켰으며, 뉴욕 아방가르드 재즈의 전설 John Zorn 또한 Butthole Surfers의 음악을 고평가했던 바가 있다. 1990년대에 이르러 이들의 기이함은 새로운 수준에 도달하였다 - "Pepper"를 통해 얼터너티브 차트 1위를 달성하였으며, MTV의 테마 송이 되기도 하였고, 심지어 할리우드 영화에도 밴드의 음악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Butthole Surfers의 영향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는 한 증거로, 지난 12월 Tom Stern 감독으로 밴드의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 제작 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1주일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5만 달러의 제작비 모금이 완료되었던 일이 있었다.

    밴드의 팬들 중 대부분은 Butthole Surfers의 가장 훌륭한 곡들은 샌 안토니오 시절, 그러니까 1978-1984년에 만들어졌다고 말할 것이다. 당시의 샌 안토니오는 지금에 비하면 훨씬 작은 도시였고, 문화적으로 사실상 고립되어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 '고립'은 밴드 멤버들의 창조력을 막는 제한으로써 작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불을 지르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개성을 만들어나가는데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Leary, 드러머 King Coffey, 초창기에 밴드를 거쳐간 멤버들 및 친구들과 함께 인터뷰를 진행했다. Haynes와 드러머 Teresa Taylor (Teresa Nervosa) 는 인터뷰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아래에 이어지는 글은 샌 안토니오에서 어떻게 이런 난폭하고 독특한 밴드가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구술된 역사이다.


    Paul Leary> 나는 샌 안토니오 북쪽에서 자랐다. San Pedro 및 Hildebrand 가 근처에서. 재미있는 동네였다. 그 무렵의 샌 안토니오는 작은 마을 중에서는 그나마 큰 축에 속하는 정도의 도시였고 히스패닉 느낌이 멋지게 깃든 장소였다. 5살 무렵부터 기타 연주를 시작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Chet Atkins가 되고 싶었다.

    Scott Stevens (이전 베이시스트)> Gibby Haynes의 아버지는 달라스 아동용 TV 쇼의 호스트였다. '미스터 페퍼민트'라는 예명이었지. Gibby도 쇼에 등장하곤 했었다. Gibby는 어렸을 때 부터 타고 태어난 쇼맨이었다.

    Jerry Haynes (Gibby의 아버지)> 1960년대 중반에 Gibby가 가끔씩 쇼에 등장해 나를 도와주곤 했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Gibby가 앉은 의자가 뒤로 넘어갔었는데, Gibby는 한 1.5 미터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는데도 웃으면서 일어났었다. Gibby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아이였다. 커다란 비눗방울 속에 작은 비눗방울을 5개는 불어넣을 줄도 알았고, 거기서 여러가지를 더할 줄도 알았다. ([Spin] 인터뷰, 1996년)

    Scott Stevens> Gibby는 어린 시절 TV 쇼 사업을 직접 옆에서 바라보았고 '쇼 비즈니스'라는 것이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 사업이라는 것을 몸으로 배워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회계학을 전공했던 것이다. 대학생 시절 Gibby는 검은 가죽 자켓을 입고 다녔고, 회계학과에서 대스타였다. 나는 Gibby를 1978년에 처음 만났다. 샌 안토니오의 트리니티 대학교는 당시에는 상당히 보수적인 대학교였다 - 'Biff and Muffy' 천지였지. 뭐 내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느꼈었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앞뒤가 꽉 막힌, 보수적인 분위기였었다.


    숨막히게 답답한 텍사스 문화

    King Coffey> 고립. 텍사스 펑크의 특징은 바로 '고립'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동부나 서부 해안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거기에 텍사스 주 자체도 도시들간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 시기는 아직 '투어 네트워크'같은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떨어진 지역 사이의 펑크 네트워크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그러니 샌 안토니오의 우리는 우리들끼리만 모여서 뭐라도 해야 했다. 텍사스 출신 밴드들, 예를 들어 1960년대를 보면 The 13th Floor Elevators같은 밴드들이 있는데, 동시대의 다른 밴드들에 비교하면 뭔가 훨씬 더 '막 나가는' 느낌이 있는 경우가 자주 있다. 나는 이런 경향이 텍사스 특유의 고립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물론 인터넷 같은 것도 없었고. 이 무렵에는 마을 바깥의 밴드들에 대해 뭐라도 아는 것 자체가 어려웠었다.

    Paul Leary> Butthole Surfers는 그 시대의 밴드였고, 텍사스의 밴드였다. 텍사스 음악에는 언제나 다른 지역 음악들과는 좀 다른 부분이 있었다. Butthole Surfers같은 밴드는 텍사스에서나 나올 수 있을 밴드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냥 평범하게 이상한 놈들이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해 반응했고 불평을 쏟아냈었다.

    Chris Smart (밴드 초창기의 지인)> 그 당시에 일어나던 일들은 전부 그냥... 지루해 빠졌었다. 그러니 우리는 말 그대로 모든 것에 반대하고는 했다. 70년대에 반대했고, 히피 문화에 반대했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싫어하게 되었다. 사실 그렇게 미움을 받는 것이 오히려 좋았는데, 그 덕에 사람들이 좀 더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싫다고? 좋아, 우리 새 밴드는 더 싫어하게 될 걸! 새 노래들도 싫어하게 될 거고! 니들이 좆같이 열받을수도 있겠지만 뭐 어쨌든지간에 바로 그런 일을 우리가 할 거야, 니들은 좆나 지루한 놈들이니까." 그러니 그렇게 미움을 받는 것이 씬에는 더 좋은 일이 되었던 것이다. 특정한 경향과 씬이 실제로 발생하기 위해서는 고립과 적대감이 필수적이니까. 당신을 싫어하는 사람, 당신이 싸워야 하는 대상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https://youtu.be/cquzZwuc9cA
    "Woly Boly"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발견하다

    Chris Smart> 당시의 샌 안토니오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이제와서는 상상해보기도 힘들 정도다. 대학가 라디오 방송도 없었고, 언더그라운드 잡지도 없었고, 공연을 할 만한 클럽도 아예 없었고, 경찰, 몸 좋은 놈들, 헤비 메탈 팬들, 건실한 일반 남자들이 계속해서 밴드와 팬들을 협박하고 다니던 분위기였다. 나만 해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게이 새끼"라고 불렸었다. 내가 속했던 밴드도 마찬가지였고, Butthole Surfers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씬에 속한 사람들은 전부 그런 취급을 받았다. 매일매일 누군가가 차를 타고 지나가며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어이! 펑크 게이새끼들아!" 좆같은 매일이었다.

