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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eathen earth
    [...]/[Throbbing Gristle] 2023. 3. 19. 01:52



    https://youtu.be/QX7mEt7hjOE
    "Catholic S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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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reader.exacteditions.com/issues/35782/

    Throbbing Gristle's Prostitution
    Simon Ford
    [The Wire]
    1996년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 런던의 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현대 예술 협회, ICA)에서는 향후 현대 음악의 면면을 바꾸어버리게 될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1976년 10월 18일, 전시회의 오프닝 파티가 진행되던 밤, 이 전시의 기획자라고 할 수 있었던 4명의 예술가들 - Chris Carter, Peter Christopherson, Genesis P-Orridge, Cosey Fanni Tutti - 은 기타를 어깨에 메고, 신디사이저의 전원을 켜고, 테이프 머신을 준비한 후 [Music From The Death Factory]라는 이름의 공연을 진행하였다. 이 전시회의 이름은 [Prostitution](매춘)이었으며, 4명의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COUM Transmissions라고 칭하고 있었으며, 음악 밴드의 경우는 Throbbing Gristle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인더스트리얼'이라는 문화를 창조해내고 있었다 - 이렇게, 전설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Prostitution]은 대략 1주일 정도만 진행되었던 전시였지만 각계의 맹렬한 반응을 이끌어냈었다: 단적인 예시로 한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은 "포르노 전시를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하는 것은 국가적 망신 그 자체다"였었다. 대부분의 언론은 여러 포르노 잡지에 실렸던 Tutti의 사진을 '예술 작품'으로 전시했던 것에만 주목하여 비난을 가했었다. (이들이 완벽히 무시하고 설명하지 않았던 부분은 Tutti가 어째서 포르노 잡지의 모델이 되었는가였다. 돈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이유였지만, Tutti에게 있어 정말로 중요했던 이유는 섹스 산업이야말로 현대 사회에서 정말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산업이면서도 동시에 진지한 예술적 고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산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계획은 Tutti의 포르노 사진들을 모아서 그녀가 특별하게 관심을 가지던 주제들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시하는 것이었다: 성(sexuality), 그리고 여성적 정체성. 이런 측면보다는 훨씬 덜 부각되었지만 사실은 동등한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었던, [Prostitution] 전시의 다른 부분들도 있었다: COUM Transmissions이 수집한 기사 스크랩들, 퍼포먼스를 담은 사진들, 예전 퍼포먼스들에 사용되었던 무대 장치들 (탐폰, 정육점용 식칼, 항문 관장용 주사기, 쇠사슬 등등).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Prostitution] 전시는 현실 그리고 그 현실에 대한 묘사 사이의 간극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전시였었다.
     전시물들은 COUM Transmissions의 시작, 1969년 헐(Hull)에서 P-Orridge가 Tutti를 만나 모든 것을 시작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Tutti는 당시 이들이 얼마나 기존의 것들을 전부 파괴하고 싶어했었는지에 대해, 열정적으로 회상했다: "우리는 '규칙'이라는 것이 있는 거라면 뭐든지 전부 파괴하고 싶었다, 그 규칙들이 모든 것의 숨을 막아버리고 모든 것을 안전하게 만들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수단을 가지고 가능한 한 최대한 많은 규칙들을 부숴버리려 했었다."

    https://youtu.be/o5mtC1oeWK8
    "The Old Man Smiled"

