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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fused Are Not Fucking Dead III
    [...]/[REFUSED] 2023. 3. 21. 09:20

    이 인터뷰는 [Noisey] 에디터가 Refused와 며칠 같이 다니면서 취재하고 기사로 쓴 글입니다.

    https://youtu.be/wRMXTvsCBw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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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popsongsfortherevolution.noisey.com/

    REFUSED Interview: Pop Songs For The Revolution


    지금, 그 어떤 것도 진짜같지 않게만 느껴진다.


    나는 Refused의 투어 버스 뒷쪽에 앉아 있다 -- 쬐끄만 밴이 아니라 45피트짜리 멋진 버스, 편안하게 도로를 질주하는 짐승 말이다. 버스 안에는 2개의 Sony TV와 샤워시설, 부엌, 와이파이, 가죽 소파가 구비되어 있다. 밴드 멤버들은 유럽발 26시간의 비행 피로로 인해 각자 자기 침상에서 잠들어 있다. 나는 일어나 앉아, 앞으로 며칠간 그들에게 할 질문들이 빼곡히 적힌 노트를 뒤적거리고 있다. 거의 20년 전에, 이 스웨덴 펑크 밴드는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선언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다시는 같이 모여서 연주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과거를 미화하거나 기념하려는 노력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마지막이자 통렬한 메니페스토였던 "Refused Are Fucking Dead"에서 이런 말을 썼으며, 이 글은 그들이 극적으로 자폭한 직후에 발행되었다. 이 메니페스토에는 대문자로 씌어진, 특별히 두드러지는 글귀가 있었다: "우리는 멍청한 기자들한테 어떤 인터뷰도 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강조 문구도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신문들이 REFUSED의 사진을 전부 불태워 버리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여기 이렇게 이들이 있다 -- Refused, 그들은 다시 모여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고, 17년만의 새앨범 [Freedom]의 홍보차 13일간의 미국 투어를 하려 하고 있고, 나, 이들과 같이 다니기에는 지적 수준이 의심스럽기만한 기자인 내가 있다. 이 동행이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 노골적인 아나키스트들이 나를 Nevada 사막 한가운데에 버려두려고 작정하고 꾸민 일일지도 모른다는 걸 의심해 본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나를 혼자 길바닥에 버려두고 버스는 유유히 떠나는 악몽을 꾸었다. "언론을 몰살시켜라!" 그들은 나를 두고 가운데 손가락을 쳐들어 보이고는 웃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Refused는 영원하리라!"

    그리고 아마도 잠에서 깨어나면 이들은 정말로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 그들에 대해 퍼져있는 소문이 너무 과장되어 있는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없는것이, 나는 그들에 대한 소문과 명성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이 물어보는 대상에 따라, 2가지 버전의 Refused가 존재한다.


    하나는 그들을 영웅으로 추대하는 관점이다 -- Umeå의 펑크 선지자들, 죽어버린 장르의 썩어빠져 잔뜩 부푼 시체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자들. 그들은 홀로 Umeå의 언더그라운드 씬을 탄생시켰으며 그 불길을 전 세계로 퍼뜨렸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반문화에 대한 위대한 가치를 위해 자기 자신의 검에 스스로를 던짐으로써 순교자가 되었으며, 이는 현대 행동파 음악의 절대적인 모델이었다.

    다른 버전은 이들을 배신자로 보는 것이다 -- 스웨덴의 쓰레기같은, 오로지 나중에 다시 돌아와 보상을 휩쓸어 가기 위해서 반자본주의를 설파하고 다닌 개자식들. 그들은 위선자로써, 90년대의 좋은 시절에 하드코어 씬의 집단들에게 극단적인 정치론을 주입시키고는, 자신들의 음악을 메이저 영화, TV 쇼, 비디오 게임에 팔아넘기고 나서 2012년 Coachella에서의 50만달러 공연 딜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 요새 불고 있는 재결성 유행에 붙어먹는 밴드들이 보여주는 모순적인 "gold standard".

    그들이 어느 쪽이던 간에, 우리는 같이 15번 도로를 달리고 있으며, Las Vegas의 황량한 사막의 파워 라인과 영혼없는 고개들을 따라, 젠틀맨 클럽과 루스 슬롯을 광고하는 늙은 코미디언과 그다지 닮지도 않은 Elvis 코스프레남이 박힌 간판을 지나쳐 가고 있다. 이 Sin City, 한밤중의 범죄가 당신을 찾아가는 그런 곳, 순진해 빠지고 낙천적인 관광객들이 마지막 동전까지 털어버리는 그 곳에서, Refused는 가장 큰 도박을 하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산을 걸고 도박을 하려 한다.

    이 스웨덴 밴드가, 파란 눈에 시차적응에 시달리는 남자들이, 디젤과 스타벅스 커피로 돌아가는 강철 무덤의 도시로 질주하고 있다. 지금은 2015년이고, 당신이 싫어하든 좋아하든간에 상관없이, Refused는 살아있다.

    음, 그러면 이제 어디로 가는 거지?


    https://youtu.be/6_rtU0-38-w


    저녁 9시 15분경, Las Vegas의 어두운 하늘에 번개가 번쩍였다.



    The Murder City Devils, 해체 이후에 생겨난 보상들을 즐기고 있는 또 다른 밴드인 이들은, 지금 무대에 올라 Punk Rock Bowling 관객들에게, Freemont Street의 카지노 불빛들로부터 고작 2블럭 떨어진 아스팔트 주차장에서 벌어지는 페스티벌에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공연을 하고 있다.

    "Midnight Service at the Mutter Museum"의 인트로가 울려퍼지려는 찰나, 정전이 일어났다. 페스티벌은 암흑으로 변했고 관객들은 신음하기 시작했다. 골치아픈 일을 담당한 페스티벌 직원이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번개가 지나갈 때까지 조금 쉬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관중들에게 말했다. 더 많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사람이 직원에게 "좆이나 까라"라고 소리지르는 것을 들었던 것 같다.

    하늘은 도시를 씻어내려는 듯이 비를 쏟아냈다. 무대 뒷편의 Refused 텐트로 돌아가자, 빗방울은 더욱 거세져 으스스하게 조용한 이 페스티벌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공기의 냄새는, 흠, 비에 젖은 펑크족 7,000명이 내는 냄새 같았다. Refused 멤버들은 소파에 앉아 워밍업을 하고 있었고, 나는 지금 상황이 어떤지를 말했다.