    King Coffey> Butthole Surfers The Dicks Big Boys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 둘 또한 텍사스 괴짜 취급을 받는 밴드였었다. 펑크 록 매니아들에게도 이상한 밴드들이었다. 그 둘은 Butthole Surfers의 무대 공연 측면에 있어 많은 영감을 제공했던 밴드들이었다. 하지만 Gibby와 Paul은 자신들만의 개성을 밴드에 첨가했다. Paul은 사실 상당한 재능을 가진 음악가였고, 여기에서 그들의 강점이 하나 생겼다. Gibby와 Paul은 예술대학 학생이었고 추구하거나 따라야만 하는 도그마 같은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펑크 록 도그마 같은 것을 아예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다. 펑크 록은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Butthole Surfers는 스스로를 펑크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펑크 록의 '규칙'들에 대해서는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Chris Smart> 70년대 후반의 샌 안토니오 펑크 씬에는 총 30명 정도의 사람들만이 있었고, 서로가 서로를 전부 잘 알고 있었다. Pugliese 형제도 있었다. The Vamps의 키보드 연주자가 Joe Pugliese 였는데, Joe는 정말 중요한 밴드들을 샌 안토니오로 불러 와 공연을 하게 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큰 기여를 했지만 딱히 알아주는 사람 없이 지나가 버렸었지. 샌 안토니오 펑크 씬에 정말 중요했던 공연들이었는데! Sex Pistols, Ramones, Iggy Pop, Patti Smith, John Cale 등등. 그 공연들 모두... 너무 이른 때였던 것이다.

    Bill Daniel (밴드와 협업을 하기도 하고 사진도 찍었던 사람)> 그 당시 샌 안토니오 예술가들에게는 시간과 공간이 넘쳐났었고 그래서 인생 전부를 예술에 걸 수 있는 경우가 많았었다. 고립된 공간에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예술을 창조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거기에 샌 안토니오 씬은 굉장히 열린 태도를 갖고 있었고, 예술가들이 뭐든지간에 완전히 새로운 것을 언제든지 마음껏 선보일 수 있었다. 씬에 관객이 많지는 않았지만, 다들 열린 마음으로 뭐가 나오던지 지지해주곤 했었다.


    트리니티 대학의 괴짜들이 연합하다

    Paul Leary> 나는 Gibby를 트리니티 대학교에서 만났다. Gibby는 나보고 기타 연주를 다시 한 번 시작해 보라고 제안했고, 나는 완전히 새로운 태도로 다시 한 번 기타에 임하게 되었다. 그 무렵의 나는 Meat Puppets Black Flag를 듣고 있었고, 그들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Scott Stevens> 나는 Paul 및 Gibby와 함께 트리니티 대학교에 다녔었다. Paul과 함께 드로잉 수업을 들었었는데, Paul은 정말 훌륭한 예술가였었다. Paul과 많은 대화를 나눈 사이는 아니였었다. 1978년 가을학기, 판화 수업을 들었었는데, 강사가 완전 병신 꼴통이었다. 판화를 만드는 데에 있어 모든 것을 "자연에서 가져 와" 그려야만 했었다. Paul은 자기 판화에 커다란 이빨을 가진 티라노사우르스, 커다란 이빨을 가진 개, 커다란 이빨을 가진 잔디깎이 기계를 그렸고, 이 셋이 원형을 그리며 돌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Paul은 작품 이름을 [Dada Dog Damage]라고 붙였다. 강사는 이 판화를 보더니 불같이 화를 냈었다: "자연에 있는, 생명들로만 그림을 그리라고 했을 텐데." Paul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흠, 저희 집 식탁 위에 작은 티라노 인형이 있고 저는 그 티라노를 매일 아침마다 보는데요."

    Terence Smart (이전 베이시스트)> Paul과 나는 교수 부모님 밑에서 자란 애들이었다. Paul의 아버지는 트리니티 대학교 경영학과에 재직했고, 내 아버지는 역사학과에서 재직했었다. 그래서 Paul과 예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Gibby는 1977~1978년 대학교 기숙사에서 만나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친하게 지냈고 연극 수업에서 같이 공연도 했었다. 트리니티 대학교의 연극 및 예술대학은 정말 훌륭한 곳이었다 - 학생으로 다니기에도 정말 멋진 곳이었다. 1981년인가 82년인가에 예술대학 학장이 바뀌었고 그 이후부터는 많은 것들이 바뀌어버렸다. 하지만 그 전의 잠깐동안의 기간에는 트리니티 예술대학은 순수한 창의력이 넘실대는 장소였었다. 그리고 Gibby는 말 그대로 정말로 멋진 예술가였다. 거기에 야구도 정말 잘했었다. 대학교 야구팀 주장까지 했었다.

    Scott Stevens> Gibby Haynes에 대한 이야기를 1978년 가을에 전해 듣게 되었었다. Gibby는 큰 키에 마른 남자였고, 회계학 전공이었는데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Gibby는 Theta 학생클럽의 대표이기도 했다. 그리고 Theta 클럽은 기숙사 내에서 하드코어 파티를 벌여대곤 했었다. 그냥 맥주만 빠는 파티는 아니였다, 무슨 뜻인지는 잘 알 것이다. 그는 Theta 클럽의 마지막 학생이었다. 트리니티 대학이 학교의 이미지를 위해 Theta 클럽을 결국 폐쇄시켜버렸던 것이다.