    COUM Transmissions은 규모 및 소속원들이 자유롭게 변하는 '집단'으로 시작했었으며, 헐의 클럽, 술집, 거리에서 온갖 혼란스러운 즉흥 퍼포먼스를 공연하며 활동했었다. 이들의 공연들 중 가장 큰 규모의 공연은 1971년 10월 Hawkwind 공연의 오프닝 공연이었다. P-Orridge는 초기 COUM Transmissions의 음악적 철학을 1971년 언더그라운드 잡지 [Friends]에 공표했었다: "음악의 미래는 음악가가 아닌 사람들에게 있다." 놀라울 정도로 미래를 내다 본 슬로건이었다.
     이들에게는 수입이라고 말할 것이 사실상 없었고, P-Orridge와 Tutti는 공연업계 바깥에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Tutti는 말했다. "우리는 그럴싸한 예술가가 아니었고, 메일 아트(mail art)나 거리 공연 따위만 하는 집단이었다. 그러다 하루는 친구였던 Mike Scott이 우리의 공연을 보고는 이 공연이 '퍼포먼스 아트'라고 평했고, 우리는 '그게 뭔데?'라고 반응했었다. Mike는 우리가 퍼포먼스 아트를 하는 예술가라고 스스로를 부른다면 예술가용 정부 보조금도 신청할 수 있을거라고 했다. 애초에 잃을 것이 하나도 없는 처지였으니 그냥 한 번 지원을 해 봤는데, 기대조차도 안 했던 보조금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예술가 지원사업 당선 이후 COUM Transmissions은 공식적으로 '퍼포먼스 아트 그룹'이 되었지만, 이 공식적 직함은 이들이 기획하고 있던 온갖 작업들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또한, 공식적인 직함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헐의 경찰들은 이들을 계속해서 주시하였으며, 이들의 '공동체'를 아주 수상하게 생각하여 지속적으로 감시하였다. COUM Transmissions은 조지 왕조 시대의 낡은 테라스를 구입해 '삶'과 '예술 작품 전시'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1972년 5월 27일자 [Hull Daily Mail]지에서, Pru Clark은 이 공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었다: "벽은 야한, 원색의 페인트들로 온통 칠해져 있었으며 계단의 윗쪽에는 검은 플라스틱 조각들이 드리워져 사실상 터널처럼 어둡게 장식되어 있었다. 부엌에서는 숨겨진 작은 공간에 놓여있는 것 같은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화음들을 들을 수 있었다. 창문에는 오렌지색 및 검은색 플라스틱들이 드리워져 있었으며, 벽에는 나이트클럽의 조명같은 빛이 들어와 엄숙하게 놓여진 양복점 마네킹들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기이하게 빛나는, 새 것 같은 드럼 키트가 있었으며, 온갖 잡다한 조각들이 모든 곳에 널려 있었고, 거대한 해변 파라솔과 Donovan의 손 모형마저도 있었다." 경찰은 이 곳이야말로 헐에서 일어나는 여러 기괴한 일들과 범죄 행각들의 온상지라고 결론을 내렸다.
     Tutti는 말했다. "우리는 '그들'이 싫어하는 모든 것들의 원인이라고 지목되었다. 한번은 경찰이 COUM Transmissions 멤버 2명을 '절도범'이라는 명목으로 막무가내로 잡아가 유치장에 넣기도 했다. 그러다가 또 한번은 Gen(P-Orridge)이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 우리 거처의 정문 위에 무지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갑자기 경찰들이 나타나서는 사다리를 흔들어대며 말했다, '다음번에는 안쪽에서 보자고, 니들 하는 거 전부 없애버릴 테니까.'" P-Orridge와 Tutti는 이제 헐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고, 1973년 7월 런던으로 향했다. Hackney의 Martello 거리에 있는 SPACE 스튜디오로.

    https://youtu.be/trEo8O_ZftI
    "Hot On Heels of Love"

