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Nick Soulsby는 최근 방대한 분량의 Coil 인터뷰를 정리하여 [Everything Keeps Dissolving]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빚어 내 Strange Attractor를 통해 발매하였다. 이 기사에서, 그는 [Everything Keeps Dissolving] 작업이 어째서 그렇게나 중요했는지를 설명하고 있으며, 그리고 책의 발췌본 또한 소개하고 있다.
[The Quietus] 2023년 4월 24일
[Everything Keeps Dissolving: Conversations With Coil]은 John Balance와 Peter Christopherson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인터뷰를 하나로 모아 정리한 책으로, Nick Soulsby가 애정을 담아 편집하여 Strange Attractor 출판을 통해 출간될 예정이다 - 대략 25년 정도에 걸친 밴드의 여정을 담은 책으로써. 이 기사에서, 저자 Soulsby는 책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소개함과 동시에 자신이 이 프로젝트와 얼마나 깊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소개하고 있다.
2004년 7월 25일. 내 절친한 친구가 애인과 돌이킬 수 없게, 안좋게 헤어졌다고 말하며 런던에서의 Coil 공연에는 함께 못 갈 것 같다고 말해왔었다.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을 정도였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책임지거나, 그들이 뭘 필요로 하는지 같은 것에 대해 신경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연날 밤 - 단 한 번의 공연이었다 - 내가 원하고 있었던 것은 단 하나, Coil의 음향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나 자신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무대의 광경 속에 살아있고 싶다는 바램뿐이었다. 공연 내내 나는 맨 앞의 안전 펜스를 붙잡고 서서 John Balance의 아름다운 의상 - 구속복(straitjacket), Peter Christopherson과 Thighpaulsandra를 감싸고 있는 천 깔때기, 흔들리는 전구 불빛들, 노래들, 비명들과 이야기들을 기억했었다. 사람의 온기만으로 소통하고 교감하고 있다는 기쁨. 내가 지금 이 장소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 같이 공연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유일한 것은, 곡마다 울려퍼지는 열렬한 박수갈채 뿐이었다.
그 자리의 누구도 '끝'이 그렇게 빠르게 오리라고는 알지 못했었다.
이들의 죽음과, 그에 따랐던 모든 슬픔에도 불구하고, Coil의 명성이 계속해서 이어져나가고, 더 성장해나가는 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몇몇 개인들의 의욕적인 활동들 - 'Live Coil Archive'의 지칠 줄 모르는 아카이브 작업이라던가, Cormac Pentecost의 [Man Is The Animal] 잡지 등등 - 을 보고 있자면 그 개인들을 거의 흠모하게 된다, 오로지 애정만으로 Coil의 예술을 계속해서 '살아있게' 만들어주는 그들의 노력을. 그들 덕분에 나의 열정 또한 계속해서 높게 유지될 수 있었다. Strange Attractor를 통해 출간될 나의 책 [Everything Keeps Dissolving: Conversations With Coil]를 통해 내가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는, John Balance와 Peter Christopherson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던 가장 인상적인 인터뷰들, 희귀하거나 아예 사라져버렸던 자료들을 전부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자는 목표였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작품 속에 완전히 빠져들어 1년 혹은 2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상당히 지치는 일이며, 그래서 나 또한 내가 무엇을 보고 선택하는지에 대해 굉장히 조심스럽게 접근했기도 했지만, 이 책의 작업은 사실 굉장히 즐거운 작업이었다. 이번 작업을 '보물찾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책장 속에 숨겨진 테잎들, 다락방에서 떨어진 편지들, 영화사를 설득해 창고에 묻혀 있던 TV 프로그램의 러시(rushes)를 찾아냈던 일, 영화감독에게 수고비를 지불하고 미사용 영상을 디지털화했던 일, 라디오 회사의 오래된 옛 방영분을 찾아냈던 일.
'수용 가능성'에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는 현재의 세상에서 내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Coil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쌓아올리고 타인은 그 가치를 인정하기는 커녕 이해조차 하기 힘들 자신들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개인들, 엄청난 비용과 모호한 보상에도 불구하고 열성을 다해 창조를 이어나갔던 그런 개인들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는 것이다. 나는 최종 결과보다는 그 과정 자체를 살아가는 사람들, 짧게 말하자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두 남자와 협력자들이 함께 Chiswick의 강변 집에서 만들어냈던 것들, 그리고 또 Weston-Super-Mare의 언덕 집에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들을, 존경한다.