    Jerry Haynes> Gibby는 트리니티 대학에서 온갖 이상한 짓을 다 하고 다녔던 학생이었다. 다 벗고 알몸으로 테니스를 치다 청원경찰한테 잡혀가기도 했었다. 한번은 학교 내 예술작품 경진대회에 출전했었는데, 작품 이름이 [아우슈비츠에서 피클을 들다] 였었다. 이 짓 때문에 학생회에 불려가 "반유대주의 성향의 작품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었다. Gibby는 교묘한 학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똑똑한 학생이기는 했다. Gibby는 트리니티에서 주는 '올해의 회계사'상을 실제로 수상하기까지 했었다. ([Spin] 인터뷰, 1996년)

    Scott Stevens> Paul, Gibby, 그리고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모여서 반달리즘 예술을 하곤 했었다. 기이한 이미지들을 만들고 캠퍼스 곳곳에 붙여댔었다. 마네킹을 이상하게 변형시켜 기숙사 정문에 두기도 했고. 기숙사 건물 외벽의 한 면 전체를 'Sound Warehouse' 스티커로 도배하기도 했었다.

    Quinn Matthews (이전 베이시스트)> Paul은 자기가 받은 학자금 대출을 써서 베이스, 기타, 앰프 등등을 구매했었다. 내 형 Scott Matthews가 밴드의 원래 드러머였다.


    연극을 시작하다

    Scott Stevens> Butthole Surfers라는 밴드의 첫 공연은 샌 안토니오의 아트 갤러리, Davenport Gallery에서 진행되었었다. 갤러리 사장은 공연을 마음에 들어는 했지만 가사가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는 못 알아들었었다. 갤러리에서의 두 번째 공연에서는 PA 시스템을 가져 와서 좀 더 좋은, 더 큰 음향으로 공연을 했고, 이 때 갤러리 사장이 드디어 "I Fuck Your Wife"나 "Butthole Surfer" 등등의 가사를 제대로 알아듣게 되었다. 뭐, 가사를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더라. 그런 식이었다. Gibby는 '쇼맨' 그 자체였다. 그는 바퀴벌레 한 마리를 애완동물로 기르고 있었고, 이 바퀴의 사진을 찍어서 엄청나게 많이 복사를 했었다. 무대에서 이걸 가지고 퍼레이드처럼 열심히 종이조각을 뿌려댔었다, 색종이 조각들 사이로 바퀴 사진 복사본들이 섞여있었지만... 우리는 Dick Clark Five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하고 다니기도 했었다. 이렇게 하고 다니면 언젠가 Dick Clark이 우리를 고소할 것이고 그러면 그걸로 유명세를 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Paul의 아이디어였다.

    Jeff Smith (밴드 초창기의 지인이자 Hickoids 멤버)> 어느날 Gibby가 나한테 와서 장황하게 늘어놓았었다. "이봐, 너가 Texas Style Barbecue라는 곳에서 진행되는 공연들의 섭외를 한다고 들었는데." 이 무렵 Gibby와 Paul은 한 골목만 들어가면 있는 판잣집에서 살고 있었다. Gibby는 나를 그 판잣집으로 초대해 데모 데잎을 들려주었다. 살면서 들어 본 것들 중 가장 지독한 테잎이었다. 나는 "좋아, 이런 거라면 와서 공연해도 되겠어"라고 대답했었고. (웃음) Mystery Dates, The Smart Dads(내가 속한 밴드), Platform of Youth와 함께 공연을 해볼 수 있었다.

    Chris Smart> 내 첫 밴드는 Platform of Youth였고, 이 밴드의 첫 공연들 중 하나가 Butthole Surfers와 함께 했던 공연이었다. 이 때 Butthole Surfers Dick Gas Five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하고 있었다. 281번 고속도로와 Bitters 가에 있던 바베큐 식당에서 Jeff Smith가 공연을 주선했었다. 당시에는 그 근처에 바베큐 식당 말고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바베큐 식당 사장은 "Dick Gas Five"라는 이름을 광고판에 올리지 말라고 했고, 해서 그 이름을 Dick Clark Five로 바꿔 올렸었다. Butthole Surfers는 이제 막 두 번의 갤러리 공연 그리고 오스틴에서 한 번의 공연을 했던 밴드였다. 그러니까 이 공연이야말로 처음으로 제대로 진행한 샌 안토니오 공연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Jeff Smith> 이 공연에서 Gibby는 지렁이를 연기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Butthole Surfers는 정신나간 녀석들이었다. 아직 음악을 완전히 가다듬지는 못했었지만, 관객들의 머릿 속의 '버튼'을 누르는 것 만은 제대로였다.

    Paul Leary> 우리는 Dick Clark Five로 시작했고, 조금 지나서 Dick Gas Five라는 이름도 썼으며, Ashtray Babyheads라고도 해 보았고, 그러다가 Nine Foot Worm Makes Own Food, Vodka Family Winstons, Abe Lincoln’s Bush, Ed Asner’s Gay, The Right to Eat Fred Astaire’s Asshole 등등으로도 해 보았었다. The Right to Eat Fred Astaire’s Asshole의 경우 The Inalienable Right to Eat Fred Astaire’s Asshole를 줄인 버전의 이름이었다. ([Spin] 인터뷰, 1996년)

    Scott Stevens> 극초반기에는 모든 멤버가 각자 뭔가를 만들어와서 사방에 던져댔었다. 잼 연주처럼, 모든 멤버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나왔고, Gibby는 몇몇 가사를 휘갈겨 써댔었다. 정말 재미있었다. 밴드 운영에 있어 독재라던가 그런 비슷한 것은 전혀 없었다. 밴드 멤버들은 모두 함께였고, 공연도 전부 함께 다니고 함께 진행했었다. Butthole Surfers 멤버들이 전부 U2를 보러 오스틴으로 달려갔던 때를 기억한다.