    COUM Transmissions은 계속해서 음악 관련 활동을 진행하였으며, 1974년 1월에는 벨기에 겐트(Ghent)에서 진행된 제4회 전자음악 및 다양한 매체에 대한 국제대회(International Festival of Electronic Music and Mixed Media)에서 마르셀 뒤샹의 [Next Work]를 공연하기도 했다. 이 공연에서는 마르셀 뒤샹의 1913년 작품 [Bicycle Wheel] - 의자 위에 자전거 바퀴를 거꾸로 뒤집어 붙인 작품 - 의 복제품 12개가 원형으로 배치되었고, 자원자들이 이 바퀴들을 '악기'처럼 연주하였으며, P-Orridge는 색깔 판들과 지시사항들로 이루어진 악보를 가지고 이 연주를 '지휘'했다.
     이 공연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시의 COUM Transmissions은 음악가가 아닌 사람들이 통상적이지 않은 악기들을 가지고 즉흥적으로 만들어내는 음악에 관심이 많았었다. 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예술가들은 플럭서스 예술가들이었으며, Tutti와 P-Orridge는 실제로 1972-1973년 여러 [Fluxshoe] 전시들에 직접 참여하여 경험하기도 했었다. (이 전시의 주최자였던 David Mayor에 따르면 당시의 P-Orridge는 '엔터테이너'였다고, 무언가를 실행하기 직전까지 자기가 뭘 해버릴지를 전혀 모르곤 했던 사람이라고 평했었다.) COUM Transmissions처럼, 플럭서스 또한 저 높은 곳의 예술 엘리트들을 전부 부숴버리고는 고전적인 예술 매체인 '회화'와 '조각'은 이제는 너무 많이 존재하는, 쓸모없는 매체라고 주장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예술 운동이었다. 플럭서스의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대량생산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으며 음향, 촉각, 일상적인 물체들, 주변 환경, 영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었다. 컨셉과 언어 또한 예술 '작품'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했다. COUM Transmissions은 이 방향성에 동의하였으며, 특히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보여주었던 것들 - 기존의 음악 질서에 대한 철저한 무시, 흥겨움, 부조리주의적인 유머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https://youtu.be/0O-52ty8Fq4
    "Hamburger Lady"

    COUM Transmissions의 방향성은 1974년 Peter 'Sleazy' Christopherson이 멤버로 참여하게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힙노시스, 1970년대 중반 다양한 록 앨범 커버를 디자인하던 선구자적 디자인 회사에서 junior assistant로 재직하고 있던 Christopherson은 1974년 3월 COUM Transmissions의 공연이 끝난 후 그들에게 접근해 왔다. Tutti는 웃으며 말했다. "Peter는 우리의 '섹스' 측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봤을 때 별명을 'Sleazy'(역주: (성적으로)지저분한/추잡한)라고 붙였던 거다."
     Christopherson은 COUM Transmissions에 성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새로운 영역과 개척지를 선보였다. Christopherson은 설명했다. "내가 참여하게 되면서 COUM Transmissions은 점점 더 강렬하고 본능적인 영역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Cosey는 여러 포르노 잡지에 모델로 서게 되었으며,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도 점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COUM Transmissions은 자기훼손이라던가 비엔나 행동주의 같은 것들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Christopherson의 영향은 COUM Transmissions의 다음 작품들에 바로 적용되었으며, 이들은 터부와 금기를 체계적으로 파괴한다는 목표를 갖게 되었다. Tutti는 말했다. "그 무렵 우리가 하던 것들은 '즐거운 부분'들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을 했고, 그 전까지는 고려하던 관객들의 편안함,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 편안함은 더 이상 고려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의 우리는 좀 건방진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때에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지만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어느 정도는 그랬었다 -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거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누구라도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P-Orridge, Tutti, Christopherson까지 