    "태풍이 온 거라면 좆같겠는데." David Sandström은 그의 무릎에 붙은 패드를 치워버리고 팔꿈치를 푸는 스트레칭을 하면서 (나이든 드러머가 제대로 연주하기 전에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하면서) 말했다. 그는 자기 수염과 갈색 안경을 강조해 주는 파나마 모자를 정말 좋아했다. 그의 목 한쪽에는 "Gods"라는 글자가, 다른 쪽에는 "Punk"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밴드의 투어 매니저인 Robin이 들어왔다. 그녀는 금발머리의 장신으로 업무를 놀라운 효율성으로 처리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밴드에게 말하길, 만약 30분 안에 비가 멎어들지 않는다면, 밤 10시 예정인 Refused의 헤드라이너 셋은 취소될 것 같다고 했다.

    "흠... 카지노에라도 가서 공연을 해야 할까?" 그녀는 농담조로 말했다.

    David Sandström은 드러밍을 멈추고 무표정한 얼굴로 Robin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농담이었어." Robin은 자기가 한 말이 어떻게든, 어디서든 Refused 공연을 오늘밤 해야 한다는 느낌으로 가는 것 같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차라리 농담을 설명하는 방향으로 갔다.

    텐트 문은 다시 열리고, Refused가 오랫동안 같이 일해온 Epitaph 레이블 사장인 Brett Gurewitz가 Ramones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여긴 몇 달동안 가뭄이었는데."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근데 시발 하필이면 지금 비라니?"

    마침내, 거진 1시간을 기다린 끝에 번개가 잦아들기 시작했고, 밤 10시 48분, 무대를 비추는 거대한 빛이 꺼지고 신곡 "Elektra"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이 공연은 2015년의 펑크 공연이었으므로, 수없이 많은 스마트폰 불빛이 올라와 사진을 찍으려 몸부림을 쳤다. "Nothing has changed!" 프론트맨 Dennis Lyxzén이 소리질렀지만, 그는 높이 쳐든 불빛들과 스크린들의 바다를 보고 있었고, 그 광경을 보는 나는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마이크를 요요처럼 돌리다가 공중으로 던져올렸다. 마이크는 한순간 정말 높이 솟아올라 있었지만, 이내 연결된 코드가 마이크를 땅으로 잡아 끌어내렸다. 떨어지는 마이크를 잡는 대신, Dennis Lyxzén은 팔을 양 옆으로 뻗고 가슴을 한층 부풀려 마이크로 자신의 흉골을 강타했다.



    Dennis Lyxzén은 비쩍 말랐지만 에너지가 넘치고 강인했으며, 두 발이 모두 땅을 딛고 있는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장난스러운 공격성을 연출했으며, 공간을 주먹보다는 기묘한 웃음으로 가득 채웠다 -- 하드코어 프론트맨이 흔히 보여주는 마초적인 폭력과는 아주 먼 거리의 행동을. 그는 흔히 마술사들이 보여주곤 하는 극적인 쇼맨십을 보여주었으며, 손을 흔들다가 "기대하시라!" 같은 동작을 취하며 기타 리프나 드럼 비트에 구두점을 찍어 밴드가 마치 마술트릭을 보여주는 듯 하게 만들었다. David Sandström은 그의 버릇을 "투우사와 발레리노의 결합 같다"고 묘사했다. Refused 서부 투어의 오프닝을 맡았던 White Lungs의 Mish Way는 그를 "James Brown과 스트리퍼 중간쯤에 해당하는 것 같다"고 비유한 적이 있다. 그녀의 비유는 상당히 맞는 축에 속한다. Dennis Lyxzén은 마이크 스탠드를 방으로 가져가서는 James Brown 비디오를 보며 그 소울의 대부가 보여주는 성(性)적인 무대매너를 따라 연습하고는 했다. 이번 투어의 막바지 무렵, Hello Kitty 속옷이 버려진 무대를 뒤로하고 공연이 끝났을 때, 나는 무대 뒤에서 David Sandström과 Dennis Lyxzén이 스웨덴어로 뭔가를 얘기하며 폭소를 터뜨리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내가 그들이 나눈 대화가 무슨 뜻인지 헛되이 추측하고 있는 꼴을 알아챘다. "어, 음," David Sandström은 적절한 번역을 생각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방금 관객들하고 자기가 섹스한 거라고 하더라고."

    대략 1시간동안, Refused는 2개의 또 다른 신곡과 함께 Las Vegas를 강타했다. 그들은 아직 정식 발매까지 몇 주나 남은 새 앨범 곡들을 너무 많이 연주하지 않으려고 주의했으며, YouTube에 신곡이 유출되는 디지털 시대의 사태를 방지하려고 했다.

    "어렸을 때 했던 병신같은 말이 당신을 평생동안 따라다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Dennis Lyxzén은 비에 젖은 관객들에게 물어보았다. "이 재결성에 있는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 사람들은 우리에게 'Refused are fucking alive!' 라고 소리지를 것이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우리는 우리가 말했었던 모든 것들을 다시 되돌려 줄 곡 하나를 연주할 것이다. 좆같이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은 "Refused Are Fucking Dead"를 시작했다.

    공연의 마지막 음이 울려퍼졌고, Dennis Lyxzén은 무대 위에 똑바로 섰다. 그는 손으로 Peace 사인을 하고 그것에 입맞춘 후 번쩍 들어올렸고, 미소지었다. 그는 땀으로 완전히 쩔어버렸지만 셔츠는 어째서인지 풀어지지 않았다.

    페스티벌 관객들이 빠져나가는 도중, 나는 내 옆에 선, 너무 티셔츠를 오래 입어 글자가 하나 닳아 RE USED라고 쓰인 옷을 입고 있는 Refused 광팬을 보았다. 반백의, 수염을 잔뜩 기른 남자가 한 손에는 맥주를 들고 다른 쪽에는 그의 연인을 잡고는 나를 지나쳐 갔다. "에," 그는 옆의 연인에게 말했다. "나는 아직도 저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겠어."


    https://youtu.be/HlppElW_DFY


    자신의 인생 또는 투어 밴을 불타는 화염에 처박아 왔던 리드 싱어 Dennis Lyxzén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Refused는 스스로를 가장 시적인 방식으로 끝내버렸다. 마지막 공연의 바로 중간 시점에, 따분하기 그지없는 Virginia의 정말 아무것도 아닌 지하실 공연장에서, 경찰 (바로 펑크 록 최대의 적) 은 강제로 쳐들어 와서는 전원을 내려버림으로써 불만에 가득찬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밴드는 그들의 유서를 마지막 메니페스토로써 작성했고 제각기 다른 길을 걸어갔다.