    Quinn Matthews> 형(Scott Matthews), 나, Gibby는 Woodlawn 가와 McCullough 가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고, 이 집은 곧 "Butthole Manor"라고 불리게 되었다. 기이한 장소였었다. 윗층에는 아주머니와 두 딸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 가족은 우리에게 "너희들 리허설 하는 것 정말 잘 듣고 있어!"라고 말하곤 했었다. 어느날인가 아주머니가 아랫층으로 내려왔는데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딱 봐도 굉장히 쇠약해 보였고 우리는 "괜찮으세요?"하고 물었었다. 아주머니가 대답하길, "아, 2주 전에 뇌 수술을 받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아주머니가 수술 후 회복하는 데에 배경음악을 깔아 줬던 것이었다.


    https://youtu.be/rw_lyHDOUoU
    "American Women"


    계속해서 바뀌는 멤버 구성

    Scott Stevens> 밴드 활동을 하다가 살도 빠지고 밥도 제대로 못 먹게 되면서 결국 탈퇴를 결정하게 되었었다.

    Quinn Matthews> 밴드의 두 번째 베이시스트는 Andrew Mullins였다. 그는 휴스턴 Rock Island 공연에서 약을 처먹고 정신줄을 완전히 놔 버렸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LSD의 상당한 분량과 공연 수익을 전부 들고 도망가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 후 다시는 Andrew에 대해 들을 수 없었다. Andrew가 스스로 말하기로는 자기 몸에 불을 지르기 위해 사막 한복판으로 나가겠다고 했었다. 무튼 그래서 밴드는 다시 베이시스트를 구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나는 밴드 멤버들 몰래 Butthole Surfers 곡들의 베이스 파트를 연습했고, 전부 다 배웠다 싶었을 때 멤버들에게 내가 바로 새로운 베이시스트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바로 밴드 활동이 시작되었다... 정신 나간 나날들이었다. 하루는 공연이 끝난 밤 다 같이 Brackenridge Park 쪽으로 차를 타고 가다가 낡은 마굿간을 발견했는데, Gibby가 "차 세워! 차 세우라고!" 라며 소리를 질러댔었다. 차를 세우니 Gibby는 바로 튀어나가서 마굿간의 간판에 올라가 매직으로 말 그림에다가 거대한 좆을 그렸다. 그러고는 내려와서 다시 차에 타고는, "좋아, 이제 가자."... 또 하루는 리허설을 하고 난 다음 다 같이 부엌에 앉아 LSD를 빨면서 쉬고 있었는데, 멤버 전부가 레이드 바퀴약 스프레이를 하나씩 손에 들고 있었다. 우리는 시합을 해 보기로 했다: 누가 바퀴벌레를 가장 많이 잡아 죽일 수 있을 것인지? 우리는 조용하게, 조명도 어둡게 하고 게임에 임했었다. 우리는 이 게임을 "Shiny"라고 불렀다. 아마 바퀴벌레가 반짝이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Chris Smart> 아, 그때 했었던, 근육위축증 환자들을 위한 자선 공연. 처음으로 100명 정도의 사람이 모였던 펑크 공연이었다... The Rejects의 Mark Rubinstein이 주선한 공연이었다. La Villita 쪽에다가는 근육위축증 환자들을 위한 자선 공연이라는 핑계를 대고 야외 무대를 빌렸었지만, 실상은 그냥 커다란 펑크 록 페스티벌이었다. The Big Boys도 왔고, The Rejects도 공연했고, 거기에 몇몇 밴드들을 더해서 대충 6개의 밴드인가가 공연했었다. Butthole Surfers도 참여했었다. 그 때만 해도 아직 "Butthole Surfers"라는 이름이 아니었다, Dick Gas Five 였었다.

    Quinn Matthews> La Villita 직원들은 우리를 명백히 싫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 마이 갓! 펑크 록커들이잖아!"라는 반응이었다. Gibby는 무대 위에 복서 브리프만 입고 올라가서는 바퀴벌레 사진을 인쇄한 종이쪼가리들을 관중에게 뿌려댔었다. '가족 관객'들에게는 적절치 않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자선용 금액을 상당한 액수로 모을 수 있었다. 그 때에는 씬의 사람들이 해야만 하는 전략을 실제로 했었다: 공연을 하기 위해 게릴라 전략을 쓰는 것.


    신화를 쌓아나가다

    Paul Leary> 우리는 샌 안토니오에 존재한다는 설정의 가짜 음악 씬에 대한 얘기를 자주 하고 다녔었다. 우리는 씬의 이름을 "쿵푸"라고 지었다. "쿵푸" 씬에 속하는 여러 밴드들도 가상으로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이 가상의 밴드들이 매주 화요일 밤마다 Olmos Pharmacy에서 공연한다는 거짓말을 지어냈다, "쿵푸" 밴드들이 약국에 있는 보청기 진열대를 전부 갖다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관객석을 마련했다는 이야기 등등을 만들어냈고... "쿵푸" 씬의 가장 대단한 밴드는 The Ridiculoids였다. The Ridiculoids 공연에서는 매번 언제나 누군가가 자살했고 따라서 밴드는 공연을 사전공지 없이 몰래 진행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었는데, 그러고 나니 The Ridiculoids 공연을 놓친 관객들이 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설정이었다. "쿵푸" 씬에는 두 명의 프로모터도 있었도 이 둘이 서로 경쟁하는 상태였다: Steak Watson과 Lady Corn Wilson. 우리는 "쿵푸" 씬의 밴드들이 모여 컴필레이션 앨범을 만드는, 하지만 실제로는 Butthole Surfers가 가상의 밴드들을 흉내내며 전곡을 연주해 앨범을 만드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King Coffey> Paul과 Gibby가 샌 안토니오의 "쿵푸" 씬을 전부 상상해서 만들었었다... 거기에 더해서 이 가짜 내용을 Jello Biafra (Alternative Tentacles 레이블의 창립자이자 Dead Kennedys 멤버) 에게 말해서 Biafra를 속이기도 했다. Biafra는 이 얘기를 마음에 들어했고, 컴필레이션 앨범을 직접 만들고 싶다고 열의를 보이기까지 했었다. 한동안 Butthole Surfers 멤버들은 15개의 가상의 밴드들을 전부 연기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Biafra도 이게 다 거짓말이라는걸 알게 되었고, 상당히 실망했었다.