모이게 된 후, 이들에게는 Throbbing Gristle라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찾아오게 되었다. Chris Carter는 TV 방송사에서 수습 음향 엔지니어로 경력을 시작하였으며, 잠깐 동안 Yes같은 밴드들의 공연을 위한 조명 장치 작업 일을 하기도 하고 Willa라는 이름의 밴드에서도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이후 Carter는 [Waveforms]라는 이름의 솔로 공연을 진행하였는데, 여기서 Carter는 손수 제작한 신디사이저를 연주하였으며 대단한 조명 효과를 더하기도 했었다. 순전히 우연으로, Carter와 함께 협업하던 사이인 John Lacey COUM Transmissions와 함께 공연한 적도 있는 사람이었다. Lacey는 P-Orridge와 Tutti에게 Carter에 대해 말해주었고, 이들은 곧바로 Carter에게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최적의 멤버로 보였던 것이다. 이들은 서로 한번 만나보기로 약속을 잡았으며, 모든 것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고, Carter는 COUM Transmissions 스튜디오(지금은 'Death Factory'로 알려져 있는 곳)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사이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COUM Transmissions 관련 작업들은 점점 더 다른 쪽으로 방향이 바뀌게 되었으며, 반대로 Throbbing Gristle 관련 작업들에 점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게 되었다. Tutti는 말했다. "우리는 이제 COUM Transmissions 회고전을 해 볼 만한 때가 되었다고, 그리고 COUM Transmissions을 무덤에 묻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Chris는 COUM Transmissions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관련해서 뭘 해 보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Throbbing Gristle를 완전히 독립적인 프로젝트로 분리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굉장히 간단하고 쉬운 결정이었다. [Prostitution] 전시는 하나의 프로젝트의 죽음 그리고 또 다른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까지 간단하지는 않았다. COUM Transmissions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니었고, P-Orridge와 Tutti는 [Prostitution] 전시 이후에도 COUM Transmissions의 이름 하에 1979년 8월 Hayward Annual Exhibition 때까지 여러 번 행위예술 공연을 하곤 했던 것이다.
     어떻게 보자면 두 프로젝트를 구분하기는 아주 쉬웠다: Throbbing Gristle은 음악 산업에서 활동하는 프로젝트였고, COUM Transmissions는 예술계에서 활동하는 프로젝트였으니. 복잡한 부분은 멤버들이 음악계와 예술계를 구분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76년 당시에는, 몇 가지 차이점들은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예술계가 엘리트 중심에 위선적이면서도 고립된 문화였다면, 음악계는 예술계보다 낫다고는 말하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최소한 좀 더 적극적으로 반응을 해 주는 청중들이 존재할 가능성은 있었던 것이다. Christopherson은 이에 동의했다. "우리 세대의 사람들, 우리가 하는 행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예술계의 기득권들은 우리에게 사실상 관심이 아예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우리는, 적어도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예술계의 작품들처럼 잘 짜여지고 계획된 '사업'을 하는 것은 아니었었다. 우리는 그냥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고 싶었고, 더 많은 음반을 팔고 싶었으며, 좀 더 넓은 영향력을 끼치고 싶었다. 음악 산업의 작동 방식을 일종의 도구로 활용함으로써 말이다."
     Throbbing Gristle은 1976년 7월, 런던 Shaftsbury Avenue의 AIR Gallery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이들의 두 번째 공연은 76년 8월, 윈체스터의 Hat Fair 공연이었다. 이 공연에 관련하여 출판된 기사에는, 향후 인더스트리얼 음악의 일반적인 이미지가 될 포스트-아포칼립스적 풍경에 대한 기대와 함께 P-Orridge가 Throbbing Gristle의 음악을 "몽환적이고, 기계적이며, 청자를 갈아버릴 것이다"라고 묘사했었다. Throbbing Gristle의 3번째 공연은 [Prostitution] 전시의 개막 공연이었다.