    이 일은 1998년, 7년이라는 시간동안 베이시스트들을 12명이나 갈아치워 오던 밴드가, [The Shape of Punk to Come], 그들의 최고작으로 여겨지게 된 작품을 발매하고 얼마 안 있어 일어난 일이었다. 밴드의 3번째 앨범이었던 그 앨범은, 그들이 1991년 스웨덴의 작은 마을에서부터 연주해 오던 직선적인 하드코어 펑크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들은 Reagan 시대인 1980년대를, 대놓고 전투적이었던 Dead Kennedys, Minor Threat, D. O. A. 및 수많은 다른 밴드들이 번성하던 그 시절을 통해 성장해 왔었다. Refused는 번영하고 있는 경제가 하드코어라는 장르를 길들이고 상업적으로 먹히게 만들어 MTV와 대형 음반 체인점에 잔뜩 올려두던 바로 그 1990년대에 이 불꽃을 다시 지폈다. [The Shape of Punk to Come]은 모던 펑크의 결합체와 같았으며, 하드코어의 수많은 서브장르들을 산산이 부서져있으면서도 깔끔하게 결합된 패키지에 담았다. 재즈 간주곡,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독백, 애절한 바이올린, 기차역에서 광적으로 울리는 라디오 다이얼. 그 앨범은 아이디어들과 음향들이 완벽하게 융합된 카타르시스의 패치워크였다.

    하지만 당대에 그 앨범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바닥으로 추락했으며, 발매된 해에 고작 1,400장이라는 최악의 판매량을 보였다. 거의 아무도 리뷰를 써 주지 않았고, 거의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았다 -- 심지어 Refused의 광팬들조차도 [The Shape of Punk to Come]를 들어보고는 자기가 어째서 테크노 비트가 나오는 하드코어 음반 같은 거를 산답시고 돈을 썼는지 의아해 할 정도였다.

    앨범에 대한 맥빠지는 반응에 대한 실망감은 수수께끼의 내부 문제와 합쳐져 밴드에게 다가올 좆같은 일의 서막을 열었다. "우리는 각자의 냄새를 역겨워했었고, 각자의 목소리를 역겨워했었다." David Sandström은 그 시절을 이렇게 기억했다. 대략 1달간 지속되었던 지옥같은 스칸디나비안 투어에서, 밴드를 엮고 있는 구조는 서서히 찢어지기 시작했다. 스웨덴에서의 한 공연에서 Dennis Lyxzén과 기타리스트 Jon Brännström는 말 그대로 주먹질을 하면서 무대 위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또 다른 공연이 끝났을 때, [The Shape of Punk to Come]의 곡들을 공연에서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한계에 절망한 David Sandström은 드럼 키트 전부를 계단 밑으로 던져버리고는 드럼스틱으로 머리를 찔러대다가 밤거리로 도망쳐 버린 적도 있었다.

    "[The Shape of Punk to Come]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그 앨범을 만들 때 이번이 마지막 앨범이 될 것이라고 결정을 내렸었다는 것이다." 기타리스트 Kristofer Steen은 말했다. "물론 밴드를 해체하자는 논의가 나왔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끝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끔찍한 이유 때문에, 지옥같았던 스칸디나비안 투어가 끝나고 고작해야 4달밖에는 지나지 않았을 때, 밴드는 미국으로 가 DC 하드코어 밴드 Frodus와 함께 6주간의 투어를 돌아야만 하게 되었다. 미국 땅을 밟았을 때 Refused는 사실상 걸어다니는 송장에 가까운 상태였다. "그들은 그 미국 투어를 오지 말았어야만 했다." Frodus 드러머 Jason Hamacher는 당시를 회고했다. "그들은 그 투어를 돌만한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예시를 들자면 이렇다: Jon Brännström은 장비를 하나도 가지고 오지 않았었다. 기타도 없었고, 앰프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장비가 필요할 거라고 말해주지를 않았다. 그들은 이미 끝나 있던 상태였던 것이다."

    Atlanta에서 그들은 결정을 내렸다. Refused는 이제 끝이다. 그들은 앞으로 8일간의 공연을 하고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가기로 합의했다. 분노, 좌절, 후회의 첫 단계를 지나자, 밴드 내에는 짐을 덜었다는 이상한 평화로움이 찾아왔다. 어두운 구름이 걷힌 듯한 느낌이었고, 밴드는 적어도 자신들의 장례 행렬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밴드가 10월 6일 예정된 공연을 하러 Virginia의 Harrisonburg에 도착했을 무렵, 이 공연이 Refused의 마지막 공연일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밴드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팬들이 몰려왔다. 좁아터진 지하실 공연장에는 75명의 팬들이 가득 찼고, 너무 사람이 많은 나머지 관객들은 거의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나도 내가 그날 밤 그곳에 무언가 특별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랬다." David Sandström은 몇년 후 공개된, 밴드의 죽음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Kristofer Steen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공연이 시작하기 전 너와 내가 서로를 바라보던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카메라는 기타를 연주하는 Kristofer Steen의 얼굴을, 그의 주름진 얼굴이 공허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것을 클로즈업했다.

    "그 모습은 정말 이상해서 일생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줄 수가 없었다. 어떤 위안조차도."


    2곡이 연주되었을 때, Harrisonburg 경찰이 등장하여 공연을 그만두라고 위협했다. 그들의 시간이 이제 정말로 끝나간다는 것을 알아차린 Refused는 최후의 저항으로써 그들의 마지막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바닥이 울리기 시작했고 팬들이 꼽는 명곡 "Rather Be Dead"의 첫 소절이 흘러나왔다. 혼돈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머리 위로 올라가 서핑하였으며 천장에 머리를 박아댔다. 기타는 도끼처럼 휘둘려졌다. 날아다니는 주먹과 발길질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수없이 많은 육체들의 틈 사이로, Dennis Lyxzén은 그 때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가사를 소리질렀다.

    "Rather be dead than alive by your oppression.

    Rather be dead than alive by your design."

    하지만 그들이 곡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정전이 일어났다. "경찰들은 말 그대로 플러그를 뽑아버렸다." 당시 South High Street에 살던 Matthew Strugar는 기억했다. "그냥 두꺼비집을 내려버리더라고." 그와 몇몇 사람들은 체포당하기까지 했다.

    경찰관의 손전등이 공연장을 비췄다. 관중들은 적대적이 되어갔고 경찰을 둘러싸 야유했다. 하지만 Refused 멤버들은 오히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들에게 경찰관의 손전등 빛은 마치 천국이 열릴 때의 빛과도 같게 보였다: 그들을 집으로 인도해 줄, 제복 차림의 천사들.