    Terence Smart> Butthole Surfers를 처음 본 것은 트리니티 대학교 캠퍼스의 한 파티장이었다. 거실에서 공연을 하는 모습을 봤었는데, 정말 웃기는 공연이었다. Gibby는 웬 인체 모형을 들고 그 인형을 이리저리 흔들어대며 인형의 목에다 대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인형의 속에다가는 Church's의 프라이드 치킨 한 박스를 쑤셔넣어 놓고는 기타 솔로가 나올 때 마다 치킨을 꺼내 잔뜩 입에 처박고 씹어대다가 뱉어버린 후 다시 노래를 불렀다. 환상적이었다.

    King Coffey> Butthole Surfers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였다. 정말로 훌륭한, 제대로 맛이 간, 아주 독특한 밴드. 처음으로 공연을 보았을 때가 그들의 작별 공연이었고, 나는 그 공연을 보러 포트 워스에서 버스를 타고 오스틴의 Ritz 클럽으로 갔었다. 밴드는 그 공연을 끝으로 L.A.로 거처를 옮길 예정이었다. 이 공연에서 Bloodrock의 "D.O.A."를 불렀는데, 정말로 진심을 다한, 훌륭한 커버 연주였다. 생각해보면 좀 웃긴 선곡이었지만 어쨌든 Butthole Surfers는 진심을 담아 최선을 다해 연주했었다.


    캘리포니아 여행

    Quinn Matthews> 우리는 L.A.로 향했다. Meat Puppets와 함께 공연도 하고 그들의 거처에서 잠도 잤다. SST 레이블의 본사 문 앞에 가기도 했다. 바닥에서, 책상 밑에서, 아무데서나 잘 수만 있으면 잤다. Grandia Room에서 공연도 했다. 샌 프란시스코도 가 봤고, Valencia Tool & Die 클럽에서 공연도 해 보고, 거기서 Jello Biafra가 우리를 봤다. 그 후 SST의 프로듀서 Spot이 L.A. Whisky a Go Go 공연에서 우리를 보기도 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남쪽으로 향했다.

    Scott Stevens> 나는 Butthole Surfers의 행보를 존경했다. 이들은 가진 것을 전부 팔아치워버리고는 위험을 감수하며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 그리고 이 캘리포니아 여행은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 되었다. The Big Boys의 달라스 공연을 본 적이 있었는데, 멤버 Tim Kerr가 나에게 말하길 "들리는 소문으로는 Butthole Surfers가 공연에서 Dead Kennedys를 아주 발라버렸다는데"라고 그러더라. 내 대답은, "그거지! 역시 그 녀석들이야, 제대로라고!"

    Quinn Matthews> L.A.에서 Carrie Faber라는 여자를 알게 되었는데, 우리가 집을 구하기 전 까지 자기 집에서 잠시 지낼 수 있게 해 주었었다. Carrie의 집에서 그 유명한 "딜도 풋볼" 게임을 했었다. Carrie는 35 cm 짜리 고무 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불알도 달려 있었다. Gibby, Paul, Scott (Matthews) 과 나는 그 딜도를 가지고 풋볼 게임을 했다 - 슈팅도 하고 패스도 해 보고 태클도 해 보고 하는 식으로. 그런데 사실 딜도는 던지는 편이 더 나았다. 발로 차니까 생각보다 아팠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던지는 것도 그저 그랬다. 멀리 날아가기보다는 그냥 땅으로 떨어져 튕겨대기만 했었으니까. (웃음)

    Scott Stevens> 시간이 좀 흐르고 듣기로는 Scott Matthews가 돌아오고 싶어하는 바람에 Butthole Surfers 또한 캘리포니아에서 다시 여기로 돌아올 거라는 소문이 있었다. 밴드가 쓰던 차량과 음향 시스템이 Scott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밴드는 몇 년간의 경험을 통해 작곡 및 녹음 능력이 일취월장한 상태였지만, 실제로 결과물을 낸 것은 거의 없는 채로 돌아온 것이기도 했었다. 밴드는 주머니에 지푸라기 정도만 남겨서 돌아왔었다. 그게 끝이였다... 돌아온 다음의 공연은 달라스에서, 히로시마 폭격 기념일 공연이었다. The Hugh Beaumont Experience, Stick Men With Ray Guns, Dead Kennedys와의 합동 공연이었고, 이 공연은 내가 살면서 본 공연들 중 가장 폭동에 가까웠던 미친 공연이었다. Gibby가 Jello Biafra에게서 공연 수익금을 받아 왔지만, 밴드 멤버들과 나누지 않았다. Scott과 Quinn Matthews가 새벽 4시에 Gibby의 부모님 집까지 찾아와 돈을 달라고 했지만, 돈을 돌려주기는 커녕 서로 주먹질까지 하며 싸우게 되었다. 그렇게 Butthole Surfers는 잠시 해체하게 되었다.


    다시 시작하다

    한바탕 싸움이 있은 후, Paul과 Gibby는 리듬 섹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밴드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 Broadway의 Kiddie Park 근처에 위치한 오래된 스튜디오 Bob O'Neil Sound Studios를 거점으로. Butthole Surfers는 샌 안토니오에서 첫 4개의 앨범을 만들게 된다 - [Butthole Surfers] EP (또는 [Brown Reason to Live]), [Live PCPPEP], [Psychic... Powerless... Another Man's Sac], 그리고 [Rembrandt Pussyhorse]. 첫 LP였던 [Psychic... Powerless... Another Man’s Sac]을 만들 무렵, 밴드는 King Coffey / Teresa Taylor의 2인 드러머 체제를 굳히게 된다.