    https://youtu.be/8XIENzVOHBQ
    "Something Came Over Me"

    이 개막 공연은 일반적인 전시회 개막 공연의 '고급 문화'적 전통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공연이었다: 와인 대신 맥주, 연설 대신 스트리퍼, 절제된 배경음악 대신 Throbbing Gristle과 펑크 밴드 Chelsea(이 공연에서는 LSD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의 공연이 있었다. P-Orridge는 Chelsea의 후원자였던 John Krivine과 헐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고, 그래서 Chelsea가 개막 공연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John Krivine은 "BOY"라는 이름의 의류 업체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업체는 Malcolm McLaren의 "Sex"와 직접적인 경쟁을 하고 있는 업체였었다. Tutti는 말했다. "Krivine과 McLaren은 Tesco와 Sainsbury's같은(역주: 둘 다 영국의 거대 슈퍼마켓 체인입니다) 관계였다. 둘 모두 같은 종류의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처럼 Krivine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McLaren과는 그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었다."
     이 파티에는, 성공적인 파티라면 으레 그러하듯이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려 혼란스러운 시장통에 가까운 파티가 되었다. 600명이 넘는 사람들이 ICA에 몰려들었으며 이 중에는 스트리퍼, 하원의원, 기자, 비평가, 그리고 Mick Jones, Siouxsie Sioux, Steve Severin같은 펑크계의 유명인사들도 있었다. P-Orridge가 입을 열어 공연을 소개하자 모든 청중들이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오늘 밤 여기에 찾아온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하고 싶다. 런던에 이렇게나 많은 팝 팬들이 있었다니, 좋은 일이다. 오늘 밤 우리는 [Music From The Death Factory]라는 이름의 1시간짜리 공연을 진행할 것이다. 이 공연은 기본적으로 문명의 붕괴 이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들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런던의 길거리를 걷다 보면 곳곳에 파산한 공장들이 즐비하고 바닥에는 포르노에 대한 기사가 적힌 낡은 신문쪼가리와 [Page 3]지의 핀업 걸 사진들이 바람에 날리곤 한다... 그러다가, 폐쇄된 공장 너머에서, 흥미로운 소음이 울려 퍼져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소음은 Throbbing Gristle이었다. P-Orridge는 베이스와 일렉트릭 바이올린 및 보컬, Christopherson은 테이프와 트럼펫, Tutti는 기타와 코넷, Carter는 키보드. 1시간 이후, 공연은 피드백 노이즈의 구름 속에 둘러쌓여 끝을 맺었다. 아주 소수의 인원만이 박수를 쳤다.
     다음날 아침 COUM Transmissions와 ICA는 일어나자마자 온갖 언론기사의 홍수 속에 묻혀버리게 되었으며, 이는 사실 향후 일어날 도덕적 혼란과 논쟁에 대한 서막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심각한 경제위기가 진행되던 시기(역주: 1976년 영국은 점점 심해지는 경제난을 겪는 상황이었으며, IMF의 자금 지원까지 받고 있었습니다. 결국 1979년 정권이 교체되고 마가렛 대처가 총리에 당선됩니다)에, 이 정도로 도발적인 아방가르드 예술에 국민의 세금이 쓰였다는 사실이 엄청난 주목을 이끌게 되었으며, 이는 문명의 종말이 실제로 임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보수당의 하원의원 Nicholas Fairbairn은 "이 자들은 문명을 파괴하는 사람들입니다"라는 말까지 했다. "Orridge 씨는 영국을 창녀로 만들어 매춘을 시키고 있으며, 그 비용에 대한 청구서를 우리들에게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The Sun]지와 진행한 분노에 찬 인터뷰에서의 발언이었다.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도덕적 가치들에 대해 총공격을 실시하는 것이 COUM Transmissions의 의도였던 것일까? Tutti는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나름대로의 강한 도덕적 가치와 양심이 있었고 이에 따라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었다. 우리의 눈에 비친 것들은 전부 위선 그 자체였고, 우리는 그 위선들을 정말 싫어했다. 도덕적 가치들을 끌어내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누구도 도덕적 가치들에 따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깨닫기를 바랬다. 특히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뛰어나다고 말하며 자기 자신을 어떤 제단 위로 올려놓는 종류의 인간들일수록, 실제로는 오히려 도덕적 가치를 더 완전하게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전시회에 여러 도색잡지들에서 가져 온 것들을 사용했던 이유는 그러한 싸구려 잡지들 또한 행위예술 만큼이나 내 삶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Prostitution] 전시는 COUM Transmissions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던 전시였다. 이 전시에서 싸구려 잡지들을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완전히 멍청한 짓거리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위선' 그 자체였을 것이다. 무슨 대단한 비밀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 삶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The Sex Pistols가 그랬듯이, P-Orridge와 Tutti는 [Prostitution] 전시 2달 후에 TV 쇼에 나와 자신들의 예술에 대한 의견을 직접 이야기했다. 하지만, The Sex Pistols가 스스로를 설명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 둘은 곳곳에서 제기되었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예리하고 상세하게 입장을 정리해 적극적으로 논의하였다. P-Orridge는 언론이 자신의 의도를 왜곡하고 대중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Prostitution] 전시는 언론을 비판하기 위한 의도로 기획되었던 전시였고, 직후 언론이 야기해버린 논란은 P-Orridge의 의도를, 대중의 의견에 대해 너무나도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언론에 대한 불안감을 그대로 증명해주는 실증 사례가 되었다. Tutti는 자신들이 언론에 오르내린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흥분했으나 거의 곧바로 그 흥분이 식어버렸었다고 기억했다. "TV 인터뷰를 진행할 때 쯤 되어선 우리 모두 이제는 질렸다는 기분이었다. 거처 주변에는 온갖 기자 나부랭이들이 매일같이 설치고 다녔으며, 주변 상점가에 들러 직원들에게 우리에 대해 온갖 질문을 해대는 것이 일상이었다. Gen은 누구보다도, 나보다도 훨씬 더 못 견뎌했었다, 거의 이성의 끈을 놓기 직전이었다. TV 업계 사람들은 우리 전시를 일상적인, 별 거 없는 한때의 소동으로 격하하려는 것 같았다, [Prostitution] 전시가 불러일으킨 소란은 결코 일상적인 소동 따위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Prostitution] 전시가 불러 온 주목은 당장은 딱히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Throbbing Gristle에게는 판매할 만한 앨범 같은 것이 딱히 없었으며, 레이블 중에서는 Virgin 정도만이 관심을 보여주었지만 Virgin이 요구하는 제한 사항들은 Throbbing Gristle로써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정도의 것들이었다. 그 어떤 기성 레이블도 Throbbing Gristle가 원하는 수준의 자유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직후 멤버들은 자신들의 레이블을 설립하게 된다. Christopherson은 다소 사무적인 어조로 설명했다. "우리는 Throbbing Gristle이 적절한 그룹으로 보여지기를 바랬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레이블을 직접 소유하고 있어야 했고, 그래서 하나를 만들어보기로 했던 것이다: Industrial Records."