    Kristofer Steen은 자신의 오른쪽으로 경찰관이 가까이 다가와 신분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신분증을 건네주고는, 마치 밴드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그 지하실 공연장에 버려둔 것 처럼, 다시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이 와중에 관중들은 점점 더 열받기 시작했다. "Rather be alive!" 그들은 합창했다. "Rather be alive!" 점점 더 시끄럽게. "Rather. Be. Alive!"

    그리고 그것이 Refused의 끝이었다.


    https://youtu.be/KC58HzENhoQ


    식당에 앉아 Kristofer Steen 그리고 David Sandström에게 Refused를 끝장냈던 그 미국 투어에 대해 듣는 도중,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이 Bruce Springsteen의 "Born in the USA"라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David Sandström, 밴드에서 가장 상냥하고 말 많았던 그 남자는, 지금 의외로 말을 별로 하지 않고 있다. "그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하지만... 어쨌든 일이 정말 안좋게 끝났었다. 나에게도. 우리들 모두에게도."

    그와 Kristofer Steen은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 있다. 짧게 자른 머리를 하고 평범한 티셔츠를 입은 Kristofer Steen은 밴드에서 가장 평범한 외양을 하고 있다. 그는 조용했지만 날카로운 감각을 갖고 있었고, 가끔 가다가 기가 막히게 적절한 말을 한번씩 하지만 보통 웅얼거리고 말기만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 때의 분위기는 아주 이상했었다." David Sandström은 말한다. "수동적인 공격성(passive-aggressiveness)도 많았다. 연기도 정말 많이 했다. 가끔 혼자서 그 때 일을 생각해 보자면, 간단했다. 나는 그저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었다." 그는 그 당시 23살이었다. "나는 말하자면 작동이 멈춘 상태였었다. 나는 사라져 버렸다. 생각해 보면 개인적인 문제들이었던 것 같다."

    Kristofer Steen이 끼어든다. "'개인적인 문제들'이라고 표현한다면 말을 좀 덜한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가, 물어본다. 뭔가 특별한 상황이 있었던 것인가?

    Kristofer Steen은 절반쯤 웃는다. "분명히 특별한 상황이 있었지."

    "그와 나는..." David Sandström은 말을 멈추고 Kristofer Steen의 눈치를 살피며, 말해도 될지에 대한 허락을 구한다. 그는 허락을 구한다. "우리 둘은 동시에 한 여자를 사랑했었다."

    우리는 점심을 앞에 두고 침묵 속에 앉아 있다. 언제나 Refused를 불가사의한, 이상주의적인 힘으로 여겨 온 사람에게 있어, 이 것은 그들이 사실 인간이었다는 것을 폭로해 버리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나는 이들을 북극권에서 온 수수께끼의 아나키스트 컬트 멤버가 아니라, 그저 Califonia의 한 식당에 앉아 Hot Mother Clucker 라는 이름의 치킨 샌드위치를 먹는 두 명의 남자로 보게 되었다.

    나는 Dennis Lyxzén이 언젠가 내게 말했던 것을, 지금 상황에 적절하게 들어맞는 말을 떠올린다. "Refused는 2개이다." 그는 말했다. "실재와 이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을 부여하고는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Refused는 그냥 모여서 음악을 하는 4명의 사람들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 일은 우리에게 독으로 다가왔었다." David Sandström은 계속해서 말한다. "공기를 오염시켰다고 할 수 있겠지. 우리 모두의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었다 -- 우리 사이의 분위기와 밴드 자체를. 파멸적인 효과를 보여 주었었다."

    "아마 Dennis에게 제일 힘들게 다가왔을 건데, 왜냐면 그는 밴드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Kristofer Steen는 기억한다. "내 생각에 Dennis는 밴드를 정말로 진지하게 여겼던 것 같다."

    "우리 모두 다른 활동은 아무 것도 안 했었다." David Sandström이 말한다. "Refused가 우리가 가진 전부였다. 당시 앨범을 들으면 알 수 있는게, 우리는 거기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그렇게 어린 나이, 22살 정도에 그런 일을 하려면, 다른 것들은 전부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22살이라는 나이는 그런 종류의 앨범을 만들면서도 이성적으로 밸런스를 잡을 만한 능력은 없을 때니까. 그건 그냥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충돌해서 부서져버렸고 완전히 불타버렸다. 이제서야 그 때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

    "지금 그 때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제는 좋은 곳에 있는 느낌이군." 그는 Kristofer Steen을 보며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요새 우리 사이에 벌어지는 트러블은 그냥 대화 몇 마디면 해결되는 일들이고, 그건 좋은 일이다."

    한가지 더, 그들이 최근에 했던 불편한 대화가 있고, 그것은 전 기타리스트 Jon Brännström에 대한 것이었다. "Jon은 그러니까..." 두 명 모두 좀 더 외교적인 설명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좀 어려운 사람이었다." 1994년부터 밴드 멤버였던 Jon Brännström은 2012년 첫 재결성 공연에서는 멤버였지만 [Freedom] 작업이 시작됨과 동시에 탈퇴당했다. 이에 대한 언급을 하게 되었을 때, Jon Brännström은 페이스북을 통해 대답했고, 일부를 여기에 적어 보자면, "나는 그 개자식들과 뭘 같이 하던지간에 그런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래도 제안해주었던 것은 고맙기는 했다."

    마지막으로 10분정도 식사를 마무리하고 우리는 $36 영수증을 3명분으로 나누었다. "돈을 번다는 것은 우리에겐 익숙치 않은 일이다. 우리 모두 그런 종류의 일을 잘 하지는 못한다." David Sandström은 인정한다. "나는 올해 들어서야 연금에 돈을 넣기 시작했다. 40살에 말이다."


    https://youtu.be/h1eC8de9QG0


    "그들은 클래식은 절대로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들 자신들은 그랬다." 그렇게 [The Shape of Punk to Come]의 아이콘과 같은 서론, 지나가는 차량의 소음을 배경으로 읊어지는 글이 시작된다. 앨범은 곧바로 급진적인 감각을 바로 처음부터 보여준다: "I've got a bone to pick with capitalism, and a few to break."

