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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pes, for Experts[...] 2023. 3. 30. 01:45
https://strategictapereserve.bandcamp.com/album/shapes-for-experts
이건 뭐야?
이제껏 나름대로 여러 음악을 들어오며 상상 가능한 온갖 이상한 것들은 적어도 한 번씩은 들어봤다고 생각했건만, "새로운 삼각법을 이해하기 위한 센터"(The Center for Understanding New Trigonometries)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단체(?)가 발매한 [Shapes, for Experts]를 재생하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뭐 이딴 게 다 있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명백히 장난이었다. 단순한 전자음의 반복을 배경으로 한 남성(해설자?)과 한 여성(자칭 "Shape Expert"라는, [핑크 플라밍고]의 미스 에디 수준으로 모양에 집착하는 사람)이 "모양"(Shape)에 대해 온갖 장광설을 늘어놓는 이 음악(?)은 분명히 헛소리였고, 농담이었다. 밴드캠프 태그는 #교육, #수학, #기하학, #아주 진지함 따위를 달고 있었다... 당연하겠지.
이 테이프는 "전략적 테이프 보존"(Strategic Tape Reserve, STR)이라는 이름의 독일 레이블에서 발매하고 있는 시리즈, "듣기로 배우기"(Learning by Listening)의 6번째 테이프였다. 설명을 보니 STR은 '서독'의 쾰른에 위치하고 있으며 완전히 독립적인 단체로 자기테이프에 담긴 내용물들의 보급과 관리를 목적으로 한다고 쓰여 있었다. 컨셉충이었다. 독일이 아니라 서독이라? 낡은 감성을 일부러 준 레이블 로고도 그렇고,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장황한 설명도 그렇고, 이 레이블의 주인장은 소련 붕괴 이전 '냉전의 시대'에 일어났던 온갖 이상한 짓거리들의 분위기에 과하게 집착하고 있었다. 앨범의 설명을 좀 더 보니, 이 앨범은 고등교육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초심자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최소한 기본적인 모양들(사각형 등)에는 익숙해진 다음에 듣기를 시작하라고 쓰여 있었다... 하, 물론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전자음들은 의외로 매력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전혀 진지하지 않은 헛소리 범벅의 기계적인 나레이션 또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구석이 있었다. 이 작자들(아마도 거의 분명하게 레이블의 설립자도 포함될 것이다)은 분명히 장난을 치고 있었지만 이 장난은 뭔가 아는 놈, 뭔가 평범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 취향을 가진 사람, 음악을 좀 해 본 경력자가 만든 것 같이 느껴지는 장난이었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음악이었지만 정확히 어디서 들었던 것인지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애니멀 콜렉티브? "#1"같은 곡이 생각나기는 하지만, 이들은 조금 너무 과하게, 조금은 미친 것처럼 집착하고 있었다. 배경의 전자음악은 불현듯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의 [Garden of Delete]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사실은 영어 듣기평가 전에나 나올 법한 인위적인, 인공적인, 가짜 같은 산뜻함을 가진 반주이기도 했다. 기이한 나레이션 - 쓰로빙 그리슬? 화이트하우스? 아니면 [White Light/White Heat]의 벨벳 언더그라운드? "Painless Childbirth"의 나레이션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스산한 공포와 기괴함 그 자체였지만, 이 나레이션은 무섭다기에는 너무 과장되어 있었고 이상했고 우스꽝스러웠다. 평범한 모양들과 평범하지 않은 모양들, 신의 손의 모양... 오컬트? 코일? [마스터]에 나왔던 것 같은 유사과학들?
이 테이프는 분명히 아무것도 아니었고, 장난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째서 아직도 이 테이프를 듣고 있는 것인가? 이상한 매력이, 스스로에게도 설명하기 힘든 매력이 있었다. 도형에 대한 내용이 흥미로워서? 애초에 나는 원어민도 아니고, 나레이션의 내용은 집중하지 않으면 무슨 소리인지 쉽게 이해되는 것도 아니었다. Shape? 도형? 도형의 전문가? 쇼핑몰에서 모양 전문가를 꾀어내려 울부짖었던 일? 톨스토이? 피를 흘리는 예수의 환영과 그의 불가해한 형태? 페트리디쉬? 에릭 사티? 아폴로니안 개스킷의 최음효과? 정말로, 진지하게?