    https://youtu.be/QbVgBvpieRM
    "Persuasion"

    Industrial Records는 "Industrial Music for Industrial People"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문을 열었었지만, 이 슬로건이 내포하고 있던 아이러니(당시는 영국이 제조 산업 능력을 거의 모두 잃어버리고 있던 시기였다)는 자주 놓쳐지곤 하는 부분이었다. Industrial Records는 실제로도 앞서 말한 슬로건의 아이러니와 비슷한 맥락에서 사실상 '포스트-인더스트리얼'이었으며, 현재의 시대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여러가지 포스트모더니즘적 전략들을 활용함으로써 표현하였다: 모방(pastiche), 형식에서의 다원주의(stylistic pluralism), 전용(appropriation), 편집증(schizophrenia). Industrial Records의 감성은 1978년 Throbbing Gristle의 싱글 [United / Zyklon B Zombie]에서 잘 표현되어 있으며, 이 싱글은 "사람들이 푹 빠져버릴 만한 디스코 기반의 곡"이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발매되었지만 동시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The Velvet Underground의 곡 "I Heard Her Call My Name"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곡이기도 했다. 미니멀하면서도 기이한 커버 디자인 또한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고 있었다: 한 쪽 면에는 샤워실에 있는 인체의 형상과 함께 'Giftgas'(역주: 독일어로 '독가스'라는 의미)라는 문구가 적인 가스 캔의 이미지가 담겨 있었으며, 다른 쪽 면에는 뒤얽힌 팔과 다리의 사진과 함께 공영 주택단지의 창고들이 담긴 사진이 있었다. Tutti는 말했다. "우리는 COUM Transmissions에서의 경험을 통해 Throbbing Gristle 활동시에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배웠다. Throbbing Gristle는 분명한 방향과 목표가 있는 그룹이었다. 예술계 시절의 우리는 게임을 하려는 의도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계에서는 정 반대의 상황이었다. 우리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게임'을 해 보려고 하였으며, 그것도 우리 스스로 해 보려고 했었다."
     '록'이라는 게임의 필수 요소들 중 하나는 '록'스럽게 꾸미는 것이었다. [Prostitution] 전시에서 Throbbing Gristle는 전통적인, 일반적인 록 음악가의 이미지를 선택했었다. Christopherson은 설명했다. "1976년의 우리는 검은 티셔츠, 청바지, 가죽바지, 선글라스 등등을 입었는데, 표면적으로라도 '걸맞게' 보여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입고 다님으로써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무언가 친숙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비록 우리의 음악은 친숙한 구석이라고는 단 한 부분도 없는 음악이었지만 말이다. 시간이 흐른 후 나는 탱크탑이나 웃긴 티셔츠에 가죽바지를 입고 다니게 되었다. 의식적인 결정이었다기보다는, 뭐랄까 그냥 DIY적인 패션에 가까웠던 것 같다. 특이한, 집안용 옷들이 'Top of the Pops'에나 나올 법한 옷들보다는 훨씬 더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왔었다. 나는 점점 더 일상적이고 점점 더 평범한 옷을 입고 다니게 되었다. Throbbing Gristle의 '유니폼'은 나중에 생각해낸 개념이었으며 멤버들이 함께 통일성이 있는 옷을 입어보자고 내렸던 첫 번째 결정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유니폼을 입는다는 결정 또한 사실은 우리가 유니폼을 만드는 사람들과 친해졌기 때문이었다."