    "시대를 앞서갔다"라는 구절은 그동안 수많은 고전 명작 앨범들에게 부여되었지만, 제목부터가 그런 개념을 보여주는 [The Shape of Punk to Come]을 보자면 진정한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다. 악명 높은 마지막 공연의 전설이 퍼져나가며, [The Shape of Punk to Come] 또한 명성을 얻어나가게 되었다. 앨범 발매가 있고 1년이 지난 후 앨범 판매량은 1,400장에서 21,000장으로 급상승했으며, 그 다음 해에는 28,000장이 팔려나갔다. 지금까지 앨범은 미국에서만도 총 180,000장 이상이 팔렸으며 하드코어 역사의 기념비적인 앨범으로 남게 되었다.

    "Epitaph 레이블은, 그때까지만 해도 사실 사운드 측면에서나 행동방식에서나 Bad Religion의 연장선상에 불과했었고, Bad Religion또한 사실 LA의 초창기 하드코어 씬 -- Black Flag, Circle Jerks, Adolescents 등등 -- 이 탄생시킨 밴드일 뿐이었었다." Bad Religion의 결성멤버이자 Epitaph 레이블의 수장인 Gurewitz가 말했다. "90년대의 펑크 열풍이 불 무렵, 대다수의 펑크 록 밴드들은 (Epitaph 에서 앨범을 발매한 밴드들을 포함하여) 대체로 보수적인 접근을 하고 있었다 -- 사실 거의 반동적인 행동에 가까웠었다. Refused는 펑크와 하드코어에 '무엇이 나올지 기대하기 어렵게 만드는' 위험성을 다시 가지고 왔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나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나 멋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Refused로부터 무언가를 배웠고, 그건 비단 펑크 쪽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2006년, [FILTER] 매거진은 메탈음악계의 유명인들로부터 Refused에 대한 사후(死後)의 찬사들을 모집하여 특별편을 낸 적이 있다. Anthrax의 Scott Ian은 [The Shape of Punk to Come]을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평했다. Guns N' Roses의 Duff McKagan은 앨범을 펑크 록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라고 비유하였다. Metallica의 Kirk Hammett은 "New Noise"의 뮤직비디오를 처음 보았을 때 말 그대로 "입이 떡하니 벌어졌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Rage Against The Machine의 Tom Morello는 Zach de la Rocha가 밴드를 떠나게 되었을 때 대체 멤버로 Dennis Lyxzén을 영입하는게 어떻겠냐고 Rick Rubin에게 제안했던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수 년이 지나고, Refused Blink-182, Rise Against, Linkin Park, The Used, United Nations, Underoath, La Dispute, 그리고 그래미상 수상자 Paramore 등등 수없이 많은 밴드들이 영향을 받은 밴드로 꼽는 밴드가 되었으며, Paramore는 자신들의 곡 "Born For This"에 Refused의 가사를 인용했다. 이번 투어를 같이 돌면서, 나는 씬의 유명인사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 펑크쪽의 랩을 하는 Antwon, 유명한 인디밴드 Yeah Yeah Yeahs의 Nick Zinner, 얼터네이티브 포르노 거물 Joanna Angel, 그리고 스크리모 아이콘 Touché Amoré의 Jeremy Bolm 까지.


    Santa Ana에서의 공연 도중, 나는 Epitaph 신인들 중 가장 유명한 밴드인 letlive.의 Jason Butler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무대 가까이까지 관객들 위에서 서핑을 하며 몰려와서는 같이 소리를 질러댔고, 관객 위로 똑바로 서려다가 안전요원들에게 제지당했다. Butler 자신 또한 하드코어에서 가장 무모한 프론트맨중 하나로써 악명을 떨치고 있었으나 -- 너무 심해서 누군가가 그의 과격한 무대매너를 컴필레이션으로 만들어서 YouTube에 올릴 정도였다 -- letlive.가 한 번 공연한 적이 있는 이 공연장에서, 지금 그는 Refused를 숭배하는 작은 꼬맹이에 불과했다. "그들은 누군가를 흉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대놓고 하는 아첨이라고 말했다." 공연이 끝나고 Butler는 내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흉내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분명히, 사상적으로나, 음향적으로나, 기악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 그 순수하고, '아나키즘적이지만-나름의-정형화를-이뤄낸' 미학에서 분명한 단서들과 영향을 받았다."


    https://youtu.be/NkAe30aEG5c


    Refused의 미학은 세련된 펑크였다. 밴드 티셔츠를 입는 대신 그들은 어두운 색의 비트닉(beatnik) 스타일 터틀넥이나 슬림핏 정장을 입었으며 검은색의 비틀즈 스타일 머리를 하고 다녔다. "우리가 밴드를 시작했을 때, 우리는 배기 스타일 바지를 입고 다녔었다." David Sandström이 알려주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주위를 보니 모두가 배기 스타일을 입고 다니기 시작했고, 그래서 우리는 중고샵에서 정장을 사 입고 다니기로 했다."

    "그들은 아나키스트들이지만 멋진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Epitaph과 Interscope에서 앨범들을 발매해 온 포크-펑크 뮤지션 Frank Turner의 말이다. Turner는 UK 하드코어 밴드 Million Dead를 통해 음악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 밴드 이름 또한 Refused의 가사에서 따 온 이름이었다. "그들의 소리는 멋졌고, 그들은 자신들의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그 어떤 하드코어 밴드도 스타일을 갖고 있지 않을 때였는데."

    Refused의 영향력은 장르의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는 것 같아 보였다. 심지어 YouTube에는 미국에서 가장 상의를 자주 벗고다니는 랩메탈 밴드 Crazy Town이 "New Noise"를 커버한 비디오까지 올라와 있다(하지만 그걸 한번 보라고 추천은 못 하겠다). 심지어 Refused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도 [The Shape of Punk to Come]의 중심점 "New Noise"를 한번은 들어 보았을 것인데, [Decibel] 매거진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 곡은 앨범의 다른 곡들과는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곡이다. 그 곡의 아레나 록 스타일 서두, Victory Records 시절의 동료 Snapcase를 파렴치하게 따라한 것을 선뜻 인정한 그 도입부는 많은 사운드트랙에서 에너지 넘치는 역할을 맡아 왔다. "New Noise"는 하이스쿨 풋볼 드라마 [Friday Night Lights] 및 Jason Statham의 액션영화 [Crank]에서 사용되었으며, 물론 드라마 [24]나 비디오게임 [Tony Hawk's Underground]에서도 등장했었다.