    Paul Leary> B.O.S.S. (Bob O'Neil Sound Studios) 는 데모 테잎용 스튜디오로 1인치, 16트랙 Tascam 믹서가 스튜디오 장비의 전부였다. 스튜디오 주인 Bob O'Neil은 밤마다 우리가 장비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해주었고, 이 작업을 통해 여러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 - 이 때만 해도 우리는 앨범이라는 걸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1982년 샌 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 Alternative Tentacles 레이블과 앨범 계약을 맺어두었었다. 하지만 샌 안토니오로 다시 돌아왔을 때, 우리는 드러머와 베이시스트를 잃어버렸고 Gibby와 나 단 둘이서 다시 시작했어야만 했었다. 그렇게 둘이서만 작업을 했는데, 하루는 디스코 매니아처럼 입은, 생판 모르는 남자가 스튜디오로 불쑥 들어오더니 길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서 왔다고 말했었다. 그 남자는 자기가 드럼을 연주해도 되겠냐고 물었고, 우리는 해보고 싶으면 마음껏 하라고 허락했었다. 이 연주가 "Hey"에 들어갔다. 그 남자는 "Hey"에 들어갈 드럼 파트를 하이햇을 시작으로 각자 다른 방식으로 연주했고, 곡의 드럼 파트가 완성될 때 까지 계속 연주했다. 그러고 다 끝나니 그냥 대뜸 나가버렸다. 그 남자를 다시는 볼 수 없었고, 이름조차도 모른다.

    Quinn Matthews> 나는 1984년 다시 샌 안토니오로 돌아왔고, 이 때 Butthole Surfers는 B.O.S.S.에서 계속 죽치고 있었다. 하루는 편의점에 갔다가 Paul을 마주쳐서 함께 즐겁게 놀았다. Paul과 Gibby가 말하길, "우리가 좆같이 망쳐버렸던 것이 사실이야, 하지만 이제 다 묻어두고 잊어버리자, 다시 친구사이로 지내자고." 그리고 우리는 다시 친구가 되었다. 나중에는 Butthole Surfers 무대에 난입해서 색소폰 파트도 몇 번 불었다! 1986년 Woodlawn Theater에서 Sonic Youth와 함께 했던 공연에서도 연주했었다.

    King Coffey> 나는 오스틴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샌 안토니오에 가 B.O.S.S.에 들러 작업을 하곤 했었다. Gibby와 Paul은 스튜디오 주인 Bob을 설득해서 [Cottage Cheese from the Lips of Death]라는 하드코어 컴필레이션 앨범을 만들고 있었다. Gibby와 Paul은 내가 속해있던 밴드 The Hugh Beaumont Experience도 섭외해 컴필레이션에 넣었다. 그래서 나와 밴드 멤버들이 샌 안토니오까지 가서 2개의 곡을 3시간 정도의 작업으로 녹음했었던 것이다. Gibby는 그 스튜디오에서 아예 살고 있었다. 매일 밤마다 스튜디오에서 난리를 치다가 아침에 첫 손님이 방문하기 전 나가는 식으로... 나는 [Butthole Surfers] EP의 수록곡 중 2개의 곡에서 드럼을 연주했다. Marching Plague의 Brad Perkins도 몇몇 곡에서 연주했었다. 그리고 나는 Butthole Surfers의 정식 멤버가 되었다... 나는 사실상 처음으로 Butthole Surfers의 멤버가 되고 싶어 했던 드러머였다. 나는 진심으로 멤버가 되고 싶었다 -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냥 Butthole Surfers를 도와주는 정도였었고.

    Chris Smart> 1984년에 Gibby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이 무렵 Butthole Surfers는 주로 하드코어 팬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고 반면 내 밴드는 포스트펑크, 예술계 관중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Gibby는 "이봐, 너희들하고 같이 공연하고 싶어! 하드코어 팬들 진짜 싫다구. 애초에 Butthole Surfers는 하드코어 밴드도 아니고, 펑크 밴드도 아니잖아" 라고 말했었다. 그런 이유로 Meridian 공연을 기획하게 되었던 것이기도 했었다. Meridian은 Austin Highway에 있는 공연장으로 코카인 불법 판매 수익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었는데, 여기에는 녹음 설비도 갖춰 져 있었고, 그걸로 [Live PCPPEP]가 만들어졌다. 이 공연에는 50~60명 정도의 관객들이 있었다. 공연에 오지 않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공연이었다"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는데, 사실 그렇게까지 대단하지는 않았었다.

    Scott Stevens> [Psychic... Powerless... Another Man’s Sac]. 명작이다. 애시드 펑크 업계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수록곡들 하나하나가 정말로 훌륭하고 대단하다 - 각자가 다 멋지면서도 색다른 개성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앨범을 통째로 들어 보면 또 다른 느낌이 있다. Butthole Surfers의 초기작들이야말로 최고다... 앨범들을 다 좋아하지만, 초기 앨범들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https://youtu.be/F9cq7gCu9Ko
    "Sweat Loaf"


    다시 길 위에 서다

    트리니티 대학교 시절의 친구 Terence Smart (Chris Smart의 형제) 도 영입한 후, Butthole Surfers는 "레이디킬러"라는 글귀를 적은 쉐보레 Chevy Nova를 타고 다시 한 번 끝없는 투어의 여정에 올라탔다. Grand Funk Railroad의 Mark Farner의 이름을 딴 암컷 핏불테리어 한 마리도 투어에 동행했다.

    Terence Smart> 나는 1984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음반 가게의 메시지 보드에 이력서를 붙이다가 Paul 및 Gibby와 맞닥뜨렸는데, 대뜸 자기들 창고로 나를 초대했다. 그들은 베이시스트가 필요했고, 나는 차가 있었고, 그래서... 그렇게 밴드에 들어갔다. (웃음) ... 우리는 내 차를 가지고 진짜 본명이 - 장난이 아니라 정말로 - 'Buzz Saw' 인 사람에게 가져갔었는데, 이 남자는 자기 말로는 '자동차 목공예'를 하는 사람이었다. 이 자동차 목공예라는 것이 진짜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 남자는 뒷좌석을 전부 뜯어내고 원래는 예비 타이어를 넣는 공간을 개조해 두 사람과 개 한 마리가 누울 만한 자리를 만드는 개조를 했다. 개조가 끝나고 우리는 떠났다. 트레일러를 뒤에 단 Chevy Nova를 타고 34시간을 달려 디트로이트까지 갔다. 미쳤었지.