    https://youtu.be/5XpqCxJZdGs
    "United"

    외양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 음악은 어떠했었는지? Throbbing Gristle의 1977년 LP [Second Annual Report]의 라이너 노트는 이 앨범을 일종의 연구개발 프로젝트로 대하고 있었으며,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음향을 조작하여 청자의 행동에 있어 생리적/심리적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일종의 실험에 있었다. 하지만, Throbbing Gristle의 이와 같은 멋진 과학-페르소나의 이면에는 온갖 음악적 영향들이 숨어 있었다. Christopherson은 말했다. "나는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Captain Beefheart, 온갖 전자음악 앨범들을 소유하고 항상 듣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Throbbing Gristle 음악에 들어간 전자음악적 요소들 중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Chris가 가져온 Kraftwerk 및 초기 Tangerine Dream의 영향이었다, 클래식의 아방가르드 음악들이 아니라. 나는 그런 아방가르드 음악들에 대해 알고 있기는 했지만, Throbbing Gristle에서 나의 영역은 그런 부분이 아니었다; 나는 멜로디나 리듬보다는 분위기 쪽이나 '컨셉'을 담당하는 편이었다. 물론 Throbbing Gristle의 음악을 '클래식'의 전통의 연장선으로 보여지도록 만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언제나 대중적인 음악을 만들어내기를 의도했었지."
     아방가르드의 정신을 대중문화로 이식하고 있을 때, Throbbing Gristle은 아방가르드의 초월적이고 충격적인 측면을 대중의 입맛에 맞추어 순화하려는 노력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다. 이들의 음악적 시도는 때로는 부드러우면서도 불길한, 자유로운 형식의 연주가 되었으며, 때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시끄러운 리듬에 폭력적인 이미지들로 가득한 가사를 광기 어린 목소리로 전달하는 음악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에 흥미를 느끼게 된 사람들은 곧 이들을 광적으로 좋아하기 시작했으며 점점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되었다. Industrial Records는 더 이상 Throbbing Gristle만을 위한 레이블이 아니게 되었으며, Carter의 표현에 따르자면 "일렉트로닉 개러지 그룹들" 간의 네트워크의 핵심에 해당하는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Monte Cazazza, Leather Nun, SPK, Clock OVA, Cabaret Voltaire, Thomas Leer, Robert Rental같은 음악가들의 앨범이 Industrial Records를 통해 발매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https://youtu.be/mfZDhs1uRPI
    "Medicine"