    하지만 해체 이후 몇 년의 세월이 지나며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앨범을 듣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멤버들에게 Refused는 거리감이 물씬 느껴지는 옛 기억에 불과했고,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일을 하고 있었다. 멤버들이 하던 대부분의 일들은 음악에 관련되어 있었고, 몇몇은 Refused와 아주 거리가 먼 종류의 일이었다. Kristofer Steen은 스웨덴에서 오페라에 관련된 일을 하기 시작했으며, 예를 들자면 [La Bohème]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Refused 재결성 투어는 돈벌이가 될 만한 거리로, 특별히 록 페스티벌계의 흥행보증수표로써 성장했다. 지난 5년간, The Replacements, At the Drive-In, Quicksand, Rocket from the Crypt, Judge 및 수없이 많은 밴드들이 재결성 공연을 했었다. Refused의 재결성 또한 코앞에 닥친 일 같게만 느껴졌었다. 가끔씩 재결성에 대한 제안이 튀어나왔으며, 밴드는 어떤 이유 또는 다른 이유로 항상 이를 거절해 왔었다. 그러다가 2011년, Coachella가 그들에게 제안을 했고, 멤버들은 2012년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50만 달러짜리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그 공연 및 Groezrock, Hellfest, Primavera Sounds 페스티벌에서 한 공연들, 그리고 따로 돌았던 세계 투어는 멤버들에게 상당한 돈을 마련해 주었다. 비록 시간이 10년도 넘게 걸렸지만, [The Shape of Punk to Come]은 마땅히 받아야 했던 보상을 받게 되었다.


    상상해보라. 그들이 마지막으로 했던 공연은 Virginia의 물이 질질 새는 지하실에서 75명의 관객을 두고 했던 공연이었다. 그들은 지난 14년간 관심이 많아지도록 내버려 두었고, 그리고 나서 한 공연은 -- 몇몇 워밍업 공연은 빼고 -- 세계에서 가장 큰 록 페스티벌들에서 메인 무대로 오른 공연이었다. 2012년 Coachella 페스티벌에 참석한 사람들의 수는 1일당 80,000명이 넘었다. 2010년 Refused의 고향 Umeå의 인구 수는 고작 79,594명 밖에 안 되었는데 말이다.

    자신의 밴드 The (International) Noise Conspiracy를 통해 Coachella에 올라간 적이 있었던 Dennis Lyxzén을 제외하곤, 밴드 멤버들에게 그렇게 큰 무대는 너무나도 생경한 경험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겁에 잔뜩 질린 4명의 남자들이 보일 뿐이었다." Dennis Lyxzén은 기억했다. "Coachella에서 한 첫번째 공연은 모두가 너무나도 긴장한 나머지 그렇게 잘 되지가 않았었다. 새로운 경험에 적응하는데에 시간이 좀 걸렸던 것이다. 82개의 공연을 하고 난 이후에야 우리가 했던 이 밴드가 그만큼 가치있던 일이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멤버들은 심지어 자기가 자기 기타를 옮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기술자들이 말해줄 때 이를 이해하지도 못했다. "관객 중 한 여자가 우리 사진을 찍었다." 베이시스트 Magnus Flagge가 말했다. "우리는 그런 걸 본 적이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Refused가 해 온 모든 것들이 그러했듯이, 재결성 또한 비평의 늪에 푹 빠져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펑크빠들의 커뮤니티에서의 Refused는 가장 의견이 양분되는 밴드들 중 하나였다. 그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공격해 온 점은 Refused가 온갖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이것저것을 마구 가져다 붙이는 태도였다. 그들이 쫙 빼입고 다닌 정장 차림은 DC 펑크밴드 The Nation of Ulysses에서 베껴 온 것이라는 비난은 언제나 있어 왔다. [The Shape of Punk to Come]의 커버는 Rye Coalition의 [Teen-Age Dance Session]의 커버를(이것도 오래 전의 Blue Note 재즈 앨범을 참고한 것이다)거의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그리고 Refused는 이것에 대해서 말해 줄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앞장서서 반(反)-자본주의를 설파하던 밴드가 갑자기 돈을 벌 수 있게 되고, 하이네켄이 후원하는 페스티벌에서 The Black Keys Bon Iver와 같이 공연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펑크족들의 인터넷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 페스티벌 공지에 달린 댓글중에는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REFU$ED ARE £UCKING D€AD.



    하지만 펑크 록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말하겠지만, 그런 반응은 정말 흔한 일이다. 나는 Punk Rock Bowling 페스티벌에서 Against Me!의 프론트우먼 Laura Jane Grace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아나키스트에서 메이저 레이블로 가게 된 커리어를 "I Was a Teenage Anarchist"라는 노래를 통해 담판을 짓듯이 말했던 적이 있었다. "보통 입으로만 자기가 얼마나 혁명적이고 아나키스트인지를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실제로는 그 어떤 전복적인 활동도 안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Dennis와 Refused의 의도를 믿는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은 여전히 그들이 시작지점부터 주장해 오던 이상들과 맞닿아 있다. '돈벌이'가 아니라."


    https://youtu.be/4A4VUj7t7mc


    지금은 LA의 점심 무렵이고, Dennis Lyxzén은 내 얼굴에 총을 겨누고 있다.



    이 방에는 유럽 스타일의 옷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 의자에 걸린 군청색의 블레이저, 바닥에 떨어진 중산모. 이야깃거리를 만들 생각을 하니, 이 광경이 지난밤 마약과 창녀들로 점철된 애프터파티의 여파로 박살난 TV와 텅텅 빈 잭 다니엘 병이 굴러다니는 그런 광경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지만, 멤버들 나이가 이미 40대인 Refused는 그런 밴드가 아니다.

    "우리는 애프터파티 같은 건 안한다." 한 공연이 끝난 후, David Sandström은 내게 말했다. "애프터파티라는 걸 할만한 에너지가 남아 있다는 것은 일을 제대로 안 했다는 것이다. 밴드에서 쫓겨나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나는 웃었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애프터파티 대신, 멤버들은 보통 공연이 끝난 후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Magnus Flagge와 그의 애인 Kati만이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니, 내 미간에 정확히 조준된 총은 메탈 잡지의 커버사진을 위한 소품이다. 우리는 Epitaph 레이블의 LA 사무실에 있으며, 오늘은 Refused의 미디어 활동으로 정해진 날이다. 지금 사진이 전부가 아니었기에, 그들은 여러 벌의 옷들을 갈아입어 왔다.


    이렇게 앨범을 홍보하는 건 Refused에 있어서는 새로운 일이다. 요새 그들은 미디어에 여러가지를 하고 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들은 [Wired]와 인터뷰를 했고, 몇가지 전화인터뷰도 했고, [Pitchfork] 기자와 함께 호텔 옥상의 수영장에 앉아서 이야기도 나누었다.