아래의 발췌본은 '어두웠던 시기들'을 다루고 있지만, Coil의 글과 작품들 속에서 오랜 시간동안 헤메이고 있을 때 나에게 변화를 주었던 것은 그들의 '인간성'이었다. Coil은 신중하게 선별되어 다듬어진 이미지를 선보이는 밴드가 아니었으며, 유머, 지성, 친절함, 사려를 마치 가장 친한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듯이 폭발적으로 내보이는 사람들이었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Coil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괜찮을 거라고,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풍부한 성격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한,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예술은 단순한 엑소시즘이나 마법(magick)적인 작업물들이 아닌 그들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작품들이었다 - 나 또한 느낄 수 있었던 그 기쁨, 수없이 많은 기나긴 밤들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게 해 주었던 그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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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Balance의 어린 시절 기억들은 얽매이지 않았던 물리적 이동들, 밤하늘의 천체들과의 연결들, 자신이 되고 싶어하던 존재가 되어가거나 혹은 그것을 넘어서고 있다는 감각으로 점철되어 있는 반면, Peter Christopherson이 겪었던 어린 시절의 삶은 - 적어도 스스로 묘사한 것들에 따르자면 - Balance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삶이 어떠했었는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Throbbing Gristle에서의 활동이나 Coil에서의 시간들을 모두 통틀어 Christopherson은 항상 인터뷰를 꺼려 왔으며, 인터뷰 약속이 있을 때 마다 아예 다른 곳에 가 있다거나, 아니면 그저 배경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Christopherson의 신중함은 타고 태어난 스타성을 가진 사람들, 처음에는 Genesis P-Orridge 그리고 다음에는 Balance라는 사람과 함께 협업했던 과정에서부터 잘 드러나고 있었다. 여러 측면에서 Balance는 Christopherson과 완벽할 정도의 '감정적 짝'을 이루는 사람이었다: 하나는 무력할 정도로 모든 것이 노출되어 있는 사람, 다른 하나는 단호할 정도로 모든 것이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는 사람. 공적인 모습과 사적인 얼굴 사이의 간극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사회의 까다로움과 결벽성을 찔러대는 것을 즐겼던 Christopherson의 작품세계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별명은 - Sleazy(역주: 추잡한, 천박한) - Simon Ford의 책 [Wreckers Of Civilisation]에서 스스로 밝혔던 것 처럼, "육체를 페티시즘의 탐구 대상으로써 다루는 것"에 대한 젊은 취향에서 비롯된 별명이었다. P-Orridge가 '외설적인' 메일-아트를 제작 및 배포했다는 혐의로 기소당하고, COUM Transmission의 [Prostitution] 쇼가 히스테릭한 비난 세례에 맞닥뜨리고, Throbbing Gristle의 스튜디오가 경찰의 급습을 당하게 되며 Christopherson의 이러한 개인적 성향 또한 보다 더 숨막히는, 압박적인 문화 분위기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Coil의 첫 10년은 적대적인 공권력이라는 불안한 존재와 함께 지내야 했던 시기였다. Balance에 따르면 그는 경찰의 불심검문 대상이었으며, 그의 친구의 자취방은 마약 및 관련용품 수색을 당하기도 했고, 동성애자 인권 시위 현장에서 체포되었던 경험도 있으며, 순전히 경찰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Psychic TV 및 Coil의 '컬트 종교 탐구'가 중단되었던 적까지 있었다. 1987년 'Operation Spanner' 작전 하에 진행되었던 급습과 기소 - '합의 하에' 진행되었던 사도-마조히즘 행위에 대한 일방적인 기소였다 - 를 시작으로 긴장감이 점점 더 심해졌으며, 1992년, P-Orridge가 아동 학대를 저질렀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발표된 후에는 모든 것이 폭발해 버렸다. 경찰이 P-Orridge와 P-Orridge의 가족의 집들을 전부 압수수색하고 모든 것들을 빼앗아버린 후 그들은 기나긴 망명길에 올라 도망쳤다. Coil 또한 이러한 행위들에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고, 집에 가지고 있던 물품들 중 경찰이 조금이라도 트집을 잡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전부 제거하였으며 수 년간이나 갑자기 경찰이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오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매일을 보냈다.