    King Coffey> 이 투어 시절 나는 완전 100% 모히칸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녔었는데, 달라스 외곽의 한 맥도날드에서 주문 대기줄에 서 있을 때 두 명의 촌놈이 다가오더니 "맘에 안 들어"라고 말하면서 내 턱을 제대로 갈겨서 기절시키고는 그냥 가 버렸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는데 아무도 도와주지를 않고 있더라. 오히려 내 꼴을 보고 웃어대고 있었다. "그런 취급을 당하는 법이지."

    Terence Smart> Gibby는 사람들의 이름/연락처가 적인 종이쪽지로 가득 찬 갈색 종이봉투를 가지고 있었고 그걸 가지고 밴드 활동을 진행시켰다. 나는 그걸 보고 큰 감명을 받았었다. 미쳤지... 우리는 먼저 디트로이트로 향했고, 그 후 뉴욕으로 가서 몇 달 가량 머물렀다. 뉴욕에서 이름 좀 날린 공연 프로모터이자 레이블 사장이었던 Terry Tolkin이 우리를 정말 많이 도와줬었다. Danceteria, CBGB's 같은 공연장에서 공연을 해 보는 것은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다. 텍사스에서 온 우리들을 보고 다들 고삐 풀린 야생마같다고들 했었다. 내가 보기에도 좀 그랬던 것 같기는 하다.

    King Coffey> 뉴욕에서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빈 병들을 주워서 병에 딸린 보증금을 모아 먹을 것을 사러 다녔었다. 하지만 어쨌든지간에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다녔다. 이 투어가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텍사스를 벗어났던 경험이었다.

    Terence Smart> 우리는 서부로 향했다. L.A.의 Olympic Auditorium에서 Public Image Ltd.의 오프닝 공연을 했던 것이 큰 행사였었다. 이 공연은 거의 난장판이었다. 사람들은 무대 위로 스틸토 부츠와 빈 병들을 던져댔고 침도 뱉어댔다. 공연이 끝나고는 실제로 폭동도 일어났었다. 공연의 수익금으로 1,000 달러와 대마 한 봉지를 받았고, 그날 밤은 멤버들 모두 스테이크를 먹고 맥주를 마셔댔었다... 그러다가 투어가 진행된 지 5개월 무렵이 되었을 때, 나는 몸이 심하게 아파져서 탈수증상도 보이고 체중도 엄청나게 줄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밴드를 떠나게 되었다. 책을 보니 내가 그만둘 때 우유곽을 벽에 던졌었다는 식으로 써 있었는데, 사실 그 때에는... 그 때의 내가 멀쩡한 우유곽을 그런 식으로 낭비했을 것 같지는 않다. 애초에 그 시절에 내가 어디서 우유를 사 올 수는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조지아에 있을 때 밴드를 떠났고, 그 후 몇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조지아로 돌아왔었다... 경찰 후보생으로서 말이다. 그 후에는 군에 입대했었다. 그 누구에게도 Butthole Surfers 시절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다. 만약 밴드에 남아 있었더라면 어땠을지, 전혀 감도 못 잡겠다.


    기괴함의 경지로 올라가다

    Terence Smart가 밴드를 떠난 후, Butthole Surfers는 이제 막 18살이 된 Jeff Pinkus를 새 베이시스트로 영입했고, 그는 밴드에서 가장 오래 활동할 베이시스트가 되었다. 또한 이 무렵 밴드는 공연에서 선보일 그들 특유의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하기도 했다.

    King Coffey> 우리는 (적어도 비슷한 장르 업계에서는) 처음으로 공연에서 영상 및 시각적 효과를 활용했던 밴드들 중 하나였다. 매 공연마다 온갖 플래시 라이트와 연기 생성기를 가지고 다녔고, 이중 프로젝터도 설치하고 다녔었다. Gibby와 Paul은 예술가들이었으며 자신들이 만든 영상을 음악에 맞춰서 상영했었다.

    Paul Leary> 나는 그 때도 그리고 지금도 이상한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Yves Klein의 작품들에서 큰 영향을 받기도 했었다. Gibby도 Yves Klein 작품들을 정말 좋아했다. 우리는 '의외성'과 '실수'들을 사랑했다. 공연에서 활용한 시각적 요소들은 기괴한 것들이었다. 남성기 재건 수술 영상을 [Charlie’s Angels] 영상 및 육가공 영상들하고 겹쳐서 상영했고, 플래시 라이트와 연기 생성기로 기괴함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매일 밤마다 무대 위에서 화염을 천장까지 쏘기도 했고 12게이지 샷건을 발사하기도 했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록 밴드 무대에서 봤었으면 했던 광경, 바로 그 자체가 되어갔다.

    Bill Daniel> 나는 1987년 Butthole Surfers 투어에 동행했었고, 87년이야말로 이들의 최전성기였다고 생각한다. 밴드가 Winnebago 캠핑카를 막 구입했을 때, 이 캠핑카의 운전수이자 공연에서 영상을 상영하는 역할로 참여했었다. 내가 운전할 때 뒤에서는 멤버들이 LSD를 즐기고는 했었다... 하지만 실제 '파티'는 거의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만 했었다. 몇 년간의 고생을 통해 밴드는 완전히 프로가 되어 있었다. 자신들의 일에 굉장히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Scott Stevens> 1987년 달라스에서 Butthole Surfers 공연을 봤었다. 하, 진짜 대단했었다. 플래시 라이트와 이중 프로젝터는 멋진, 기괴한 이미지들을 보여줬다. Butthole Surfers에게는 여러 훌륭한 순간들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1987년이야말로 이들의 최전성기였다고 본다.

    Bill Daniel> 이 무렵의 Butthole Surfers는 무대 연출에 있어 한 단계 진보하고 있었다 - 투어 내내 자신들의 음향 장비를 전부 직접 가지고 다니면서. 매일 밤마다 모든 장비들을 차량에서 꺼내고, 다시 넣었다. 비용도 정말 많이 들었고 수고롭기도 했지만, 정말 훌륭했었다.


    메이저로 올라가다

    오스틴으로 거처를 옮기고 [Locust Abortion Technician], [Hairway to Steven], [piouhgd]이라는 3장의 앨범을 발매한 후, 밴드는 메이저 레이블인 Capitol Records와 계약하게 되었다. Led Zeppelin Jone Paul Jones가 이들의 메이저 레이블 데뷔 앨범 [Independent Worm Saloon]을 프로듀싱하게 된다.