    Refused의 앨범이 시대를 앞서갔던 역사가 있기에, [Freedom]을 바로 평가하는 것은 꽤나 난해한 일이 될 수 있으리라. 여러가지 측면에서 [Freedom]은 Refused가 해체하지 않았다면 일어났을, 메이저 레이블로 가서 전도유망한 팝스타들 명단에 낀 하드 록 밴드들처럼 커리어를 밟아나갔을 때의 결과물 같게만 들린다. [Freedom]은 마치 [The Shape of Punk to Come]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밴드들이 그것을 따라하며 만든 곡들의 집합체처럼 느껴진다.


    [Freedom]은 밴드가 여전히 세계에 만연해 있는 거대한 부조리에 집중하면서도 그들 또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밝히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여 준다. "누군가가 독일에서 우리와 인터뷰를 했었다." David Sandström은 말한다. "그리고 그는 물어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이 해답인가?' 그건 내 일이 아니다. 내 일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Dennis Lyxzén도 동의한다. "만약 우리가 해답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곡일 것이다." 비평가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는 전혀 관계없이, [Freedom]의 음악은 그 앨범이 가져오는 자극에 가려질 것이다.

    밴드는 대부분의 인터뷰에서 재탄생한 그들의 존재를 정당화해보라는 질문에 맞서 방어적인 대답을 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상을 저버리고 타협한 것인가? 만약 그들이 돈 때문에 이걸 하고 있다고 대답한다면 기자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계속해서 등장하는 주제들 중 하나는 [Freedom]의 몇몇 곡을 같이 작곡한 30살의 팝 프로듀서 Shellback 이었다. 물론 앨범의 홍보자료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Shellback은 지난 5년간 라디오에서 나온 거의 모든 팝 히트송들을 공동으로 작곡하고 프로듀싱했었다. 그가 작업한 곡들에는 Taylor Swift의 "Shake It Off"와 Maroon 5의 "Moves Like Jagger"를 비롯해 9개의 빌보드 1위 싱글들이 있었다. 그는 Pitbull부터 Avril Lavigne에 이어 Britney Spears까지 많은 사람들과 작업을 해 왔다. 대부분의 펑크 밴드들에게 있어 팝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웬만하면 덮어두어야만 할 비밀이겠지만, Refused에게는 아니었다.

    "레이블이 보내준 홍보자료 초반에는 Shellback이 없었다." David Sandström은 말한다. "나는 곧바로 답장을 보내 'Taylor Swift'와 'P!nk'의 이름이 들어가야만 한다고, 그래야 웃기고 이상하고 눈을 잡아끌거라고 말했다. 이렇게 하면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기자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둘이 이어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스웨덴 태생 Shellback은 Refused의 광팬이었고 그 누구보다도 Refused에 대해 잘 알고있었던 사람이었다. Refused의 말에 따르자면 그들은 [Freedom]의 몇몇 곡 데모를 그냥 피드백을 얻을 요량으로 Shellback에게 보냈다. 그러나 Shellback은 그것들을 새롭게 다시 녹음했고 이 새 버전을 돌려주었다. 바로 그 때, 밴드는 그들이 원해 온 사람이 Shellback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Refused의 DIY 시절부터 그들을 알아 온 팬들이라면, 이 오랫동안 죽어 있었던, 대놓고 미디어를 싫어하던 밴드가 지금 새 앨범을 홍보하기 위해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는 광경을, #RefusedFreedom이 @iTunes에 6월 30일부터 @EpitaphRecords로부터 공개된다고 말하고 다니는 꼴을 보는 것이 굉장히 이상할 것이다. 그들은 내일 영국의 뉴스매체 [The Guardian]을 통해 신곡을 발표할 것이다. 그들은 이런 짓을 하는데에, 아니면 적어도 어떻게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듣는 것을 잘 하게 되었다. 여기 서십시오. 이 셔츠를 입으십시오. 이렇게 바라보십시도. 모던 밴드가 되십시오.


    https://youtu.be/eRf1m-SaFy0


    Refused는 아직 자본주의와 격론을 벌일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West Hollywood 호텔 스위트 룸의 거실에 놓인 벽난로 앞에 앉아, Dennis Lyxzén은 내게 말했다. 모든 밴드 멤버들과 6명의 크루는 호텔에서 각각 자기 방을 쓰고 있었다.



    "지금이 무려 2015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자본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다녀야만 한다." 그는 말한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전투적인 인내심이 느껴졌으며, 마치 이런 대화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주 있어 온 일이었다고 토로하는 듯 했다. 어쩌면 오늘만 해도 이미 몇 번이나 누군가에게 설명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나는 돈을 벌게 되었다." 그는 Refused의 재결성을 염두에 두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한다: '우, 너는 자본주의자다!' 아니다. 나는 돈을 벌고 있다. 하지만 그 둘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자본주의는 시스템이다. 돈을 버는 행위가 당신을 자본주의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Dennis Lyxzén은 Refused에서 가장 잘 알려진 얼굴이었고, 이번 주 내내 길을 걷다 보면 누군가는 그를 불러세워서 사진을 같이 찍거나 싸인을 받고는 했다. Refused가 해체한 이후, 그는 지체없이 새로운 밴드들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 The (International) Noise Conspiracy, INVSN, 그리고 AC4 -- 이 모든 밴드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단 한번도 Refused가 가졌던 그 무제한의 화학적 상호작용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스트레이트 엣지를 지키는 채식주의자로서, 그는 [Elle] 매거진이 뽑은 '스웨덴에서 가장 섹시한 남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었다.


    팔꿈치에 슬리브가터가 달린 60년대 스타일 셔츠에, 칼라를 끈 모양 타이로 강조한 차림으로, 허리에는 엄청난 벨트 버클을 장식한 그는, 말을 할 때마다 짙은 갈색 머리를 앞뒤로 자주 넘기곤 했다. 문신이 잔뜩 들어간 손가락은 투박한 디자인의 반지들로 가득했다.


    해체 이후의 활동에도 만족하며 스스로를 노스탤지어에 붙잡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였지만, Refused에 대해 말할 때 그의 일부는 해체에 대한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나는 Refused를 계속하고 싶었다. 음악때문이 아니다. 나는 Refused가 혁명을 위한 투쟁에 있어 훌륭한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당시의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회고한다. "내 기억에 다른 멤버들이 몇시간이고 리프를 만들고 있으면, 내가 쳐들어가서는 '좋아, 뭐든지간에, 느낌 좋은데. 음악은 혁명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난 신경 안 써' 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리고 물론, 그런 사람이 밴드에 있다면, 보통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걸 하고 앉아있는거지?'"