Balance 및 Christopherson에게 닥쳐 온 실존적인 위기는 경찰 뿐만이 아니었다. 둘 모두 런던의 게이 씬의 자유로움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었으며, 곧 'AIDS 확산'이라는 참혹한 파괴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둘 모두 개인적으로는 AIDS 감염에서 도망칠 수 있었고 그래서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기도 했지만, 동시에 둘은 절친한 친구들이 하나 둘씩 병마에 집어삼켜져 죽어가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기도 했다. Madonna의 투어 매니저였던 Martin Burgoyne은 1986년 그의 23번째 생일에 죽었으며, Balance는 그의 죽음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겼었다: "점점 더 깊게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 않겠는가? 특히 그와 섹스해 본 사이라면, 더." [Tainted Love] 싱글의 커버 아트를 맡았던 예술가 Eddie Cairns의 죽음에 대해서는, 1995년 인터뷰의 Balance는 여전히 상당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Eddie의 시체를 처리했던 것이 Hammersmith 의회였다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피범벅이 된 달렉(Dalek) 옷을 입은 남자들이 Eddie의 시체를 비닐로 여러 겹 감싸고는 그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하나도 모르는 채로 멍청하게 있는, 그런 상황." 1994년 12월, Coil의 또 다른 친구 Leigh Bowery 또한 죽었다. 다른 한편으로, Coil과 Derek Jarman 사이의 오랜 인연은 1986년 12월에 있었던 Derek Jarman의 AIDS 진단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이는 1994년 2월 그의 죽음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Coil 그리고 보다 더 넓은 전반적인 '게이 커뮤니티'는 적재적소의 쾌락들에 고개를 끄덕이던 [Scatology]가 죽음을 실제의 경험으로써 명시적으로 다루는 [Horse Rotorvator]로 이어지는 모습에 상당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영국에 거주하는 20대라면 누구라도 연로한 친척의 죽음을 한번이라도 경험했을 터이며, 질병이나 불행한 사고로 인해 몇 지인의 죽음을 경험했던 사람도 상당할 테지만... 이렇게나 많은, 젊은 친구들의 죽음을 한번에 겪는다는 것은, 그 당시의 공포는 어떤 식으로 표현하더라도 과소평가가 될 정도일 것이리라. 1986년에 Balance는 24살이었으며 Christopherson은 31살이었다: 감각적 탐구의 정점에 달할 나이의 청년들이 위험, 질병, 죽음으로 어긋나 버렸던 것이다.
AIDS 너머에는 끝나지 않을 트라우마가 자리잡고 있었다. "Ostia (The Death Of Pasolini)"는 살해당한 영화 감독 Pier Paolo Pasolini에게 바치는 헌정임과 동시에 Dover 절벽에서 뛰어내려 버린 친구 Wayne 및 Coil이 끝내 사인을 밝히지 않은 또 다른 친구 Leon에게 바치는 헌정이기도 했다. 1992년에도, 누군가가 누군가의 자살을 묘사하는 음성 메일이 Coil의 전화기에 남겨졌으며, "...그는 절벽에서 스스로 뛰어내렸어..."라는 구절은 청자의 머릿속을 섬뜩하게 맴도는 곡 "Who'll Fall"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이 곡은 1993년 "Is Suicide A Solution?"이라는 이름으로 재발매되었으며, 이 재발매반의 커버는 창문으로 뛰어내려 자살한 한 Coil 팬의 침실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1993년 발매되었던 싱글 "Themes For Derek Jarman's Blue"은 AIDS로 인한 실명을 묘사한 영화에 대한 곡이었다.
죽음의 드럼 소리, 감정적인 짐덩어리들, 경찰의 그림자로부터의 안정과 안식을 추구하는 대신, Coil의 세 번째 앨범 발매를 전후한 몇 년간의 시기는 개인적인 혼란과 대격변으로 채워져 있었다. [Love's Secret Domain]은 Coil의 '댄스' 앨범이라고 묘사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Second Summer of Love'(역주: 1980년대 후반 애시드 하우스, 레이브 문화, LSD의 유행으로 촉발된 영국 내 문화 흐름)의 즐거움에 대한 증거 같은 앨범이 절대로 아니었다. 거대한 긴장감이 갑작스레 풀려 버린 Coil은 1988년 ~ 1992년의 대부분을 엑스터시와 기타 마약들에 쩔어든 채로 쾌락 그 자체에만 몰두해 보냈다. 결과적으로 만들어진 [Love's Secret Domain]은 첫 곡 "Disco Hospital" - Coil의 "Tainted Love"로써 비유적으로 표현된 곡 - 으로 시작하며, 곧바로 어지럽게 뒤얽힌 죽음과 사랑 사이를 헤쳐나가는, 기쁨이라기보다는 절망을 담은 사운드트랙 앨범이었다. 화학물질에 절여져 보낸 시간들의 후유증은 너무 심한 수준이어서, 멤버 Stephen Thrower는 밴드에서 탈퇴해 떠나버렸으며 Balance의 경우 개인적으로 또 공개적으로 몇 번이나 무너져버리곤 하다가 결국에는 알코올 중독*에 빠져들어가게 되어버렸다. 이 시기의 심각성을 상징하는 단어인 'Eskaton'은 Coil에게 있어 영구적인 레이블이 되었다. 종말 신학(Eschatology) - 세계의 멸망을 연구하는 학문 - 은 [Horse Rotorvator]의 명시적인 주제와 얽혀 있는 단어임과 동시에 [Scatology]와는 언어유희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기도 했다. 