    Throbbing Gristle의 체제전복적이고 비타협적이면서도 때로는 유머러스한 익살이라는 '다양성'은 오늘날의 인더스트리얼 장르가 보이는 명백한 경계 바깥에서의 그룹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어느 정도는 역효과가 나 버렸던 것이 맞다." 1980년대 중반, P-Orridge는 Jon Savage에게 인정하는 말을 했다. "쓸데없음과 진지함 사이를 구분하기가 불가능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결국에는 불건전한 사람들과 불건전한 아이디어들을 만들어버리게 되었다, 비록 우리의 의도를 오해하고 잘못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던 것은 바로 그 사람들이었지만 말이다. 누가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나의 경쟁 따위가 되어버렸다, SPK의 경우는 실제 시체들이 나오는 영상을 사용했고... Whitehouse같은 밴드들도 있겠다, 나는 진심으로 경멸하는 밴드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서 기어다니는 구덩이를 만들어 버리게 되었다는 것이, 상당히 무섭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이런 '전형적인 인더스트리얼 그룹'들이 생겨남과 동시에, '전형적인 인더스트리얼 팬'들도 따라붙게 되었다. P-Orridge는 이어갔다. "'그들'은 닥터 마틴 신발을 신고 군복 바지와 검은 가죽 재킷, 나치 느낌을 주는 장식들, 스킨헤드 혹은 검은 머리 차림이다. 대체로 남성들이며, 살인자에 대한 책들을 수집하고 스스로도 살인자들, 특히 성범죄와 살인을 같이 저질렀던 사람들에 대한 글을 쓰고 다닌다. 자기들이 만들었다고들 하는 인더스트리얼 음악을 녹음한 테이프도 제작하고 다니는데, 그 음악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그냥 피드백 노이즈에 불과한 것이다. 이들은 Throbbing Gristle의 해체에 대해 한탄하면서 Throbbing Gristle 멤버들이 무언가 엄청나게 멋진 것을 배신했다고 생각한다."
     Tutti 또한 Throbbing Gristle가 창조한 서브컬처에 대해 양면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에게 이끌린 사람들 대부분이 벼랑 끝에 몰린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뭐랄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그들만의 국제적인 모임을 만들버리게 된 것 같았다. 우리가 새로운 서브컬처를 만들어내려고 활동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 문화는 누군가들이 필요로 했기에 스스로 알아서 만들어졌던 것에 가까웠다. 누군가가 필요로 한다면, 그게 무엇이든지간에 결국에는 알아서 만들어지게 되는 법이다. Throbbing Gristle가 죽어버리게 된 것은 사람들이 Throbbing Gristle를 일종의 '안식처'라던가 '천국'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무슨 권위있는 '예술 위원회'같은 위치로 떠받들기 시작했고, 그래서 우리는 밴드를 해체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우리를 우상화하는 팬 같은 건 원하지 않았다."
     어쩌면 Throbbing Gristle가 남긴 진정한 유산은 90년대의 클럽과 레이브 문화가 훨씬 더 정교하고 압도적인 멀티미디어로 변화하던 과정을 묘사하는 세세한 부분들 사이에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고립주의자들과 '다크 앰비언트'라는 이름 아래에 모인 몇몇의 음향 예술가들 사이에.

    https://youtu.be/XEusQWIlKao
    "20 Jazz Funk Greats"

    Throbbing Gristle는 1981년 6월 23일, 이 문구를 적은 엽서와 함께 공식적으로 활동을 중단하였다: "'Throbbing Gristle: 미션은 종료되었다'... 원형(archetype)은 연구되었으며, 정보는 저장되었다. 여러분의 관심과 지원에 감사한다." 하지만 Throbbing Gristle 해체 이후 멤버들의 행보, 창조적이고 독특한 음악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던 행보를 보자면 멤버들의 얼마나 깊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P-Orridge는 Psychic TV를 결성하였고, Christopherson은 Psychic TV  Coil에 참여하였으며, Carter와 Tutti는 Chris & Cosey CTI를 시작하였다. Throbbing Gristle의 음반들은 여전히 제작되어 판매중이며, 반쯤 공식적인 부틀렉들도 꾸준히 계속해서 나타나는 중이다.
     [Prostitution] 전시가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는 생각은 편리하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모든 문화 운동의 기원에 관련된 일종의 신화들이 존재하며 인더스트리얼 문화의 경우에는 그 신화가 [Prostitution] 전시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쉬운 길이겠지만, 사실 그 전시는 기원이라기보다는 그저 이전부터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발전되어지고 있던 어떤 과정의 한 단계였을 뿐이다. 하지만 어쨌든지간에, 이런 '분석'따위에 지쳐버렸다면, Nicholas Fairbairn 의원의 의견에 동의하고는 이 모든 것들이 그냥 이런 것이었다고 생각해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업계의 모든 괴짜들, 동성애자들, 병신들, 멍청이들이 노출증을 마음대로 뽐내기 위해서 만들어낸 변명"이었을 뿐이라고.

    https://youtu.be/ppmFQEPUsTo
    "Discipline" (Live at San Francisco,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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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ter Christopherson (1955.2.27. - 2010.11.25.) / Chris Carter / Cosey Fanni Tutti / Genesis P-Orridge (1950.2.22 - 2020.3.14.)

    Rest In Peace

     

    2022/05/31 0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