    나는 악역을 맡아 "New Noise"의 상업화에 대한 질문을 했다. "그래." 그는 인정했다. "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을 알고있다 - '이놈들은 반자본주의 밴드고 혁명에 대한 사상을 떠벌렸는데 정작 곡이 영화, TV 쇼, 비디오게임에 나오는구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오랜 시간동안, Refused는 내게서 완전히 멀어져 있었다. 우리는 해체했고, Refused가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정말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우리는 우리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할 수 밖에 없었다.

    "해체 이후 몇 년간 나는 Refused와는 진정으로 단절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The (International) Noise Conspiracy 멤버들과 투어 버스를 타고 가며 영화를 보는데 갑자기 "New Noise"가 나오는 걸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는 [Friday Night Lights]를 염두에 두고 말했다. "나는 '시발, 이게 대체 뭐야?' 같은 느낌이었다. Refused와 너무나도 단절되어 있었기에 이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의 마지막 메니페스토 ("Refused Are Fucking Dead") 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기자로서 태만한 것이리라. 그러니, 당연히 나는 이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나는 그에게 "멍청한 기자들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라는 부분을 읽어주었고, 그는 말이 다 나오기 전에 이미 움찔했다. "내가 그걸 쓰기는 했다. 물론." 그는 웃었다. "우리는 Refused였고, 따라서 '아쉽게도, Refused가 끝났다는 것을 알리게 되었다' 같은 식으로 할 수는 없었다. 당시의 나는 '좆까, 이 마지막 메니페스토를, 이 좆같고 정신나간 장광설을 늘어놓고는 던져버리겠어'라는 식이었다. 우리가 다시 재결성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에, 그 글이 내 발목을 잡을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그는 마치 비밀이야기를 하듯이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그 메니페스토를 좋아한다. 그건 Refused에 있어 정말로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은 제대로 한 '엿이나 처먹어라'였다."


    https://youtu.be/qPD4cRnPZPQ


    당신이 그 글을 직접 썼다는 사실이, 그리고 사람들이 그 글을 기억하고 다시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이 Coachella에서의 재결성 여부를 결정하는데에 영향을 주었는가? "아니, 전혀 아니다." Dennis Lyxzén은 미소지으며, 멤버들 중 그 누구보다도 이것에 관련된 좆같은 일들을 가장 많이 겪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 글을 17년 전에 썼었고, 그 때의 나는 그 글보다도 훨씬 더 멍청한 놈이었다. 관점은 변하기 마련이다. 우리들 또한 변하기 마련이다. 그건 한 인간으로써 성장한다는 것의 일부이다."

    나는 새 앨범을 기대하는 오랜 팬의 입장에 서서 질문을 던져보았다. [Freedom]이 Refused의 명성에 먹칠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지는 않는가? "그래, 물론이다. 우리는 지난 3-4년동안 [The Shape of Punk to Come]의 곡들을 연주하며 투어를 돌았다. 관객들은 흥분했고 만족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새 앨범을 낼 것이고, 이는 일종의 도박이다. 우리는 Refused의 이상에 부합하는 길을 가는 것이다. 반면 이는 동시에 Refused의 신비를 해체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우리는 밴드의 운명을 이렇게 하기로 정했다."

    Refused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무엇인가, 나는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는 대답을 생각하느라 잠시 조용히 있었다. "우리의 고향 Umeå에서 Refused가 그렇게 큰 지지를 받았던 이유들 중 하나는 우리가 아주 재밌는 밴드였기 때문이었다. 그 점이야말로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는 언제나 소란을 일으켰고 해체했으며 사람들은 무대 위에서 싸워대고는 했었다." 그는 문신이 가득한 손을 내려다 보고는 깍지를 끼며 히죽거렸다. "하지만 지난 몇년간, 우리는 재미있는 밴드였다."


    https://youtu.be/PEvd282sB-w


    Sunset Boulevard의 Vacation Vinyl 앞에는 Refused 팬들이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길 건너 채식주의자 식당에 앉은 우리는 대기줄이 점점 더 길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밴드의 비밀 공연이 한 시간쯤 뒤에 그 곳에서 있을 예정이었고, 소문은 이미 퍼져있는 것 같아 보였다.

    공연이 정말로 될 지에 대한 의문들이 있었다. "만약 경찰이나 소방수들이 온다면 난 완전히 좆되는거다. 벌금때문에 파산할지도 모르지." Vacation Vinyl의 주인 Mark Thompson이 말했다. "하지만 뭐 어떤가." 그는 줄 앞에 서 있는 30명을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 뒤의 20명은 문턱과 도보에 섰다. 그들은 발뒤꿈치로 서서는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남자는 공중전화 위로 올라서기까지 했다. 커다란 헤드폰을 쓴 아기가 아버지의 목에 올라 타 있었다.

    우리는 발 디딜 틈도 없는 관객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Refused는 직원들이 그들을 위해 준비해 둔 악기들을 집어들었다. 거대한 무대조명도 없었고, 강력한 음향 시스템도 없었다. 그저 Refused, 가장 기본인 밴드 멤버들만이 있었다.


    밴드는 신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새 앨범을 홍보했다. 관중들은 이 신곡에 대해서는 몰랐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다들 알게 되리라.

    짧은 셋리스트를 불태우며, 곡과 곡 사이에 농담과 이야기를 하던 그들은, 마지막으로 한 곡만 더 연주하겠다고 말했다. 뒤에 있는 누군가가 "Rather Be Dead"라고 소리질렀다. David Sandström과 Kristofer Steen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은 정말 이상해서 일생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마치 서로에게 어떤 평온함이 주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Dennis Lyxzén은 말했다: 우리는 다른 곡을, 누군가의 곡을 커버한 것을 연주할 예정이다.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그들은 Black Flag의 "My War"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펑크의 가장 대표적인 곡을. 클래식을. 나는 클래식은 결코 유행에 뒤쳐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를 높이 들고는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 물론 나도 한 장 찍었다. 언제가 마지막 기회일지는 알 수 없는 법이 아닌가? 벽에는 여러 앨범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각각의 앨범에는 나름의 이야기들이 존재했으며, 펑크의 역사를 따라 제각기 나름의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는 [The Shape of Punk to Come]도 있었다. 그 옆의 자리는 비어있었으며, 나는 [Freedom]이 그 빈 자리에 들어갈 수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밴드는 공연을 끝냈고, Dennis Lyxzén은 내게 걸어왔다. 그는 흐르는 땀줄기를 손등으로 훔치고는 젖은 금발머리를 뒤로 젖혔다. 공연장이었던 가게는 꽤나 더워져 있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해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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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3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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