    Paul Leary> 오스틴에서의 첫 거처는 굉장히 웃긴 곳이었으며 버려진 자동차 극장 사인이 있는 이상한 공터에 놓인 집이었다. 그 집에다가 스튜디오를 차려 놓았고, 천장에 큰 합판을 매달아 그 아래에서 잤다. 결국에는 고속도로 관리공단에서 공문이 와 이 집을 비워줘야만 했었다. 공단에서 1만 달러의 이사 지원금이 나왔고, 우리는 이 돈을 텍사스 Driftwood의 집을 사는데 썼다. 이 집도 좋은 장소였다, 특히 몇 년 동안의 투어에서 쌓인 피로를 풀기에 정말 좋은 곳이었다. 이 집에서 MTV 용 CM 송을 만들었고 연주도 많이 했었다. 그 곡 덕택에 그 당시에 MTV에서 가장 많이 연주된 밴드가 되기도 했지만, 아무도 그 곡을 우리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piouhgd]도 그 곳에서 만들었다. "piouhgd"라는 이름은 키보드에 더러운 양말을 집어던졌을 때 눌려져 써진 단어를 그대로 가져 온 이름이었다.

    King Coffey> 앨범 이름을 [Hairway to Steven]로 지었었기 때문에 Jone Paul Jones가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고 작업도 같이 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의 뻔뻔함을 좋아했다. [Independent Worm Saloon]이 메이저 레이블 데뷔작이었고, 우리는 그렇게 '변명을 제대로 하던가 아니면 닥치던가'의 양자택일 상황을 스스로에게 강제하는 꼴이 되었었다. 우리는 번지르르한 앨범을 만들었다. 이전에는 결코 만들지 않았던 그런 앨범이었다... 그리고 "Pepper"가 나왔다. 그 때 나는 "Pepper"를 정말 좋아했었다. 이 곡은 당시의 밴드가 무엇에 빠져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곡이다: 바로 '트립합'. 이 곡의 단점은, "Pepper"가 히트를 치자 레이블이 우리가 이런 곡을 몇 번이고 더 만들 수 있는 밴드라는 착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에게 "Pepper"는 정말 이상한 실험이었는데 말이다. 생지옥이었다, 우리가 단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장르에서 히트곡을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시대가 변하고, 기대도 변하다

    Paul Leary> 우리는 공연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것을 정말 좋아했었다. 하지만 9/11 테러 이후, 나는 아수라장에 대한 욕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Chris Smart> Butthole Surfers의 마지막 투어를 봤었다 (역주: 2001년 [Weird Revolution] 발매 투어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싱글곡은 Kid Rock과 함께 만든 곡이었고 (역주: "The Shame of Life"), 앨범은 디즈니 레이블 (Hollywood) 에서 나왔다. 평범한, 결코 좋다고는 말하기 힘든 앨범이었고, 공연도 좋지 않았다. 두 명의 고용 세션도 있었다. 공연 중간에 배경 트랙들 - 키보드, 보컬 - 이 전부 꺼졌었다. 초기의 Butthole Surfers 였다면 그런 공연을 하는 사람을 찢어버렸을 만한, 그런 공연이었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평범한 일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에는 성명서를 작성해 발표하고 세상에 맞서게 되는 법이고, 어떤 일들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언젠가는, 결국에는 스스로 집세를 내야만 하는 법이다.

    Scott Stevens> Butthole Surfers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11년 오스틴의 Emo's 공연이었다. 옛 노래들을 다시 들어보는 것은 좋았지만, 공연에 나왔던 영상들은 1980년대만큼 좋은 영상들이 아니었다. 반짝거리는 빛은 많았지만 기괴한 이미지들은 이제 더 이상 없었다. 남성기 재건 수술 영상도 없었고.

    Terence Smart> Butthole Surfers가 자신들만의 새로운 메인스트림을 만들지 못했던 것은 안타깝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를 팔아버린다거나, 큰 돈을 벌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예술에 언제나 진지하게 임했었다.

    King Coffey> 지금 이 시대는 정말로 마법같은, 기적같은 시대다 - 음악 혹은 문화 전반적으로 이렇게나 탈중앙화가 이루어진 시대는 없었다. 물론 소셜 미디어의 시대에 우리가 있었더라면 어떻게 대처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Butthole Surfers는 언제나 자신의 정보를 최대한으로 감추려 했던 밴드였다, 모든 것을 최대한 '열린 결말'로 만들고자 했었던 것이다. 밴드 멤버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최대한 공개하지 않았었고, 앨범에도 밴드 멤버들의 이름을 싣지 않았었다. 사람들의 상상력은 현실보다 더 멋지다! ... 오늘날의 음악 씬은 그 어떤 때보다 더 훌륭하다. 밴드는 이제 더 이상 레이블의 도움 따위가 필요하지 않고, 스스로 앨범을 만들어 발매할 수 있다. 밴드가 앨범을 만들고 발매하는 행위에 대한 모든 것이 바뀐 것이다. 규칙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니 애초에, 앨범을 만들 필요가 있기는 한지? (웃음)

    Paul Leary> 나는 최신 음악에는 큰 관심이 없다. 주로 40년대, 50년대, 60년대, 70년대, 80년대 음악들을 듣는다. 유일하게 듣는 최신 음악은 내가 프로듀싱이나 믹싱을 맡은 음악들 뿐이다. 탈출하고 싶어하는 꼬맹이들에게 해 줄 말이라고는 학교에 그냥 계속 다니라는 것 뿐인 사람이 되었고. 지금 젊은 음악가들이 어떻게 음악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 건지, 전혀 모른다... 내 가족은 지금 샌 안토니오에서 살고 있다. 자주 샌 안토니오에 들러 세계 최고의 텍스멕스 음식을 먹으러 다니곤 한다.


    https://youtu.be/Un-ZrB0sFto
    "Pepper" (David Letterman,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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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utthole Surfers

     

     

    2022/02/07 14: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