이러한 순환고리는 Coil이 새롭게 시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들의 과거는 미래와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같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들은 이제 '마지막 날들', 종말의 한가운데 혹은 그 너머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Balance와 Christopherson은 계속해서 활동을 지속할 수 있을 방법들을 모색했다... 하지만 Coil의 경우, 그 때에는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피로 범벅이 된 존재였다. 실제로 'Coil'이라는 이름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는 사실상 아카이브, 다른 정체성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수단, 다른 사람들의 음악들을 리믹스하는 주체 정도로 운영되었다. 그 대신, 둘은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어서 보는 것을 통해 머뭇거리는, 잠정적인 한 발을 내딛었었다: 1994년, 둘은 Coil Vs. The Eskaton 및 Coil Vs. ELpH라는 이름으로 싱글을 발매했으며, 이는 Coil이라는 부서진 껍질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아직 순수한 페르소나들로 '분열'한다는 더 급진적인 아이디어로 발전하게 된다: Wormsine, Black Light District, Time Machines, ELpH, Eskaton. 1995년부터 1999년까지의 시기는 '탈출 시도'의 시기였다: 홍등가(red light district)의 음탕함과 대비되는 이름 'Black Light District'에서 피난처를 찾기도 하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지워 없애기 위해 외계의 존재들과 소통하기도 하며, 함께 '시간'을 벗어난다거나, '여성적'인 달을 추구하기 위해 화성과 태양을 거부하기도 했으며, 복잡한 동쪽의 대도시를 떠나 서쪽의 머나먼 해안가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장례식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이미 구상되었다가 버려졌었던, Coil의 '잠정적 앨범 제목'중 하나인 'Funeral Music For Princess Diana'은 1997년의 시점에서 돌아보기에는 섬뜩할 정도로 미래를 명확하게 내다 본 느낌이 드는 제목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 제목의 진정한 의미는 그 속에 '거울'이 있다는 것이리라. 처음 10년간의 Coil은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을 이어나갔으며, 그 이후의 Coil은 모든 트라우마의 시기를 지나 파편과 잔해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젊은 시절의 Balance가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폐기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시도를 이어나갔다. Coil이라는 존재의 최후반부는 거의 '항복'의 느낌마저 드는 시기였다. Balance가 알코올 중독과 벌였던 무시무시한 싸움은 스캔들에 목말라하는 미디어의 산물이 아니었다: 바로 Coil에서 나왔던 산물이었던 것이다.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냈던 인터뷰들과 여러 문제들에 대해 무대 위에서 직접 인정했던 경우들과 함께, 2000년 Coil은 [Musick To Play In The Dark 2]에 실제 피를 묻힌 '트라우마' 에디션을 제작 및 판매하였으며, 2004년의 Balance는 무대에서 구속복(straitjacket)을 입고 공연을 진행했었다. Coil은 '경험 없는 숫총각'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음란하고 선정적인 소비 욕구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었으며, 미디어가 인간의 고통을 대중에게 공급하는 수단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Coil은 다이애나 비를 '끝'으로, 파멸로 몰아넣었던 바로 그 '공생 관계'에 뛰어들었다. Christopherson이 음악의 '원로'가 될 준비를 끝마친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면, Balance는 '고통'의 대중적 아바타로써의 자신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망에 고통받고 괴로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 한 가지 추가적인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싶다: Balance가 추구했던 마법(magick)의 여러 측면들은 보다 더 위대한 지식을 얻기 위한 단계로써 개인적 정체성의 상실을 장려했다는 점이다. 1980년대에 Balance는 마법을 추구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너무 공개적으로 활동을 한다고 비판하였으며, 진정한 발전은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내밀한 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Balance가 겪었던 여러 파멸과 혼란들, 자신의 이름과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기도 했던 그 경험들이, 실제로 최후의 결과를 예측했다거나 의도했던 것이 아닐지라도,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개인적인 목표와 의도의 가시적인 결과를 겨냥했던 것일 가능성도 있으리라.
[Everything Keeps Dissolving: Conversations With Coil]는 현재 Strange Attractor를 통해 발간되어 있다.