STR이라는 레이블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졌고, 레이블의 웹페이지에 들어갔다. 온갖 비효율적인 표현과 미사여구로 늘어진 기다란 글들은 읽어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레이블의 설립자라고 하는 사람의 인터뷰도 있었다. STR을 설립할 무렵, 쾰른에서 거주 비자를 얻기 위해 여러 관청을 들락날락하며 행정적 처리를 기다리며 기나긴 시간을 그저 소모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자는 곧바로 이 관료주의와 느려터진 행정처리가 사실 굉장히 친절하게 느껴졌고, 실제로 일이 원활하게 잘 진행되도록 도와주었다고 덧붙였다. 무한한 자유와 '다 좆까라'식의 반항 대신 고압적이고 훈계적인 태도의 추구. 그럴싸한 구석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관료주의, 전체주의, 통제, 제한과 억압 속에는 모종의 편안함이 있기도 하니 말이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이해할 수 없는 첨단기술이 끝없이 돌아가고 있는 공장단지, 대심문관의 이야기 - 자유 대신에 빵을, 카프카의 불가해한 자유와 규율, "I want discipline"... 나는 인더스트리얼의 변태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테이프는 음향적으로는 인더스트리얼과 상당히 달랐지만, 주제 측면에서는 연결되는 부분이 있었다. 이 작자는 어쩌면 중국의 수능시험장처럼 무한히 펼쳐진 책걸상과 거기에 앉은 무한한 '학생'들이 헤드폰을 쓰고 모두가 이 테이프를 들으며 모양에 대해 '들으며 배우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이 테이프를 만들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복제와 몰개성, 통제의 미학...
테이프는 끝났고, 나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듣기로 배우기? 이 테이프를 듣고 내가 무엇을 배우기는 했을까? 머릿속에는 새로운 지식은 한 톨도 없이 이런저런 쓰잘데없는 상념들과 기억들, 이미지들이 이리저리 뒤얽혀 있었다. 레이블 설립자는 인터뷰에서 자유로운 자기 표현이 아닌 분명한 의도와 목표를 가진 도구로서의 음악, 라이너 노트를 전달하기 위한 매체로서의 음악, 엘리트들의 명령에 따라 착실한 납세자의 세금을 거둔 후 그 돈을 낭비해 만든 난해한 엉터리 음악 같은 말이나 하고 있었다. 라이너 노트: 음악의 힘을 통해 인간의 정신의 특정한 영역에 사실들과 추상적인 개념들을 매끄럽게 주입하도록 제작되어진 테이프? [시계태엽 오렌지]의 루도비코 요법?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들이 '세뇌'에 가까운 정도 만큼은, 이 테이프도 실제의 '교육'을 수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장난이었고 큰 의미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이 장난질에는 어떤 힘이 있었다, 적어도 나라는 청자 한 명에게는 온갖 잡생각을 떠올리게 만든 힘이. 비록 이 테이프는 아무것도 아니며 나 또한 이 테이프의 제작자처럼 의미도 없는 것에 쓸데없이 집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고, 아마 실제로 그러고 있는 것이겠지만.
무엇을 들었던 것인지, 무엇을 얻어냈는지 알 수 없는 느낌. 괜찮은 음악을 들었을 때의 느낌이었다...
- 모양 전문가들을 끌어들이는 방법 -
1. 쇼핑몰처럼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가만히 섭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몸을 비틀며 낯선 사람들에게로 넘어집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양 전문가들이 당신에게 주목할 수도 있습니다.
2. 쇼핑몰처럼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가만히 섭니다. Sharpie 펜 같은 마커 펜을 사용하여,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불규칙적인 형태를 온 벽에 전부 그립니다. 눈을 감고, 크고 두꺼운 선들을 길게 그립니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와서 "이거 skewtoid 군요."라는 말을 건넨다면, 당신은 스스로가 모양 전문가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3. 우리 웹사이트에 방문하려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4. 쇼핑몰처럼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우리 웹사이트에 방문하려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2022년 4월.
※밴드캠프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이 테이프와 레이블의 존재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밴드캠프의 탄생은 21세기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건들 중 하나였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 모습을 유지하기만을 바랄 뿐이다.2022/04/07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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